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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을 살리는 9인의 경영학

이채윤 지음 | 머니플러스
한국기업을 살리는 9인의 경영학

이채윤 지음

머니플러스 / 2008년 11월 / 279쪽 / 13,000원



위기를 기회로 만든 리더십 - STX그룹 강덕수 회장


1999년까지는 샐러리맨이었다. 1973년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27년 동안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쉰 살이 되었고, 직장인으로서는 보통 은퇴를 생각할 나이였다. 그런 사람이 회사를 세웠다. 그런데 그 회사는 창사 8년 만에 자산 기준 재계 순위 15위의 그룹이 되었다. 그 기업의 이름은 STX그룹이고, 그룹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강덕수 회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으킨 사나이로 부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 1990년대 말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그가 다니던 쌍용중공업을 퇴출 기업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당시 그는 회사의 재무 총괄(CFO)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퇴출 기업으로 지정된 쌍용중공업의 인수 주체인 미국계 회사 '한누리 컨소시엄'이 강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강덕수 회장은 누구보다 회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는 그동안 해외 무대를 누비고 다닌 경험으로 조만간 다가올 조선과 해운업의 호황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27년간 직장 생활하면서 모은 전 재산을 처분해서 출자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보았자 20여 억 원 남짓 한 자금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쌍용중공업의 주가는 워크아웃 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350원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모은 자금으로 회사 지분을 사들였다. 여기에 사장으로 근무하며 받은 스톡옵션 140만 주를 보태니 상당한 비중이 되었다. 그는 졸지에 지분 14.4%를 가진 최대 주주로 올라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그는 자신이 다니던 기업을 인수해서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STX그룹의 첫 출발이었다.



그 후 강 회장은 변화에 잘 대응하고,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 24시간 업무에 몰입하면서 동분서주했다. 그는 먼저 독자 생존을 위한 경영 체제를 구축하여, 자금과 인재를 구하는 일에 승부수를 던졌고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001년 4월, 어느 정도 진용이 갖추어지자 그는 회사 이름을 'System Technology eXcellence'의 약자인 STX로 변경하고 STX그룹 출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때부터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강 회장은 STX조선, STX에너지, STX팬오션, STX유럽(구 아커야즈) 등 4개 회사를 인수하고 STX엔파코, STX중공업, ㈜STX, STX건설, STX엔진 5개 회사를 설립했다. STX그룹은 과감한 M&A를 통해 현재 16개 국내 계열사와 60여개의 해외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다. 핵심 계열사인 STX조선은 부실기업에서 세계 5위의 조선소로 성장했고 2001년 인수 당시 3억6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주액은 100억 달러를 훨씬 넘어섰다.



STX그룹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세계 조선업이 한동안 호황이 지속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규 사업 진출과 인수 합병(M&A)에서 이런 강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적중해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흔히 STX그룹을 M&A를 통해 성장한 기업이라고 하지만 강 회장의 M&A에는 문어발식이 아닌 명확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다. 그는 그룹 출범 이후 조선, 해운, 에너지 전문 기업으로 한 우물을 파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그리하여 STX그룹은 현재 '조선기자재-선박엔진-조선-해운'으로 이어지는 조선·기계·해운 분야 전반에 걸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되었고, 시너지가 큰 연관 산업 진출을 통해 조선·해운·에너지 분야 전문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렇게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어 뒤집기에 성공함으로써 국내 굴지의 중공업그룹 총수가 되어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어낸 강회장의 대기만성은 남다른 신념과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스스로 단순한 월급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오너라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일해 온 것이 현재의 위치를 만들었다." 물론 STX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해운·조선의 호황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회사를 극적으로 키울 수 있었으니, 마치 강덕수 회장의 공격적 확대 경영이라는 전략에 승리의 여신의 훈풍이 불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엄청난 운에 의해 실려온 것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강 회장은 의외로 단호하다. "똑같은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죠."



'혁신전도사'의 글로벌 리더십 - LS전선 구자열 부회장

2004년 1월, 구자열은 LG그룹에서 분리된 LS전선 대표이사 부회장에 취임한다. 구 부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넷째 동생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에서 분리된 LS그룹의 오너 경영인으로 경영 실세다. 그는 부회장 취임 후 사업 다각화와 글로벌화로 사업 전략에 대해 배수의 진을 짜놓고 보수적인 기업문화의 대대적 수리에 들어갔다. 구 부회장이 우선적으로 진행한 일은 조직원들의 사고를 혁신하는 일이었다. 우선 사내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선진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프로세스 혁신(Process Innovation) 작업을 시작했다. 또 2005년 7월 ERP(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을 전선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처음에 직원들은 물론 임원들도 ERP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ERP 도입 이후, LS전선은 수많은 직원들의 교육을 통해 변화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온라인 교육을 통해 과제 관리가 시작되었으며, 체계적이고 공정한 평가 및 이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경영 혁신의 관리 시스템이 가동되어 기업 혁신과 경영 효율성, 수익성이 높아지는 성과를 나타냈다. LS전선은 이를 통해 200억 원 이상의 원가를 절감했다. 경영 혁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LS전선은 업무 생산성을 제고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식스시그마와 공급망관리(SCM)를 도입하는 등 혁신 활동을 극대화했고 그러한 노력은 시너지 효과를 거두어 실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LS전선은 구 부회장이 취임하기 전 5개에 불과했던 해외 법인과 지사는 불과 4년 만에 20여개로 대폭 증가했다. 또 중국·인도·말레이시아·베트남 등에 생산 법인을 설립하고, 영국·미국 등 선진국에 판매 법인을 세웠다. 2003년 1조 9396억 원이었던 매출은 2004년 2조 4287억 원으로 뛰어 올랐고 2007년에는 3조 원을 돌파했다.



혁신 경영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구 부회장은 글로벌 역량을 강화해 해외 사업의 비중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구 부회장은 이번에는 중국 진출을 결정했다. 결국 2005년 9월, LS전선은 중국 우시 무시(無 )에 10만 평 규모의 'LS산업단지'를 조성했다. 이 LS산업단지는 구 부회장이 중국은 물론 세계시장 개척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포석에서 마련한 회심의 역작이었다. 치밀한 사전조사와 중국 측의 협력이 있었던 까닭에 그가 연출한 해외 첫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LS전선은 중국에 이어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에도 현지 생산 법인을 설립했는데 모든 사업체가 제 몫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구자열 부회장의 글로벌 리더십을 빛나게 한 사건은 2008년 6월에 이루어진 수페리어 에식스(Superior Essex)의 인수다. 수페리어 에식스는 북미 최대 전선회사이자 세계 1위 권선 제조업체로서 2007년 2조 7819억 원의 매출과 1190억 원의 영업 이익을 달성한 세계 10위권의 전선 제조업체다. LS전선은 수페리어 에식스를 인수함으로써 그동안 아시아와 중동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왔던 글로벌 사업을 북미와 유럽에서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써 LS전선은 세계 7위에서 3위 전선업체로 도약하게 되었다.



이 같은 혁신 경영과 글로벌 역량 강화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구 부회장은 이제는 기술력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구 부회장은 맹자에 나오는 '유수불영과불행(流水不盈科不行)', 곧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제품의 품질은 건너뛰거나 무시하고 지나칠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구 부회장은 품질이 글로벌 시대에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사후대책 위주의 품질 활동에서 벗어나 고객이 기대하는 품질 기준을 명확히 정의하고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하도록 주문한다. 구 부회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스피드 경영이다. 구 부회장은 조직원들에게 '실력이 부족한 것은 인내할 수 있지만 늦어서 실패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 있는 의사결정 구조와 실행력을 키우라고 주문한다. 그는 조직원들에게 각 사업장 간의 정보 교환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있다.



M&A 야전사령관의 파워리더 - 두산인프라코어 박용만 회장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M&A 지휘관'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박용만 회장은 두산의 창업주 박승직, 초대 회장 박두병에 이은 두산그룹 3세로 오너 경영인이다. 그가 M&A 지휘관이라는 평을 듣게 된 데는 2007년 세계적인 중장비 업체인 밥캣 등 잉거솔랜드의 3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인수하고부터이다. 우선 인수 금액이 49억 달러로 국내 기업의 최대 해외 M&A라는 점에 세간의 시선이 쏠렸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인수한 밥캣은 세계 1위의 컴팩트 건설중장비 사업체로서 건설중장비, 어태치먼트(Attachment), 유틸리티 등 3개 사업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미국, 유럽 등지에 2천700여 개의 딜러 망과 6개국에 16개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으며, 2006년 매출 26억 달러에 영업 이익 3억 7천만 달러를 올리고 있다. 이들 3개 사업 부문 모두 세계 1위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밥캣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시장 점유율이 각각 38%, 43%로서 자동차 브랜드로 치면 벤츠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통한다. 이로써 두산인프라코어는 기존 중대형 건설 중장비 사업 이외에 부족했던 컴팩트 건설 중장비 사업을 보완함으로써 완벽한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 최고 수준 첨단 기술과 브랜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계적인 건설 기계 회사 '밥캣'을 인수한 뒤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재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재계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했지만, 알고 보면 그에게도 쓰라린 실패와 인고의 나날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두산음료 상무로 있던 박용만 회장은 자동판매기 사업진출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형 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소규모 점포들은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접근성이 용이하며 소매점 마진까지 챙길 수 있는 자판기 사업이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두산기계를 통해 잘 나가던 일본의 자동판매기 제조업체 후지 전기와 손잡고 냉온 캔음료 자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후, 연산 3만 대 규모의 공장까지 완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왔다. 당시 소형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지만 24시간 편의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자판기 공급도 갑자기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큰 오판은 내부 조달에 대한 과대 평가였다. 두산음료 자체 물량만으로는 설비 산업에 가까운 자판기 사업의 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자판기 사업 실패는 외환 위기가 오기 훨씬 이전인 90년대 중반에 두산이 재계 최초로 구조조정을 벌이게 된 단초가 됐다. 그러니까 인생만사는 새옹지마이고 전화위복인 셈이다.



박 회장의 두 번째 실패는 1997년 두산의 기획조정실장으로 소주와 맥주 사업을 진두지휘할 때 찾아왔다. 당시 소주시장에서 파격적인 디자인이 인기를 끌자 박 회장은 이에 대응할 만한 제품을 직원들에게 지시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청색시대'란 소주였다. 병에 청보라색을 입힌 청색시대는 화려한 색깔과 수려한 디자인으로 감각적인 박 회장의 눈높이에 안성맞춤이었다. 디자인뿐 아니라 내용물도 최고급이었다. 탁월한 맛 때문에 출시 전 전문가들의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청색시대는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으며 3개월 만에 생산을 중단했고, 이듬해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청색시대의 실패는 1999년 쌀로 빚은 '미소주'를 내놓으며 또다시 재현되고 말았다. 당시 미소주의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 투명한 병에 담았지만 역시 소비자의 냉담한 반응으로 4개월 만에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그에게는 인사와 관련한 아쉬운 '실패'도 있었다. 박 회장은 90년대 초반에 청량음료 사업을 개혁하며 나이든 지점장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나이가 너무 많고 변화에 느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 지점장급들을 '젊은 피'로 대거 수혈하자 내부 조직은 한층 탄탄해졌고, 외부 환경 변화에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매출이 오히려 곤두박질치며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모멘텀을 실적으로 연결시키기엔 미흡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좌절을 겪어야 큰 그릇이 된다'는 말이 있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성장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 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중공업과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에 이어 국내 사상 최대의 해외 기업 인수까지 성공시키며 재계에 M&A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 박용만 회장의 오늘이 빛나는 것인지 모른다. 박용만 회장이 귀띔하는 '실패의 경영학'에 귀 기울여 보자. 첫째, 곰탕집이 잘 된다고 그릇까지 팔면 망한다. 둘째, 너무 앞서 달리지 마라. 셋째, 실패도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 포용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라. 다섯째, 조직을 진짜 글로벌 표준에 맞춰라. 여섯째, 넘어지면서 안전하게 걷는 법을 배워라.



지금껏 그래왔듯 박용만 회장은 앞으로도 그룹의 글로벌경영을 진두지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두산그룹은 현재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부문의 제품 라인업을 강화하기 위한 M&A도 검토 중이다. 또 건설 기계 부문에서 불도저, ADT 등 두산인프라코어나 밥캣이 생산하고 있지 않은 품목을 가진 기업에 대해서도 M&A를 할 의사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박 회장은 M&A에 대해서는 항상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원천 기술과 글로벌 시장을 가진 기업을 사들여 단숨에 글로벌 플레이어로 가는 스피드 경영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두산이 그룹 차원의 M&A 전담팀뿐만 아니라 각 계열사 차원에서도 M&A팀을 두고 대상을 물색 중이다. 그러나 박 회장은 M&A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여긴다. M&A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내년에는 두산밥캣, 두산밥콕 등 인수한 해외 기업들이 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주력할 계획이다. 그가 생각하는 합병 후 통합(PMI) 과정이 '두산화'는 아니다. 'M&A는 이질적인 두 기업이 경영 철학을 공유하는 과정'이며 '침략'이나 '점령'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인수한 회사들에 대한 파견 인원을 최소하며 각 사 실정에 맞는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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