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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 혁신과 성장의 비밀

윌리엄 로스차일드 지음 | 가산북스
윌리엄 로스차일드 지음

가산북스 / 2008년 1월 / 446쪽 / 19,000원



PART Ⅰ 전기산업의 발전이 가져다준 풍요로운 생활

- GE 경영의 제1단계 : 에디슨 그리고 스워프와 영의 경영시기(1879년-1939년)


기술 선택의 오류

첫 단계는 전설적인 발명가인 토마스 에디슨이 주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신, 전화, 영화 영사 시스템 그리고 백열등의 주요 부품에 대한 특허권을 바탕으로 수십 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에디슨 브랜드를 기반으로 축음기, 영화, 전기 배터리 공급 장치 등의 회사들을 별도로 설립했으며, 동시에 기존 브랜드도 강화하였다. 그리고 1879년, 마침내 GE를 창립하여 완벽한 통합 직류전기 공급 시스템을 구축하여 가로등을 포함하여 주거용, 상업용, 산업용 가스램프를 전면 교체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에디슨의 전략은 단순 명료하였다. 그의 전략은 네트워크를 구축한 후, 이를 활용하는 상품을 개발하며, 동일한 전략을 기반으로 네트워크 공급자들에게 규모가 더 크고 구조 또한 복잡한 전기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독려하며, 건설 진행은 에디슨 GE 회사에 의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이른바 '호순환'으로 불리었다. 에디슨의 연구와 개발전략은 경쟁업체보다 더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경쟁업체의 제품과 컨셉 분석에도 매우 주도면밀하였다. 더욱이 실패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이 일일이 재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성공에서뿐만 아니라 실패에서도 배울 점을 찾아내었기에 에디슨은 문제점을 간파하여 상품의 질을 개선하는 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그런데 에디슨은 기술 선택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고 만다. 발전과 송전 방법은 크게 직류와 교류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에디슨은 직류 방식을 선택한 반면에 경쟁사인 웨스팅하우스와 톰슨 휴스턴은 교류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1888년 웨스팅하우스는 그의 기술자인 올리버 샐린저와 함께 동력 계량기 개발을 시작하였으며, 한때 에디슨의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직류 전기가 아닌 교류 전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퇴사한 니콜라 테스라의 교류 발전기 특허권에 대한 인가를 얻어냈다. 이후 웨스팅하우스가 램프 전력 공급에 대한 일부 소비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웨스팅하우스가 1907년 대공황 중에 회사에 대한 경영권을 잃지 않았더라면 웨스팅하우스와 GE의 결과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에디슨과 투자자인 빌라드가 웨스팅하우스의 성공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회사는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에디슨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헨리 빌라드와 투자은행 측 대표인 J.P.모건은 현실을 직시하고 회사 합병을 통해 더 굳건한 교류 전기 공급회사를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톰슨 휴스턴과 손을 잡게 되었다. 에디슨은 조명에 대한 앞선 기술과 직류 전기에 대한 많은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직류 전기 분야에서는 미국 최고의 기술업체였다. 톰슨 휴스턴 역시 교류 전기 분야에서는 웨스팅하우스에 뒤이은 제2의 기술업체였다. 즉 에디슨 GE는 조명시장에서 그리고 톰슨 휴스턴은 전기 공급 분야에서 이미 인정받는 최고의 기업이었다. 이러한 두 회사의 결합으로 탄생한 제너럴 일렉트릭은 기술과 응용 분야 모두에서 전력 시스템과 전력 상품 공급 리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톰슨 휴스턴으로부터 영입된 찰스 코핀은 1900년대 초반 GE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어낸 핵심 인물이었다.



리더가 되는 법

당시 대부분의 경영진들과 대조적으로 코핀은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경영에서 조언과 참여를 중시하였으며, 재능 있는 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하고 에디슨과 휴스턴이 정립해 놓은, 체계적이면서도 잘 관리된 기존의 연구 개발 방법을 계속 유지하였다. 거래 확장을 통해 기존의 특허권 포트폴리오를 지키면서 계속 도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특허권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각종 카르텔과 사업 협력에 있어서 회사 측의 법적 대응책을 공고히 하였다. 코핀은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객들이나 경쟁업체들 사이에서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기 제조업체에서 단연 돋보이는 세일즈맨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1893년에 공황의 여파로 경영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자신의 협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J.P.모건과 중요한 협상을 하였다. 모건은 GE 소유의 공공 서비스 주에 대한 지급액으로 당장 필요한 금액만큼 가격을 올리는 데 동의하였다. 이로 인해 GE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코핀의 남은 경영 기간동안 GE는 급속도로 회복하여 연이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변화를 빨리 인식하고 이에 잘 대처한 코핀의 경영능력은 오늘날 GE의 존재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한 가지로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코핀의 영향으로 GE는 소유주의 개념을 크게 탈피하여 주요 공급업체로서의 이미지를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보수적인 회계 운영과 현금 흐름에 초점을 맞춘 결과 GE는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투자업계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코핀과 그가 이끄는 경영진은 일찍이 각 분야별로 재능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여 필요한 기술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기 위한 다양한 과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01년에 GE는 스키넥터디, 린, 브리지포트, 포트 웨인과 같은 주요 제조공장에서 수련생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지역 대학교와 연계하여 수련생들이 관련 기술 학위를 취득하도록 하였다. 코핀은 기본 실력에 더하여 GE식으로 훈련을 받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기술자야말로 GE가 필요로 하는 인력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엔지니어링 테스트 프로그램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술 외적인 분야에서도 능력이 있는 대학졸업 인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비즈니스 연수 프로그램도 개설하였다. 이를 통해 학점과 업무 평가 결과를 토대로 승진 대상자를 선정하였고 최고 점수를 얻은 사람은 회계감사 스텝으로 임명하여 다른 회사의 운영에 대해 배울 기회와 관련 업무 분야에서 경영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훈련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코핀의 경영으로 GE는 이른바 유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로 도약할 수 있었다. 즉, 제품, 업무 관계, 경영 철학, 인력 관리에 있어서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조언과 참여를 중시하는 경영과 자산의 공유

제라드 스위프와 오웬 영은 시기를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경영자들이었다. 그들은 매출이 75퍼센트까지 감소했던 대공황 시기에도 회사를 경영하면서 이윤을 창출해낸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제라드 스워프는 MIT에서 전기 엔지니어링을 전공했으며, 웨스턴 전기회사에서 여러 경영 관련 분야에 근무하면서 국제 경영의 전문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원래 전형적인 경영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스스로 시온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하였다. 오웬 영은 보스턴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률회사에 근무하였다. GE를 상대로 발생한 몇 차례 소송을 승소로 이끌자, GE는 그에게 고문이자 회사정책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영은 중재와 회유 등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스워프와 영은 자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자로서 자신들의 경영 방침에 대한 조언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1928년에 독립적인 경영기구인 엘펀협회를 창립하여 이러한 목적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주요 업체들이 직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저지하려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워프는 산업 종사자들을 위한 산업별 노동조합회의가 구성되자 곧바로 GE의 노동조합 구성을 요구하였다. 또 GE는 최초로 모든 직원들이 경영 방침이나 제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공식적인 제안제도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스워프와 영은 기존 직원과 경영진이 회사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독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였으며, 이에 따라 GE는 더욱 더 평생직장의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특히 대공황 당시 실직자 구제, 고용보장 프로그램, 이익분배 계획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동정심과 실용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1912년 코핀이 최초로 실시한 GE연금 프로그램을 개선하여 직원들의 연금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직원과 회사가 동시에 연금을 부담하는 신탁적인 특성을 부과함으로써 법적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파산할 경우에도 직원들이 신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17년 동안 GE의 경영을 맡아온 두 사람은 회사의 성장에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경쟁업체들과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업(RCA)을 탄생시켰으며, 대공황의 아픔과 위협 또한 성공적으로 대처하였다.



PART Ⅱ 다양화와 분권화

- GE 경영의 제2단계 : 윌슨과 보크의 경영시기(1940년-1970년)



전쟁의 승리

GE는 초기 60년 동안 전기 수요 창출과 리더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기 분야의 리더에서 고도로 다양화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전세계적 규모의 전쟁 발발이라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마케팅 분야에 대한 상거래의 일반 규칙은 사실상 잠시 보류되었다. GE는 군사적 수요에 초점을 맞추고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기술과 자산을 고도의 무기 및 군비 시스템 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GE는 상당히 다양하고도 고도화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저곳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고속도로와 전기통신망이 건설되었다. 결국 당시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짓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단시간 내에 시장상품화할 것인가였다. 그 결과 제조공장과 판매시설 또한 다량으로 건설해야 했으며 GE는 산업 및 상업 각 분야에서 엄청난 성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기 시스템 개발에도 착수하게 되었다. GE의 사업 분야에는 원자력 발전소와 가스 터빈도 추가되어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스워프와 영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상당히 협조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근무 분위기를 형성했다. 전쟁이 끝나자 GE의 노동조합들은 점차 요구사항을 확대하면서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40년에 스워프와 영이 후계자로 지명한 찰리 윌슨은 비록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회사 핵심 경영진까지 승진한 장본인이긴 하지만 임금인상과 각종 혜택 확대를 요구하는 근로자들에게 그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요구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파업이 일어나더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1947년 엄청난 규모의 유혈 파업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는 GE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이 파업은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 1930년대의 자동차 산업의 파업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협조적이었던 조합과 회사의 관계는 점차 적대적으로 변질되었다. 윌슨은 1950년에 정부 관료직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5년 동안 GE 경영을 이끈 최단기 CEO로 남게 되었다. 그는 당시 비서실 임원이었던 랄프 코디너를 자신의 경영후계자로 지목했다.



분권화를 통한 성장

코디너와 리드는 GE의 경영을 맡은 이후 고도의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여 기업의 주요 성장기회를 포착하는 일과 기존의 기업 이익을 다양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과거에 실시한 전 직원 능력개발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인재양성을 계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하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문 경영' 개념을 받아들여 크로톤빌이라는 최초의 대규모 경영진 연수원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건강과 연금, 저축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다시 종업원들과 이익을 공유하려는 경영진의 의도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여기에는 미국 최초의 매칭기프트 제도(사원이 기부행위를 할 때 회사도 일정비율을 부담하여 기부하는 제도로 기업과 비영리단체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시스템)가 포함되어 있었다. GE는 각 직원들이 출신 대학에 기부하는 정도에 따라 회사 또한 대학에 일정액을 기부했다. 또한 GE 재단을 창립하여 각종 자선 사업을 장려하고 체계화하는 데 공헌했다.



한편 코디너와 리드는 정부나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스워프나 영과는 매우 달랐다. 코디너는 큰 정부와 대규모 노동조합을 경영권과 각종 권한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이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대규모의 노동조합 견제 및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노동조합과 정부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고안된 '보울웨어리즘'이라는 매우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50년에서 1960년까지의 기간은 GE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회사는 양적으로나 수익면에서나 모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결과가 '전기회사의 대음모'에 의해 무산되고 회사가 경영진을 선택할 능력을 상실하면서 회사의 성장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의 변신

코디너는 과거에 함께 일했던 르무엘 볼웨어를 기용하여 경영 교육 프로그램을 창안했다. 동시에 대규모 노동조합과 큰 정부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볼웨어는 당시 무명배우에 불과했던 로널드 레이건을 영입하여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삼았다. 이를 통해 레이건은 노동조합과 대규모 사업의 위험성과 자유 기업경영의 장점을 사내 전체에 홍보하는 일종의 선교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 레이건은 미국내 곳곳의 GE 계열사를 찾아다니며 경영책임자들과 일반 직원을 대상으로 많은 면담을 가졌으며, 이를 통하여 정치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충분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다분히 애국적이면서도 비즈니스 지향적인 입담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원래 자유주의자로서 과거 노동조합 대표를 지내기까지 했으나 차차 보수적인 성향을 강하게 발전시켰다. 르무웰 볼웨어라는 인물과 그의 연설이 레이건에게 총체적인 변화를 유도하여 그를 자유주의자에서 보수적인 공화주의자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볼웨어에 따르면 "노동조합 위원들은 패턴에 따른 협상법을 구사하면서 조합원들이 '탐욕스럽고 사악한 경영진에 대한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며" 그에 따라 조합원의 주도 하에 회사가 마지못해 옳은 일을 하는 방향으로 끌려간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볼웨어는 패턴 방식을 완전히 철폐하기로 마음먹고, 선불 방식에 의한 구체적 조건을 명시한 경쟁 '상품' 즉 계약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회사는 공정하면서도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월급을 비롯한 각종 혜택 패키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임금, 보험, 교육비, 연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노동조합과의 협상 실시 이전에 조합 측에 제시한 후, 회사 측은 더 이상의 양보나 타협을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동일한 패키지를 비노동 조합원들에게도 제시했으며, 노동조합이 이를 수락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회사 방침이 그들에게 적용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노동조합과 회사 사이의 교섭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회사 경영진은 이 패키지가 회사로서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임을 분명히 못박아 두었으며, 일부 세부 사항은 수정할 수 있지만, 설사 노동조합이 협상을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할지라도 패키지의 기본 내용은 결코 양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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