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작지만 강한 기업
한국일보 경제산업부 지음 | 굿모닝북스
Part 1. 시련이 기회였다
자살의 문턱에서 재기에 성공하다-코막중공업
코막중공업은 유압 브레이커, 유압펌프, 트리샤(콘크리트 파쇄기) 등을 수출하는 건설중장비 전문업체다. 조봉구 사장은 1997년 2월 구로공단에서 월세 20만 원짜리 사무실을 열었는데, 당장 자체 기술도 없었고, 직원도 없는 제로지대와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부품 도면을 그려 와 국내 전문가에게 외상으로 도면을 작성할 정도로 미약한 시작이었지만, 발로 뛰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자체 개발한 유압 브레이크 핵심 부품인 치즐(심)이라는 아이템으로 1998년 1월 요르단과 노르웨이, 4월에는 독일, 이스라엘과 칠레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수출의 기반을 다져갔다. 2000년에는 코막의 유압 브레이커 360대가 미국 땅을 밟게 된 것을 계기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럽시장도 개척했는데, 이때 코막 중공업이 거래한 나라는 무려 40여 개국으로서 수출 상품도 중장비와 부품 13종류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3년 중국 현지법인이 무너지면서 회사는 존폐의 위기로 곤두박질했다. 모든 비상구가 막힌 사면초가의 자리까지 몰려갔다. 중국 현지 법인이 관리 부실로 무너짐으로써 22억 원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고, 회사는 압류 딱지로 도배를 할 정도로 참담한 모습이 된 것이다. 벼랑 끝에 선 조 사장은 자살을 결심했으며, 이 충격으로 병까지 걸려 앓아 눕게 되었다. 하지만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신을 간호하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진 남편을 천사와 같은 다사로움으로 끌어안은 아내를 대하는 순간에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무서운 결심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친 것이다.
모든 직원들을 소집하고 스스로 사표를 내면서 함께 회사를 살려보자는 사장의 '절규와 같은 호소'에 직원들도 함께 사표를 제출하고 결사적으로 일에 매어 달리기 시작했다. 조봉구 사장은 사표뭉치를 들고 다니면서 60여 곳의 협력업체들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협력업체들은 조봉구 사장의 열정과 진심에 감동을 받고 주문을 하기 시작했고, 비록 80명의 직원들 중 17명만이 남아 있었지만, 현장에서 쓰러지는 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철야로 작업을 강행했다. 마침내 기사회생한 조봉구 사장은 2005년 고성능 유압 브레이커 토르(Tor) 시리즈 특허를 획득하고, 2006년에는 호주의 딩고사와 제휴하여 미니 로더(Mini Loader, 다목적 작업차량) 사업을 개시함으로써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코막은 2007년에 145억원의 매출액과 7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불량자석이 열어준 천재일우의 기회-마그넷포유
마그넷포유를 설립한 윤봉석 사장은 불량인생이다. 공부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 간신히 들어간 인하대학교 금속공학과도 1년 만에 중퇴. 거의 매일 나이트클럽에서 지낼 정도로 일그러진 인생, 아버지로부터 사업자금으로 받은 1억 원을 불과 1년 만에 날려버린 실패자.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쓰러진 아버지, 경매로 넘어간 집, 망한 사람과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매정하게 돌아선 아내와의 쓰라린 결별, 이것이 윤봉석 사장의 현주소였다. 이 정도가 되면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인간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고독한 외톨이가 된 윤봉석 사장은 동대문시장을 떠돌다가 어느 좌판 옆에 걸을 힘조차 잃은 채 주저앉았다. 그런데 곱게 깎아 반지르르한 단추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구원의 메시지가 윤봉석 사장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바보야, 녹이지 말고 깎으면 돼." 그 후 오피스텔은 공장이 되었고, 주차장은 창고가 됐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자석 깎는 일에 몰두했는데, 자석 위에 본드를 바르고 단추용 고광택 플라스틱을 덧 씌웠다. "그때 본드질의 달인이 됐습니다"라고 그는 그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환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버지가 실패했던 불량 판정을 받은 전자 부품용 자석이 '메모 고정용 자석 홀더'라는 기발한 발명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발명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당시 월 매출액이 5,000만원을 넘었는데, 이 수입으로 아버지가 진 빚을 모두 청산했다.
1992년에는 코리아마그네틱(마그넷포유의 전신)을 설립하고 본드질의 달인답게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색종이와 고무를 찰싹 붙인 '홍보용 고무자석 스티커'(자석 전단지)를 발명했다. 이 상품 역시 대박을 터뜨렸다. 자석 액자, 자석 수첩, 자석 다트, 자석 블록, 자석 가베(학습용 나무토막 완구) 등 자석으로 만든 문구와 완구는 모두 윤 대표의 머리에서 나와 상품 개발로 이어졌다. 윤 대표는 1997년 외환위기 때 30억 원의 부도를 맞기도 했지만,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해외 시장 공략으로 돌파했다. 국내에서 잘 통했던 원색과 캐릭터 디자인을 과감히 버리고 야구 다트, 골프 다트 등 해외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함으로써 미국 시장에 물꼬를 트게 되고 이렇게 만든 제품이 미국의 완구 유통업체에 100만 달러를 납품하게 되었다. 2003년에는 5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으며 알짜배기 수출기업으로 부상했으며 2005년에는 구슬자석게임이 산업자원부 지정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결국 '불량 자석' 덕분에 '불량 인생'이 '우량 인생'이 된 것이다.
Part 2. 열정은 성공의 동력이다
콘크리트 펌프카를 우리 손으로, 16년 만에 "세계 Big 3"-전진중공업
안의환 전진 중공업 회장은 전남 보성의 녹차 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손바닥만 한 땅, 이것이 5남 2녀를 키우던 부모님의 유일한 자원이었는데, 안의환 사장은 녹차 농사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중학교 때 무작정 상경, 주경야독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연명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판검사가 되리라는 꿈을 가지기는 했지만, 당장 먹고살기 위해 중고 중장비를 정비하고 부품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생의 방향이 돌변한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에서 유압의 원리를 배우며, 기계의 매력에 끌려 이 분야에 매료당함으로써 이것이 직업이 되고 인생이 된 것이다.
1980년대 말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에 따라 건설 붐이 일어났을 때에 콘크리트 펌프카(CPC)는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상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런 호기에서도 국내 건설업체들은 값비싼 수입 완제품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며, 국산화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건설 장비는 가격이 10억원에 가까운 고가의 제품이고, 크기도 35~65m에 달해 자체 개발한다는 것은 큰 부담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거기에서 아이디어가 생산되기 마련인데,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리는 이런 경우에도 유효한 전략이다. 안의환 회장은 CPC 부품만 만들어 팔아도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송관과 개폐기 등 몇몇 부품의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사업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는데, 품질은 다소 외국 제품에 비해 떨어져도 싼 가격 때문에 사업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안의환 회장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보다 모험을 하는 길에 몸을 던지기로 하고 완제품 개발에 회사의 사활을 걸기로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하고 비판했다. "돈을 벌더니 미쳤군." "무모한 짓이야." "사서 고생이지." "30년이나 앞서 간 외국 기술을 무슨 수로 따라잡나?" "설사 비슷하게 만든들 누가 사 주겠어?" 1991년 안의환 전진중공업 회장은 전진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콘크리트의 펌프카 제조의 꿈에 도전장을 던졌다. 1994년 3월 10일 드디어 자체 기술로 CPC 장비 1호(43m)를 만들었는데, 안 회장은 회사경영, 기술 개발, 공장관리까지 1인 3역을 전부 감당했다. 그러나 안 회장이 개발한 기계는 가격이 외제 보다 30%가 더 쌌지만 구매자가 없었으며, 헛고생을 했다는 좌절감이 마음을 짓누르며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부품 공급으로 신뢰를 쌓았던 김영중 전 현대건설 상무가 장비 1호를 4억 8,000만원에 구입해줌으로써 이 제품 국내 판매에 물꼬를 트게 되었다. 마침내 1998년 완벽한 국산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 판매한 CPC는 모두 1,343대나 된다. 현재로서는 CPC 제품은 국내 1위, 세계 3위의 시장 점유율에 달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수출만으로 800억 원의 매출 실적을 올리는 쾌거를 달성했다. 현재는 미국, 캐나다, 중국, 유럽, 중남미, 중동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7겹 진공포장 기술 개발해낸 억척 주부-롤팩
필요는 발명이 어머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필요는 사실상 불편함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공포장 기술에 뛰어들기 전에는 롤팩의 김금자 대표는 평범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생활 속의 불편함'에서 힌트를 얻은 김 대표는 '어떻게 하면 식재료를 더 오랫동안 더 신선하게 보관해서 맛과 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가정과 일,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은 사업의 길로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오직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거의 맨손으로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변변한 사무실도, 공장조차 마련할 수 없었고 손바닥만한 좁은 공간을 싼값으로 빌려 거기에서 핏덩어리를 사과 상자에 넣어둔 채 진공포장 기술에 몰두한 것이다.
꺼질 줄을 모르는 비전과 식을 줄을 모르는 열정, 성공하고 말겠다는 억척같은 집념은 드디어 보석 같은 결정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는데, 0.75mm 두께의 7겹 진공포장 기술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진공포장용 필름(비닐봉지)을 끼우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내부의 용기가 빠져나가 진공 포장되는 가정용 진공포장기 푸드가드(Food Guard)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진공포장기 분야에서 세계 특허를 가진 미국 탈리아사가 문제였는데, 당시 탈리아사는 진공포장기 세계시장 98%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대표가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태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탈리아사 제품이 '잘못 누르면 터지는 결함이 있다'는 약점을 확인했고, 이런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독특한 에어채널 방식(진공이 쉽게 되도록 공기가 빠져나가는 길을 만들어 놓은 방식)을 독자적으로 개발함으로써 롤팩의 진공포장기가 탈리아사 제품보다 탁월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졌다. 롤팩은 필름을 개발하자마자 2001년 마드리드 협정에 근거한 세계특허를 등록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자금이 없어 제품을 자체 생산할 수도 없고,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있었다. 그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산업전시회에 이 제품을 출품해보자는 발상이었고, 당시 직원 월급으로 줘야 할 500만원을 들고 도박을 한다는 심정으로 이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시회 첫날 롤팩의 부스에는 바이어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는데, 바이어들은 김 대표에게 "아예 전시회 부스를 철회하고 우리와 단독 계약을 맺자"고 제안해 올 정도였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의 진공포장업체 탈리아사가 러브콜을 해 왔는데, 김 대표에게 투자를 약속하고 독점 물품공급 계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김 대표의 땀과 눈물이 고귀한 결실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기술력만 있어도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현재 롤팩은 가정용 진공포장기 푸드가드와 멀티 압축백인 에어채널백으로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등 해외시장에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Part 3. 꿈을 가진 자만이 이룰 수 있다
작지만 강한 USB처럼, 세계 시장 점유율 30%-아이오셀
아이오셀은 이동식 저장 장치인 USB드라이브만을 고집해온 스토리지 전문업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USB 기반의 콘텐츠웨어 전문 제조업체로 부르는 게 맞다. 아이오셀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USB 물량의 70% 이상, 세계 시장 점유율 30%를 차지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수준에 올라 있다.
강병석 사장은 인기 직장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6개월간의 구상 끝에 2001년 6월 지인이 운영하는 공장 2층에 회사를 설립했는데, 창업 자금으로 가진 돈 3억 원을 전부 쏟아 부었다. 시기적으로 IT 거품이 빠진 직후였으므로 IT 산업은 사양길이었고, 안전과 장래가 보장되는 편안한 직장생활을 포기하면서 시도한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강 대표는 직장이라는 박스에 갇혀 있기에는 꿈과 모험정신이 특별한 사람이었다. 꿈과 모험정신이 결합하면 일을 내기 마련인데, 이것이 아이오셀의 창업이었다. 당시 IT 제품의 이동성이 강조되고, 또 이동성의 필요가 급하게 증가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이동식 저장 장치인 USB드라이브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며 2002년 이후 USB 시장은 해마다 100% 정도 성장을 계속했다.
강 사장은 USB 저장장치가 새로운 미디어로 성장하려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아닌 미드웨어 개념의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이 판단을 바탕으로 3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C2'라는 플랫폼을 내놓았다. C2는 USB 기반 저장 장치가 인터넷과 상호 연동할 수 있는 플렛폼이다. 이를 탑재한 USB는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다운로드해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아이오셀의 C2 플랫폼과 경쟁할 수 있는 상대는 미국의 샌디스크가 만든 U3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아오오셀의 C2는 샌디스크의 U3보다 앞선 기술로, 세계시장의 기술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현재 2008년도 매출액 목표를 1,000억 원을 잡을 만큼 아이오셀의 성장은 가파르다.
게임의 구글을 꿈꾼다-조이맥스
우공이산(愚公移山)라는 중국 고사성어가 있다. 꾸준히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조이맥스라는 게임업체의 전찬웅 대표에 적합한 용어일 것이다. 그는 꼼수 없는 정도(正道)경영과 꾸준한 사람 관리를 통해서 성공한 기업인이다. 전 대표는 1994년 캐나다에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스쿨에 입학함으로써 게임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 학교는 일본의 게임업체 닌텐도가 현지 그래픽 업체와 손을 잡고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전 대표는 학교를 졸업한 후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게임 기획서를 작성해서 투자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문화관광부 주최 제1회 우수국산게임 사전 제작지원 사업에 당선됨으로써 부상으로 받은 1000만원을 종자돈으로 게임 제작에 들어갔다.
전 대표는 인근의 한국 소프트웨어 진흥센터에 둥지를 틀고 6명의 제작자를 영입함으로써 정식 게임 사업의 닻을 올렸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월급이 6개월씩 밀리고 끼니를 라면으로 때워야 하는 극한에 몰리게 되었다. 전 대표는 어려운 자금 사정을 무릅쓰고 게임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렇게 1년이 흐른 뒤 1999년 첫 작품 파이널 오디세이를 내놓았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유통업자로부터 계약금과 로열티를 받기로 한 약속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다시 1년 이상 와신상담, 각고의 연구 끝에 후속작 '아트록스'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크게 성공했다. 게임을 접한 유저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독일과 영국 등 11개국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이 무렵 게임이라고 하면 대부분 컴퓨터에 CD를 넣어 구동하는 패키지 게임이었는데, 불법 복제가 기승을 부리면서 게임업체들은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도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와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전 대표는 2002년 온라인 게임 제작을 위한 구상에 들어갔는데, 드디어 전 대표는 직원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2005년 실크로드를 개발했다, 그러나 국내 반응이 신통치 않자 포기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함으로써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부터 대단한 러브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