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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지음 | 모색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무측천은 14세 때 당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 신분으로 입궁하게 된다. 무측천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서충용이라는 후궁에게 황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자 궁녀들은 대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매끼 들여오는 음식도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상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열한 궁정 암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 무측천은 환관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로써 대하고 뇌물을 주어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즉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서로 반목하는지와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를 통해 앞날의 정황을 준비했다.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무측천에게 궁녀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정무를 처리하고 퇴조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었으며, 항상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 보면 심신이 지치고 팔다리가 퉁퉁 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했다. 이미 황제의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군 태종과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성공이란 매력, 능력, 지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은 기회를 가져오고, 능력은 남과 다른 비범함을 발휘하며, 지력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다. 무측천은 이 세 가지를 가장 적절하게 융합하여 최대 효과를 발휘할 줄 알았다. 상원 원년 12월, 무측천은 황후의 신분으로 당 고종에게 치국에 필요한 12조를 건의했다. 『건언 12사(建言 十二事)』라고 불리는 이 제안서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열두 가지의 건의사항이 담겨 있었다. 당 고종은 부황의 국책을 그대로 승계하여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극심한 가뭄 피해와 동방과의 전쟁 그리고 황실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소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무측천은 이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농업과 양잠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할 것,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 표준으로 삼을 것 등의 산업 진흥 정책이 담겨 있었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당은 경제를 회복했으며 향후 무측천의 통치 기간에는 100% 국력이 증가하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12사'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점은 신진 관료 세력들의 이익을 주청한 내용이다. 무측천은 관리의 봉록을 인상할 것과 더불어 직위가 낮아도 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제안하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한 신진 관료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측천의 건언 12사는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정책개선의 의지도 담고 있었지만, 당시 대거 등장한 신흥 관료 계층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천하를 얻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이씨 왕실과 관료 귀족 계층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선발해 자신의 손발로 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측천은 인재 활용에 있어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용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경업의 난(684년)을 계기로 시행한 것으로, 기존의 관료 제도를 향해 무측천이 던진 단죄의 칼날이었다. 서경업의 난은 무측천이 중종 이철을 폐하고 예종 이단을 세웠으나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위시한 원로중신 세력이 폐위된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서경업의 난은 3개월 만에 패하였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



무측천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후 탐관오리를 비롯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동궤'를 설치했다. 동궤는 동(銅)으로 만든 상자에 익명의 투서를 하도록 만든 것인데, 그 내부는 네 개의 칸이 있어 투서 내용을 달리했다. 동쪽은 연은이라 하여, 황실의 업적이나 공덕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임관이나 승진을 청하는 상소를 위한 공간이었고, 서쪽은 신원이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투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소간은 정책적 건의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마지막 북쪽 칸인 통현은 천재지변이나 군사기밀 관련 내용을 투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동궤에 투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무측천의 밀고제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민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관료 집단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당 고조와 당 태종은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에 약간의 억압을 가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도교와 불교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무측천은 성력 원년(689년) 정월, 『금승도전방제(禁僧道殿謗制)』를 반포하고, 불교와 도교는 선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라 볼 수 있으니 승려와 도사가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면 칙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엄중 경고했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무측천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고승들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고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도교의 발전도 함께 도모했다. 이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 도교가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측천은 종교를 정권의 유용한 통치 수단으로 보고 그 둘을 상호 견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였다.



위정자가 개혁에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치국의 도를 깨닫고 안정적으로 시정을 펼쳐야 한다. 688년, 무측천은 명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이는 무측천이 최초의 여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자고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명당에서 정사를 펼치는 것을 큰 공으로 여겼다. 그러나 명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명당에서 정사를 베푼 왕은 3명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무측천은 고종 시절부터 명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관이나 학사들이 명당건축이 백성을 혹사시키고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사치행각이라며 은근히 비판했다. 이에 무측천은 "명당이 선조와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곳이니, 재해와 화란을 막고 나라를 성하게 하는 일"라며 명당의 기능을 과장했다. 그리고 명당을 완공시키자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대사면을 명하고 백성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화려하고 웅대한 명당의 모습은 당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명당을 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몰려든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예관과 학사들의 비방은 사방에 가득한 칭송에 묻혀 사라졌다. 무측천은 명당을 통해 일련의 '유신(維新)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영창 원년 정월, 명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정사를 펼치면서 백관들을 훈계하는 9개항을 반포했다. 그 요지를 요약해보면 군신들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직무에 충실하며, 제업(帝業)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사확을 주충효태황, 어머니 양씨를 충효태후 등의 존호로 추서함으로써 무씨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개원재초칙(改元載初 )』이라는 개혁조항을 반포했는데, 그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예악과 문서를 교정하고, 신조한자를 제정하고 역법을 개정하는 것 등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황제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무측천은 황위에 등극한 후, 수나라 때의 감찰(監察) 제도를 부활시켰다. 중앙의 최고 감찰 기관을 어사대로 두고, 이들로 하여금 각 주현의 군정, 민정,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상서성(정무집행기관)의 회의, 문무백관의 연회 및 제사를 진행할 때에도 감찰을 시행하도록 했으니, 감찰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감찰관은 황제의 눈과 귀와 같은 존재로, 그 권한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감찰관의 특권에 대해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억울하게 탄핵된 관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즉 감찰관의 선발부터 신중을 기했으며, 감찰어사들이 올린 탄핵과 상소는 자신이 직접 분석하고 감별하였다.



감찰제도의 부활은 국가 기관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기여했다. 무측천은 감찰을 통해 여러 주현들을 통합함으로써 주현을 거의 1/2이나 줄이고 대규모 감원을 이행했다. 인재의 유용성을 중시한 무측천은 이러한 감원정책을 두고,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무측천은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관리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 등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하지만 고위 대신들과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관을 차려 입지 않으면 내치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등,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감찰을 통한 대규모의 구조조정은 부패한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는 것과 더불어 일반 지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출을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농민의 납세부담을 줄이는 등 여러 면에서 이로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감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무측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은 오직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로써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무측천이 실시한 일련의 '변화'란 그녀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하자 당의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합당한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무씨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이씨에서 주나라의 무씨로 종실의 위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국호를 주(周)로 세운 것도 고대 왕조의 치세를 재현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고대 중국의 치세란 '주(周)'와 '한(漢)'의 태평성세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무씨의 주(周) 왕조를 세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이미 고종 시대부터 준비되어온 일이었다. 낙양은 흔히 말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곳'이었다. 이미 수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낙양과 장안을 왕래하며 정사를 펼쳤는데 고종이 낙양에서 머문 기간만 10여 년에 달했다. 무측천은 그 기간 동안 낙양에 세력을 형성하고 고종이 죽자 낙양을 더욱 육성시켰다. 그래서 무주 왕조 건국이 가시권에 이르렀을 때 낙양은 이미 새로운 왕조의 정치, 문화,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무측천이 사직을 신도로 옮긴 것도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직은 본래 제왕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상징이 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무측천은 신도에 무씨 태묘(太廟) 7개를 세우고, 삼십만 군대를 상주케 하여 무씨 왕실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켰다.



자고로 예를 즐기는 것은 모든 제왕의 공통점이었다. 무측천은 유가의 예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여러 가지 예의 법식과 의식들을 통해 민심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유신론자였던 무측천은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결정짓는 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즉, 신의 힘을 빌려서 주 왕조 설립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민심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존호이다. 무측천은 고종을 도와 정무를 살피던 시기에 이미 '천후'라는 별칭을 사용해왔으며,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황제임을 뜻하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존호를 개칭했다. 이렇듯 무측천은 무주 왕조를 건국하기까지 매사를 심사숙고했다. 여자의 몸으로 구중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서 사직을 바꾸고 세력을 형성하여 새 왕조를 세웠으니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 데 성패가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성공의 문을 관통할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는 얼마나 기회를 잘 포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낼 줄만 알았지, 자신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무측천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도사가 자신의 관상을 보고 "귀인중의 귀인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과 지혜를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감지함으로써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으며, 특히 주위의 모든 권력을 방패막이이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측천의 정치적인 영민함은 일차적으로 그녀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무씨 집안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 관직에 진출했으나, 명문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 대에 이르면서 무씨 집안은 가문 부흥의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본래 목재상이었던 무사확은 수양제의 대형 토목 공사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재력을 무기로 권세가들과 쉽게 교분을 쌓았다. 산서 지역의 세력가로 후에 당을 건국한 태조 이연(李淵)과의 친분도 이때 맺은 것이다. 무사확은 이연이 군사를 일으킬 때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봉기 후 군수관(軍需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간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장안의 신흥 귀족으로 부상했다.



무사확은 전처 상리씨와의 사이에 원경, 원상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전처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연이 수나라의 재상이던 양달의 노처녀 딸을 그와 맺어 주었다. 양씨는 무사확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았으며, 그중 둘째가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무측천이 아직 어렸을 때 부친 무사확이 사망했고, 이후 두 이복 오빠는 양씨 모녀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무측천이 14살 되던 정관 15년, 조정에서 각 지방의 재주 있는 미녀들을 입궁시키게 했다. 그러나 딸의 입궁을 원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 중에 실제로 은총을 입는 궁녀는 극소수인 데다 황제의 은총을 입는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때부터 천대와 멸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측천의 어머니 양씨 역시 딸들이 궁녀로 간택되는 걸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큰딸과 막내딸은 하급관리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무측천은 한사코 시집가기를 마다했다. 그리고 "황제를 뵐 수 있는 건 행운이니 그렇게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국 무측천의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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