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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 - 신화가 된 기업가들

찰스 R. 모리스 지음 | 황금나침반
찰스 R. 모리스 지음

황금나침반 / 2007년 6월 / 470쪽 / 19,000원


남북전쟁 이전 시대만 해도 거대 다국적기업의 출현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링컨이 사망한 1865년 앤드루 카네기는 30대에 접어든 부자였으며, 존 D. 록펠러는 당시 25세로 그의 클리블랜드 정유소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내는 큰 기업이었다. 29세인 제이 굴드는 무두장이의 짧고 맹렬한 경력을 끝내고 철도 기업 전문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부유한 북부 귀족중의 귀족으로 태어난 피어폰트 모건은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의 은행 네트워크 안에서 조용히 일을 배우는 28세 청년이었다. 이 네 사람은 거대 기업가 세대의 핵심 거물이자 언론에서 '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가장 주목받는 그룹이었다.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주식과 철도의 달인 굴드는 미국의 광대한 자원과 노예 해방으로 인한 계급적 자유로 갑자기 늘어난 무한한 사업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전설적인 금융가 모건은 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네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고 종종 아군이자 적이었다. 모건은 카네기, 굴드, 록펠러 세 사람 모두와 일했고 그들의 야망을 조율해나감으로써 세 사람의 경력은 절정에 올랐고, 그들 모두 지배적인 인물이 되었다.



미국의 실용주의, 영국을 비웃다



1830년대에 영국 수준의 3분의 2에 불과했던 미국의 1인당 소득이 1860년대에는 영국과 거의 동등해졌다. 미국이 독일과 영국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 잡으며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떠오른 데는 '미국 시스템'이라는 정밀기계 가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세기 후 실리콘 밸리와 놀랍도록 유사한 코네티컷 리버밸리는 당시 첨단 기술을 주도했던 산업단지다. 활발한 기업가 활동, 기계광 문화, 스프링필드 병기 공장의 기술적 리더십 등이 리버밸리를 호환성 단계에 이른 정밀기계 가공의 자연발생적인 중심지로 만들었다. '미국 시스템'은 근원적이고 독특한 기술 환경에서 유래했다. 예를 들어 블랑샤르의 개머리판 조립 기계의 발전과정을 보자. 숙련된 수작업 팀이 한 주 동안 생산한 개머리판은 고작 8~10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블랑샤르가 개머리판 기계 자동조립선반 작업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완벽한 생산 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연구 개발환경의 빠른 창조와 신속한 특허 취득, 폭넓은 라이센싱으로 뒷받침되는 혁신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 과정의 핵심에는 첨단 기술을 국가의 최우선 순위에 둔다는 정부와 군 내부의 합의가 있었다. 엄격한 병기 공장 방식은 1880년대에 대중소비 사회의 출현으로 활짝 꽃피기 시작했다.



철도의 약탈자



굴드는 1867년 이른바 '이리 철도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1868년 경쟁자인 밴더빌트가 발부한 소환장을 피해 굴드는 야음을 틈타 나룻배로 허드슨강을 건너 저지시티로 도망갔다. 거기서 몇 달 숨어 지내다가 옷가방에 돈을 꾸려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굴드는 체포되었지만 챙겨간 돈 가방으로 밴더빌트의 의원들과 법관을 매수해 의기양양하게 뉴욕으로 귀환했다. 이리 철도 감사의 일기에 의하면 그 때 뿌린 돈이 60만 달러-오늘날의 가치로 700~8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그 때 굴드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이후 철도 회사를 약탈하는 그의 일관된 전술은 아주 조용히 움직여 다수의 가짜 계좌를 통해 주식을 매집하고 나서 보통 중요한 이사회 선거 직전에 갑자기 지배적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었다.



1869년 여름, 굴드의 철도 전쟁은 모든 전선에서 맹위를 떨쳤다. 철도 전쟁 결과가 불확실한 가운데 굴드는 악명 높은 피스크 굴드 '금 매점'을 시작했다. 굴드와 피스크가 소유한 금이 유통물량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가격은 이론적으론 무한히 오를 수 있었다. 9월 20일 월요일에 피스크의 브로커들이 금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금값은 계속 상승해 목요일에 143.25달러로 마감했다. 그러나 금요일 개장 후 155달러를 넘어선 금값은 오전 11시 45분 워싱턴 당국의 금 매도 긴급전문으로 순식간에 시장붕괴가 일어났다. 금 매점으로 굴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는 굴드의 철도 전략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1872년 3월 굴드는 마침내 이리 철도에서 물러났다. 굴드의 금 매점은 미국 금융사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이며 굴드의 자멸적인 성향뿐만 아니라 전후 미국 금융 시장의 취약성과 부패의 만연을 보여주었다.



그 시기부터 전국적인 철도 전쟁은 상대의 허를 찌르고 포위하여 점수를 올리는 바둑게임을 닮아갔다.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과정에서 사업적 수요를 훨씬 앞질러 새로운 철도 노선들이 생겼다. 수요를 초과해 과잉 건설된 철도 노선으로 화물운임이 꾸준히 하락하여 종종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까지 가격이 폭락하자 철도회사들은 회계를 분식하고 주주들에게 채무를 불이행하는 방식으로 확장자금을 조달했다. 파멸을 초래하는 굴드의 경쟁 방식을 막아내는 것이 피어폰트 모건의 사명이 되었다. 모건이 마침내 굴드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을 때쯤 철도는 이미 19세기 말을 특징짓는 전국적인 경제 붐을 이끌고 있었다.



최초의 석유부호



존 록펠러가 경영하는 클리블랜드가 정유 중심지로 부상한 것은 굴드가 새로 쓴 철도 경쟁 법칙의 직접적인 부산물 때문이었다. 클리블랜드는 굴드와 밴더빌트의 서부 노선이 지나는 천혜의 관문이었고, 두 노선 모두 곡물 시즌외의 과잉 수송 용량을 해소하기 위해 클리블랜드 정유 화물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굴드와 밴더빌트는 운임 인하 싸움을 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이점을 꾸준히 늘려주었다. 록펠러와 카리스마 넘치는 새 파트너 헨리 플래글러가 이 싸움을 이끌면서 클리블랜드의 정유 용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1870년 경 클리블랜드는 이미 정유 중심지로 피츠버그를 따돌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1870년 자신의 사업체들을 주식회사 스텐더드 오일로 재편성함으로써 개혁자로 자리매김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혁신 기술은 없었지만 록펠러는 입증된 기술의 얼리어댑터였고, 끊임없이 인재를 찾아 헤맸다. 예를 들어 1871년에 찰스 프랫의 첨단 정유소를 인수했고, 이 거래로 뛰어난 증류 전문가 핸지 조지스를 얻었다. 이 시기에 록펠러는 정유업의 격변이 막 시작되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비용을 절감하고 낭비를 없애고, 부산물을 더 팔기 위해 모든 면에서 전력을 다했다. 자체 운송 회사를 세우고, 자체 석유통 공장을 건설하고, 송유관 회사를 매수하는 등 작은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았다. 또 록펠러는 석유경영자들 사이에서 유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정제, 수송, 유통의 균형을 이루어 모든 단계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올리는 유일한 회사였다.



1871년 록펠러가 두려워한 위기가 현실로 나타났다. 정유 용량은 연간 1,200백만 배럴로 급증하고 수백 개의 영세 정유소들이 난립한 반면 원유 생산량은 500만 배럴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원유 가격은 1871년 배럴당 5달러로 올랐다. 하지만 대유정들이 발견되면서 곧 원유는 공급과잉이 되었다. 철도 산업 또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리 철도 쟁탈전은 치열한 가격 경쟁을 유발했지만 정유 업체들은 더 많은 할인과 리베이트를 요구했다.



근대화가 만들어낸 먹이 사슬



미국은 근대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으로 전통적 사회구조가 붕괴되면서 1840년대와 1850년대 이래로 기술적 상업적 개척의 힘이 구축되고 있었다. 1870년대 현대화의 힘은 옛날 방식으로 유지되던 생활, 정치, 사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현대화의 주역은 카네기, 록펠러, 굴드와 그의 찬양자들이었다.



제이 쿡 은행은 팔 수 없는 노던 퍼시픽 철도의 채권으로 포트폴리오가 채워지자 1873년 9월 18일에 도산했다. 쿡은 월스트리트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고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쿡의 뒤를 따라 휘청거렸다. 사실 미국은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겪고 있었고 그 위기는 1874년 중반까지 계속 되었다. 1990년대 광섬유 통신망처럼 철도는 실제 수요보다 훨씬 앞질러 건설되었다. 철도업계의 위기는 월스트리트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공급 충격'으로 표현되는 1870년대는 아주 활발한 성장을 보인 10년이었지만 불경기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 이유는 1870년대와 그 이후 내내 지속된 가파른 물가하락으로 화폐소득의 감소를 초래했고, 또 1879년 미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1870년대는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했고, 미국의 중공업이 영국과의 기술과 생산성 격차를 결정적으로 좁히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지만 은행가와 기업가, 농부와 공장 노동자에게 모두 힘든 시기였다. 사회적 불안이 심해졌으며 농민 저항 운동이 중서부 지방을 휩쓸었고, 산업 현장에서의 파업은 노사 양측 모두에게 사망자와 부상자를 남겼다. 그리고 미국 특유의 부당 이익과 시민주의의 반독점 기치가 처음 뿌리내렸다.



1873년 제이 쿡 은행의 파산으로 예기치 않은 결과 중 하나는 북서부 지방 특히 미네소타와 다코타 레드 리버밸리 지역에 일어난 토지 붐이었다. 노던 퍼시픽 철도는 전부 470만 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연방정부 토지를 불하받았다. 이 지역은 밀과 옥수수의 대량 생산에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땅이었다. 자본가인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장식 농장들은 엄청난 이익을 올렸기 때문에 '노다지농장'이라 불렀다. 이 농장은 공장식으로 생산을 관리하고, 기계를 최대한 이용하고, 계절 노동에 크게 의존하고, 상주 인원이 적고 일반적으로 비거주 투자자들이 지주인 수만 평 넓이의 농장이었다. 농부가 아닌 사람이 관리할 정도로 운영이 조직화되고 표준화되었다. 핵심 관리 직원들은 일반 회사의 회계원, 원가 계산 담당자, 구매 전문가와 같았다. 농장일은 곡식다발을 묶는 기계를 조작하고, 곡식 다발을 싣고, 장비나 곡물을 운송하는 작업 등으로 분업화되었다.



노다지 농장과 같은 시기에 육류 산업도 거의 대등하게 발달했다. 남북전쟁의 참화에서 텍사스 소 방목장이 탄생했다. 기업가들은 텍사스의 울타리 없는 방목장들이 수백만 마리에 달하는 반 야생의 '낙인 없는 소들'을 키우는 데 적합한 곳임을 깨달았다. 동부 지방과 유럽의 자본이 대규모 목축 사업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이것이 19세기의 그 유명한 정육공장 해체라인이 탄생한 배경이다. 정육공장 '해체라인'은 전 세계에 무서운 경이로 알려졌다. 쇠고기 해체라인에는 무려 78가지의 작업이 있었다. 그것은 빠르고, 힘들고, 위험한 작업이었다. 라인의 빠른 속도와 날카로운 도구로 인해 작업 중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19세기 말 정육업은 미국 최대의 고용 산업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나타난 대부분의 새로운 직업은 근로 환경이 몹시 열악했다. 19세기 정육 공장은 중세판 지옥 같았다.

1870년대 말 철도 부설이 급증하며 미국의 철로 길이는 유럽의 2배가 되었다. 철도 회사들은 철강 회사와 석탄 회사의 확장과 집중화, 식량 생산의 산업화에 주된 역할을 했다. 전국적인 철도망으로 인해 미국에서 처음으로 인구 중심지와 식량 공급지의 분리가 일반화되었다. 굴드가 엄청난 속도로 추진한 철도 건설과 록펠러가 구축한 값싼 유통망으로 미국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소비자 경제를 일구어냈고 중산층을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국내 소비시장의 거대한 규모 덕분에 미국은 규모의 경제를 완전히 이용할 수 있는 대형 공장 체제에 쉽게 도달했다. 1873년 공황이 가져온 기회를 잡은 카네기, 굴드, 록펠러는 모두 거대한 공장을 건설하는 등 규모의 변화를 추진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모건은 은행가로서의 경력을 쌓아 1880년대의 두 번째 시장 붕괴 후에 조직의 중재자로 떠올랐다.



1877년 앨러게이니 강가의 리버티가를 따라 뻗어있는 3㎞길이의 펜실베니아 철도 조차장의 모습은 애틀랜타 대화재를 방불케 했다. 무장한 수천 명의 성난 군중들이 건물 39채와 기관차 1,300량에 불을 질렀고, 거대한 곡물 창고에서 일어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1877년 7월 1일 밤이었다. 이 파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군인 몇 명을 포함하여 22명이 사망했다. 1877년 대파업은 미국 최초의 파업은 아니지만 수년 전 '몰리 맥과이어' 펜실베니아 탄전에서 일어난 광부와 사설 탐정 핑커턴이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동원한 폭력단인 핑커턴 경비대간의 유혈 충돌과 함께 매우 심각한 계급 기반의 위기를 처음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역사가들은 1877년 노동 봉기를 1870년대의 '길고 가혹한 불황'에 대한 반동으로 생각했고, 일반적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에 이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최악의 사태라고 평가했다.



철강왕 카네기



카네기는 네 타이쿤 중 가장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160cm의 작은 키에 손발도 작고 담황색 머리칼에 천진난만한 얼굴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정력에 말 많고 고집 세고 아부 잘하고 도발적이었다. 또한 자신의 이익에 관련된 일이라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알아차렸다. 카네기는 비범한 지성, 스코틀랜드인다운 실용성, 활력, 엄청난 매력, 거래에 대한 예리한 본능 등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료들보다 독서량이 훨씬 많았고, 후천적인 것이지만 예술과 문화에 대한 안목이 높고 그의 글쓰기 문체도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카네기는 자신까지 철저하게 속였다. 그는 어떤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성격이었다. 아주 매몰찬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치 자신의 본분이 사회 복지 사업이라도 되는 듯 늘 인도주의적인 이상가로 버젓이 행세했다. 세계 최고의 철강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동자에 대한 요구 강도를 높이고 그들의 봉급을 삭감하면서도 친노동자 성명을 발표하고 측근의 아첨을 좋아했다. 카네기는 가장 충성스러운 동료들에게도 종종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 아랫사람들을 파렴치하게 다루어 그들의 사소한 실수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그들의 성공을 전부 가로챘다. 카네기 제국 건설에 누구 못지않게 기여를 한 헨리 프릭이 은퇴했을 때 카네기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정력과 집요함을 온통 프릭을 속여 그의 재산을 빼앗는 데 쏟아부었다.



카네기는 경리 사무원을 거쳐 전보배달부 소년으로 일하면서 전신기사들의 어깨너머로 전신 기술을 익혔다. 곧 유능한 전신기사가 된 카네기는 1인 통신사가 되어 매일 피츠버그 신문사에 보내는 전신 뉴스 보도를 편집했다. 그는 일만큼이나 자기 개발에 몹시 엄격하여 탐욕스럽게 독서했고, 말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카네기의 행운은 그의 사업 영웅이 된 톰 스코트를 만난 열일곱 살 때 찾아왔다. 스코트는 카네기를 첫눈에 좋아했다. 광궤 차량의 필요성 때문에 철도 회사들은 전보를 많이 사용했는데, 펜실베니아 철도의 서부 감독관으로 임명된 스코트는 카네기가 일하는 전신 사무실을 종종 방문했다. 자체 전신국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을 때 스코트의 첫 번째 선택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카네기를 전신기사로 고용한 것이었다. '스코트씨의 앤디'라는 카네기의 위치는 스코트가 펜실베니아 철도의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카네기를 서부 지부 감독관으로 임명한 1859년에 끝났다. 이는 카네기의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카네기는 1860년대 초에 이미 부자였다.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 일상사였던 시대에 스코트는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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