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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철학자들

안드레아 가보 지음 | 황금가지
제1장 프레더릭 테일러 -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Fredrick W. Taylor)는 하버드 대학교의 입학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으나, 23세가 되던 해 필라델피아의 미드베일 제철소에 주형제작 수습공으로 입사했다. 1880년대 내내 대정부 납품업체였던 미드베일은 군수 납품 계약이 기술적으로 복잡해지고 수요가 증가했다. 그러자 테일러는 공작 기계 사용법을 혁신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공구강(工具綱, 공작기계용 도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적 관리'에 대한 실험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시간 연구, 직무의 작업 단위별 구분, 각 공정의 코드화 등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테일러는 선반을 조작하는 기계공에서 작업반장으로 승진했다. 테일러는 당시에 널리 활용되던 성과급제 아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즉, 근무한 시간에 따라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부품이나 단위의 수량에 따라 차등적으로 급여를 지급받았다.



경영층은 너무 많은 성과가 나오면 성과급 금액을 삭감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솔저링(soldiering,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일하는 행위)이라는 널리 행해진 태업 형태로 자신들만이 지키는 비공식적인 근로 할당량을 만들었다. 테일러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솔저링'에 동참했다. 하지만 그는 작업반장으로 승진하자마자 이러한 태업 관행을 근절했다. 그는 작업자에게 어떻게 하면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가를 직접 시범을 보여 가르치고, 노동자가 따르기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다짜고짜 해고해 버렸다. 그리고 작업장에서 일일 공정 작업량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성과급 금액을 삭감했다. 테일러는 '차등급제'라는 새로운 급여 방식을 채택했다. 그것은 작업마다 공정 급여를 설정하고 각 작업 단계의 절차를 사전에 정해두는 제도였다. 이 시스템의 적용으로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은 기존 1.5 달러의 두 배로 늘어났으나 작업량은 3배 정도로 늘어났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경영진의 신뢰를 받게 된 테일러는 동종업계에도 알려져, 1899년에는 베들레헴 제철소로부터 근무 제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베들레헴 제철소는 장갑판을 부당하게 높은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50퍼센트의 가격인하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테일러가 이 회사에 영입된 것은 비용 절감을 위한 것이었다. 테일러가 가장 우선적으로 했던 일은 하나에 42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선철봉(銑鐵棒)을 작업장에서 화차까지 실어 나르는 시간과 작업량 등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관찰 내용을 토대로 일일 작업량을 45톤으로 정했다.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톤당 3.75센트 또는 일당 1달러 68센트라는 최대 성과급이 주어졌지만, 45톤이라는 작업할당량은 노동자들이 위험천만할 정도로 빠르게 실어 날라야 할 양이었다. 테일러는 선철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수는 600명에서 140명으로 크게 줄었다. 혹독한 일을 이겨낼 만한 체력이 없거나,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했던 것이다.



테일러는 인간적 특질에 따라 생산성이 달라진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아이디어와 생산 공정의 개선을 이끌어 내는 잠재적인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는 미국 기업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기업인들은 새로운 공장 시스템의 메카를 구경하기 위해 베들레헴 제철소를 빈번히 방문했고, 공법의 사용권을 구입했다. 1901년까지 이 새로운 공법의 해외 사용권은 6개국 이상의 나라로 팔려 나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899년에 특허를 낸 공구강 제조공법으로 인해 얻은 수익 중 가장 큰 몫은 베들레헴 제철소가 차지했다. 베들레헴 제철소 입장에서는 수많은 테일러의 아이디어 도입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개혁과정에 1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야 했으며, 실험을 위해 제철소의 기계가 가동을 멈추는 경우가 빈번했다. 따라서 테일러는 노동자들은 물론, 베들레헴 경영층 가운데 상당수에게서도 반감을 사게 되었다. 베들레헴 제철소는 테일러의 마지막 직장이 되었다.



베들레헴 제철소를 떠난 지 2년 후 1903년, 테일러는 <공장관리(Shop Management)>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새로운 경영 철학의 바이블이 되었고, 테일러는 컨설턴트 겸 강연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두 가지 사건으로 일약 국가적으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첫 번째는, 그가 1901년에 지은 아름다운 건물 '박슬리'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는 이 건물주변에 거대한 화양목(boxwood) 울타리를 심었는데, 박슬리(boxly)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과학적 관리에 대한 복음을 전파했고,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두 번째 사건은 이보다 10년 후, 루이 브랜다이스의 눈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브랜다이스는 장차 미국 대법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 인물로, 당시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변호사였다. 그는 당시 철도 회사들의 요금 인상을 막기 위한 변론을 맡고 있었는데, 철도회사가 운영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여 철도요금 인상을 반대했다. 즉 당시 새롭게 도입된 과학적 관리 방식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국제상업위원회의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 브랜다이스에게 과학적 관리의 모범이 된 업체, 링크벨트를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노동자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테일러에게 링크벨트는 '과학적 관리'의 대외 홍보용으로 제격이었다. 테일러가 링크벨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곳의 컨설턴트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링크벨트의 사장 제임스 도지는 테일러의 공법에 매료된 후 그의 과학적 관리 기법을 자신의 회사에 도입했다. 그러나 도지는 테일러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성과급을 받는 노동자들의 급여 삭감을 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고위 간부들과 의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링크벨트는 서서히 개혁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베들레헴 제철소와 같은 급격한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비용이 20퍼센트 급감했고, 노동자 한 명당 작업량은 2배로 늘어났으며 노동자들의 평균 급여는 25퍼센트 내지 30퍼센트 늘어났다. 이로 인해 링크벨트는 과학적 관리의 모델이 되었다.

사실 링크벨트에서 과학적 관리가 성공을 거둔 데는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은 회사 경영층의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이런 사실을 인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브랜다이스는 링크벨트의 성공사례를 통해 국제상업위원회로부터 철도회사의 요금 인상 요청에 대한 거부 결정을 얻어냈다. 그것은 테일러와 과학적 관리에 명성을 가져다준 것이기도 했다. 몇 달 동안 기자들이 박슬리로 대거 모여들었고, 테일러의 유명한 논문 <과학적 관리의 원칙들(The Principle of Scientific Management)>은 발간되기도 전에 아메리칸 매거진에 시리즈로 실렸다. 이후 테일러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과학적 관리를 강연했고, 과학적 관리는 미국과 프랑스, 인도와 동부 유럽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테일러리즘이 없었다면 미국 산업계의 발전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경영자와 노동자들 사이의 대립을 더욱 경색되게 만들어 그 반발로 인한 인본주의 경영 철학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제2장 메리 파커 폴렛 - 후기 과학적 관리의 어머니



메리 파커 폴렛(Mary Parker Follett)은 비교적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다소 소외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그녀는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폴렛은 고향을 떠난 뒤, 후에 래드클리프 대학교가 된 여성 대학교육 기관에서 수학하고, 케임브리지와 파리에 유학하여 정치학과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는 실험주의와 참여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록스버리에서 10대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곳은 당시 보스턴에서 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이 높던 지역이었다. 폴렛은 자비를 들여 공립학교에 산업 연맹을 창설하여 청소년 노동자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취업을 알선을 하는 등, 공립학교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폴렛의 공공 분야 참여 활동은 대부분 산업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폴렛의 사상은 '사회단체 운동'을 통해 실천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녀는 '국가를 비롯한 모든 인간 조직은 나무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뿌리가 넓게 퍼지면 퍼질수록 가지도 뻗어 나가듯이, 조직은 개인의 참여와 실천, 그리고 실험을 필요로 하는 유기체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실체라고 규정했다.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새로운 국가』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8년에는 심리학적 접근 방식을 담은 책 『창조적인 경험』을 발간하여 조직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정서적인 반응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1924년, 폴렛은 뉴욕에 있는 인사 관리국에 '산업 조직에 관한 일련의 보고서'를 제출한 이후, 강연과 컨설팅을 의뢰받으면서 인사관리국의 리더로 활동했다. 이때 강연한 내용들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역동적 관리(Dynamic Administration)』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 실린 다음의 내용들은 그녀의 경영 사상을 대표하는 특징이 되었다.

권위와 '상황의 법칙': 권위라는 것은 조직에 속한 개인의 지식과 기능으로부터 나오며, 결코 조직 내 서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강제로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반감을 살 따름이므로, 명령과 권위에서 개인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또한 독단적인 권위는 지시를 받는 사람들이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직원이 자신의 업무에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보다 사업에 있어서 더욱 큰 자산은 없다.



파워 위드(Power-with): 일반적으로 권력이라 함은 파워 오버(power-over), 즉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서 힘을 행사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반면 파워 위드라는 개념은 공동으로 형성된 권력을 말하는데, 권력에서 개인적인 요소를 제거하면 굴종적인 복종은 사라지게 되고, '상황의 법칙이 요구하는 사항'을 실천함에 있어서 진정한 협력의 정신이 형성되는 것이다.



연속적인 과정으로서의 리더십과 의사 결정: 리더십과 의사 결정은 협조의 연속적인 과정속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구성원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의 권한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당 조직은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을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아야 한다(이러한 상호간 팀 제도는 1980년대 미국 제조업체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건설적인 갈등: 갈등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은 승리도 타협도 아니며 양측 견해를 '통합(intergra-tion)'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은 노사 간의 경계선을 빈틈없이 날카롭게 긋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경영층과 노동자층은 문제점 대신 불만을 강조하게 되고, 협상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과의 협력과 협조만이 기업을 운영하는 방법 가운데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다.



20세기 초에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내던 경영 이론가들조차도 노동자들의 단합이나 단체 교섭 행위에 반대했지만, 폴렛은 노동계층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닌, 노사 갈등의 원인과 이런 적대 감정으로 인해 입게 되는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폴렛이 누렸던 명성은 너무나도 짧았다. 1930년대와 1940년대라는 혼란스럽고 분열된 시대에, 그녀의 이론은 소집단의 협력에 초점을 둔 이상주의적인 경영철학으로 여겨졌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러시아에서 발발한 볼셰비키혁명은 폴렛이 전개한 시민단체 조직에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은 폴렛이 남긴 대부분의 자취를 깨끗이 씻어 내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폴렛의 경영사상이 재발견 되어 경영이나 분쟁 해결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점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많은 나라의 공무원이나 지방 정부는 시민들로부터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실천 기준을 개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제3장 체스터 바너드 - 미국 경영철학의 제왕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AT&T(미국 전신 전화 회사)만큼 전문 경영의 탁월한 모델이 되고, 사회 안정과 경제 번영을 도모하는데 기여한 회사는 미국 사회에서 거의 없을 것이다. AT&T는 거의 1세기 전부터 각각 독립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전신 전화 회사들을 합병해왔다. 이러한 통신 분야의 독점을 일반 시민들이 별다른 반감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데는 AT&T의 우수한 관리 능력이 공헌을 했다. AT&T의 경영개혁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체스터 바너드(Chester Barnard)는, 1920년대부터 수십 년간 AT&T의 경영에 공헌했다. 그는 1930년에 『경영자의 역할』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당시에 유행하던 군국주의적이고 명령과 통제에 기반을 둔 리더십 모델 대신에 심리학에 기반을 둔 실천적 측면을 강조했다. 더욱이 오늘날 경영학에서 중요하게 인식되는 거의 모든 사상을 예측하고 있다. 바너드는 경영층의 권위가 명령을 하달하는 능력이 아닌, 설득하는 능력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바너드의 경영 방침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전문 경영인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바너드의 아버지는 가난한 기계공이었다. 게다가 바너드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 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려운 환경 탓에 바너드는 그래머 스쿨(8년제 초등학교)을 졸업한 15세부터 피아노 조율사로 일을 시작했다. 피아노 조율사 일을 시작한 지 2년 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나중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잡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는 3학년에 학사 학위 취득에 필요한 대부분의 과목을 이수했지만, 학비가 부족하여 마지막 과목을 끝내기 전에 대학을 중퇴했다. 바너드는 대학을 중퇴하자마자 AT&T에 입사했다. 당시 AT&T는 수많은 통신 사업체들을 통합하여 국영화하려는 정부와 싸우고 있었다. 통계부서에서 일했던 바너드는 국유화가 이루어지면 전화 요금이 비싸지고 통신 설비의 품질도 악화될 뿐 아니라 통신 시설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로 인해 회사 경영층의 관심을 끌었고 NJBT(뉴저지의 벨 회사)의 부사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바너드가 NJBT에서 해야 할 일은 교환을 통해 제공하는 전화서비스를 다이얼 서비스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37년, 다른 통신회사들은 뉴저지 주 전체전화의 절반 이상을 다이얼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NJBT는 35퍼센트만을 성공시켰다. NJBT의 저조한 전환율은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있던 전시 생산 체제에서 통신 지원의 애로를 나타내기도 했다. 바너드는 이처럼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비전이 부족한 단점을 드러냈지만, 조직 구축 기술과 사내 복지 정책에 대한 노력에 있어서는 탁월함을 나타냈다. 대공황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3년 바너드는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근무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평소에도 직접 노동 협상에 나서는 등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높은 편이었다. 바너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파일을 보면 고객들의 구체적인 불만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경영의 심리학적 측면과 행동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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