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성공한 대박기업 대박가게
허중희 지음 | 황금물고기
㈜남진농기 유남진 사장 - 획기적인 농업 신기술 개발로 다시 일어서다생활의 불편함과 호기심이 발명으로 이어져 유남진 사장은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점을 발견하면 좀더 편리하게 개선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 그가 발명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은 군대 통신병과에 배치되면서부터다. 군 복무 기간 동안 통신과 전기 기술을 배우면서 전화기와 라디오 등 당시 낙후되었던 전기 기술 가운데 개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제대 후 그는 전업사를 세우고 증폭 전화기를 발명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전화기는 우리나라 전기통신법상 인가를 받지 못해 상용화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조개 양식장을 운영한다. 9만 평 규모의 양식장에서 키운 조개를 100% 수출하면서 한때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양식장이 바다 한 가운데 있다 보니 도적이 끊이지 않았는데, 충남 당진에서는 대낮에 배 20여 척에 나눠 탄 100여명의 도적들을 상대해 싸우다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후 사고의 후유증을 겪은 그는 수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코알라 인형 만들어 호주에 수출 시작, 최초로 '집게 인형' 발명 사고의 후유증으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에게 고교 후배가 "인형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우연히 호주의 마스코트 코알라를 보게 된 유 사장은, 딸이 입던 잠바 속 원단이 동물의 털 색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뜯어다가 코알라 인형 샘플 하나를 만들어 호주로 보냈다. 얼마 후, 호주에서 반응이 왔고 코알라 인형 3천 달러 어치와 강아지 인형 3천 달러 어치를 주문 받게 된다. 유남진 사장은 종업원 7명을 모집해 서울 화양동에 30평 짜리 지하실에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설립 2개월 후, 그는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 착안해 팔과 다리에 집게를 넣어 나무에 매달리게 하는 '집게 인형'을 발명한다.
집게 인형이 나오자마자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히트 친 남진산업의 집게 인형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받지 못했다. 다른 인형 회사 대표 두 명이 특허 담당자에게 특허를 주지 말도록 로비를 벌였고, 당시 여우 목도리에 있는 집게와 비슷하다는 억지를 내세워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수십 개 완구회사가 이 집게 인형을 모방하면서 엄청난 양의 집게 인형이 완구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유 사장은 당시 법원에 이의 제기로 상고했고, 무려 10년이 걸린 끝에 특허가 나왔다. 하지만 10년이나 지나 뒤늦게 받은 특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와이에 갔다가 '허리 돌아가는 훌라 인형'에 아이디어 착안 1973년, 지하실에서 직원 7명으로 시작한 남진산업은 집게 인형의 대히트로 주문이 계속 들어오면서 불과 1년 만에 160평 규모로 공장을 확장한다. 호주를 비롯해 미국, 일본 등지에서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들었고, 설립 8년 후인 1981년에는 무려 1,13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전국에 5개의 공장을 가진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또한 1,000만 불의 수출 공로를 세우며 국내 최대의 완구인형 회사로 거듭났다. 그렇게 탄탄한 성공 대로를 달리던 1980년대 초, 그는 하와이에 갔다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면 꼭 훌라 인형을 하나씩 사가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바로 하와이 민속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훌라 인형 개발에 착수한다. 허리를 돌리면서 깜찍하게 작동하는 훌라 인형은 하와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이듬해에 120만 달러의 수출 계약을 하게 된다. 그의 앞날은 그야말로 핑크빛 세상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악한 인간의 사기 행위로 몰락의 길 걸어 국가에 많은 공로도 세우고 성공한 사업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그에게 어느 날 더글러스 킴이라는 재미교포가 찾아온다. 자신에게 15만 불 어치의 외상을 주면, 하와이은행에서 120만 불의 신용장(L/C)을 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유 사장은 은행 지점장이 책임지고 신용장(L/C)을 열어 주겠다고 하자 의심하지 않고 15만 불 어치의 물건을 주게 된다. 그런데 더글러스 킴은 물건을 가져간 뒤 잠적해 버렸다. 당시 국내에는 훌라 인형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전자부품 칩이 없어서 거액의 비용을 들여 홍콩과 일본에서 칩을 수입하던 형편이었는데, 많은 돈을 투자해 만든 훌라 인형을 사기꾼에게 몽땅 떼인 것이다. 게다가 더글러스 킴은 자기 이름으로 미국에서 특허를 받아 오히려 유 사장을 사기꾼으로 몰아 소송을 걸기까지 했다. 한 사악한 인간의 술수에 넘어가 한 순간에 10억 이상의 금전적 손실을 본 유 사장은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공장 2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정리했다. 그런데 이즈음 마이클 박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더글라스 킴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자기에게 미국 판매권을 달라는 제안을 했다. 유 사장은 또 다시 그와 계약을 하고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4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이클 박은 그동안 자기가 지불한 변호사 비용이 10만 불인데 50만 불의 신용장을 열어 줄 테니, 1년 동안 12회로 나누어 갚아 달라고 요구한다. 유 사장은 그 동안 애써 준 그를 철석같이 믿고 10만 불에 대한 지불증을 써 주게 된다. 하지만 마이클 박은 신용장은 열지 않고 거꾸로 법원에 청구 소송을 하여 유 사장의 부동산 3건을 압류했다. 두 사람이 쳐놓은 사기 올가미에 어이없이 걸려들면서, 1984년부터 1992년 사이에 남진산업은 전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 결국 유 사장은 당시 시가로 3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모두 자진 매각하여 부채를 청산한 후 월세 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두 번의 사기와 계략에 휘말려 분신과도 같은 회사를 어처구니없이 날린 유남진 사장. 몇몇 인간의 사악한 욕망으로 공들여 키운 회사가 어이없이 쓰러지는 좌절을 맛봐야 했던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1990년 그는 사기꾼 2명을 찾아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어 잘못을 빌게 한 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무작정 하와이로 떠난다. 그 뒤 하와이에서 7일 동안 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헤매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린다. '내가 왜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에 죽어야 하느냐? 나는 사업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사기에 의해서 사업이 망한 것이므로 내 자신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일어설 수 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
농업 분야의 신기술 벤처기업 '남진농기'로 재기 정신을 추스르고 재기를 다짐하던 그는 농업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농업 기술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는 농업 분야의 낙후한 기술을 개선할 아이템을 선정하고, 이 새로운 사업을 위해 1992년 남진농기를 설립한다. 유 사장은 평소 선진국을 다니면서 눈여겨보았던 농업 기술 분야의 4개 상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성공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국의 수많은 농촌 지역을 다니면서 잠자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야간열차에서 잠을 자고 곧바로 아침에 일을 시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이렇게 13년 동안 농업 기술을 연구한 끝에 개량형 논물꼬, 종이육모상자, 앞마당 육모기, 논뚝보강덮개, 흙톨볍씨 등을 개발했다. 이것은 기존의 낙후된 방식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획기적인 발명 제품으로 현재 국내 시, 군청에 납품하고 있으며 미국, 일본 등 농업 선진국에도 활발히 수출하고 있다.
현재 남진농기는 광주와 김천에 공장을 건립하고 있다. 앞으로는 전국 각지에 신기술 제품을 빠르게 보급하기 위해 호남권, 경남권, 충남권, 경기 강원 지역에 각각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한 공장에 들어가는 투자액만 50억 원에 달해, 국가 보조금과 회사의 자금 투자로 충당하면서 차근히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사업이므로 무궁한 발전과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
13년 만에 이뤄 낸 결실, 남진농기를 국민 기업으로 유남진 사장은 앞으로 남진농기를 국민 기업으로 키우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즉, 국민 기업이 되어 농민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골고루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제 좌우명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입니다. 평범하지만 이 말 속에서 굳은 의지와 살아가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 있다.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실패로 끝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환난을 꿋꿋이 이겨내고 새롭게 도약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인생의 쓰디쓴 고난을 얼마나 잘 이겨내고 지혜롭게 극복하느냐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이제 밝은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활짝 펴고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유남진 사장.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현재는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하다. 이제 그는 희망의 축포를 쏘아 올렸고, 앞으로는 그에 값하는 무한한 성취감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수원 호텔 캐슬 이은종 사장 - "최고가 아니면 시작도 안 한다!" 맨 주먹의 호텔리어다리 장애는 더 강한 의지와 독립심 키워 친척 잔칫집에 갔던 어머니가 방에 눕혀 놓은 갓난 아기.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때부터 아기는 사흘을 쉬지 않고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사흘 밤낮으로 굿판을 벌였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는 자라면서 보통 아이들처럼 똑바로 걷지 못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전교 3등을 할 정도로 명석하고 공부를 잘 했지만 다리를 절뚝거린다는 이유로 중학교에 불합격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나중에 결국 합격 처리가 되어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서러움을 느꼈다. 25세까지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외형을 먼저 따지는 사회적인 풍토 때문에 그는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큰 병원에서 다시 정밀 조사를 받고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안 좋아 보이겠지만 다리 때문에 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왔기 때문에 크게 안타까워하지 않아요." 세상에는 사지 멀쩡해도 자기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멀쩡한 육신이 아니라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과 가치관이라는 사실이다.
장애로 취업이 안 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장사 선택 마침 유통업 쪽에서 일하던 친구의 권유로 수원에 와서 슈퍼마켓을 열게 된다. 서울보다 땅값이 저렴해서 아예 땅을 구입해 그곳에 건물을 짓고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배달까지 다니며 150여 평 규모의 대형 슈퍼마켓을 알뜰히 운영해 나갔다. 수원에 온 것은,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친구를 주말이면 만나러 오다 이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수원은 예로부터 갈비가 유명한 지역이다. 이 사장은 종종 거래처 사람들에게 갈비를 접대하곤 했는데 하나같이 갈비집들이 차를 타고 찾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이 불편하다고 느낀 그는 문득 '주차하기 편하고 대로변에 갈비집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건너편 가게에서 동물 사료를 팔던 이웃이 있었는데, 자주 접하다 보니 형님과 아우 사이로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자본을 대줄 테니 사업 한번 크게 해 보라고 부추겼다. 이 사장은 그 동안 번 돈과 그 사람에게 사채 2억 원을 얻어 사업을 확장한다. 1983년, 그는 객실 30여 개가 달린 5층 짜리 건물을 지었다. 위치가 수원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수원 모텔(이은종 사장이 처음으로 이름 붙인 '동수원'이라는 말은 어느새 수원에서 하나의 지명이 되어 버렸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이름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건물 1층에는 대형 갈비집을, 2층은 커피숍으로 만들어 숙박업과 같이 운영했다. 갈비집 앞에 넓은 마당은 잔디 정원으로 꾸며 날씨 좋을 때는 야외 정원에서도 갈비를 먹을 수 있게 했다. 또 당시 음식점 입구 문은 자동문으로 해 놓았는데, 손님들이 무척 신기해하였다. 내부 인테리어도 대형화·고급화시켰고 일류 주방장을 고용해 갈비 맛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잘 나가던 관광호텔, 넉 달만에 부도내고 도망자로 전락 누구나 찾기 쉬운 편리한 교통과 지리적 이점 덕에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집 한 채 없던 자리에,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한적했던 곳에 갈비집을 열어 번성하게 되었고 이후 근처에는 우후죽순으로 갈비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갈비집은 장사가 잘 되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2년 후에는 건물을 더 증축하고 관광호텔을 지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갔다. 하지만 사채로 끌어 쓴 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초기 투자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생각지 못했던 이 사장은 결국 사채를 쓰게 되었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형님'이라 불렀던 사람에게 농락을 당하게 된다. 갈비집은 날로 번성하고 돈을 떼로 벌어 들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사채업자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다. 혹독히 당하고 나서 나중에야 그가 직업적으로 사채놀이를 하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장사가 잘 되는 관광호텔을 차지하려는 사채업자의 농간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가 부도를 내게 된다. 채권자들이 몰려오고 그에게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친구가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급하게 짐만 싸서 무작정 떠났고, 1년 8개월 동안을 그는 그렇게 떠돌이 도망자 신세로 지내게 된다. 사업이 잘 되면서도 부도를 낼 수밖에 없어 수배자 신세가 되다니, 이은종 사장은 자살 충동을 느꼈고 소주 먹고 죽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죽고 싶어도 분통이 나서 죽을 수가 없었다. 또 자신의 죽음으로 남은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없었다. 이 시기만 무사히 넘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난생 처음 노숙도 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 부동산 경기가 불황이라 지어서 안 팔린 아파트에 보증금 200만원에 월 7만원을 주고 들어갔다. 만약 아무 때라도 아파트가 팔리면 나가고, 또 세입자가 나간다고 하면 보증금을 바로 받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하루는 대중탕에 갔는데 일회용 면도기를 살 돈마저 없었다. 마침 다른 사람이 쓰다 버린 것 같은 일회용 면도기를 주워 쓰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나타나더니 '왜 남의 면도기를 쓰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래서 '버린 것인 줄 알고 썼다고, 죄송하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면도기 하나 가지고 그렇게 무안을 주느냐'며 '이거 쓰라'고 이 사장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때의 일은 당시엔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지금 이 사장에게는 쓰지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파산자에서 다시 복권자로, 기업 소생시킨 의지의 기업인 그렇게 1년 8개월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그 동안 악덕 사채업자는 호텔을 삼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호텔 자산은 200억이 넘는데 부도 액수는 15억이었다. 채권자들이 협의해서 '호텔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돈을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부도가 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은행에서는 대출이 안 되었다. 당시 신용금고에서 15억을 대출 받아 채권자들에게 모두 나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