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100년의 저력
데이비드 마지 지음 | 비전코리아
01 루지 단지의 폭발 사고1999년 2월 1일은 포드 자동차의 창립자이자 산업화 시대의 혁명론자인 헨리 포드의 증손자 윌리엄 클레이 "빌" 포드 주니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생산업체인 포드 자동차의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한 지 두 달째에 접어드는 첫날이었다. 빌 포드는 1979년 헨리 포드 2세가 회장직에서 퇴임한 후 포드 가문 일원으로서는 최초로 포드사에서 고위 간부직에 임명되었으나, 회사 내부에서는 단지 포드 가문의 사람으로만 알려진 인물일 뿐이었다.
빌 포드는 1979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말단 사원으로 포드 자동차에 입사했다. 빌 포드는 포드 자동차의 전통에 따라 10~12개월마다 부서를 바꾸며 다양한 직책을 두루 거치는 승진 과정을 거쳤다. 포드 자동차에서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직책을 계속 맡는 간부는 승진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를 회사 내부에서 육성한다'는 포드의 사내 문화의 일부분으로, 간부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는 인재는 재무에서 시작해 판매, 마케팅, 그리고 제품 개발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사업의 모든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념에 따른 것이다. 빌 포드 역시 아버지가 예전에 그러했듯 고위 간부로 가는 길을 향해 이와 같은 승진 절차를 밟았다.
빌 포드의 아버지 빌 포드 시니어는 1940~1950년대 포드 자동차 내부에서 제품 디자인 및 개발의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 재능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콘티넨털이라는 자신만의 회사 사업부가 주어졌을 정도였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 당시 포드 자동차의 회장직에 있던 빌 포드 시니어의 형제인 헨리 포드 2세가 1956년 회사 주식 상장을 준비하면서 콘티넨털 사업부를 링컨 사업부로 편입시킨 것이다. 그 후 빌 포드 시니어는 포드 자동차 이사회 임원의 직책만 유지한 채 포드 자동차의 산업에서 손을 뗐다. 빌 포드 시니어와 부인 마사 포드는 1남 3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윌리엄 클레이 "빌" 포드 주니어는 1957년 태어났다.
빌 포드의 어머니는 자식이 버릇없는 아이로 크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빌 포드 주위에는 경호원이나 운전기사가 따라다니지 않았으며, 빌 포드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기다린 후 학교 수업이 끝난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부모님은 제가 가능한 한 다른 아이들과 같은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요. 제가 어른이 되어서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지 않고도 자력으로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한 빌 포드는 역사를 전공했고, 4학년 때는 학내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높은 명성을 지닌 학생 클럽 아이비의 회장에 선출되었다. 포드는 6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4학년 논문 「헨리 포드와 노동 : 그 재평가」를 완성했다. 대학 시절이 끝나가는 무렵 가문과 포드 자동차의 역사를 논문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은 바로 젊은 시절의 빌 포드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더 깊이 자각하고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빌 포드는 프린스턴을 졸업한 직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포드 자동차에 입사하겠노라고 공표했다. 빌 포드 시니어는 결코 아들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도록 강제로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아들의 결정에 매우 흡족해했다.
빌 포드는 1979년 포드 자동차에 입사한 후,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덕분에 빌과 사촌 에드셀 포드는 1988년 이사회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빌 포드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재무 위원회에, 에드셀 포드는 집행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빌 포드는 재계 중진들과 함께 이사회 회의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호재로 생각하고 경영의 지혜를 쌓기 위한 기회를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 스리(3)가 기록적인 적자를 보면서 일본 경쟁업체들의 압력에 굴복하는 듯했던 1990년과 1991년의 어려운 시기 동안 이사회 재무 위원회 임원으로 일한 빌 포드는 더 명확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 1995년 재무 위원회의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포드 자동차의 피고용인이 아닌 경영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사회 임원인 칼 리하르트는 이 임명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빌 포드는 자신의 노력으로 위원장 자리에 오른 겁니다. 우리는 재무 위원장 자리에 아무나 앉히지 않거든요."
1998년 말 알렉스 트롯만이 회장 및 CEO 자리에서 예상보다 1년 빨리 사임하겠다고 발표하자, 빌 포드는 포드 자동차의 회장이 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회는 아직 젊고 3살에서 13살 난 4명의 자녀와 아내를 둔 빌 포드를 핵심적인 자동차 사업 경험을 소유했거나 매일같이 출근해 회사를 경영할 시간이 있는 인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1,600억 달러 자산 가치의 포드 자동차를 실제로 경영하는 권력은 빌 포드가 아닌, 다른 노련한 경영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트롯만이 사임한 후, 회장과 CEO의 직무는 사실상 분리되었다. 자크 나세르가 매일매일의 경영을 책임지는 포드의 CEO 역할을 했고, 빌 포드가 이사회를 관리했다. 나세르는 출발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이는 그의 성격 탓도 있었고, 당시 상황 탓도 있었다. 나세르는 경영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포드 자동차라는 기업의 뿌리를 최고 경영진부터 시작해 대대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이미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포드 자동차는 그 당시 슬럼프에 빠져 있던 경쟁업체 제너럴 모터스를 가볍게 제치며 미국 자동차 시장의 25퍼센트를 점유하고 70억 달러를 상회하는 수익을 올렸으며, 주가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999년 2월 1일, 나세르는 유럽 출장 중이었고, 빌 포드는 점식 식사를 마친 후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아래와 같은 소식이 흘러나왔다. "포드 자동차의 루지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빌 포드는 차창 밖으로 연기가 하늘로 나부끼듯 피어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빌 포드는 본사에 들려 사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찾아 본 후 홍보실 직원과 함께 곧장 사고 현장으로 갔다. 사고 현장에서 상황을 수습하는데 최대한 협조하였고, 병원을 방문해 부상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챙겼다. 포드사는 활발한 성장을 구가하며 행복의 비명을 지를 만도 했으나, 루지 사고로 인한 7명의 사망자는 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고로 포드사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새로운 리더를 잉태하게 되었다.
02 리더십의 교훈1999년경,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 대부분은 구경제 기업들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 투자자들은 첨단 기술이 주도하는 소비자 시대가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으며, 이 새로운 소비자 시대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한 기업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큰 관심과 많은 투자자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신경제의 신화가 병적인 열광의 상태에까지 다다랐던 시점이 바로 나세르가 포드 자동차의 CEO 자리에 오른 때였다. 나세르는 미국 대기업 중 가장 민첩하지 못한 축에 드는 포드 자동차를 이끌어, 과거에 비해 3~4배는 더 높은 주가수익율을 올리는 재빠르고, 다각화되었으며 전 세계적인 사업망을 갖춘 대기업으로 쇄신시키고자 했다.
나세르가 주창한 계획은 포드 자동차를 "자동차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도 소비자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세르는 포드사가 차지하는 잠재 수익의 비중을 늘리기 위해 더 고급스러운 글로벌 브랜드를 인수함으로써 제품군을 확대하고 상당한 선까지 인터넷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자 했다. 나세르는 자신의 계획이 포드사의 미래에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어줄 것이라 확신했으며, 볼보와 랜드 로버를 단시간 내 인수함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모두 끝냈다.
그리고 나세르와 포드 자동차는 자동차제품의 수익 라이프 사이클에서 포드사가 차지하는 수익의 양을 더 늘리려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자동차 제조 외의 기타 자동차 관련 분야로 재빨리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처음 한 일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딜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판매 대리점 영업에 직접 뛰어든 것이다. 게다가 영국의 큇 핏을 16억 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자동차 서비스 및 정비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즉 생산 단계부터 사후 서비스 제공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접근법을 취함으로써,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포드 브랜드가 새롭고 거대한 수익원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포드 경영진의 면면과 전략을 매우 급속히, 그리고 대대적으로 바꿈으로써, 연공서열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시하며 외부 인재 기용에 배타적인 내부 고용 및 승진 시스템을 기반으로 수십 년 동안 번창해온 포드사 특유의 사내 문화, 그리고 성장 및 새로운 시도에 매우 보수적인 접근법 등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주고자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BLI(Business Leadership Initiative) 프로그램과 성취관리 프로그램(PMP, Performance Management Program)이다. PMP는 그 시작부터 큰 마찰을 빚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공헌 정신을 매우 중요시하는, 군대와 다를 것 없는 시스템에 수십 년 동안 길들여져온 매니저와 간부들은 왜 자신들의 운명이 인사이동에 대한 결정권을 쥐게 된 나세르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03 급격한 변화의 중심그 당시 빌 포드는 비상임 회장직의 자격으로, 이사회의 회장으로서만 회사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빌 포드는 일상적인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제외된 채, 실무 경영은 모두 나세르가 맡았다. 자크 나세르가 사실상 포드사의 성장을 도모하는 가운데, 빌 포드는 포드 자동차의 회장으로서 21세기 포드사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분야에서 포드사가 리더가 되도록 이끄는 일에 매진하는 데 만족했다. 기업 책임감과 장기적 비전을 지키는 일은, 이 둘을 모두 필요로 하는 포드사에서 빌 포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1990년대 말 포드 자동차는 판매하는 차 한 대당 2천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덕분에 포드 자동차에는 빌 포드가 "더 나은 세상"이라는 기업 모토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파워가 있었다. 빌 포드는 이 "더 나은 세상"이라는 슬로건이야말로 21세기 포드 자동차를 세계를 선도할 용의와 준비가 갖추어진, 양심 있는 글로벌 자동차 대기업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빌 포드는 오랫동안 포드 자동차를 괴롭혀온 "사회 및 환경 관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회장직에 오른 후 곧바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신선한 관점을 도입하기 위한, 이해 관계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프로세스"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포드 자동차의 고위 경영진 사이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세르는 CEO직에 오른 초기 시절부터 특히 루지 단지 폭발 사고에서 우연찮게 매스컴을 탄 덕에 빌 포드 회장이 손쉽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지지자 층을 확보하게 된 데 심기가 편치 않았다. 미국의 재계 지도자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떠받들던 시대가 절정에 다다랐을 그 때, 나세르는 스타 경영인이 되고 싶어했으며,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완벽한 CEO가 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한편, 빌 포드 회장은 나세르를 지지한다는 공식 입장을 계속 유지했으나, 나세르가 포드사의 성장과 개혁을 도모하는 데 이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오랜 사내 문화를 너무 무시하는 데 점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자신의 경영 스타일에 대한 빌 포드 회장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느낀 나세르는 그럴수록 자신이 구축한 실세 집단의 응집력을 더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빌 포드 회장은 나세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늘어갈수록 회사 경영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지만, 나세르는 빌 포드 회장이 중요한 경영 관련 정보를 접할 수 없도록 방해했다. 이처럼 고위 경영진 사이에서는 불화가 존재했지만, 포드 자동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속 성장을 구가했다.
04 포드 자동차의 시련포드 자동차가 구경제의 굴뚝 산업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면 쓸수록, 그 근본이 제조업이라는 현실은 포드사를 끈질기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루지 폭발 사고가 포드 자동차에 큰 타격을 입힌 지 1년하고도 1주가 지난 후, 타이어 결함 문제에 대해 보도한 텍사스 휴스턴의 한 TV 뉴스는 포드 자동차를 송두리째 삼켜버린 엄청난 폭풍의 눈을 급속히 성장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당시 포드 자동차는 SUV 유행을 선도한 익스플로러 모델이 거두어들인 막대한 이익 덕분에 수많은 기업을 인수하고도 여전히 200억 달러가 넘는 충분한 현금 여유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 익스플로러에 기본 사양으로 장착된 파이어스톤 타이어가 미국 전역의 수많은 익스플로러 전복 사고를 일으킨 주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된 것이다. 뉴스가 나간 후 시청자들로부터 전화 문의와 이메일이 빗발치고 그해 5월,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관리국에서 관련 제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후 포드사와 파이어스톤사는 두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신문 지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동안 대중의 신뢰가 실추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제작된 TV 광고에 등장하는 등 공식적으로 포드사를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나세르였다. 빌 포드 회장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공식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나세르의 리더십을 침해하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조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인 포드와 파이어스톤이 결코 유쾌하지 않은 뉴스로 방송과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사태를 바라보며, 빌 포드 회장은 "매우 긴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드 자동차는 파이어스톤 위기처럼 탑승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많은 제품에서 품질 저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 포드 자동차는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회사 기준에 미달하는 성능의 자동차, 트럭, 그리고 SUV를 판매 대리점에 출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소비자 기업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대대적인 다각화 노력 때문에 핵심 자동차 사업에 대한 집중력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핵심 제품에 주력하는 역량이 저하됨에 따라 모든 자동차 생산업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제품을 출시하는 데 타격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빌 포드는 계속되는 파이어스톤 위기, 직원들이 제기한 소송이 야기한 분열 사태, 그리고 사내에 만연한 나세르에 대한 불만 때문에 회사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직원들은 화가 났고, 딜러들은 심기가 불편했으며, 소비자들은 경계심을 품었고, 수익은 증발하고 있었다. 포드 자동차를 쇄신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는 글로벌 기업 리더로 우뚝 서게 하려 했던 나세르의 꿈은 급속히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05 빌 포드 회장의 부상나세르가 자신을 염탐하는 기이한 행동을 해도, 빌 포드는 나세르가 CEO로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