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엑설런트!
최준영ㆍ박영출ㆍ유회경ㆍ노윤정 지음 | 랜덤하우스중앙
1부 슈퍼 엑설런트의 힘!
포기하는 대신 정면돌파하라1966년 선경직물 임원 전체회의에서 최종건은 "나는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선경을 일으켰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고, 선경을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금은 제대로 된 기업을 일으켜 세울 때입니다. 이제 선경은 종합섬유기업으로 첫발을 내디디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동생 최종현이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66년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설립, 67년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 건설, 그리고 70년에는 선경기술센터를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임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술렁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임원들만이 아니었다. 원사 공장을 짓자는 최종현의 제안에 배포가 크기로 유명한 최종건조차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최종현은 망설이고 있던 형을 설득하고자 시도했더니, 최종건은 "야, 누가 원사 공장 지으면 좋은 걸 모르냐? 돈이 문제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최종현은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했고, 최종현은 "그럼 네가 계획을 짜 봐라. 뛰는 건 내가 해 볼게."라며 동의함으로써, 원사 공장 건설이 추진되었다.
해결책으로 최종현은 일본 거래회사를 통한 '현물 차관'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 선경에 원사를 공급하던 일본의 데이진이라는 회사에 300만 달러 상당의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말하자면 '외상'거래였다. 공급받은 원사로 상품을 만들어 3년 안에 모두 갚겠다고 약속했다. 데이진으로서도 3년 동안 안정적으로 거래처를 확보하는 셈이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나 누가 지급을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종현은 선경에 원사 공장 설비를 공급하기로 한 일본의 이토추를 끌어들였는데, 선경과의 거래가 성사되기를 원했던 이토추는 최종현의 보증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형제는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원사 공장 건설을 추진해, 1968년에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을 완공했고, 이듬해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도 완공했다. 두 공장의 건설로 한국의 원사 생산력은 하루 35.5톤에서 48톤으로 늘었고, 선경은 이 중 26퍼센트를 생산하는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이 사건은 SK그룹의 역사에서 최초의 도약으로 기록되고 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법"유공의 인수자로 선경그룹이 최종 확정되었음을 발표한다." 1980년 11월 28일, 박봉환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의 기자회견으로 재계는 술렁거렸다. 당시 유공은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국내 유일의 기업이었다. 따라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예외 없이 유공을 인수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고, 선경이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없었기에 정부 발표에 모든 사람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바로 특혜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심지어는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킨 형국'이라며, 과연 선경이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유공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정부는 선경을 선택한 이유로 "선경은 우리나라 종합상사로서는 처음으로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했고, 앞으로 원유 추가 확보의 잠재력이 있으며, 산유국과의 친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일반 국민에게는 석유 사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섬유 업체로 알려져 있던 선경이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최종현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기회를 기다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말에 원사 공장을 설립하여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선경은, 일찌감치 석유 사업에 눈을 돌렸다. 천연 섬유가 아닌 화학 섬유는 대부분 석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선경은 창업자인 최종건 회장 시절부터 '섬유에서 석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목표로 삼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선경에 처음으로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당시 일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 국내에서는 정유 시설을 확장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일본으로 건너가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인 최종현은 경상남도에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기계, 기술은 일본이 담당하고, 선경은 부지 마련과 경영을 맡기로 했다.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자금과 설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원유가 확보되어야 했다.
당시 최종현의 사업 파트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베드라위였다. 최종현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 공장을 짓는 일을 돕고, 베드라위는 선경이 정유공장을 설립할 경우 석유를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양측의 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석유파동으로 이어지면서 최종현은 정유공장 설립을 보류해야 했다.
그 뒤 최종현과 베드라위의 인연은 사우디아라비아 주요 인물들과의 만남으로 확대되었다. 베드라위는 외삼촌이자 왕비의 남동생인 카라마담에게 최종현을 소개했고, 카마라담은 왕실 특사인 족달을 최종현에게 보냈다. 또 이들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민'의 자말자와 부총재와 야마니 석유장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말자와는 그의 민간인 창구로 압둘라 박사를 소개했다. 압둘라 박사는 이후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고, 올 때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계 인사들을 서너 명씩 데려와 최종현에게 소개했으며, 최종현은 자말자와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동 지역에 지사를 설립했다.
사막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은 좀처럼 남을 믿지 않았지만, 일단 신뢰를 쌓으면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을 믿지 못하면 쓰지 않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 라는 최종현의 신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종현과 사우디아라비아 친구들의 우정은 두터워졌고, 이 우정은 제1차 석유파동과 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 위기 때 선경은 물론 국가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참고로 당시 유공 인수 경쟁에 참여했던 대기업들이 자산 규모와 현금 동원력만을 중시한 반면, 최종현은 오랜 기간 쌓아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해 원유 확보 능력을 직접 입증해 보였다. 또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를 조달하여, 오일머니 유치 능력까지 증명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경그룹에게 정유사업은 10여 년 전부터 준비해온 숙원사업이었고, 한편 기업이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최종현의 신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한평생을 사는 동안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왜 당신한테는 세 번은커녕 단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느냐는 불만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러나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끊임없이 준비하고 계획하는 자에게만 기회가 온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가 그냥 가버렸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준비된 새우에게는 고래를 삼킬 기회가 온다.
미래를 지배하는 자의 달력은 10년 더 빠르다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10년 앞을 내다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사업이 잘 된다고 하여 10년 후에도 여전히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앞으로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하면, 이미 먼저 시작한 사람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다. 이런 이유로 최종현은 늘 '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그것이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최종현에게는 뚜렷한 원칙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며,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은 사업 확장의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슈퍼 엑설런트 정신이다. 사실 이러한 원칙을 모두 충족하는 사업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최종현은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애쓰는 대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룹의 간부진은 물론 평소 가까이 지내던 교수나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자문을 구했다. 또 미국을 방문하면 세계적인 회계법인 딜로이트 컨설팅의 선경 자문팀을 만나 미래사업에 관한 조언을 구하곤 했다.
1984년, 최종현은 이러한 노력을 더욱 체계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해 미주 경영기획실(현 SK USA)을 설립했는데, 이들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는 미래사업 발굴, 정보기술(IT), 통신, 금융,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조사 활동을 벌이고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 당시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아들 최태원은 새롭게 등장한 이동통신사업에 큰 매력을 느끼고, 수시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미주 경영기획실에서도 선경그룹의 미래사업으로 이동통신사업이 적합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미주 경영기획실은 1988년 미국의 작은 이동통신사 '테네시 RSA'에 지분 투자를 했다. 투자 수익보다는 이동통신 경영을 학습한다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이처럼 치밀하게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하던 최종현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7월 정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최종현은 1991년 4월 선경텔레콤(이후 대한텔레콤으로 이름 변경)을 설립하고,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대비하여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최종현은 손길승 당시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에게 대한텔레콤 사장 자리를 맡기고 실질적인 운영은 목정래에게 일임했다. 대신 두 가지 주문을 했다. 입찰과정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과 해외 파트너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1992년 7월 체신부(현 정부통신부의 전신)의 1차 심사발표에서 대한텔레콤은 8,127점을 얻어 2, 3위 기업들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같은 해 8월 20일 2차 심사발표에서도 대한텔레콤은 다시 최고점수를 획득하여, 최종 허가대상 법인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반(反)선경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노후를 대비해 사돈인 최종현에게 사업권을 줬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최종현은 8월 21일 기자회견을 자청, 사업권 획득이 정당한 노력의 결실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론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당시 민자당 대표이던 김영삼이 여론에 편승하여 '선경 불가'를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김영삼과 독대한 끝에 최종현은 최종 결단을 내리고, 사업권을 따낸지 7일 만에,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겠다고 천명했다. 체신부도 다음달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이양한다는 발표를 했다.
한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 10개월이 지난 1993년 12월, 정부는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방식을 발표했다.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하되, 컨소시엄 구성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2개월의 시한을 두고 결정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한국통신(현KT)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 추진계획도 발표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종현은 난감해 했다. 결국 최종현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대신,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최종현의 결단으로 나머지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전경련은 이후 포철을 1대 주주, 코오롱을 2대 주주로 한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한 뒤 이를 체신부에 통보함으로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은 일단락되었다. 대신 선경그룹은 1994년 1월 24, 25일 이틀 동안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의 경쟁 입찰에 참여하여, 한국이동통신 주식 23퍼센트(127만 5,000주)를 계열사인 유공, 선경인더스트리, 흥국상사 등을 통해 시가를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 5,000원에 인수했다. 선경그룹의 미래사업에 대한 최종현의 꿈이 우여곡절 끝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돌파구다최종현은 누구보다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택한 성공 전략은 창조적인 노력을 통한 '독점'이었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연이어 국내 최초, 세계 최초의 기록을 수립해간 SK의 이동통신 사업에서 여실히 그 위력을 드러냈다. 즉 SK텔레콤의 성장은 어느 누구보다 앞선 전략 때문이었는데, 광고나 고객 세분화 정책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순간순간의 위기를 돌파했다. 이를 살펴보자.
1997년은 한국통신, LG, 한솔 등 개인휴대단말기(PCS)사업자가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같은 날 SK텔레콤은 기존의 '디지털 011'이라는 이동통신 브랜드를 '스피드 011'로 변경하고, 통화소통률과 품질 등 사용자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 마케팅을 펼쳤다. 그 결과 011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CDMA 상용화 3년 만에 SK텔레콤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는데, 시장점유율은 크게 증대되었지만 10, 20대의 젊은층 고객이 취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1999년 7월 SK텔레콤은 TTL브랜드를 출시하였다. TTL 브랜드 출시는 국내 이동통신업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이후 SK텔레콤 등 5개 업체들은 기존 장려금 지급 위주의 출혈 경쟁에서 벗어나 신상품 개발, 고객 서비스 중심의 창의적 마케팅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9년 이후 국내 이동통신 업체들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져, SK텔레콤은 이동통신업계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같은 800㎒대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는 신세기통신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SK텔레콤은 IMT-2000(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for the 2000 : 현재 각 국가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다양한 이동전화 시스템의 규칙을 통일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단말기로 다양한 영상, 신호 등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권을 획득하기 위해 주력했고, SK IMT는 비동기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더욱이 SK텔레콤은 2002년 1월 인천광역시에서 세계 최초로 동기식 IMT-2000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하나의 세계 최초 상용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편 국내 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SK텔레콤은 해외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해 1995년 10월 인도 델리에서 무선호출 사업을 시작했고, 이동통신 부문에서도 1996년 태국, 1998년 브라질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추진하는 등 90년대 중반부터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또 1999년 몽골에서 아날로그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중국에서는 2002년 7월 CDMA 이동통신업체 차이나유니콤과 무선 인터넷 관련 조인트 벤처기업 '유니에스케이(UNISK)'를 설립했다. 또 카자흐스탄과 이스라엘에는 '네이트' 무선 인터넷 플랫폼을 공급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LG전자 등과 함께 CDMA이동통신 업체 '에스텔레콤'을 설립, 가입자 16만 명을 모으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2005년 1월에는 미국의 인터넷접속업체(ISP)인 어스링크와 조인트벤처 'SK어스링크'를 설립해 미국 시장에 진출했는데, SK어스링크는 미국 현지 이동통신 업체의 망을 임대 사용하는 가상이동망서비스 방식으로 2005년 3분기부터 미국 전역에서 음성과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상기 내용 외에 1부에는 '1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면 시작하라', '신뢰는 무한한 성장엔진이다', '불가능은 충분히 시도하지 않은 자의 변명이다'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