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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가게

김용범·이기창 지음 | 흐름출판
1.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89년째 고객 하나에 옷도 하나, 종로양복점
- '옷은 희망의 날개다.' 종로양복점의 3대 주인 이경주씨의 철학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손님이 만족하지 않는 옷은 옷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의 뜻을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이경주씨는 선친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근우빌딩 2층 계단 입구에 'Since 1916'의 글자가 박힌 간판이 하나 붙어 있다. 그 빌딩 2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이 『종로양복점』이다. 단골손님이 아니고서는 찾기가 어려운 위치다.



할아버지 이두옹 옹이 종로양복점을 창업한 해는 1916년이었다. 일본 도쿄의 양복기술학교에서 유학을 한 뒤 그는 종로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차렸다. 이 옹은 일본양복점과 경쟁을 하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그 후 1928년에는 사업을 확장해 개성과 함흥에 지점까지 개설했다. 그 무렵 『종로양복점』의 규모는 직원 100여명을 둘 만큼 성장해 있었다.



"양복을 만들 때 재는 20가지 신체지수가 같은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개성이 다릅니다. 맞춤양복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체로 개성이 강합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리 좋은 기성복을 거저 주어도 입지 않습니다." 이경주씨는 기성복에서 개성을 찾는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씨는 유행을 좇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멀리하지도 않는다. 언제 입어도 무난하게 멋을 낼 수 있는, 호흡이 긴 옷을 손님에게 권한다.



맞춤양복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0년대만 해도 매달 200~300벌의 양복을 만들었지만 1990년대 들어 대기업의 기성복에 밀려 매출이 뚝 떨어졌다. 이에 맞서 젊은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언젠가 이씨는 남매의 의중을 떠보았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딸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망설이는 눈치다. 하지만 이경주씨는 자신 있게 말했다. "종로양복점은 4대째 대물림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2016년 창업 100주년을 맞게 될 겁니다."



2. 변하더라도 핵심만은 지킨다



옛 주막에서 토속 음식점으로 탈바꿈하다, 마방집 - 경기 하남시 천현동의『마방馬房집』은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었다고 해도 틀림없다. 하남시청 앞에서 지하차도를 지나 광주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80년 넘는 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서 있는 마방집이 있다. 마방집의 어른 원연희 할머니는 2002년 일흔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텅 빈자리를 원 할머니의 세 아들이 메우고 있다. 3대째 대물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물림의 과정에서 둘째 열종 씨의 일본체험은 형제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일본에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음식점이 흔하다는 사실에 가업계승의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마방집은 주막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한정식 역시 주막밥상이 발전한 것이다. 마방집은 마구간이 딸려 있던 주막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다.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우마차꾼은 물론이고 과거를 보러오던 선비들도 묵어가곤 했다. 원 할머니의 시부모가 마방집을 인수한 때는 1920년경이다. 1960~1970년대 근대화의 물결은 우마차꾼을 밀어내고 화물차 운전기사를 마방집의 주요고객으로 바꾸어 놓았다. 식단 변화는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마방집은 도로부지로 잡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헐려서 옮겨져야 할겁니다." 첫째 두종 씨의 말은 담담했다. 그러면서도 원형을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어감이 묻어 있다. 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도 마방집의 특징이다. 이 집에서 '효자 할아버지 가족'이라고 부르는 단골손님이 있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정겨워 그런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외국인의 입맛까지 잡는 56년 전통 불고기, 옥돌집 - 불고기는 갈비, 김치와 더불어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다. 성북구 길음동의 옥돌집은 반세기 넘게 불고기를 으뜸메뉴로 내놓고 있는 오래된 가게다. 1949년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창업 56주년이 되는 셈이다. "외삼촌이 처음 시작한 이래 서울식 불고기의 전통을 지켜왔다고 자부합니다. 값도 가능한 한 고객의 주머니 사정에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옥돌집 대표 김영덕 사장과 부인 왕영희 씨가 말하는 장수비결이다. 서울식 불고기의 전통 맛은 어떤 것일까. 육질이 무척 부드러운데다 독특한 양념장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이 집 불고기의 풍미다. 나이 든 고객일수록 "옥돌집 불고기는 여전히 맛이 있다."고 말한다.



창업자는 김 사장의 외삼촌인 고 신옥돌 옹이다. 농사를 짓던 신 옹은 부업을 찾다가 불고기집을 차렸다. 부부는 저울눈금을 개의치 않고 고기를 듬뿍 담아 내놓았다. 손님들은 주인부부의 인심과 푸짐한 양에 놀라고 불고기의 맛에 또 놀랐다. 부인이 음식 솜씨가 뛰어난 터라 너나 할 것 없이 신 옹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고객들은 발길을 재촉했다. 김 사장은 1990년 초 외사촌형에게 옥돌집을 물려받았다. 외사촌형이 간곡하게 당부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옥돌집이라는 상호를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되며, 이후로도 옥돌집의 명성을 지켜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라는 것이었다.



옥돌집 불고기 맛의 비밀은 양념장과 구워낸 고기를 찍어 먹는 소스에 있다. 양념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집과 차별화 된 점이 있다면 진간장에 꿀(또는 설탕), 다진 파와 마늘, 깨소금, 후추 등을 넣어 만든 보통 양념장에 7가지 한약재를 달인 약수를 추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진간장은 쇠고기 특유의 피비린내를 없애주기 때문에 담백한 맛을 낸다. 고기는 매일 새벽, 마장동의 단골거래처에서 가져온다.



옥돌집은 일본인에게 더 잘 알려진 식당이다. 일본의 인기 여배우이자 방송인인 구로다 후쿠미가 서울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책을 냈는데 여기에 옥돌집이 포함된 것이다. 이밖에도 옥돌집을 사랑하는 단골은 100세 할머니에서 국내스타까지 다양하다. 서울시에 재직했던 공무원 치고 옥돌집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말이 돌 정도이며, 고건 전 총리도 서울시장 시절 몇 번 들러 "옛날 맛이 변하지 않아 좋다. 정말 맛있게 먹고 간다."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왕년의 스타 신영균, 탤런트 전원주 씨도 단골이다.



우리 맛의 세계화에 앞장 선다, 우래옥 - 서울 중구 주교동 우래옥은 3대에 걸쳐 평양냉면을 고수하고 있는 업소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맛을 해외에까지 전하고 있다. 탐닉의 세계로 유혹하는 요소는 단연코 육수다. 이곳을 즐겨 찾는 단골들은 쇠고기만으로 우려낸 육수에선 특유의 담백한 풍미가 그대로 살아나고 면에서는 싱싱한 메밀 향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래옥의 육수는 순수한 고기국물이다. 한우의 엉덩이 살과 다리 안쪽 살을 네다섯 시간 푹 곤다. 따라서 냉면에 편육이 보통 네다섯 점 들어가 있으면 제대로 육수를 우려냈다고 할 수 있다. 메밀만으로는 면의 모양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국수를 만들 때 메밀가루에 결합재를 섞는다. 제일 좋은 결합재는 감자로 만든 녹말이다. "우래옥은 반칙을 안 합니다." 본점의 전무 김지억 씨는 영업방침을 그렇게 설명한다. 바로 창업자의 유훈이란다. 우래옥의 냉면 값은 호텔을 제외하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 최상의 재료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이 지긋한 단골들은 그래서 "값을 제일 먼저 올리는 집이 우래옥이야"라면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냉면은 살아 있다." 우래옥의 창업자 고 장원일 옹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평양에서 명월관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다 광복 직후 월남한 그는 1946년 현재의 자리에 우래옥을 창업했다. 그는 성공의 비결을 최상의 재료에서 찾았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냉면을 세계인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한국음식의 세계화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외아들 진건 씨에게 밝혔다. 교사의 길을 접은 그는 업계의 생리를 어느 정도 체득하고, 1967년 냉면과 불고기 그리고 갈비를 들고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로 진출했다. 우래옥의 진출은 대성공이었다.



자카르타의 진출로 가능성을 확인한 진건 씨는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1974년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뉴욕(77년), 워싱턴(81년), 시카고(96년)에 차례로 우래옥 분점이 들어섰다. 그는 할리우드의 고급주택가 베버리힐즈에도 점포를 냈다. 진건 씨는 1972년 부친이 타계한 뒤에도 해외진출에 전념하기 위해 본점운영을 부인에게 맡길 정도였다.



깊은 역사만큼 단골의 수도 적지 않다. 그리고 단골들은 하나같이 냉면에 도가 틀 정도로 냉면 매니아다. 소설가 최인호 씨도 그중 한 사람인데, 그는 면발을 가위로 자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리를 한 입 물고 동시에 육수를 마시면서 면을 씹어야 진짜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 이 집 육수에 인이 박힌 사람들은 식초는 물론 겨자도 안친다.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육수를 들이키면서 "바로 이 맛이야"라고 내뱉는다. 우래옥은 이미 '또 찾아오는 집'이라는 상호에 걸맞게 그 맛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냉면의 대표 브랜드가 되어 세계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



곰탕 하나에 깍두기 하나로 60년 사랑, 하동관 - "국물도 없다." 이런 농담을 하며 이 집을 찾는 단골도 적지 않다. 과장을 조금 보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끔히 비울 만큼 맛이 뛰어나다'는 역설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곰탕은 설렁탕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일품요리다.



곰탕의 조리법은 설렁탕에 비해 까다로우며, 손질하기도 어렵다. 우선 곱창은 질긴 막을 벗겨내고 양(소의 위)은 끓는 물에 튀기듯 삶아 검은 부분을 제거한다. 곤자소니(소 창자 끝의 기름기가 많은 부위)는 소금으로 잘 문질러 점액질을 없앤 다음 양지머리나 사태 등을 끓는 물에 넣고 푹 곤다. 여기서 맛을 가늠하는 요소는 불의 강약이다. 곰탕은 조리과정에 양념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곰탕 고유의 맛을 내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곰탕은 구수하고 담백한 국물이 맛의 생명인 만큼 한결 같은 맛을 내려면 그만한 관리가 필요하다.



하동관의 대표 장석철 씨는 손님을 가장 공정한 심판으로 여긴다. "손님의 입이 음식 맛을 판정하는 심판이지요. 맛이 달라지면 손님이 가장 먼저 알게 마련입니다." 그 역시 매일 오후 1시 반이면 곰탕을 점심으로 먹는다.



창업자 고용택 씨는 1939년 지금 하동관 자리에 문을 열었다. 김 씨와 교분이 두터웠던 장 사장의 선친은 1964년 하동관을 인수했다. 제법 맛 좋기로 소문이 오르내리던 무렵이었다. 그 명성을 확장한 주인공은 장 사장의 모친 홍창록 여사였다. 사실 하동관의 얼굴은 지배인 강복형 씨와 주방장 권혁녀 씨다. 강씨는 49년째 하동관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고 권 씨도 30년 넘게 주방을 지키고 있다. 하동관의 식단은 단 한 가지, 곰탕뿐이다. 찬도 달랑 깍두기 하나다. 주방에선 직경 1m가 넘는 가마솥 세 개에 담긴 진국이 손님을 기다리는데 가마솥 한 개당 150~200인분 정도의 곰탕이 나온다.

'60년 전통 한우만을 고집합니다.' 하동관의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표어다. 장 사장은 손으로만 만져만 보아도 한우의 암컷인지 아니면 수컷인지를 정확하게 감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맛에 이렇게 공을 들이다 보니 하동관 곰탕을 즐겨 들지 않은 역대 대통령은 없다. 특히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하동관의 곰탕을 좋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청와대 주인이 되기 전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종업원들에게 천 원짜리 새 돈을 봉사료로 주며 격려하곤 했다고 한다. 그밖에 60년대 한국인의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고 김기수 씨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 단골도 많다. 54년 단골도 있다.



하동관은 저녁장사를 하지 않는다. 매일 일정한 분량의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에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은 적은 없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보통 오후 4시 반이면 영업이 끝난다. 곰탕이 떨어져 낮 12시 반에 문을 닫은 날도 있다. 장 사장은 "큰 욕심을 냈다면 왜 저녁 장사를 않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은 조금만 이름이 나면 분점을 내는 게 유행인데 우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맛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4. 정신과 원칙을 남겨라



인삼뿌리마다 신용과 양심을 담아 판다, 송도삼업 - 고려 인삼의 명성을 드높인 주역은 개성상인, 이른바 송상이다. 송상은 개성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상인을 일컫는다. 개성상인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삼상이었다. 송상은 축적된 자본을 인삼재배와 가공업에 재투자했는데, 이에 따라 개성에서는 인삼재배와 가공업이 동시에 발달했다. 송도삼업은 이러한 송상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전 월남한 고 홍순호 옹은 1963년 신용과 자본을 바탕으로 '고려인삼진흥'을 창업했다. 그는 몸에 밴 근검절약과 사리에 밝은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여 일단 '틀림없는 사람이다'라는 판단이 들면 아낌없이 지원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인삼농사는 자식농사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인삼농사는 연작이 안 된다. 한번 수확한 밭은 최소한 10년 이상 지나야 지력地力이 회복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격적인 생산전략을 세우는 일은 꿈도 못 꾸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인삼시장의 40%를 한국산이 차지했지만, 2000년에는 채 5%도 안 될 정도로 하락했다. 홍콩 인삼시장의 경우에는 미국이나 중국산이 시장을 장악한 지 오래다. "삼업계는 현 상황을 최대의 위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인삼종주국의 명성이 흔들린 지는 오래됐고 사업의 장래성도 불투명합니다." 홍광표 사장의 한숨 깊은 토로다.



도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담아 판다, 박인당 - '돈은 빌려줘도 도장은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드물지만 옛날에는 친교가 두터운 집안끼리 도장을 바꿔 갖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서명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도장은 가장 확실한 증명과 신뢰의 수단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반세기 가까이 인장공예기능사의 길을 걷고 있는 박호영 씨는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인私印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신한다고 믿고 있다. "도장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인감제도가 존속하는 한 도장을 만드는 것은 물론 사용하는 데도 신중해야 합니다." 박 씨의 장인정신은 작업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손도장'만을 고집한다. 인격을 반영하는 기물인 도장을 컴퓨터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박 씨의 신념이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한 빌딩 지하 1층 4평 공간의 박인당, 여기서 그는 나이도 잊은 채 조각도와 씨름하고 있다. 비록 도장포에 불과하지만 상호에는 '도장의 명가'라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박 씨는 10대 후반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던 김두칠 옹의 문하에 들어 전통인장예술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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