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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IS WAR, 숨막히는 기업 경영 이야기

로버트 F. 하틀리 지음 | 아인앤컴퍼니
1 성공적인 창업과 성장사례 - 사무용품 전문매장 오피스맥스



마이클 퓨어는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퓨어는 사업 파트너로 로버트 허위츠를 선택했는데, 두 사람은 사무용품의 판매 및 유통구조에 많은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제조업체에서 물건을 받아 소비자에게 바로 판매하는 유통구조를 도입하기로 했다. 50명의 투자가들로부터 3백만 달러의 창업자금을 모았는데, 그들은 회사 경영권에 대해 간섭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지도 않았고, 벤처 캐피털리스트의 자금도 받지 않았다.



퓨어와 허위츠는 작은 창고에서 사업(오피스맥스)을 시작했다. 직원들을 뽑을 때 그들은 월급을 많이 주지 못하는 대신, 회사의 사정이 나아지면 꼭 그 결과를 공유하겠다고 약속했다. 창업 초기 가장 힘든 일은 제조업체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들이 잘 되면 제조업체들도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다녔다. 다행스럽게 클리블랜드에 있는 대형 은행을 설득한 덕택으로 - 대형 은행이 이제 막 탄생한 회사에게 크레딧 라인을 부여해주었다는 사실로 인해 - 제조업체들에게 오피스맥스가 가능성이 있는 회사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물론 급성장을 할 것이라는 오피스맥스 측의 약속은 지켜졌고, 5년이 지난 후 제조업체들은 오피스맥스를 최고의 고객으로 대접하게 되었다.

퓨어가 현금을 창출하기 위해 문을 연 제1호 매장은 대성공이었다. 고객들은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오피스맥스의 매장 개념을 좋아했다. 제1호점 개점 후 90일이 지나 제2호점, 제3호점이 클리블랜드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오피스맥스는 회사경비를 제하고도 손익분기점에 도달했다.



한편 퓨어는 창업 초기 일만 했다. 매장에서 고객들의 구매행위를 소리 없이 관찰하기도 하고, 고객들에게 어떤 점에서 오피스맥스가 마음에 드는지, 또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물었다. 또 그는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그냥 나가는 고객들을 주차장까지 쫓아가 왜 그냥 나가는지를 묻기까지 했다.



회사가 조금씩 수익을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 퓨어는 회계에 문제가 있어 잘못하면 파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연구한 퓨어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추가 투자금을 모집하게 된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회사가 성공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자금은 쉽게 모을 수 있었고, 초기 주가보다 주당 75센트 더 높게 주식을 판매할 수 있었다.



창업하고 2년이 지난 1990년 초, 오피스맥스의 매장 수는 17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몽고메리 워드가 오피스맥스와 오피스월드(Office World)의 합병을 제안한다. 합병 협상에서 오피스맥스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오피스월드를 인수하게 되었다. 1990년 여름, 오피스맥스는 매장 30개에 2,500만 달러의 유동성을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 가도를 달리던 오피스맥스에게 큰 위협이 다가왔다. 그것은 케이마트가 오피스맥스에게 도전장을 던지며 '오피스 스퀘어'라는 사무용품 슈퍼체인을 개점한다는 소식이었다. 각종 방어 전략을 구사하던 퓨어는 케이마트 측과 협상을 시도했고, 결국 케이마트 경영진이 퓨어의 제안을 수락하여 1990년 11월, 케이마트와 오피스맥스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는데, 이 협정의 내용은 케이마트 측이 4,000만 달러를 투자하되 그 반대급부로 주식의 22%를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오피스 스퀘어는 오피스맥스의 차지가 되었고, 케이마트는 오피스맥스 이사회에서 자리 하나를 얻었다.



케이마트의 협조와 지원을 등에 업고 오피스맥스의 확장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처음 정했던 사업목표에 도달하자 퓨어는 이제 투자가들과 성과를 나누어 가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창업 투자가들을 위해서 퓨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주식을 공개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케이마트와 새로운 협상을 하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오피스맥스는 두 번째 카드인 케이마트와의 협상을 선택했고, 케이마트는 창업 투자가들이 보유한 모든 주식과 퓨어와 허위츠가 보유한 주식의 50%를 구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7월말에 이르러 오피스맥스는 150개 시장에 405개의 매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피스맥스의 주요 고객은 직원 1명~100명 사이의 중소기업들과 홈오피스 고객, 그리고 개인 고객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초ㆍ중ㆍ고등학교나 대학교도 주요 타깃이었다. 또한 오피스맥스는 기존의 오피스맥스 매장 옆에 8,000~1만 평방미터 규모의 사무실 전용 가구용품 매장인 퍼니처맥스(FurnitureMax) 매장 20개를 열었다. 또 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카피맥스(CopyMax) 매장을 10개 정도 시험 삼아 운영했다.

한편 오피스맥스가 이렇게 급성장을 하고 있는 동안, 케이마트는 월마트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되어 자금이 필요했다. 30억 달러의 자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케이마트 측은 오피스맥스 주식 25%를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오피스맥스는 이 거래로 인해 1억 1,000만 달러의 이득을 얻었다.



그런데 1998년 9월이 되자 오피스맥스의 주가가 주당 10달러 선 미만으로 갑자기 추락했다. 이어 그 해 겨울, 주식 전문가들은 일제히 오피스맥스의 경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피스맥스의 경영실적이 주요 경쟁업체인 오피스 데포나 스테이플스(Staples)에 비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2000년에는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다. 오피스맥스는 50개 매장을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회사 주가는 2달러 선으로 추락해 버렸다.



오피스맥스의 초기 성공의 공은 대부분 창업자 마이클 퓨어의 노력으로 돌려야 한다. 그는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의 자금과 무리한 대출을 통한 사업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극도로 경비를 절약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보상을 직원들과 공급업체에게 약속함으로써 퓨어는 힘든 시기를 잘 넘겼다. 그 외에도 투자가, 직원들, 그리고 공급업체들 모두에게 신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하는 기업들에게는 동종기업을 좋은 조건에 인수할 기회가 어김없이 주어진다. 오피스맥스의 또 다른 성공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절제와 검약정신은 1990년대 후반에 추진된 급격한 팽창전략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러한 부적절한 전략 외에도,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경기 전반에 걸쳐 침체기가 도래함에 따라 오피스맥스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사례의 시사점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성공적인 경영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비록 환상일지라도 성장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대고객 관계에 있어서는 다른 기업보다 항상 앞서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날씬하고 효율적인' 경영의 힘은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의 경우, 급성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면 바로 지출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진다. 오피스맥스의 경우, 초기에는 이런 유혹을 잘 견뎌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매장을 개점하겠다는 팽창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넷째, 헌신적인 직원들은 기업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기업이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 그리고 팀워크를 중시하는 경영정책이 직원들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불행하게도 오피스맥스의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초창기의 장점이었던 이런 분위기가 퇴색하고 말았다. 다섯째, 시장 포화상태를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고가전략과 절제된 성장정책의 성공사례 - 맥주제조업체 보스턴 비어



짐 카치는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고,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양조업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루이스카치가 세인트루이스에 양조시설을 마련해놓고 진한 맥주를 제조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짐 카치는 새롭게 양조공장을 건설하기보다는 기존의 양조공장인 피츠버그 브루잉 컴퍼니(Pittsburgh Brewing Company)의 시설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창업 자금 문제를 해결했다. 짐 카치는 새롭게 제조할 맥주 브랜드를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 -전쟁 영웅이었으며 양조업에 종사하기도 했던 사람- 로 정했다. 또 짐 카치가 창업 초기에 결정해야 할 중요 문제는 판매가격이었는데,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수익을 내기 위해, 맥주 한 상자당 상당히 높은 가격인 20달러로 책정했다.

짐 카치는 회사의 유일한 세일즈맨이 되어 가격은 비싸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신생 맥주를 소매점과 일반 소비자들에게 알리고 다녔다. 또 그는 이 신생 맥주를 광고하기 위해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퍼부었는데, 광고는 수입 맥주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소매점을 끈질기게 찾아다닌 그의 노력과 수입 반대 광고 덕분에, <뉴스워크>나 <유에스에이 투데이> 같은 언론사가 전국적으로 이 국산 맥주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바텐더들과 소비자들이 사무엘 아담스를 마셔보는 시도를 했고, 한번 마셔본 후에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맥주를 찾았다.

짐 카치가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유통업체들을 찾는 일이었다. 신생기업이 이 벽을 뚫고 들어가는 일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짐 카치는 차례차례 한 지역씩 배달구역을 확대해나가 보스턴에서 워싱턴 D.C., 뉴욕, 시카고,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유통망을 확대해갔다. 이렇게 세를 확장하는 와중에도 행여나 품질이 저하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1994년에는 대리점이 전국적으로 70군데로 늘어났고, 보스턴 비어는 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맥주제조업체가 되었으며, 소형 제조업체 중에서는 가장 큰 업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맥주산업에도 변화가 왔다. 기존의 대형 맥주제조업체들이 자신의 시장점유율이 하락하자, 가격할인 경쟁에 나섰고, 또 한편으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맥주의 개발에 나서 기존의 평범한 브랜드와는 차별되는 특별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게 되었다. 대형 업체들의 이러한 변신은 짐 카치에게 큰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한편 1995년에 보스턴 비어는 주식 530만 주에 대한 주식공개상장(IPO)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99만 주는 사무엘 아담스 여섯 개 들이 팩이나 포장 맥주를 구입할 때 받을 수 있는 쿠폰을 가져오는 고객들에게 주식을 구입할 수 있는 청약권을 주는 방식으로 배분되었다. 이 주식 청약권은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 11월 20일에 주식이 상장되었을 때, 높은 수요로 인해서 주가는 주당 20달러 선으로 상승해 있었다. 1998년, 보스턴 비어는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맥주제조업체가 되었고, 독립 맥주제조업체로는 미국에서 가장 큰 업체가 되었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 보스턴 비어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 앞서 설명했듯이 처음 주식을 공모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주당 30달러에 팔렸는데, 이 주가는 금방 떨어지기 시작하여 1998년 말경에는 겨우 8달러에 거래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상황이 어려워지자 카치는 생산하는 맥주의 종류를 줄이고 가장 잘 팔리는 라거 맥주와 4계절용 맥주만을 생산하고 있다. 2001년 중반 현재 이 회사의 주가는 8달러에서 10달러로 상승하기는 했지만, 처음 IPO때 큰 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신생기업이 한창 잘 나갈 때는 그 성장 흐름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성장에 제동이 걸리는 일이 많은데, 그 원인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진출에의 용이함 때문에 언제든 다수의 경쟁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일반 맥주가 아닌 특별한 맥주시장이 매우 견고해 보였고, 수요도 계속 증가세를 보일 것 같았는데, 결국은 수요의 한계 때문에 일반 맥주시장의 흐름을 뒤엎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이 사례의 시사점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고가전략을 택할 것인지 저가전략을 택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가전략의 경우 경쟁사가 신속하게 가격을 인하하며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매우 취약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고가전략의 경우, 위험부담이 커서 따라오는 경쟁업체가 많지 않다. 대신 고가전략의 경우 찾는 고객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둘째,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무리한 확장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정 시장이 붐을 이루면 기업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생산 능력이나 장비를 늘리게 되는데, 후에 수요가 감소하면 위기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새로운 벤처기업의 경우, 가능한 한 손익분기점을 낮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스턴 비어의 경우 공장을 건설하지 않고 타 기업의 양조시설을 임대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손익분기점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넷째,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품질이 형편없다고 한번 낙인 찍히면 그 불명예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다.



3 위기관리의 귀감 - 존슨 앤드 존슨 타이레놀 독극물 투여 사건



1982년 9월 말 아담 재너스는 가슴에 통증을 느껴 초강력 타이레놀 캡슐 한 병을 구입하여, 그 중 캡슐 하나를 먹었는데, 그 날 오후에 사망했다. 이어 그 주 주말에 시카고 지역에 거주하는 6명의 주민이 유사한 이유로 사망했다. 사망의 원인은 청산가리였다. 의학 검식반원들은 사망자들의 집에서 찾아 낸 타이레놀 캡슐 10알에서, 누군가가 캡슐의 반쪽인 빨간색 부분을 잘라내어 그 안에 든 흰색 타이레놀 가루약을 빼내고, 대신 아몬드 냄새가 나는 회색 청산가리를 집어넣은 것을 발견했다.



존슨 앤 존슨은 문제의 타이레놀 캡슐 병들을 모두 리콜했으며, 소비자들에게 문제의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질 때까지는 절대로 초강력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미국식품의약청(FDA)은 생산과정의 오류가 아니라, 누군가가 가게에서 타이레놀 캡슐병을 구입한 후 거기에 청산가리를 투여하여 다시 그 병을 매장에 갖다놓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으로 존슨 앤드 존슨은 누명을 벗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간판상품에 독극물이 투여되고 이로 인해 사망자가 여러 명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 회사에 치명타를 주었다. 존슨 앤드 존슨은 회사 전체 차원에서 위기관리 경영체제를 강화하고, 피해로부터 신속한 회복을 모색하는 새로운 경영대책 마련에 나섰다. 존슨 앤드 존슨은 3단계 -1단계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2단계는 피해액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히 평가하며, 3단계는 타이레놀을 다시 시장으로 돌려보낸다- 에 걸친 위기타개 및 회복작전을 실시했다. 이런 작전 실행으로 모든 타이레놀 캡슐은 리콜 처리되었는데, 금전상으로 존슨 앤드 존슨은 약 1억 달러가 넘는 손해를 보았다.



이러한 금전적 피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의 손상이었다. 존슨 앤드 존슨은 어떻게든 타이레놀이라는 브랜드명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정기적으로 타이레놀을 구입ㆍ복용하는 소비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신뢰를 회복한 다음, 일반 소비자들에게로 신뢰의 폭을 넓혀가는 방향으로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존슨 앤드 존슨은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내용의 TV 광고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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