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홍하상 지음 | 국일미디어
프롤로그 - 불황의 시대, 개성상인의 지혜를 배워라개성상인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한반도의 상업을 주름잡았던 상인 집단이었다. 우수한 상술을 펼치며, 절약과 절제, 근면과 성실, 신용, 협동정신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의 최고 추구 등 오늘날까지 상업의 원칙이 될 만한 상도와 상철학을 남겼다. 하지만 역사의 질곡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 갔다. 그들의 소멸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니스상인, 일본의 오사카상인에 견줄 만한 우리들만의 전통적 상인상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개성상인이라는 집단은 사라졌지만 오늘날 많은 개성상인들의 후예들이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시스템이 점차 고도화됨에 따라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세계의 경제 시스템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곧 미국, 일본, 유럽의 불황이 우리의 불황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 세계는 거대한 불황의 장막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최근 한국의 경제가 계속해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방황을 잃고, 자신감도 잃어가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개성상인의 정신은 우리들에게 어떤 길이 진정 올바른 것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지침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법칙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Part 1. 한국의 대표적인 개성상인
야전침대에서 꿈꾼 침대회사 - 에이스침대의 안유수 회장과 두 아들6·25전쟁 당시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 '에이스 침대'라는 연 매출 2,000억 원의 국내 굴지의 침대회사 회장이 된 안유수 회장. 6·25 당시 남하하여 미군부대의 잡역부가 된 그는 밤이면 미군이 준 야전침대에서 잠드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야전침대에서 미래의 꿈을 키워나갔다.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내가 이 다음에 크면 따뜻한 매트리스를 깔고 잘 수 있는 침대를 만들리라.' 이것이 바로 오늘날 침대 업계의 최고봉인 에이스침대를 낳게 한 계기였다. 전쟁이 끝난 후 야채 행상을 하는 와중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부산 동아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방송 기자재를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3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가구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그의 눈에 가구점 안의 침대가 들어왔고, 문득 전쟁 통에 자신이 깔고 자던 미국의 야전침대가 떠올랐다. 이후 그는 침대 사업에 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고, 10년 후 1963년 오늘날의 에이스침대를 설립한다.
안유수 회장은 침대를 생산할 초기부터 스프링이나 내부 충전물을 최고급으로만 사용했다. 또한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 1980년에는 침대 제조 기술을 아랍에미리트 연방에 전수하기도 했다. 이어 1987년에는 국내 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1등급을 받았으며, 1994년에는 ISO9001을 세계 최초로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탈리아 및 미국의 유명한 침대 업체로부터 침대 제조에 관한 노하우를 배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오늘날 에이스침대는 외국 업체로부터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을 창조, 보유하게 되었고 홀로 설 수 있었다.
설립된 지 41년이 된 에이스침대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약 400명의 직원이 1,033억 원의 매출에 101억 원의 순익(2002년)을 올렸다. 매출 규모로만 보면 전 세계 침대 업체 중 7∼8위권에 속하는 규모이다. 그리고 2003년 7월 1일에는 아트레 사를 인수 합병하여 연 매출 1,400억 원대의 회사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에이스침대의 세계화 주도 선두에는 안유수 회장의 장남 안성호 대표가 있다. 현재 에이스침대는 안 대표가 주도하는 국제화의 기치 아래 일본과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화 마인드를 구체화하기 위한 제품의 디자인이나 색상 변화, 매장의 인테리어 교체와 같은 이미지 쇄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것은 바로 장인정신이다. 사실 에이스침대 발전의 핵심은 장인정신과 개성상인정신이라는 두 축이다. 그것은 에이스침대가 상업이며, 동시에 가구업이기 때문이다. 고래로부터 가구업은 장인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업종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장인정신은 안유수 회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유수 회장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안성호와 차남 안정호가 그들이다. 장남인 안성호가 가업인 에이스침대를 물려받았고, 차남인 안정호는 시몬스침대를 차려서 나갔다. 현재 에이스침대는 업계 1위이고, 시몬스침대는 업계 2위이다. 안성호, 안정호 두 형제를 두고 침대 업계에서는 '형제 바람'이라고 했었다. 이러한 형제 바람의 이면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바로 안유수 회장이 물려준 장인정신이다. 하지만 장인정신이 투철하다고 해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안유수 회장이 물려준 두 번째 정신적 자산, 즉 개성상인정신이 있다.
두 형제의 무차입 경영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무차입 경영이란 쉽게 말해 남의 돈으로 사업을 이끌지 않는 것으로, 개성상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 특성이다. 개성상인들은 예로부터 아무리 사업적 확신이 강하더라도 남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할 상황이면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이러한 마인드는 사업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투자의 흐름에도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그러한 비판은 사그라들었다. 무차입 경영을 고집해 온 개성상인의 후예들 대부분이 IMF 시절에 더 사세를 확장하는가 하면 흑자를 냈기 때문이다. 안성호 대표와 안정호 사장도 이런 무차입 경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장인정신이 투철하면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이다. 즉 안씨 삼부자의 침대업에 있어서의 성공은 장인정신을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키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이스침대의 안성호 대표가 추구하는 '최고 품질화', 즉 품질경영 중시라는 말에는 장인정신과 개성인들 특유의 상인정신이 접목되어 있다.
3:3:3:1의 원칙으로 불황을 이긴다 - 신도리코의 우상기 회장남한의 많은 개성상인들 중에서도 신도리코의 우상기 회장은 대표적인 개성상인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그의 경영방식이 철저히 개성상인의 정신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1971년 태어난 그는 1960년 불혹을 넘긴 나이에 평생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신도리코의 명칭은 신도교역이었는데, 리코 사로부터 들여온 복사기를 판매하는 무역상에 가까웠다. '디아조'라는 이 복사기는 감광지 위에 원고를 얹어 수은등이 들어 있는 실린더 사이를 하나하나 투광시키는 방식이어서 간단한 서류만 복사할 수 있었고, 원고 뒷면이 백지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복사기마저도 국내 기술로 개발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리코 사의 복사기를 들여와 판매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상기 회장의 주도로 1964년 국내 최초로 복사기가 만들어졌다.
복사기는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나갔고, 복사기 사업은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그해 12월 리코 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했고, 이때부터 신도리코라는 회사명을 사용하였다. 물론 리코 사와 합작을 하긴 했지만 1964년과 1969년의 복사기 개발에서도 드러나듯이 국내 기술화에 대한 우 회장의 열정은 대단해서 당시 기술 연구소에 전체 직원의 20%를 둘 정도였다. 이러한 열정 덕분에 전자계산기, 보통 용지식 복사기, 팩시밀리를 국내 최초로 개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우 회장을 통해 개성상인 특유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신도리코는 창업 이래 40여 년 동안 한 번의 적자도 없었고, 최근에는 복사기 기술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일본에 2억 5,000만 달러어치의 복사기 수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오늘날 신도리코의 성공 요인은 아니다.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바로 '짠돌이 경영'이다.
예로부터 개성상인들은 짠돌이 경영으로 유명하다. 허튼 곳에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남의 돈을 빌려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상기 회장은 이 짠돌이 경영의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의 일이다. 당시 복사기 유통은 지게꾼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경비를 아끼기 위해 우상기 회장도 직접 지게를 짊어지고 복사기를 실어 날랐고 복사기를 짊어지고 다니며 판촉을 하기도 했다. 그의 짠돌이 경영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우 회장의 장남인 우석형 신도리코 사장 역시 많은 부분에서 무차입 경영만은 그대로 유지해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2000년 들어 많은 기업들이 벤처사업에 뛰어들 때에도 신도리코만은 묵묵히 종합사무기기 업체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벤처사업을 하려면 남의 돈을 빌려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근검 절약과는 상반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짠돌이 경영은 사내 현금 보유액이 2,500억 원대가 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모든 이익을 배분한 후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보해두는 사내 현금 보유액을 2,500억 원대의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돈의 투자가 '못 먹어도 고!'라는 식으로 행해지고 있는 세태에 비춰볼 때 분명 짠돌이 중의 짠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 짠돌이 경영에도 예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신도리코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에 대한 투자이다. 이것은 우상기 회장이 국가, 회사,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삼애정신'을 경영철학으로 삼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삼애를 실천하기 위해 우상기 회장은 평소에 세금을 많이 냈고, 회사의 이익은 재투자하는 데 30%, 주주들에게 30%, 종업원에게 30%, 나머지 10%는 공익사업에 써야 한다는 '3:3:3:1 원칙'을 지켰다. 우석형 사장도 지금까지 이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주주들에 대한 배당률이 40% 대로 일정 폭을 유지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 신도리코는 한국 개성상인 2세인 우석형 사장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디지털 네트워크 중심 업체로 도약하고 있다. 복사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벗어나 디지털 네트워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력 투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 회장이 남긴 창업정신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신도리코의 정신은 그 모델이 개성상인에 있다. 신도리코의 짠돌이 경영이라는 핵심 정신이 바로 개성상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매달 애국가를 부르는 기업 - 오뚜기식품의 함태호 회장매달 1일, 오뚜기식품 본사 직원 100여 명은 서울 대치동 본사 강당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는 일명 애국조회를 갖는다. 오뚜기식품의 애국조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 오뚜기가 거대한 다국적기업에 맞서 국내 소스 시장을 지켜낸 자부심을 확인하는 자리이자, 앞으로도 토종 브랜드로서 외국의 자본에서 지켜내자는 결의가 담긴 자리인 것이다.
함태호 회장처럼 개성상인들에게 '애국애족주의'는 일종의 전통적 가치이다. 개성상인들에게 애국애족주의가 전통적인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일제 식민지 하에서부터였다. 조선의 전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취한 조치 중 조선회사령은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회사 설립 허가에 관한 법령으로, 조선에서 회사를 세울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과 사업의 정지와 금지, 그리고 더 나아가 회사의 해산과 폐쇄까지도 총독부가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법은 한국 내의 모든 산업시설을 근대화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 또한 허가과정에서 실제 총독 정치에 대한 충성도, 재력과 신용도 등을 따지고 헌병과 경찰에 의한 간섭과 탄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본인과 친일파만이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장정책과 시장행정을 재편하여 상행위 자체를 관리, 감독하려는 의도로 제정된 시장규칙도 있었다.
일제는 개성상인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했다. 개성상인들의 기반을 흔들어놓기 위한 개성인삼의 자유 판매 금지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이 개항 후 외세의 자본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개성상인들은 그 정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는다. 개성에 근대적 회사 조직을 갖춘 기업이 설립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인데, 여타의 신흥도시에 비하면 십수 년이나 늦어진 시기였다. 특히 개성상인들의 민첩함과 과감함을 고려해 봤을 때 이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의 개성상인들에 대한 박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성상인들은 특유의 배타성과 보수성으로 더욱 굳건하게 단결한다. 그러나 이 단결은 개성상인들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제에 대항하는 토착 민족자본으로서의 애국애족주의의 발현이었다. 그랬기에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한 보부상단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군자금을 운송하는 역할을 떠맡기도 했던 것이다. 함태호 회장은 이러한 선대들의 정신을 오늘날에 부활시킨 민족주의형 개성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그들의 대의명분으로 삼아 다른 유형의 개성상인들보다 높은 도덕심을 지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성상인들이 비정치적이고 비권력 지향적인데 반해 국가와 민족의 거대한 사업에 협조적이고, 공익사업적인 성격도 강하다.
오뚜기식품은 1969년 풍림상사로부터 출발한 이래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특히 1980년대 오뚜기식품(주)로 상호를 변경한 이후에는 외국 자본과 국내 식품 시장을 놓고 본격적으로 경쟁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국내 식품 시장의 80%를 석권하고 있다. 그 비결은 함태호 회장의 신념, 즉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외국 브랜드 제품을 먹일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오뚜기식품은 다른 개성상인의 기업들처럼 세계화에 나서 세계 각지에 공장을 짓고, 수출망도 확대하고 있는데, 그 근원에는 항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함태호 회장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건강을 팔려면 나부터 건강하라 - 한국야쿠르트의 이은선 사장한국야쿠르트의 이은선 사장은 평생 동안 아침 5시에 기상하고 밤 10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 시간 엄수, 단순한 삶을 통해 건강을 유지해왔다. 그의 생활 속에 담긴 이 원칙들은 오늘날 그가 근면과 성실의 개성상인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근원이 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생활 패턴은 오랜 노력 끝에 얻은 것이다. 실제로 이은선 사장이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습관화하게 된 것은 군 시절의 일과가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그때의 습관을 사회생활에서도 지속하여 일정 시간에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체질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규칙적인 생활의 정점에는 건강이 있다. 즉 규칙적이고 단순한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 생활은 곧 건강으로 연결되며, 그 건강이 근면과 성실의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경제신문」의 기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파는 회사 사장인데 저부터 건강해야죠. 저는 건강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는 국민건강식품으로 자리잡은 유산균 발효유 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맨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이 건강이라는 생각으로 항상 건강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상인정신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이은선 회장에게 개성상인 특유의 창의성이 발휘된 것으로 '방문 판매제도'가 있다. 방문판매제도는 태평양화학의 서성환 회장이 화장품 유통 업계에 도입하여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것으로 잘 알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