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혁명, 미션임파서블을 달성하라
카타야마 오사무 지음 | 제우스
1. 나카무라 쿠니오는 어떻게 개혁자가 될 수 있었나?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과열 양상을 띠고 있던 경기를 안정시키기 위한 시중 자금 억제 정책의 결과로 파생된 경기하락이 있었다. 이로 인해 마쓰시타도 1964년에는 수익이 감소했고, 계열판매대리점들의 경영도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위기 타개를 위해 아타미에서 개최된 '전국 판매대리점 사장 간담회'에서,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직접 사과를 하고 영업 회복을 위해 근본적 개혁의 시행을 약속했다. 그 후 고노스케는 영업본부장 대행으로 영업 현장에 돌아와, 지역판매제도, 사업부 직판제도, 새로운 할부판매제도 등을 점차적으로 도입하여 판매망 개혁을 실행한 결과, 영업성적은 1년 반 만에 회복으로 돌아서며, 계열 판매대리점들의 적자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나카무라 쿠니오는 '오너 사장이 경영하는 소규모 판매대리점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유통부문의 효율이 좋지 않고, 고비용 체제가 고착되어 가고 있으며, 이를 바꾸기 위해선 판매대리점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보고서로 정리하여 가전영업 본부장이었던 야마자키 다카시에게 건의하였다. 이후 승락을 받아낸 나카무라는 곧 판매대리점의 통합에 들어갔다. 한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판매대리점 사장들은 나카무라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일부 말썽은 재판으로 발전했고, 재판소의 화해권고를 통해 진정되었다.
또 나카무라는 큰 적자를 내는 하나의 통합 판매대리점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그 회사의 사장으로 발령받았다. 나카무라는 신속하게 경영혁신을 시행했다. 구체적으로는 판매점과 하나가 되어 실수요 증가를 위한 현장영업에 임했고, 200명 이상의 정리해고 - 이 일은 노조가 구성되는 결과로 이어짐 -를 단행했다. 이런 대담한 개혁 방법에 대해, 통합 전 오너 사장이었다가 현재는 임원으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여, 마쓰시타 사내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이 일로 당시 사장으로 있던 야마시타 토시히코가 진노하여 책임 소재 문제가 급부상되었다.
결국 이 일은 중부권 가전총괄부장이던 이치카와 카즈오와 나카무라 두 사람이 '사표를 내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황한 야마자키와 사쿠마 쇼지(경영기획실장)가 사장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다만 소동을 일으킨 것에 대해 나카무라가 사장에게 사과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되었다.
이 일 이후, 나카무라의 앞날을 염려한 이치카와 카즈오는 어느 날 식사를 하며 나카무라에게 한 권의 책 - 소설 『우에스기 요잔』- 을 건넸다. 우에스기 요잔은 에도시대 후기에 재정파탄이 일어난 요네자와 번(藩)의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성공 요인은 '사랑'이었다. 이치카와는 자칫 독선가가 될지도 모르는 나카무라에게 이 책으로 충고를 대신한 것이다. 이후 나카무라는 결국 그 판매대리점을 흑자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 뒤 나카무라는 미국 마쓰시타 전기 파나소닉의 부사장과 사장, 영국 마쓰시타 전기 사장직을 역임하고, 다시 미주 본부장, 회장직을 맡았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카무라는 최신 경영전략이나 경영기법 도입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개혁자로서의 '자질'에다가 미국에서의 경험과 이론을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카무라는 1997년 마쓰시타 전기 AV상품 등의 사업부를 관장하는 사내의 분사조직인 AVC의 사장으로 일본에 돌아왔는데, AVC 산하에 있는 TV 사업의 상태를 알게 되면서 매우 놀랐다. 마쓰시타의 컬러TV 시장점유율은 최고의 위치를 유지해왔지만, 93년 21%를 마지막으로, 94년에 16.3%, 95년에 16.3%, 96년에 16.5%, 97년에 16.8%의 수준으로 1위 자리를 지키고는 있다 하더라도, 시장점유율은 저조하여 끝내 20%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더욱 나카무라를 놀라게 한 것은 숙적 소니의 추격이었다.
소니는 세계시장에서는 1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정작 국내시장에서는 만년 4위라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96년 말에 평면브라운관의 평면TV 제1호를 발매하고, 97년 6월에는 '베가'라는 애칭을 달아 시리즈로 발매했다. 이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단번에 2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베가'는 완전평면 화면이기 때문에 주변 사물의 반사율이 적고, 화면의 구석까지 왜곡 없는 영상재현이 가능했다. 한편 마쓰시타는 '내추럴 평면'이라고 하는 네이밍으로 브라운관 자체에 곡면은 있지만, 화면은 평면처럼 보이는 TV, 즉 평면에 가까운 브라운관을 채용한 대화면TV '미라이' 시리즈를 판매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마쓰시타의 내추럴 평면이라는 표현을 - 소니의 단순한 특징과 비교하여 -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판매량에서도 확실한 차이가 났다. 하지만 마쓰시타의 기술자들은 화면에 곡면은 있지만, 내추럴 평면이 '베가'보다 향상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위기감을 느낀 나카무라는 사장인 모리시타 요이치에게 회사 전체를 동원하여 급히 평면TV를 제작해야 하고, 소니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디지털 TV를 개발하여 한 번에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곧바로 모리시타를 리더로 한 평면TV프로젝트팀이 구성되었고,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난, 98년 9월 마쓰시타는 평면TV 'T(타우)'를 발표했다. 그 결과 시장점유율은 전년의 16.8%에서 18.2%로 점유율을 높여갔다.
2. "초(超)제조업"으로의 전환우에키 노리오가 키쿠수이 공장 - 자기헤드 분야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음 - 에 부임한 것은 91년이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기헤드에서 박막헤드로 모델 체인지가 진행되자 자기헤드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어 사업은 순식간에 큰 적자로 돌아섰고, 95년에는 생산을 중단했다. 우에키는 인원정리라는 힘든 일을 맡아줄 만한 용기 있는 리더를 찾고 있었는데, 다카기 이사오가 선택되었다.
자기헤드를 대신할 상품 카테고리를 개발해내는 것이 키쿠수이 공장의 당면과제였는데, 그것의 하나가 카드리더 사업이었다. 결국 자기헤드 라인에서 일하던 200명의 사원이 카드리더 부서로 옮겼다. 다카기는 카드리더 제조팀의 주임이 되었다. 사업부 벽에는 당시 사업부장이었던 다카야마 구니미츠가 쓴 '도전, 스피드, 저비용, 전원경영'이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 다카야마는 스스로 솔선하여 생산라인에 들어가 스태프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전원경영"이라는 말을 실행했다. 카드리더 사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체제의 변화도 꾀해야 하지만, 상품력과 가격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선두에 선 것은 가와노 마사타가 전무였다.
그 당시 인쇄와 소거 기능을 가지고 있는 카드리더의 가격은 약 10만 엔이었다. 그것을 반값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라고 가와노는 기술담당인 하타에게 압력을 넣었다. 고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삽입한 카드가 바로 나오지 않을 때이다. 그런 문제에 착안한 하타는 오픈구조의 카드리더기 개발을 제안했다. 생각대로 오픈 구조의 카드리더는 호평을 받았고, 매출도 증가했다. 하지만 흑자를 달성하기에는 부족했다. 하타는 업무 영역을 세일즈 엔지니어로까지 넓혀 고객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고, 고객의 의견을 제품개발에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의 공장에는 25m의 벨트 컨베이어 라인이 두 개가 설치되어 있어, 한 라인에 15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객별로 다른 조건의 사양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번번이 벨트 컨베이어를 바꾸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마다 현장 종업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었다. 라인이 밀리면 재료도 쌓였다. 벨트 컨베이어 시스템은 소량 다품종 생산에 대응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다카기와 우에키는 벨트 컨베이어를 떼어내 버리기로 했다. 셀 생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셀 생산은 생산성 향상 외에도 인원 절감, 공간 절약 등의 이점이 있었다. 셀 생산의 도입은 어디까지나 현장의 작업수준에서 개선과 개발이 행하여진다. 또 다카기는 직원들을 설득해 1인 생산을 시작했고, OJT(On the Job Tranining, 직장 내 교육)를 통해 기능을 익히게 했다. 목표는 '다능공'의 육성이었다. 1인 생산은 현장 작업자가 문제를 발견하여 스스로의 책임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장의 자주적인 판단에 의지하는 부분도 많고 권한이양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카기는 다시 새로운 제안 - 4~5명이 한 그룹을 만들어 작업을 하는 안 - 을 했다. 그룹으로 나뉘어 작업을 한 결과 3%였던 불량률이 소수점 단위로 줄어들었다. 그룹단위로 품질 경쟁을 시켜서 맡겨진 작업에 대한 책임감이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다능공'화에 대한 의욕적인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 사이에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직장 내 의욕상실을 피할 수 없었다. '저항세력'의 출현으로 다카기는 근무의식을 개혁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현장 밖 미팅'을 제안했다. 평균연령 40세의 여성 스태프들은 가족과의 관계, 육아나 자녀들의 교육문제 등으로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일단은 공통된 고민을 모두와 이야기하며 마음을 열 것을 노렸던 것이다. 모임은 휴일인 토요일에 열기로 하였다. 하지만 첫날 참가자는 단 2명뿐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덕분에 1개월 후에는 참가자가 25명이 되었다. 그녀들은 점차적으로 마음을 열어 개인적인 사정까지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실은 다능공화를 진행하던 당시, 그녀들의 노동 시간은 늘어나 귀가시간도 늦어지게 되었다. 다카기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그녀들에게 회식을 시켜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들의 집을 한 곳 한 곳 찾아다니며, 그녀들의 남편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후, 작업효율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들은 가족의 이해로 더욱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성만의 마음 씀씀이와 치밀한 작업효율이 개선에 공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00년 1월 종업원 3~4명의 그룹을 하나의 회사로 간주하는 방식의 '셀 컴퍼니'가 만들어졌다. 팀 리더의 이름을 따 'OO 컴퍼니'라는 칭호를 붙였다. 생산량, 인건비, 간접비, 재료비, 재고 등을 파악해 철저한 원가 관리를 하는 동시에 종업원 한 명 한 명이 원가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카기는 매일의 생산성을 확인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발생원인을 개선해 나갔다. 재료의 구매원가도 공개했다. 이익률이 계산되어 적자 컴퍼니와 흑자 컴퍼니가 명백히 갈렸다. 다카기는 적자 컴퍼니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흑자 컴퍼니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다카기는 컴퍼니들 사이의 협력체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셀 컴퍼니를 지원하면 자신들의 성과가 되어 각자의 급료도 더해지는 구조로 만들었다. 다능공 육성을 시작한 지 4년 뒤, 스태프 전원이 1인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1인당 생산량은 셀 생산 개시 당초의 172%에 도달했다. 재고는 47%로 반감했다. 4.3일이 소요되던 운영중의 재고는 2일로 줄었다. 카드리더 사업은 드디어 흑자로 돌아섰다. 큐마츠는 마쓰시타 전기의 완전 자회사가 되었고, 2003년 1월, 이름은 '파나소닉 커뮤니케이션즈'로 바뀌었다.
3. 가장 빨리 시장을 제압하라나카무라 쿠니오는 취임 직후, 회의석상에서 AVC 사장인 토다 카즈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제대로 된 디지털 카메라 하나 없지 않소. 마쓰시타 전체를 동원해서라도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시급히 시작해야겠소. 디지털 카메라는 네트워크 구성체의 하나가 될 거요. 부탁하겠소." 사실 이것은 제2차 디지털 카메라 프로젝트였다. 그 회의에는 토다 카즈오를 비롯해 부사장인 무라야마 아츠시, 상무인 오츠보 후미오, 경리담당 이사격인 카와카미 테츠야 등이 참석했다.
그 뒤, 기획디자인에 후사가, 설계에 토모이시 케이스케가 합류했고, 제1차 디지털 카메라 프로젝트를 추진했었던 우에마츠도 함께 일하게 되었다. 마쓰시타 본사의 AVC 외에 마쓰시타 고토부키, 일본 빅터, 웨스트 전기의 디지털 카메라 관련 기술자들이 모인 DSC개발센터가 AVC 사내에 설치되었고, 프로젝트의 리더로는 토다, 서브 리더는 오츠보, 마쓰시타 전기의 상무인 고이케 스스무였다. 마쓰시타 최초로 사업부를 넘은 프로젝트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차 디지털 카메라 프로젝트는 각 부서가 동시에 업무를 진행시켜나가는 동시개발공학방식을 택했다.
디자인도 기존과 달리 개발과 동시에 착수되었다. 중심이 된 것은 나카무라 마코토였다. 디자인 컨셉은 '솔리드&휴먼터치'로 결정했다. '솔리드'란 물건으로서의 무게감, '휴먼터치'라는 것은 사용하기 쉽고 손에 익숙해지는 감촉을 말한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디자인 회의가 열렸고, 스케치 제작자가 한 장 한 장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발표했다. 선택된 것은 모두 나카무라가 그린 작품이었다. 디자인 평가를 둘러싸고 의견이 크게 나뉜 것은 젊은 세대를 의식한 기종인' F7'이었다.
제2차 디지털 카메라 프로젝트에는 비장의 계획이 있었다. 라이카 카메라 회사로부터 광학기술을 도입하여 기사회생을 노리는 것이었다. 후사는 라이카와의 제휴에 관한 기획서를 작성하면서, 뒤늦은 시장 진출을 회복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후사는 2001년 1월 말에 우에마츠와 함께 독일로 갔고, 케넨을 비롯한 라이카측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다.
라이카 측에서는 마지막으로 품질에 관한 중요사항을 제기하였다. 렌즈에 관해서는, 라이카의 독일공장에서 만든 렌즈와 같은 품질을 가지지 않으면, 라이카 상표를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쓰시타는 라이카의 공장 검사를 받고, 합격할 때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여 마쓰시타는 2001년 7월 24일, 드디어 라이카와 제휴를 할 수 있었다.
2001년 7월 27일, 'LUMIX' 브랜드 최초의 컴팩트형 디지털 카메라 'F7'과 'LC5'의 2기종이 탄생했다. 나카무라 쿠니오의 한 마디로 결성된 디지털 카메라 프로젝트팀은 11개월 만에 드디어 예정대로 상품을 출시한 것이다. 'LUMIX'의 렌즈 테두리에는'LEICA'란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LUMIX' 판매는 예상했던 월 1만 2천 대를 뛰어넘었고, 시리즈 전체로도 예상 보다 2배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다. 2002년 4월부터는 글로벌 전개에도 힘을 쏟으며, 신기종의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4. 영업의 원점으로 돌아가라사업부제를 파괴한 후 창조된 조직이 AVㆍ정보기기의 '파나소닉 마케팅본부'와 생활가전제품의 '내쇼날 마케팅본부'이었다. 이것은 '프로덕트 아웃(상품을 만들어서 시장으로 내 놓는 것)'에서 '마켓 인(시장에 받아들여지는 상품)'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사업부제 바탕에는 "공급 측의 논리"가 우선시 되어, 시장과는 거리가 있는 '프로덕트 아웃'의 상품을 만들기 쉽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시장이 다양화·세분화되고, 또한 변화하기 쉬운 환경에서는 보다 시장의 요구에 가까운 마케팅이 요구된다. 즉 '마켓 인'이 필요한 것이다.
이 본부를 짊어지게 된 사람이 우시마루 순조다. 우시마루는 입사 후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아무리 힘든 해외출장이라도 항상 4가지의 일을 실천했다. 첫째, 철저한 시장조사였다. 둘째, 현지의 판매대리점에 더미(dummy) 샘플을 가지고 가사업계획의 실현성을 확인했다. 셋째, PSI(Purchase·Sales·Inventory, 구매·판매·재고)의 컨트롤이었다. 넷째, 목표달성을 위한 판촉 대책을 행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