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경영이 온다
하승호 외 지음 | 동아일보사
1부 윤리경영
'윤리경영'이 온다미국 동부 월담에는 윤리경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벤틀리 대학이 있다. 이 대학에는 기업윤리센터(Center for Ethics)가 있는데, 미국 920여 개 주요 기업들의 윤리담당 임원들로 구성된 'EOA(Ethics Officer Association, 미국윤리임원협회)'도 바로 이곳에서 출범했다. 또 이 연구소에서 미국 기업들의 윤리경영 확산에 분수령이 된 'FSGO(기업 범죄에 대한 연방판결지침)'의 기초가 마련됐다. 현재 미국윤리임원협회는 BCMSS(Business Conduct Management System Standard, 윤리경영 표준)를 만들어 국제적으로 표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협회가 마련한 윤리경영 표준안은 2004년 현재 ANSI(미국표준기구)의 지원을 받아 ISO(세계표준기구)에 제안된 상태로 몇 년 안에 국제표준 인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표준안이 마련되면, 주요 대기업들은 이를 채택하라는 사회적 압력을 느끼게 될 것이며, 또 각국 정부가 관련 법령을 제정하는데 기초가 될 것으로 협회는 전망하고 있다. 참고로 뉴욕 증권거래소는 새로 상장하는 기업들의 조건으로 이 윤리표준안의 일부를 이미 채택하고 있다.
기업윤리에 대한 흐름은, 크게 미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유럽의 신뢰경영 흐름은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투명한 경영방식이나 회계제도, 기업의 기부행위 등을 강조하는 미국식 '기업윤리(Business Ethics)'와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기업윤리 문제가 이슈로 등장한 것은 타이레놀 사건부터다. 1982년 두통약 타이레놀에 한 범죄자가 독극물을 투입하자 제약업체인 존슨앤드존슨이 피해를 감수하고 1억 달러어치의 제품을 모두 거둬들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윤리경영이 기업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학계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경영대학원들은 앞 다퉈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이후 미국의 기업윤리 운동의 중심은 금융 중심지인 월스트리트로 옮겨갔다. 정치 사회적으로 좌파의 영향력이 강하고 노동자들의 입김이 드센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기업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진행돼 오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발상의 차이 때문인지 문제 해결 방식도 차이가 있다. 미국은 2001년 엔론 스캔들 이후 정부가 주도해 회계 관련 제도를 전면개편한데서 볼 수 있듯이 시스템 개선을 통한 해결 방법을 선택했다. 이에 비해 유럽의 기업윤리 움직임은 인본주의와 자발성에 무게를 두면서, 기업이 서로의 장점을 배우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1999년 윤리경영을 도입한 신세계는 2001년과 2003년 2차례에 걸쳐 동아일보 경제부의 윤리경영, 신뢰경영 시리즈 취재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즉 신세계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해외 취재에 기업윤리 담당 부서 직원들을 동행시키면서, 선진 기업의 윤리경영 사례를 수집했고 이는 고스란히 신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또 신세계는 일본 자동차업체 도요타와 혼다, 미국 생활용품업체 존슨앤드존슨의 협력업체 존중경영 사례도 실천에 옮기고 있다. 6,000여 개 협력업체를 가진 신세계로서는 윤리경영 실천은 물론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협력업체와 공존의 파트너십 구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신세계는 월마트 등 세계적인 유통업체의 사례를 토대로 불투명한 거래를 없애는 시스템 구축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또 일본 유통업체 이토요카도가 운영하는 핫라인 제도를 최근 도입했다. 이 핫라인을 통해 한 협력업체 사장이 신세계 직원의 부당한 요구를 고발하기도 했다. 한편 신세계백화점과 신세계 이마트 매장에서는 여름철에는 상하기 쉬운 단무지와 달걀 등이 들어간 김밥을 팔지 않고, 속이 없는 충무김밥만 판다. 매출이 줄더라도 고객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품은 판매하지 않겠다는 스위스 식품업체 네슬레의 윤리경영을 참고하고 내린 결정이다.
2003년에는 윤리경영 마스코트를 만들어 자판기 컵, 직원 수첩, 결재판 등에 사용하고 있다. 직원들이 일상 업무에서 자연스럽게 윤리경영에 친숙해지도록 업무환경을 디자인한 것이다. 기업윤리에 대한 해외 선진 사례가 조직 내에 스며들면서 직업들의 업무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거래로 이어졌다. 한 사례를 들면, 신세계에 사무기기를 납품하는 후지제록스는, 식사는 물론 차 대접조차 거부하는 신세계 직원의 정확한 업무 태도를 보고 감동해, 자사 직원들에게 나누어 줄 기념품을 신세계의 상품권과 물건으로 구입하고 있다.
주주를 섬기는 기업한국 대기업들에 있어서는 오너 총수의 입김이 절대적이지만, 미국에서는 최고경영자가 그 이상의 권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사전 검증을 통해 선발되며, CEO가 된 후에도 항상 주주들의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식 스타 최고경영자(CEO)의 신화도 2002년 미국 엔론 사에서 시작된 회계부정 스캔들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즉 케네스 레이전 엔론 회장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전문경영인들이 스톡옵션 등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실적을 부풀리고 주가를 뻥튀기하는 등 '단기 업적주의'에 쉽게 빠져들고 있으며, GE의 웰치 전 회장도 막대한 퇴직금을 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CEO는 '집행하는 사람'으로 주주총회와 이사회에서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이사회 의장은 주주와 사외이사를 대표하면서 CEO등 집행임원을 감시·평가하는 방식이다. 한편 두 개의 이사회로 견제하는 독일식 이사회 시스템도 관심을 가져볼 만 하다. BMW의 이사회 시스템은 2개의 대립되는 축으로 이뤄져 있다. 헬무트 팡케 회장을 포함, 7명으로 구성된 '경영이사회(board of management)'는 BMW 승용차와 영국에서 인수한 소형차 브랜드인 로버, 최고급승용차 브랜드인 롤스로이스 등 3개의 브랜드를 거느리며 직접 경영한다. 이에 맞서는 것이 경영이사진의 경영활동을 견제하고 경영이사의 임명권을 갖는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인데, 주주 측 대표 10명과, 독일의 자동차 노조와 BMW 사원들이 추천한 노조 측 대표 10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주와 노조측 의견이 대립하면 주주 측인 감독이사회 의장이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합의체(合議體) 의회에서 표결 결과 가부 동수인 경우에 의장이 가지는 결정권]를 행사한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은 오랫동안 대주주와 소액주주를 나눠 생각하는 잘못된 관행에 빠져 있었다. 즉 대주주는 회사의 주인이며, 소액주주는 간섭이나 하는 귀찮은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기업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 다행스럽다. '주주 중시 경영'이야말로 기업과 주주 모두를 위한 윈윈(win-win) 게임의 방법이며, 신뢰경영과 투명경영의 핵심이다. 계열사 간 무리한 지급보증,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최대주주의 이익을 위한 계열사 주식거래 등은 모두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주 중시 경영으로 기업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주주의 신뢰'다. "기업이 주주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라는 주제는 궁극적으로 '기업이 왜 존재하는가?'하는 담론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논의는 넓고도 깊다. 주주는 '기업의 법률적 주인'으로 고객, 종업원, 채권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정부 등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 중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집단이다. "CEO를 어떻게 뽑고 이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결국 "어떤 길이 주주의 이익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나?"라는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다.
고객을 두려워하는 기업월마트의 2002년 총 매출은 2445억 달러(한화 293조4000억 원)로 세계 1위이며, 신문과 잡지들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짠돌이 경영'을 한다. 고객관계 담당인 바버라 부라운 부사장은 "월마트의 철학은 고객에게 1센트라도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회사의 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이는 것이 월마트의 존재이유"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본사도, CEO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월마트는 고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매장 직원들을 뽑을 때에도 현지 지역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페덱스도 마찬가지다. 주소가 잘못 기재돼 배달이 제대로 안 됐다는 연락을 받고, 직원이 주말에 직접 차를 몰아 300km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고객에게 배달했다거나,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24시간 안에 수백 톤에 이르는 구급약 등을 현장에 배달했다는 등 고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영웅담'들이 도처에 많다.
왜 그럴까. "고객들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월급을 받는 것도, 회사가 매출을 올리는 것도, 고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들의 신뢰를 잃어 이들이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끝입니다." 월마트 '슈퍼센터 1호점'의 점포매니저 매트의 말이다.
소비자를 존중하는 기업은 성공한다.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연구기관(TARP) 조사에 따르면, 기업에 불만이 있는 고객 가운데 96%는 기업에 직접 불평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10명이 직접 불평했다면, 드러나지 않은 불만 고객이 240명 더 있다는 뜻이다.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 고객 10명 중 9명은 다시는 그 기업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평균 8∼10명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린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기업이 '소비자 불만 처리 업무'를 '비용'으로 여기는 등 고객 만족 경영과는 거리가 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편 제품 사용에 따른 소비자들의 안전 책임을 업체가 지는 '제조물책임법(PL법)'은 한국에서 '안전'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라 할 수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PL팀의 강종구 변호사는 "갈수록 제품들이 다기능화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제조자를 맹목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직원과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은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앞으로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직한 경영은 투명회계에서부터2003년 초 중동에서 이라크와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본토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회계부정(Accounting Fraud)과의 전쟁'이다. 한때 최고의 기업 투명성을 자랑하던 미국이었지만, 2001년 말 터진 엔론 사태는 미국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꿔놓았다. 엔론에 이어 월드콤 등 회계부정은 줄을 이었고, 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 아더앤더슨도 파산 대열에 끼었다. 루슨트테크놀러지 등 신경제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분식회계 의혹을 사고 있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가. 미국 금융권의 분석은 명쾌 - 경영진들이 월가의 애널리스트가 내놓는 단기수익 전망을 맞추기 위해 회계부정을 저질렀다는 것 - 했다. 실적이 분기마다 항상 개선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회계를 통해 실적의 상하 진폭을 완화하게 된다. 말이 좋아 완화이지, 사실은 조작이며 회계분식이다. 이렇게 과대 포장된 실적은 그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안겨줬다. 사실 기업의 진짜 주인인 주주는 기업의 내용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반면 주주의 대리인인 경영자는 세세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으며, 정보의 양이나 질에 있어 매우 우월하다. 즉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경영진들이 회계법인에 대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문제다. 통상 회계법인은 경영컨설팅 사업을 함께 한다. 같은 회계법인이 회계감사와 컨설팅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수가 많은데, 감사를 너무 원칙대로 깐깐하게 하다보면 컨설팅 서비스까지 중단될 수 있다. 회계법인의 입장에서 회계감사 수수료는 얼마 안 되지만, 컨설팅 수수료는 매우 비싸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 결국 컨설팅 수수료에 발목을 잡혀 감사를 대충하게 된다. 분식회계 사태 해결의 핵심은 기업지배구조에 있으며 이사회의 기능을 강화해, 이사회가 CEO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회계부정에 대한 미국의 종합 대책은 '사베인스-옥슬리(Sarbanes & Oxley) 법'으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법에 따라 회계법인은 이제 동일한 기업에 대한 회계감사와 컨설팅 서비스를 동시에 할 수 없게 됐다. 법은 또 SEC(증권거래위원회)와는 별도로 회계법인을 직접 관리 감독하는 PCAOB(기업회계감독위원회)를 설립토록 했다.
오늘날 각국 정부는 기업에 엄격한 회계기준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외부감사인에 의한 회계감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한국 회계법인들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산동회계법인은 2000년 11월 대우그룹 회계 부실 감리에 따른 충격으로 자진 폐업했다. 분식회계로 회계법인이 문을 닫은 것은 기아자동차 감리를 맡았다가 2000년 초 퇴출된 청운회계법인에 이어 산동이 2번째였다. 안건회계법인도 2000년 9월 나라종합금융 감사보고서를 부실 감리한 사실이 드러나 '1년간 나라종금 감사업무 참여제한' 조치를 받았다. 또 영화회계법인은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가 터지면서 10년이 넘도록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실을 적발하지 못한 것을 고백해야 했다.
투명회계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스템을 갖춰 부정의 소지를 아예 없애려는 국내 대기업들의 노력도 보인다. 하지만 대기업이 시스템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회계사와 제도도 함께 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기업이 1년 내내 작업해 정교하게 숨겨놓은 부정을 두 달 남짓한 감사로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다. 충분한 인력을 투입하기에는 감사 보수가 너무 적고, 기업의 결산기가 12월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것도 문제다.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노무현 정부도 2003년 5월 이런 저런 대책을 담은 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개정안은 우선 특정 기업의 감사를 맡는 회계법인은 해당 기업의 재무제표를 작성하거나 회계기록을 대신 기재하는 컨설팅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또 회계법인과 기업의 유착을 막기 위해 원칙적으로 회계법인이 한 기업의 회계감사를 6년 이상 맡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도 내놓았다.
한국 사회에도 각종 '정보의 불균형'이 만연해 있다. 기업의 내부자가 정보의 불균형을 악용할 경우 주주의 이익을 가로채게 된다. 이는 시장의 불신을 조장하고 투자를 가로막는다. 내부자의 미공개 정보 이용 이외에 또 다른 정보의 불균형은 기업과 회계법인이 짜고 기업의 이익을 부풀리는 분식회계의 불투명성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큰손(기관투자자)과 소액투자자의 정보 불균형도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2002년 11월 정부는 이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기업의 중요 정보를 기관이나 개인에게 동시에 공개하는 '공정공시'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 이후 증시에서는 일부 '잡음'에도 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