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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술의 아름다운 경영

정문술 지음 | 키와채
강제 해직



10·26과 함께 보안사가 득세하고 내가 18년 동안 근무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풍전등화 신세가 되었다. 1980년 5월, 평소처럼 출근했더니 내 책상 위에는 해고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직장밖에 몰랐던 인생이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과 순진하기만 한 아내, 내 주변의 익숙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나는 마흔 셋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아득했다. 18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무원의 눈으로 감당할 만한, 꼭 그만큼의 세상이었다. 막상 퇴직 당하고 보니 세상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직장을 잃어버린 나는 세상의 모든 것에 서툴렀다.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을 다시 배워야 했다.

어느 날 공무원 시절 나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부하직원이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전자제품의 부품을 제조하는 풍전기공을 알게 되었다. 사장을 만나 보니 우직하고 성실해 보였다. 사장은 대표이사 자리를 넘길 테니 얼마간 자본을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영업이사로 물러나겠다고 했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들떠 그 자리에서 2천만 원을 투자기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받은 퇴직금의 꼭 절반이었다.

출근을 시작한 지 1주일이 채 안 되어 빚쟁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영업이사로 일하겠다던 사장은 그 날 이후 볼 수 없었다. 공장에 있던 기계들도 알고 보니 모두 담보에 걸려 있었다.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하청업체의 눈물



순식간에 2천만 원을 날리고 빚더미뿐인 공장 하나를 인수한 것이, 말하자면 내 '경영 인생'의 시작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중에 옛 은사의 소개로 P라는 엔지니어를 만났다. 공장이 처한 사정을 솔직히 다 털어놨음에도 그는 막무가내로 내 밑에 들어올 것을 고집했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그는 폐허나 다름없는 풍전기공에 뛰어들었다.

그를 얻고 나니 비로소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나마 풍전기공을 살려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대로 속수무책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이기도 했다. 공장이 제 모습을 갖추어 나가자 우리는 금형(金型)업체로 탈바꿈했고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나는 일본인 퇴역 기술자를 영입했다. 장인정신이 투철한 그 기술자 덕분에 우리는 금형에 관한 한 독보적인 업체로 떠올랐고 머지않아 '잘 안 되는 일이 있으면 풍전기공을 찾아가 보라'는 말이 부천공단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희망을 가꾸어왔던 풍전기공은 금형을 주문했던 한 대기업 계열사의 횡포로 인해 결국 문을 닫아야만 했다. 공장을 정리하면서 나는 공고 출신의 엔지니어 네 사람과 수위 아저씨에게 분명히 말했다.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반드시 다시 시작합니다." 뻔뻔한 부탁이었지만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실패는 했을 망정 나를 사장으로 인정해 주는 그들이 나 역시 눈물겹게 고마웠다.다행히 내게는 아직 퇴직금 2천만 원이 남아 있었다. 공무원 시절부터 틈틈이 사 모았던 그림도 몇 점 있었다. 집을 담보하면 은행대출도 얼마쯤 가능할 터였다. 문제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금형에는 자신 있었지만, 절대로 그 일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종의 회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호기심과 열정, 패기, 낭만, 모험심, 승부근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공무원 서랍 깊숙이 숨어 있었다. 지금의 나는 막 세상에 튀어나온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사회 초년생에게는 서랍 속의 그 물건들이 다시 필요하지 않을까. 풍전기공의 쓰라린 경험은 18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진짜 나를 자극하고 일깨워 주었다. 낯선 곳으로 끝도 없이 뛰어들었던 나, 그 덕분에 항상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던 나를 되찾고 싶어졌다.

미래산업



나는 마침내 반도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방면에 남다른 지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반도체가 가까운 미래에 크게 각광받을 만한 사업이라는 상식 정도가 당시 내가 가진 사전지식의 전부였다. 다시 겁이 없어지기로 작정한 나는, 반도체라고 내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다소 엉뚱한 오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와신상담의 고사를 생각하며 다짜고짜 반도체 공부를 시작했다.

반도체 산업에는 크게 세 가지 갈래가 있다. 첫째가 반도체 생산업체, 둘째가 원부자재 공급업체, 셋째가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다. 그 중에서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거나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분야는 대기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과 거대한 시설, 전방위적인 기술력이 필요한 분야다. 하지만 제조장비라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까지 매우 다양했다. 반도체 제조장비라면 내가 뛰어들 만한 틈새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부천에 있는 조그만 공장 하나를 전세로 얻은 후, 풍전기공 시절의 식구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그동안 각자 흩어져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은 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우리는 허름한 공장에 모여 재회와 창업을 자축하는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가 도전해야 할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제시했다. "반도체 제조장비를 만들 겁니다. 겁먹지 마세요. 그동안 연구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분명 해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연신 싱글벙글한 나를 보며 이내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뭐든지 해보죠. 금형만 아니라면요." 우리는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그 자리에서 탄생한 미래산업은 자본금 8천만 원, 전 직원이 여섯 명밖에 안 되는 반도체 제조장비 회사였다. 1983년 2월이었다.

나는 리드 프레임 매거진을 우리의 첫 프로젝트로 선정했다. 반도체 단자에 소자를 부착하기 위해 사용하는 복잡한 형상의 금속상자였다. 소모품은 아니었지만 반도체 공정에 있어 필수적이면서도 다량으로 필요한 물건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6개 업체가 매거진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모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영세한 규모였다. 따라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매거진은 거의 전량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국산 제품과 미국, 일본의 제품을 구해 와 직원들과 함께 기술 검토에 들어갔다. 결론은 싱거웠다. 그 정도 제품을 만드는 데에는 별다른 기술력도 필요 없었다. 규격만 정확히 나와 준다면 조립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단순작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협소한 국산 매거진 시장에서, 여섯 개나 되는 업체가 경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획기적인 개선 제품이 아니라면 우리가 들어갈 틈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매거진들의 문제점을 찾아보았다. 모두들 원가절감을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에만 목숨을 걸고 있으니, 후발주자인 우리는 품질개선으로 맞서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기존 매거진의 가장 큰 문제는 정밀도와 내구력이었다. 여러 개의 금속판을 조립해서 만드는 장비이기 때문에 조립과정에서 이미 오차가 생길 확률이 높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오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 조립과정에 신중을 기하자면 생산속도가 너무 느려 문제였고, 그렇게 오차를 줄이더라도 내구력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그 문제로 씨름했다. 조립에 사용되는 볼트와 너트도 개선해 보고, 금속판의 소재도 다양하게 교체해 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모두가 차츰 지쳐갈 무렵, 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금형으로 통째로 찍어 이음새를 없앤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금형기술이라면 국내 최고를 자부하던 우리들 아니었던가.

우리가 개발한 '이음새 없는 리드 프레임 매거진'은 출시 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국내 시장을 석권했다. 반년 후에는 해외로부터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여섯 명의 직원들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물량이었다. 당시의 미래산업은 거의 매일 인력을 충원해야 할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매출은 몇 십 배로 뛰어올랐고, 미래산업은 비로소 반도체 제조장비 업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만용



매거진의 성공은, 사업가로서 나의 첫 성공이자 미래산업의 첫 성공이었다. 하지만 나는 매거진 정도로는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좀더 획기적인 것, 좀더 위험한 것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매거진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곧장 또 다른 도전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수출 업무를 대행해 주던 한 업체의 사장을 통해 나는 아서 타일러라는 미국인을 소개받았고 곧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의 개발에 뛰어들었다. 웨이퍼란 반도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자를 말한다. 당시 반도체를 제조하는 주요 공정 중에서 자동화되지 못한 것이 바로 웨이퍼의 검사공정이었다. 웨이퍼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미경과 육안을 필요로 했다. 현미경과 육안을 대체할 장비가 개발되기만 한다면 시장성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만큼 첨단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장비였다.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물건'이었다.

매거진에서 발생하는 매출은 규모도 컸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웨이퍼 검사장비의 개발비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나는 개발자금을 구하기 위해 아예 길거리로 나섰다. 주변에서 끌어올 수 있는 사채라는 사채는 다 끌어들였고, 은행과 신용금고에 들락거리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빚은 차츰 늘어갔다. 반면에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연구는 큰 성과 없이 더디기만 했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라 온 나라가 축제 열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한 해였다. 내 집은 물론이요, 처남의 집과 조카의 곗돈까지 모두 연구비로 쏟아 부은 상태였다. 당시의 내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빚 명세였다. 은행과 사채 이자만 해도 하루에 대여섯 건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수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히고 눈앞이 깜깜했다.

없는 집안에 제사 잦다더니, 그런 형편 속에서도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직원과의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므로 급료를 미루는 것만은 절대 하지 말자고 창업과 동시에 다짐했었다. 어느 월급날 아침, 나는 더 이상 돈을 구할 곳이 없어서 출근도 못한 채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전화를 받는 친구들과 친지들은 나를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비참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급여만큼의 은행 잔고를 맞춰 놓고 나니 정오 가까운 시각이 되었다.

내색은 안 하려 노력했지만, 회사 사정이 엉망이라는 걸 직원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나타나면 직원들은 항상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싫었다. 아무 신경쓰지 말고 그저 일에만 매달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 앞에 설 때마다 더 쾌활한 척해야 했다. 하지만 그 날만은 자신이 없었다. 직원들을 보자마자 울컥 눈물을 쏟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로 경리에게 전화를 해서 월급 지불을 당부한 후,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실컷 울다가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슈퍼마켓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입사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어린 경리 여직원이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직원들도 일손을 놓은 채 침통하게 앉아 있었다. 개발팀장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은행 앞에서…, 날치기를 당했답니다…." 몇 차례나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받고, '정신 좀 차리고 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구걸하다시피 구해 놓은 돈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더 있다간 무슨 실수를 저지르게 될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엎드린 경리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임마!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만 울어!" 나는 초라한 빵봉지를 옆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오기



이제 파산은 눈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한 목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아내와 함께 우울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장비가 돌아간다는 개발팀장의 전화였다. 나는 듯이 연구실에 도착해보니, 정말로 기계는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우리는 실로 어이없는 허점을 발견했다. 기능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우리가 만든 기계는 숙련된 기능공보다 무려 4배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18억을 삼킨 '바보 장비'였다. 개발팀장은 나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사장님, 용서하세요! 제가 사장님 전 재산을 날렸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어비린 상태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방안에만 틀어박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사무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원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강원도 어디쯤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던 일가족이 벼랑에서 떨어져 익사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내게는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식구는 많고 차는 작아서 문제가 좀 되겠지만, 한 가족이 자살을 하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불러 앉히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죽읍시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없구려."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동반자살을 결심했건만, 아이들 생각만 하면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이내 포기하곤 했다. 나는 결국 동반자살을 포기하고 혼자서 죽을 결심을 했다. 근 한 달간 동네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한 병 가까이 사 모은 나는, 소주를 사들고 집 뒤편의 청계산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였다. 비정한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한다는 것이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병과 약병을 발치에 내려놓은 채 한참 동안 서럽게 울었다. 어두워지도록 산 속에 홀로 앉아 실컷 울고 나니 얼마가 속이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명징해지는 머릿속에서는 차츰 오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때까지 살면서 무엇보다 싫었던 것이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비관적이 되긴 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다른 누구 못지 않은 나였다. 하긴 실패는 했지만 기술은 남아 있지 않은가. 4년 동안 18억을 쏟아 부어 축적한 첨단기술을 이대로 흩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 기술로 좀더 아랫 단계의 장비를 만든다면 잘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계곡을 향해 약병을 있는 힘껏 던져버린 나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직원들은 각자 알아서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달만에 갑자기 나타난 사장을 보고 놀라는 직원들에게 나는 호통을 쳤다. "무슨 짓들 하고 있는 거야! 우리 회사가 망했어? 얼른 짐들 못 풀어?"

며칠 후 나는 직원들을 데리고 마침 진행 중이던 '세미콘 코리아'라는 반도체 장비 전시회를 찾아갔다. 해외 선진국 첨단장비들의 화려한 각축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은 것은 '반도체 테스트 핸들러'였다. '핸들러'는 생산된 반도체 칩의 이상 유무와 성능을 테스트한 후, 등급별로 분류하는 기계였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이면서도 매우 복잡한 종합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전량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해 왔던 우리들로서는 핸들러의 국산화가 영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당시의 미래산업은 또 다른 장비개발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다. 아니, 개발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당장의 큰 일이었다. 사실 핸들러라는 장비는 수만 개의 정교한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최첨단의 전자, 기계, 광학기술 등 복잡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핸들러의 구조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우리가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장비를 개발한 경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개발 시간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추스린 의욕이건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 앞에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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