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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술의 아름다운 경영

정문술 지음 | 키와채
1년 전, 나에게 수면제를 사게 했던 미래산업은 어느 새 핸들러 국산화의 주역이 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우리는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핸들러의 국산화에도 성공하고, 마침내 미국과 일본의 핸들러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핸들러의 성공으로 한동안 느슨하게 지냈던 나는 마운터 개발에 다시 한번 목숨을 걸었다. 미래산업의 향후 미래를 책임지게 될 'SMD마운터'는 '메카트로닉스의 꽃'이라 불릴 만큼 화려하고 복잡한 장비다. 전자기판 위에 수만 종의 소형 부품을 정확하게 심어놓는 장비이니만큼 초고속과 정밀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발하기 어렵지만 핸드폰에서부터 컴퓨터, 텔레비전,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가 된다. 그것은 곧 무궁무진한 판매시장을 의미한다. 또한 연구원들이 마운터에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도록, 목숨 이외의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다. 미래산업은 마운터의 개발비용으로 367억 원을 지출했다. 개발 기간 3년 동안 발생한 회사 총매출의 30.4%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 매출이 적었던 1997년도에는 오히려 매출액을 넘어서는 비용을 개발비용으로 투자했다. 그리고 우리는 3년 만에 SMD마운터를 개발했다.



우리의 마운터는 개념의 참신성에서, 기능의 효율성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물론 우리는 '후발주자'였다. 이듬해,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열린 에이팩스쇼에서 우리의 마운터는 최고상인 'Vision Award'를 수상했다. 자신감이 생긴 우리는 일본 마쿠하리에서 열리는 프로텍 재팬쇼에도 달려갔다. 일본 현지의 관계자들은 우리의 마운터 기술에 놀라고, 리니어 모터의 우수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파나소닉, 산요, 미쯔비시 등을 포함해 무려 42개 업체가 우리에게 기술 이전을 요청해왔다.

원래 마운터는 미국이 먼저 개발했지만, 후발주자인 일본이 미국 기업들을 추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도 마운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유럽에서는 지멘스 정도가 그나마 마운터 업체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고, 세계의 마운터 시장은 거의 일본 업체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기술 쾌거였다. 사업하는 '맛'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장차 마운터로 돈을 벌고 말고는 내게 큰 의미가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손익계산이 끝났기 때문이다



마운터는 워낙 고가이며 한번에 다량을 구매해야 하는 장비였다. 우리는 미주와 유럽, 일본, 중국, 동남아 지역의 시장을 각각 담당해 줄 해외 파트너를 선정해 나가는 한편으로 새로운 자금원을 물색했다. 세계시장에서 마운터로 승부를 하려면 장차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9년 3월, 미래산업의 주식은 액면가 100원 한 주에 3,000원의 가격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섣부른 유상증자는 주주들의 불이익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고심 끝에 나는 미국의 나스닥(NASDAQ)을 떠올렸다. 여전히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한국전쟁과 올림픽의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의 마운터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적인 지명도'도 필요했다.



나스닥 등록 신청서를 준비하고, 신청서를 접수하고, 다시 수정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미국 현지 기업들의 경우에도 수십 명의 인원과 몇 년의 시간이 투여되는 대작업이다. 하지만 미래산업의 경우에는 이 모든 작업이 반 년 만에 끝났다. 나스닥 역사상으로도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미래산업은 숨겨야 할 만한 '비밀'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은 없었다 해도 나스닥이 요구하는 원칙과 순서에 맞춰 하나씩 준비해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터넷 회선사업자인 D 사와 나란히 나스닥에 진출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곧이어 ADR(주식예탁증서) 1억 2,000만 불의 발행에 성공했다.



나는 넉넉한 사업자금이 외부로부터 유입되고,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경영스타일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을 기하여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제는 미래산업과 함께 고난과 행복의 순간들을 반추하며 아내와 함께 곱게 늙는 것만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업무이리라.2001년 새해, 내 머릿속에는 '은퇴'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공언해 왔던 일이었고, 이제는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까지 그 단어는 내 안에서 수백 번씩 죽다가 다시 살아났다.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미래산업이 내게 어떤 회사였던가. 공직에서 강제 해직되고, 마흔 셋의 나이로 무작정 뛰어들어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일군 '내 회사' 아니었던가. 미래산업은 차라리 내 목숨이었다. 일선에서는 물러난다 하더라도 회사가 돌아가는 모습을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것도 같았다. 후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내게는 아직 그만한 열정과 정력이 남아 있었다. '사실 회사에 이만한 안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문'이나 '고문'쯤 되는 명함을 찍어 수렴청정 하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약속은 이행된 셈이니 욕먹을 짓도 아니었고, 멀쩡한 노동력을 썩히지 않아도 좋으니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괜히 멋 부리느라 일찍부터 은퇴를 말해왔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직원과 주주들은 아직도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가 다시 아차 싶었다. '늙어 추해지는 게 바로 이 순간이구나.'



한편으로 아이들에 대한 심경도 복잡했다. '유산은 독약'이고, '회사는 애비 것이 아니라 주주와 종업원들 것'이라며, 회사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못하게 했던 녀석들이었다. 다섯 아이의 결혼식에도 미래산업 직원들은 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아이들과 회사를 철저히 '격리'시켜 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니 결국은 그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CEO 이전에 나 역시 늙은 아비였다.



다른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혹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엄한 체하다 어느 순간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덥석 안아주길 속으로 바랐던 것은 아닐까. 어려웠던 집안사정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일찍부터 제 몫을 스스로 감당해 왔던 아이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씩씩하게 버텨 준 끔찍하고 애틋한 내 새끼들. 경영권이란 아비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와 권력이 한꺼번에 갖춰진 최고의 종합선물 아닌가. '은퇴'라는 화두를 붙잡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떠올랐다.



2001년 시무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점심시간에 두 아들을 음식점으로 불러냈다. "이제 물러날 생각이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단도직입적으로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이이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회사를 잘 이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래산업은 아쉽게도 내 것이 아니다. 사사로이 물려줄 수가 없구나."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랬던가 싶었다. "애비가 너희를 위해 해놓은 게 너무 없구나. 미안하다." 진심이었다. 나는 눈앞의 두 아이에게 한없이 죄스러웠다. 잠깐의 침묵 뒤에 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거의 동시에 둘째가 받았다. "아버님, 훌륭하십니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좀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약해지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번복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 아이들을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된통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데운 청주를 거푸 석 잔이나 들이켰다. 낮술에 취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는 양손으로 아이들의 등을 힘차게 다독였다. "나야말로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나의 마지막 벤처 프로젝트 : 돈 쓸 궁리은퇴와 동시에, 나는 내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본전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늘 '결핍'이고 앞으로도 그러할진대, '길 막고 퍼주는 자선'이란 곧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뜻이 아닐까. 좀더 근원적이고 의미 있는 환원 방법은 없을까.



남아도는 쌀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도 좋지만 '슈퍼 옥수수' 종자를 북한에 전해 주는 한 과학자의 노력이 내게 오히려 반갑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는 일은 일회성 자선이다. 목적의 갈급은 채울 수 있을지언정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으므로 따지고 보면 소모적인 자선이다. 보다 근본적인 처방은 장기적으로 거시적인 사회 인프라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 알량한 돈이나마 '잘'쓰고 싶었다. 돈을 잘 써보겠다는 생각에서 '자선 공부'를 시작했지만 막상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첨단과학의 21세기'가 아닌가. 아직 한국에서 손을 못 대고 있는 '첨단'은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현장 직원과의 미팅에서 한 패기만만한 신입사원이 내게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사장님, 바이오테크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생명공학과 정보기술, 기계기술, 나노테크놀러지가 만나는 융합기술이야말로 21세기를 관통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그 후 나는 바이오테크놀러지와 관련해 본격적으로 자료수집을 시작했다. 이 분야의 기술은 결국 앞으로 국가의 경쟁력과 생존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비용은 국민총생산(GDP)의 3%도 채 안 된다. 나라에서 못한다면 민간에서라도 그 격차를 줄이는 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마침내 나는 KAIST에 300억 원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기부를 결심하면서 나는 KAIST와 정부의 과학기술부에 직접 두 가지를 요구했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 및 기계기술을 서로 융합하여 학제 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학과를 신설해 달라는 것, 그리고 교수와 시설, 기자재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예산을 국가에서도 일부 보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의 당돌한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KAIST에서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하는 한편, 나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바이오테크 연구동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과학기술부장관은 내 제안을 환영하면서 기획예산처와 관련 예산을 협의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2003년 10월 30일에 열린 KAIST의 '정문술 빌딩' 준공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지만 나는 불참했다. 마땅히 돌려줄 것을 돌려준 곳에 가서 축사하고 꽃다발까지 받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 이제는 차라리 솔직해지고 싶다. 매스컴들은 나를 두고 '아름다운 퇴진'이니 '진정한 부자'니 떠들썩하게 칭찬들을 했지만, 사실 추하지 않게 늙어 가며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살아 보겠다는 또 다른 노욕의 발로였을 뿐이다.



이 사회가 지금껏 나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왔으므로, 떠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기업하게 해주고, 돈을 벌게 해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으므로, 언젠가는 보은도 해야겠고 효도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단순하나마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환원'의 의미다.



'나는 용궁에 갔다 온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촌스럽고 진부하지만, 내가 한때 경험했던 절망의 나락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비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없음'의 극한을 경험해 본 사람이다. 짐 부리고 난 뒤의 청량감이 이토록 절실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오히려 '없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돈을 버는 즐거움'은 나름대로 충분히 누려 봤다. 진짜 부자들이 들으면 웃을 소리인지 몰라도 내 배포 안에서는 그마저도 과했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이제는 '버리는 즐거움'을 누려 보고 싶다. 돈을 포기하고 나니, 더 가져야겠다는 욕심과 지켜야 한다는 초조감, 가지고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해야 한다는 자괴감 등등의 온갖 번뇌까지 말끔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가 먹은 것과, 남에게 대가 없이 준 것들만이 진짜 자기 재산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짜 내 재산'만 꼭 품고 살다 가고 싶다. 버림은 소유의 끝이 아니라 소유의 절정이다.만용초고속(?) 국산화벤처의 손익계산법낮술그러던 중 공고 출신의 한 엔지니어가 때 맞춰 사고를 냈다. '핸들러'라는 장비를 우리가 입에 올리기 시작한 지 불과 일주일만에, 그 녀석이 핸들러 설계도면을 들고 온 것이다. 핸들러 중에서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트랜지스터 핸들러였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이 자식! 이거 어디서 났어!" 사람들은 반가움과 불안함 뒤섞인 얼굴로 그를 다그쳤다. 그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었다. "제가 그렸는데요." 워낙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긴 했지만 이 정도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장비 전시회에 가서 핸들러를 유심히 관찰한 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사전지식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정당한 산업 스파이였고, 걸어다니는 사진기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그를 '찍사'라 불렀다.

물론 그의 도면은 허점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의 도면은 막연하기만 했던 우리들에게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엔지니어들이 밤새 휘갈겨 놓은 메모쪽지를 들고 차를 몰아 청계천 부품상가로 달려갔다. 오후에는 10만 원이고 100만 원이고 가리지 않고 무작정 돈을 구하러 다녔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핸들러 설계도와 개발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에 핸들러 국산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기업 A 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그들은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설계도와 개발계획서를 보여주는 순간 그들의 태도는 일변했다. "대단한데…, 대단해요." "한번 믿어 주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설계도는 완벽해 보입니다만…, 아무래도 매거진 만들던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비록 실패했지만, 저희는 4년 동안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핸들러의 헤드만 먼저 만들어 오세요. 그걸 보고 나서 향후 계획을 잡아 보는 걸로…."

주어진 기간은 한 달이었다. 나를 포함한 전 직원은 공장에 야전침대를 준비해 놓고 곧바로 합숙에 들어갔다. 정확히 한 달 후, 우리는 헤드를 들고 A 사를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역시 대기업다웠다. 확언은 다시 유보되었다. "정말 대단들 하십니다. 내친 김에 시제품을 하나 만들어 보시죠." "계약은…." "아, 걱정 마세요. 시제품 만들어 오시면 그때 결정하는 걸로 하지요."



이번에는 6개월의 기한을 받았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핸들러에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반년 만에 시제품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6개월 안에 핸들러 비슷한 물건이라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정확히 4개월 후, 우리는 핸들러를 만들었다. 조잡하고 엉성한 기계였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국내 최초의 핸들러였다. 기한은 남아 있었지만 사정은 우리가 더 급했다. 뿔뿔이 흩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하루빨리 계약을 따내야했다.



그렇게 만든 최초의 핸들러를 A 사로 가져갔다. A 사 간부들 앞에서 장비에 전원을 넣는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테스트 결과는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당시 A 사에서 사용하고 있던 일본 테섹 의 'TO-92' 핸들러보다 우리 시제품이 처리 속도에 있어 훨씬 우수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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