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크스바겐 스토리
페르디난트 피에히 지음 | 생각의나무
폴크스바겐 스토리
페르디난트 피에히 지음/김태영 옮김
생각의나무/2004년 2월/366쪽/25,000원
신화의 시작
첫 기억과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그의 가족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 아홉 살이었던 나는 운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운전을 시작하자마자 차고 문을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고 한 달간 운전 금지령을 받았다. 한번은 어머니와 산책하면서 앞으로 커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붙잡고 씨름하는 일이 아니라 비행기 정비나 기관차 운전처럼 손으로 하는 진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1875~1951)는 지금은 체코지만 당시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보헤미아 지방 - 의 마터 스도르프 출신이었다. 영국에서 특허를 받은 휠 허브 엔진 개발에 착수했던 외할아버지는 휠 허브 엔진을 작동시키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외할아버지는 전기 자동차에 만족하지 않고 네 바퀴 굴림 자동차 개발을 계속 추진했다. 1900년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만든 차를 몰고 자동차 경주에 출전했다. 포르쉐 가의 자동차 경주 열정은 카레이서로도 이름을 날렸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천부적인 엔지니어로 한창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1903년, 외할아버지는 빈의 한 마이스터 재봉사의 딸인 알로이시아 캐스와 결혼했으며, 1906년에 아우스트로 다임러의 기술 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빈 노이슈타트로 이주했다. 1923년부터 일하기 시작한 메르세데스에서 외할아버지는 경영진과의 불화로 메르세데스를 나온 후에 이전에 슈투트가르트에 지어두었던 포르쉐 설계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 루이제는 빈의 변호사 안톤 피에히와 결혼했다. 할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소를 물려받았던 나의 아버지는 1928년에 결혼한 뒤 계속 빈에서 살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폴크스바겐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아우스트로 다임러가 군사 장비 생산 공장으로 전환되면서 외할아버지는 총 이사로 승진했다. 전쟁이 끝나자 아우스트로 다임러는 중상급 자동차를 다시 생산했지만, 외할아버지의 주 관심사는 가격이 저렴한 경차였다. 아우스트로 다임러가 제작한 1.1리터 엔진이 탑재된 소형차 자샤는 타르가 폴로리오에서 1리터급 자동차 경주 부문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아우스트로 다임러의 대주주들과의 불화로 자샤는 끝내 대량 생산되지 못했다.
그 후 외할아버지는 다임러 모터스에 기술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5년 후 전설적인 경주용 자동차 SSK를 제작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일류 기업인 슈타이르의 기술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외할아버지는 이제 전설이 된 ‘아우스트리아’를 제작했다. 그 후 경제 공황이 최악에 달했던 1931년에 외할아버지는 슈투트가루트로 돌아가 ‘명예 공학박사 F. 포르쉐 유한회사, 자동차 및 엔진 개발 사무소’라는 긴 이름의 설계 사무소를 차렸다. 20대 초반의 페리 외삼촌은 설계 사무소 초기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외할아버지는 경주용 자동차 프로젝트를 통해 히틀러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히틀러는 나치 조직인 독일노동전선에 국민차 프로젝트 운영을 맡겼고, 외할아버지를 초대 회장으로 선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크스바겐 공장은 엔진, 클램프, 비행기 부품, 탱크 캐터필러, 탄약, 폭탄 케이스, 지뢰와 V1로켓 등의 군수품을 생산할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업적 중에서 내가 가장 벤치마킹하고 싶은 부분은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이었다.처음부터 ‘포르쉐’ 설계 사무소는 일인 지배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협력과 독자적 연구의 두 톱니바퀴가 환상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분야별 최고 권위자들의 팀워크에 대한 집념을 나는 한평생 갖고 살아왔다. 이런 팀워크야말로 경쟁 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45년에 프랑스의 새 정부는 프랑스판 국민차 공장 건립을 구상하고 외할아버지를 초빙하여 독일 폴크스바겐 공장의 노하우를 전수받고자 했다. 정부 관련 부처의 공식 초청 형식으로 초대되어, 외할아버지는 페리 외삼촌과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점령 지역 바덴바덴으로 떠났다. 그러는 동안 산업부 장관이 급작스레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고, 새로 임명된 법무부 장관은 저녁 만찬 도중 갑작스럽게 외할아버지 일행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할아버지는 르노 공장의 국유화 지지자와 민영화 지지자들 간의 세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페리 외삼촌은 4개월 후에 석방되었고,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바덴바덴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1947년 2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디종으로 이송되었다. 3개월 후 디종에서 심문이 시작되면서 다행히 상황은 반전되었다. 핵심 증인들의 증언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중 외할아버지와 프랑스의 관계, 그리고 나치 친위대의 선동 행위에 대항했던 것이 밝혀지면서 외할아버지의 무죄가 입증되었던 것이다. 1950년 11월 외할아버지는 전후 처음으로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공장을 방문했다. 그날 밤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온 외할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1951년 1월 30일 76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하셨다.
기술을 향한 애정/취리히 대학 시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뒤인 1952년 아버지도 불과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에 의해 나는 스위스의 기숙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수 엘리트 정예 교육을 지향하는 스위스의 기숙 학교는 사관학교처럼 엄격하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기숙 학교에서의 생활이 생각처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여하튼 그곳에서 나름대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터 호반 근처의 외할아버지 설계 사무소에서 나는 기술에 대한 애정을 계속 키워나갔고 기숙 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가지 상황으로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자동차보다는 비행기와 경량 차체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1959년 대학 입학과 거의 동시에 나는 코리나와 결혼했다. 내가 막 스물두 살이 되던 때였다. 코리나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당시로서는 임신을 하면 결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했던 것은 다분히 어머니에 대한 나의 뒤늦은 사춘기적 반발심 때문이었다. 큰손녀 아리아네, 연이어 손녀딸 코리나와 데지레가 태어나자 어머니는 내게 서운했던 마음을 푸셨다. 1962년 12월 나는 드디어 학위를 취득했다. 그 무렵 스위스 공군의 전투기 추락 사고로 스위스의 항공산업 근간 구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스위스의 항공업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그 여파로 나는 항공기 제작 회사에 취직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나는 1963년 4월 1일부터 포르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경제 기적의 선구자 폴크스바겐과 피에히 가와 포르쉐 가 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비록 소량이기는 했지만 뜻밖에 연합군이 사용할 민간용 비틀을 생산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비틀의 ‘수요’는 화폐 개혁으로 탄력을 받으면서 날이 갈수록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렸다. 폴크스바겐에 아주 회의적이었던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폴크스바겐 공장에 대한 당신의 지분을 챙겼다.
그리고 투옥되어 있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페리 외삼촌이 폴크스바겐의 포르쉐 특허권 사용 문제로 시급하게 협상에 들어가야 했다. 그 결과 1948년 포르쉐는 폴크스바겐 그룹 모델 개발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당했고, 폴크스바겐의 비틀이 한 대 생산될 때마다 1 마르크의 로열티를 받기로, 또 오스트리아의 피에히/포르쉐가 폴크스바겐의 오스트리아 독점 수입권을 보장받기로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어머니가 자신의 지분을 폴크스바겐에서 분리한 뒤,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피에히 가와 포르쉐 가는 어머니와 페리 외삼촌을 중심으로 양분되어 각기 슈투트가르트 포르쉐 공장과 오스트리아 상사라는 서로의 불가침 영역을 엄격히 구분했다. 하지만 양사의 소유권과 수익은 어머니와 페리 외삼촌, 그리고 두 분의 자녀 8명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결과적으로 페리 외삼촌은 설계자로,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폴크스바겐 독점 수입업자로 수십 년간 폴크스바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인리히 노르트호프와 포르쉐 시절, 그리고 포르쉐 917과 피에히 가와 포르쉐 가 2
하인리히 노르트호프는 폴크스바겐/포르쉐의 역사에서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폴크스바겐 회장이 되면서 그는 자동적으로 포르쉐 기술을 이어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의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버린 피에히 가에 하인리히 노르트호프는 어머니의 조언자이자 친구이며 우리 형제들에겐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하인리히 노르트호프가 회장으로 있을 당시 폴크스바겐은 포르쉐와 실질적인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자체적인 기술은 끝내 개발하지 못했다. 폴크스바겐은 생산을, 포르쉐는 개발을 책임졌던 30년 전과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1963년 4월 1일에 경주용 자동차 엔진 담당관으로 포르쉐에서 일을 시작했다. 포르쉐 초기 시절 외삼촌보다는 기술 감독 한스 토말라가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다. 덕택에 나는 1965년에 시험 주행 감독관으로 발령받았으나, 차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출 전문가가 절실해졌다. 파트너로 선정된 헬무트 보트와 나는 포르쉐에서 이후 숨가쁜 승진가도를 달렸다.
포르쉐의 개발 파트를 맡고 있던 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모델은 작은 날개가 달리고 길이가 짧은 908이었다. 1968년에 경주용 자동차 917 모델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다이내믹한 레이싱 머신 917에는 어떠한 경주용 자동차도 대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나도 917을 다시 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을 보면, 917은 당시 절실히 필요했으면서도 무모한 모험이었음에 틀림없다. 917을 통해 군소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는 원칙적으로 불가능이란 없다는 자사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굳혔다.
그 무렵 피에히/포르쉐 가는 어머니와 페리 외삼촌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대비하여 후계자 선정 문제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8명의 사촌은 입장에 따라 서로 공동 전선을 형성하거나 갈라서기도 하는 등 양가는 차기 후계자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단단히 치러야만 했다. 사태 수습을 위한 두 차례의 집단 역학 컨설팅 결과 양가 모두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 경영인’을 회장에 선임하기로 하였다. 에른스트 푸어만이 포르쉐 주식회사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페리 외삼촌은 포르쉐의 감독 이사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1년 말, 나도 포르쉐에서 맡고 있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도전, 다시 도전
다임러 벤츠에서의 짧았던 시간
내가 포르쉐를 아직 그만두기 전에, 요아킴 찬 다임러 벤츠 회장은 포르쉐를 나오면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여 나는 동의했고 디젤 성능 제고에 대해 고문관 역할을 하기로 했다. 다임러 벤츠는 4기통 엔진을 6기통 엔진으로 바꿀 생각이었는데, 나는 기존 차체에도 들어맞고 제 기능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5기통 디젤 엔진을 제안했다. 5기통 엔진 납품 기간으로 합의한 반 년이 끝나기 전에 나는 프로토 타입 5기통 엔진을 다임러 벤츠에 납품할 수 있었다. 계약된 5기통 엔진을 납품한 시점에 찬 회장은 자신의 집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고 내가 능력을 입증한다면 몇 년 후 나를 쉐렌베르크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용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투자하지 않고서는 좋은 자동차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루트비히 크라우스의 아우디, 5기통 엔진과 로터리 엔진
그 후 나는 아우디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아우디 80의 나사 문제 해결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크라우스 이사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아우디의 미국 지사에서, 아우디 100이 배기 가스 규정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착수하여 미국 측에 6개월 뒤에 연료분사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한 대가로 아우디 100에 특별 허가를 받은 캬브레터를 장착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일로 - 크라우스 이사의 약속대로 - 1973년 초 시험 주행 담당자로 발령 받으면서 나는 개발 담당 이사의 유력한 후보자 대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크라우스 이사가 갑작스럽게 은퇴하면서 나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아우디의 개발 담당 이사로 승진했다.
앞에서 언급한 1972년 다임러 벤츠의 디젤 엔진 작업으로 5기통 엔진에 대한 나의 믿음은 확고해졌다. 5기통 엔진은 특히 비용과 편의 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다. 개발 담당 이사가 된 후 나는 5기통 엔진을 아우디 양산형에 투입했다. 아우디 콰트로 모델에 장착된 5기통 엔진은 최대 650마력의 랠리 버전에도 사용되었고, TDI(디젤 터보 직분사 엔진)를 통해 재창조되었으며 오늘날 장거리 주행용 자동차를 찾는 고객들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아우디를 그만둔 후에 5기통 엔진이 폐기 처분된 조치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아우디의 개발 담당 이사가 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로터리 엔진 문제를 떠안게 되어 아주 난처한 입장에 놓일 뻔했으나, 다행히 로터리 엔진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1974년 프란츠 벨레스 이사가 로터리 엔진의 효율성에 대해 최종 결과를 발표한 후 아우디는 로터리 엔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로터리 엔진의 저연비와 배기 가스 문제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1974년의 오일 쇼크로 로터리 엔진의 문제성을 비로소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디젤 터보 직분사 엔진(TDI)
1980년대 아우디 개발 파트는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디젤 터보 직분사 방식을 개발했다. 디젤 터보 직분사 방식의 약칭인 TDI는 지금도 폴크스바겐만의 고유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1975년 나는 아우디의 기술 담당 이사와 폴크스바겐 엔진 및 변속기 개발 파트 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아우디의 연결 기계 담당자 바스휘센은 직분사 엔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직분사 엔진은 알루미늄 차체 콘셉트와 마찬가지로 나의 콘셉트에도 들어맞았다.
바스휘센과 나는 고효율의 화물차 직분사 엔진의 악명 높은 소음과 배기 가스 문제를 제거하는 데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시점에 호프바우어가 직분사 엔진 프로젝트에 끼어들었다. 우연히 NSU 공장을 방문했던 그는 아우디가 4기통 직분사 엔진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폴크스바겐 그룹 디젤 엔진의 제1인자인 호프바우어는 그룹에만 허용된 디젤 엔진을 다른 계열사가 연구 개발하는 것을 묵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피알라 이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결국 직분사 엔진 관련 서류를 포함한 전체 프로젝트 건이 폴크스바겐 그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1978년 바스휘센은 추진 중이던 4기통 직분사 엔진 프로젝트를 폴크스바겐에 빼앗겼다. 하지만 아우디에는 5기통 엔진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디젤 터보 직분사 엔진(TDI)을 개발하기까지 꼬박 12년이 걸렸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은 각각 5기통 TDI와 4기통 TDI를 거의 동시에 완성시켰다. 이상하게도 폴크스바겐은 자체 생산한 4기통 엔진을 곧바로 투입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아우디만 5기통 TDI와 4기통 TDI를 도입했다. 3년간 두 엔진의 탁월한 성능을 지켜본 폴크스바겐도 1993년부터 두 엔진을 사용했다.
우줄라
나는 첫사랑 코리나와의 결혼에서 아이 다섯을 두었다. 말레네와는 아이 둘을 두었고 다른 여자 사이에서 아이 둘을 더 두었다. 말레네와는 나는 자유로운 관계를 갖자는 약속대로 서로 구속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서로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자는 약속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자 우리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말레네와 결별하기 전에 우줄라 플라서라는 여자가 내 인생에 나타났다. 우줄라는 내 아이들의 가정교사였었는데, 나와의 결혼생활 내내 그녀 특유의 쾌활함을 잃지 않았고 바쁜 업무에 시달리는 내가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