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이야기
레이 크록 지음 | 문진출판사
제1부 맥도날드 신화창조의 토대
1나는 17년간이나 종이컵 판매를 하고 난 뒤 새로운 기회라고 여겨진 멀티믹서기를 전국의 약국, 소다수 판매점, 우유 가게에 팔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국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 지역과 판매점에 상관 없이 "캘리포니아 주 샌 버나디노의 맥도날드 형제가 가진 멀티믹서와 똑같은 것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접 그들을 찾아나선 나는 무려 여덟 대나 되는 믹서를 가지고 한 번에 40개의 쉐이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150달러나 되는 그 기계를 한 두 대 들여놓고 쉐이크를 판매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현지의 대리인과 직접 통화를 한 나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가 햄버거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척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변에는 파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복장을 챙겨 입은 종업원들은 자신의 외모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식당 주변의 모든 것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주차장까지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맥도날드 형제와 만난 나는 그들이 설명하는 판매 시스템의 간편성과 효율성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들은 메뉴 생산 과정을 최소한의 공정으로 줄여 최소의 노력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유지하였다. 맥도날드 가게에서는 오직 햄버거와 치즈버거만을 팔았는데, 모두 같은 공정으로 구워져 15센트에 판매되었으며, 4센트를 더 지불하면 치즈 한 조각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간단한 음료는 10센트, 16온스의 밀크쉐이크는 20센트, 커피는 5센트를 받았다. 맥도날드 가게가 지닌 사업성에 매료된 나는 그들에게 이 가게의 전국 체인점을 열 것을 제안했다. 1954년, 시카고로 돌아오는 나의 서류 가방 안에는 맥도날드 형제와 계약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
2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삼촌의 약국에서 소다수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작은 레코드점을 차릴 수 있었다. 사업이 실패로 끝난 후 에는 무료하게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봄 학기가 끝날 때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커피콩과 다른 신상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방문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적십자 사 구급차 운전기사로 일을 하다가 싸구려 무도회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던 손님이었던 에델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따라 종이컵 회사에 취직하여 판매를 맡게 된 후의 일이었다.
3종이컵을 판매하는 세일즈 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종이컵 사업은 계절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이 되면 판매가 저조해졌다. 그래서 나는 주요 타겟을 청량음료 판매점으로 삼아 공략하기 시작했다. 종이컵은 유리보다 위생적이었고, 더구나 깨질 위험도 없었으며, 값이 매우 싼 편이었기 때문에 누가 한 두 개쯤 집어간다고 해서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장점을 꿰뚫은 나는 그것을 판매의 주안점으로 삼았고, 습관적인 타성만 극복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종이컵 세일즈가 쉬워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섯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세일즈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종이컵 사업은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대로 번성해 나갔고, 그에 따라 자신감도 비례하여 증가했다. 고객도 늘어나기 시작했을 즈음, 당시 신문에는 플로리다의 경제 호황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플로리다 주로 이주하여 부동산 판매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일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기 시작하여 오래 하지 못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플로리다를 떠나온 것은 매우 적당한 때였다. 우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경기의 붕괴로 인해 불황이 일어났다. 내가 다시 플로리다로 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4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간 종이컵 사업은 크게 성장했다. 금주법이 시행되어 술을 팔 수 없었던 가게에서 술 대신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하여 용기로서의 종이컵 시장도 커진 것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엄청난 불황에도 불구하고 나의 종이컵 판매는 기업 고객들을 확보함에 따라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감봉과 보조금의 삭감을 강요하는 회사를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을 했으며, 전반적인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또한 에델은 무척 검소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저축은 계속 늘어만 갔다.
고객 중에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더 시원하고 더욱 더 진한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내 큰 수익을 얻고 있는 랄프 설리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또다른 고객 중 한 명인 얼 프린스와 그들을 동업으로 이끌었다. 사업 제휴 결과 매일 같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던 얼 프린스는 쉐이크를 미리 만들어 금속 통에 보관했다가 판매를 했기 때문에 세척해야 하는 우유 통들이 싱크대에 가득 쌓이자 결국 쉐이크를 보관하는 금속통의 위쪽 부분을 잘라 원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통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좁아지는 부분은 슬리브 관처럼 16온스 종이컵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원통의 위쪽 부분과 컵의 가장자리가 정확하게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쉐이크를 담아 그대로 믹서기에 올려놓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얼은 기존의 싱글 믹서로는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5대의 믹서가 배치되도록 고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엄청난 양의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 발명품이자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상품이었다. 얼이 멀티믹서를 개발한 후 나는 그 기계를 회사로 가져가 실연을 해보였고, 그 기계에 매료된 회사 경영자 존 클락은 서둘러 새니터리 컵 앤드 서비스 사가 멀티믹서의 독점 공급자가 되는 계약에 사인을 했다(클락은 일선에서 새니터리 컵 앤 서비스 사의 사장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 회사의 대주주는 뉴욕에 있는 코우 형제였다. 그리고 클락은 서비스 컵 사에서 생산하는 릴리 컵의 중서부 지역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발명품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본사 대신 나는 얼 프린스와 동업을 시작하였다. 대신 멀티믹서 계약권은 내가 갖고 '프린스 캐슬 판매'로 이름 지은 내 회사의 지분 60%는 멀티믹서 계약권을 갖고 있던 새니터리 컵 사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악랄하고 지독한 조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내 목을 조이는 덫이 되고 말았다.
5내가 신제품 멀티믹서를 판매하기 위해 독립한 후 멀티믹서의 판매 실적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재정상태는 늘 불안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새니터리 컵 사는 60%의 지분을 가진 동업자였기 때문에 나의 급여를 제한할 수 있었고, 클락은 내가 릴리 튤립 컵 사를 나왔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급여를 동결해 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코우 형제는 멀티믹서와 아무 관련이 없었고, 클락은 지분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현금 6만 8천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힘겹게 그 채무를 이행해야만 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들어서게 해주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날 때쯤에는 멀티믹서 사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경영할 수 있었다.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멀티믹서를 팔러 다녔다. 하지만 당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제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접는 테이블과 의자를 팔기 시작했지만 한 개의 주문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업의 대 실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캘리포니아의 샌 버나디노에서 8개의 멀티믹서로 엄청난 양의 밀크쉐이크를 만들고 있다는 맥도날드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때 내 나이는 52세였다.
제2부 우주시대를 지향하는 맥도날드 성공 이야기
6193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드라이브 인 식당의 등장으로 요식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대공황이 할리우드 지역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생활 태도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이 식당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으며, 업자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도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맥과 딕 맥도날드 형제는 1937년 작은 드라이브 인 식당을 차리면서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 매우 빠르게 성장한 그들은 1948년, 서비스와 메뉴를 매우 간소화하여 햄버거, 감자 튀김, 음료가 전부인 식당을 열었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간소한 메뉴와 서비스 때문에 맥도날드 형제는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보다 더 신경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 식당의 성공 비결이었다.
그 식당이 지닌 가능성에 매료된 나는 맥도날드 식당의 가맹점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가맹점 총 매상액의 1.9%를 받고, 가맹점 허가를 내줄 때마다 950달러의 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세부 조항들로 이루어졌다.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하게 설계하도록 되어 있는 맥도날드 매장의 문제점을 발견, 수정하고, 제대로 된 감자튀김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 첫 매장을 열어 수익을 얻게 되자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말해주지 않았던 계약상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기도 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장으로 출근하여 조리 과정에서의 주의점을 알려주고 청소도 하곤 했다. 매장에 쓰레기라도 떨어져 있으면 나는 화를 냈다. 나는 완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완벽'을 나는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맥도날드에서 그 '완벽'을 보여주고 싶었다.
7새로운 사람이 필요했지만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맥도날드를 위해 24시간이라도 바치겠다는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있으며, 진실하고 진정한 믿음을 주었던 해리를 만났다. 결국 주급 100달러의 조건으로 채용된 그는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는 법률 및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 실로 감탄할 만한 연구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새로운 성장 단계에 돌입하였고, 향후 몇 년을 좌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 시기에 내려졌던 기본적인 결정 중 하나가 가맹점 시스템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기업이 재료 공급 사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수익을 높이기 위해 가맹점에 판매하는 제품의 질을 저하시키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맥도날드가 우리의 계획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자영 점포를 개발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자영 점포의 개발은 총체적이고 장기적이며 전국적인 마케팅 계획의 일부로 맥도날드의 매장 위치를 선점하는 강력한 시스템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가맹점 경영자에게 맥도날드의 이름만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메리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프랜차이즈 코퍼레이션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해리는 이 계획의 현실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맥도날드에서의 순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해리는 가맹점 경영자들이 지불하는 월납액으로 대출 금리 등을 지불하고 순익을 남기는 방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가맹점 경영자들로부터 규정된 매일 납부액이나 매출액의 일정 퍼센트 중에서 큰 쪽을 받아들였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점포의 위치가 몹시 나쁘지 않는 한, 품질과 서비스가 성공을 보장하였으므로 나는 기본적인 서비스 내용을 언제나 반복하여 강조했다. 특히 새롭게 개업하는 곳일 경우에는 더욱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는 회사 경영을 담당할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8내가 찾아낸 사람은 프레드 터너였다. 훗날 맥도날드의 사장이 되고 더 나아가 이사회 회장이 될 그는 원래 가맹점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가맹점 개업을 기다리는 동안 매장에서 운영 방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을 시작했다. 지배인으로 활동하던 프레드는 우리가 전국에 25개의 지점을 새로 개업했던 1957년 1월부터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모든 지점의 개설에 관여하였다.
요리사들이 일을 하는 데 편리하도록 햄버거 빵을 낱개로 자르게 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튼튼한 햄버거 포장용 종이박스를 제작하는 등 프레드는 계속해서 조그마한 단점들을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가맹점이 개업을 할 때마다 그 지역 제빵회사에 들러 맥도날드 사가 원하는 빵에 대해 일러주곤 하였다.
맥도날드는 빵과 케첩, 머스타드 등을 다른 상점보다 더 많이 구입했기 때문에 재료 시장에서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공급업체에게 비용을 보다 더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 맥도날드에 더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비교우위의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그 중의 한 가지 방법이 대량구매였고, 한 번에 주문량 이상의 배달을 허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매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재고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패티 가격을 파운드당 10달러로 정했고, 그것은 곧 업계의 표준가격이 되었다. 그리고 프레드는 패티가 포장지에 달라붙지 않도록 최적의 포장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패티가 망가지지 않도록 패티를 쌓아올릴 수 있는 적당한 높이를 알아냈고, 고기 공급업체에 포장 단위를 정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아이디어의 목적은 요리사들의 작업이 신속하고 쉽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비용 절감이나 재고관리 등에 대한 고려도 중요했지만 조리실에서 일어나는 결정적인 일들이 우리 생산라인의 핵심공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일한 지 1년만에 프레드는 회사 구매 분야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었고, 신규 가맹점의 가입이 없는 동안 그는 기존의 가맹점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맹점을 돌아보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기록한 체크리스트는 오늘날 맥도날드의 품질 관리의 필수 요소인 가맹점 점검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9회사 운영 과정에서 필요한 대출을 받기 위한 협상 과정에서 10여 개의 지점을 묶어 하나의 회사 형태로 운영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맥도날드 본사와 상관없이 확실한 수입 기반이 보장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규모를 조금 축소하고 다른 이름으로 우리 회사 매장들을 가동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또 다른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자금 투입이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해리가 동분서주한 결과 우리는 우리 주식의 약 22.5%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3개의 보험회사로부터 150만 달러를 대출받았다.
이 대출금은 맥도날드의 60년대를 열어준 신호탄이 되었다. 물론 우리 지점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나마 150만 달러의 대출이 없었더라면 시작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960년 여름, 오하이오 콜럼버스에 우리 스스로 지은 첫 지점을 개업하였다. 그때 나는 150만 달러의 대출 건을 성사시킨 해리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는 사업을 전개하면서 많은 지점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점 운영자들에게 명백하게 공개하였다. 우리는 회사가 전 지점의 30% 이상을 소유하게 되면 경영이 어려워지고 비생산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맥도날드가 가맹점 경영자들을 위해 준비한 슬로건은 '자영사업을 하십시오. 그러나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성공 비결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