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이야기
레이 크록 지음 | 문진출판사
1963년, 우리는 전국 각지에 110개의 지점을 개설하여 햄버거 업계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총매출 1억 2,969만 달러, 순익 21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업무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자 해리는 회사의 일상적인 사무를 떠나 기업 공개 방법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는 본사에서도 중요한 업무를 맡아야 했다.
특히 해리는 당시에 유행이던 대기업과의 합병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우리 기업의 모든 상황을 관리하기는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분권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회사의 권한이나 결정권은 가능한 한 가장 아래쪽 선까지 분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지론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선에서 뛰는 사람들이 본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도 업무상의 결정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해리는 본사가 집중적인 통제력과 보다 우월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권한이 업무와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해리와의 경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제시한 방법은 전국을 몇 개의 지역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 보관 걱정을 하지 않고 대량으로 구입하여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최고 품질의 감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냉동 감자 튀김 기술의 개발로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기계로 껍질을 벗기고 그 찌꺼기가 하수도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상에서는 감자 껍질 썩는 냄새를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교회가 금육을 명한 금요일에 매출이 급감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대구를 이용한 생선 샌드위치도 개발했는데 이 메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은 계속하여 기록을 경신하며 쭉쭉 뻗어나갔고, 창업 10주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사업을 시작한 것처럼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 시기에 우리는 기업 공개를 준비했고, 주당 22달러 50으로 주식이 상장되었다. 그리고 첫 달이 지나기도 전에 주당 50달러로 뛰어올랐다. 1966년, 우리는 2억 달러의 판매 실적을 올려 다시금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는데, 전 매장의 황금빛 아치에는 '20억 개 판매 달성'이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하며 홍보자료를 배포했다. "20억 개의 햄버거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지구를 5.4바퀴나 돌 수 있는 수량입니다."
1966년 4월에 우리는 처음으로 주식 배당금을 지급했고, 그 다음 달에 있었던 기업 공개 후 첫 주주총회에서 나는 우리가 새로운 미국식 기업제도를 창조해 냈음을 선포하였다. 그렇게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면서 우리는 기존의 스타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드라이브 인 식당 대신 1966년 7월 좌석을 설치한 식당을 개업하여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대부분의 회사에서 회장이라는 직함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상품 개발과 부동산 취득에 관한 것은 내가 책임자로 나섰던 것이다.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른 후 우리의 일은 점점 더 재미있게 전개되었는데 내가 맥도날드의 장래와 회사 전체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메뉴와 특성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이제 초기의 맥도날드가 아니다. 하지만 맥도날드가 분권화되면서 구시대의 경영자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는 우리 앞에 일이 더디게 진행되도록 방해하는 사람이나 기관들도 많이 등장했지만 맥도날드는 그들과 상관없이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은 맥도날드의 새 건축양식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결국 다락 지붕이 있는 벽돌 건물, 멋진 창문, 내부 좌석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되었고, 그것이 전국에 퍼진 후 건축학 수업의 주요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맥도날드의 메뉴판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필레 오 피쉬, 빅맥, 핫 애플 파이, 에그 맥머핀과 같은 새로운 메뉴의 추가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나는 언제나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메뉴의 목록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일부 매장에서 시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떤 메뉴는 조만간 전 맥도날드 매장의 메뉴판에 정식으로 이름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사에 완벽한 실험 주방과 연구실을 갖추고 우리의 전 제품을 실험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언제나 시장의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 사업의 핵심은 바로 틈새 확장 전략에 있다. 세계 각지에는 아직도 우리가 끼어들 만한 틈새들이 널리 퍼져 있고, 우리는 우리의 사업을 확장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사실, 맥도날드의 도시 지역 진출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도시에서는 지방에서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는 사회·정치적 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여러 종류의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맥도날드를 제물로 삼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맥도날드의 깨끗하고 건전한 운영을 환영했고, 또한 맥도날드가 지역 사회를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나는 샌디에고 파드레스 야구 팀을 사고 싶었다. 이를 위한 예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계약은 길고 힘든 협상의 연속 끝에 체결되었다. 파드레스는 5년 연속 하위권에서 허덕여왔기 때문에 나는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두 시즌 동안 대부분의 게임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샌디에고 팬들의 파드레스에 대한 응원과 지지는 대단했고, 관중의 수는 매년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상태에서 만약 팀 성적이 좋아진다면 더 많은 관중들이 들어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다른 다양한 홍보 행사를 통해 야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더욱더 증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수준이 낮은 상태에 있던 구단 직원들의 급료를 인상하고,크리스마스 보너스와 성적 향상에 따른 보너스도 지급하도록 하였다. 즐겁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팀은 날이 갈수록 성적이 향상되었고 197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기량이 뛰어난 몇몇 선수들이 우리 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파드레스를 소유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는 샌디에고의 발전 가능성을 알게 된 것이었다. 샌디에고는 모든 조건이 훌륭했으며, 기후가 모든 종류의 제조업에 적합하고 노동력도 풍부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성장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나는 맥주 레스토랑, 고급 햄버거 레스토랑 체인점 사업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우리는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손을 떼야만 했다. 그리고 실패한 메뉴들도 몇 개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에 뛰어들다 보면 이처럼 가끔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비록 실패를 하더라도 그 속에서 뭔가 배울 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의 맥도날드 운영 방식에서는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요리여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로스트 비프의 경우에서처럼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맥도날드의 운영방식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제1부 맥도날드 신화창조의 토대
1234510111213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삼촌의 약국에서 소다수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작은 레코드점을 차릴 수 있었다. 사업이 실패로 끝난 후 에는 무료하게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봄 학기가 끝날 때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커피콩과 다른 신상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방문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적십자 사 구급차 운전기사로 일을 하다가 싸구려 무도회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던 손님이었던 에델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따라 종이컵 회사에 취직하여 판매를 맡게 된 후의 일이었다.나는 17년간이나 종이컵 판매를 하고 난 뒤 새로운 기회라고 여겨진 멀티믹서기를 전국의 약국, 소다수 판매점, 우유 가게에 팔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국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 지역과 판매점에 상관 없이 "캘리포니아 주 샌 버나디노의 맥도날드 형제가 가진 멀티믹서와 똑같은 것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접 그들을 찾아나선 나는 무려 여덟 대나 되는 믹서를 가지고 한 번에 40개의 쉐이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150달러나 되는 그 기계를 한 두 대 들여놓고 쉐이크를 판매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현지의 대리인과 직접 통화를 한 나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가 햄버거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척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변에는 파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복장을 챙겨 입은 종업원들은 자신의 외모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식당 주변의 모든 것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주차장까지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맥도날드 형제와 만난 나는 그들이 설명하는 판매 시스템의 간편성과 효율성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들은 메뉴 생산 과정을 최소한의 공정으로 줄여 최소의 노력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유지하였다. 맥도날드 가게에서는 오직 햄버거와 치즈버거만을 팔았는데, 모두 같은 공정으로 구워져 15센트에 판매되었으며, 4센트를 더 지불하면 치즈 한 조각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간단한 음료는 10센트, 16온스의 밀크쉐이크는 20센트, 커피는 5센트를 받았다. 맥도날드 가게가 지닌 사업성에 매료된 나는 그들에게 이 가게의 전국 체인점을 열 것을 제안했다. 1954년, 시카고로 돌아오는 나의 서류 가방 안에는 맥도날드 형제와 계약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간 종이컵 사업은 크게 성장했다. 금주법이 시행되어 술을 팔 수 없었던 가게에서 술 대신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하여 용기로서의 종이컵 시장도 커진 것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엄청난 불황에도 불구하고 나의 종이컵 판매는 기업 고객들을 확보함에 따라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감봉과 보조금의 삭감을 강요하는 회사를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을 했으며, 전반적인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또한 에델은 무척 검소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저축은 계속 늘어만 갔다.
고객 중에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더 시원하고 더욱 더 진한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내 큰 수익을 얻고 있는 랄프 설리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또다른 고객 중 한 명인 얼 프린스와 그들을 동업으로 이끌었다. 사업 제휴 결과 매일 같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던 얼 프린스는 쉐이크를 미리 만들어 금속 통에 보관했다가 판매를 했기 때문에 세척해야 하는 우유 통들이 싱크대에 가득 쌓이자 결국 쉐이크를 보관하는 금속통의 위쪽 부분을 잘라 원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통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좁아지는 부분은 슬리브 관처럼 16온스 종이컵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원통의 위쪽 부분과 컵의 가장자리가 정확하게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쉐이크를 담아 그대로 믹서기에 올려놓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얼은 기존의 싱글 믹서로는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5대의 믹서가 배치되도록 고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엄청난 양의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 발명품이자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상품이었다. 얼이 멀티믹서를 개발한 후 나는 그 기계를 회사로 가져가 실연을 해보였고, 그 기계에 매료된 회사 경영자 존 클락은 서둘러 새니터리 컵 앤드 서비스 사가 멀티믹서의 독점 공급자가 되는 계약에 사인을 했다(클락은 일선에서 새니터리 컵 앤 서비스 사의 사장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 회사의 대주주는 뉴욕에 있는 코우 형제였다. 그리고 클락은 서비스 컵 사에서 생산하는 릴리 컵의 중서부 지역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발명품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본사 대신 나는 얼 프린스와 동업을 시작하였다. 대신 멀티믹서 계약권은 내가 갖고 '프린스 캐슬 판매'로 이름 지은 내 회사의 지분 60%는 멀티믹서 계약권을 갖고 있던 새니터리 컵 사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악랄하고 지독한 조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내 목을 조이는 덫이 되고 말았다.193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드라이브 인 식당의 등장으로 요식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대공황이 할리우드 지역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생활 태도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이 식당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으며, 업자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도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맥과 딕 맥도날드 형제는 1937년 작은 드라이브 인 식당을 차리면서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 매우 빠르게 성장한 그들은 1948년, 서비스와 메뉴를 매우 간소화하여 햄버거, 감자 튀김, 음료가 전부인 식당을 열었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간소한 메뉴와 서비스 때문에 맥도날드 형제는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보다 더 신경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 식당의 성공 비결이었다.
그 식당이 지닌 가능성에 매료된 나는 맥도날드 식당의 가맹점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가맹점 총 매상액의 1.9%를 받고, 가맹점 허가를 내줄 때마다 950달러의 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세부 조항들로 이루어졌다.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하게 설계하도록 되어 있는 맥도날드 매장의 문제점을 발견, 수정하고, 제대로 된 감자튀김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 첫 매장을 열어 수익을 얻게 되자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말해주지 않았던 계약상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기도 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장으로 출근하여 조리 과정에서의 주의점을 알려주고 청소도 하곤 했다. 매장에 쓰레기라도 떨어져 있으면 나는 화를 냈다. 나는 완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완벽'을 나는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맥도날드에서 그 '완벽'을 보여주고 싶었다.맥도날드 형제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결국 270만 달러를 그들에게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 상호 등을 양도받았다. 하지만 협상의 마지막 순간에 맥도날드 형제는 샌 버나디노에 있는 레스트랑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맥도날드에 대한 나의 믿음은 거의 종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위일체나 코란, 유대 율법을 모독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맥도날드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신과 가정과 맥도날드를 믿는다. 그나마도 회사에서는 그 순서가 역전되고 만다. 100미터 경주를 생각해 보라. 달리는 동안 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해리와 나 사이에는 분쟁의 불씨가 많았다. 그 즈음 해리는 병으로 인해 회사를 떠나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회사 경영진들은 크록의 사람과 해리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게다가 부동산 개발을 점차 줄여나가던 해리가 마침내 모든 신규 지점의 개발의 일시 정지를 선언해 버렸다. 더 이상 건설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따지고 들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후 주변의 설득으로 그 의사를 철회하기는 했지만 어느 날 그는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