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자를 만든 참모들
이철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클린턴과 딕 모리스 - 아이디어를 보스의 가슴속에 심는 탁월한 세일즈맨
'고용된 총잡이'와 '뺀질이 윌리'"삐삐, 삐삐." 1994년 9월의 어느 날, '고용된 총잡이'의 호출기가 울렸다. 호출기에는 '뺀질이'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위기에 빠진 대통령 빌 클린턴이 딕 모리스에게 보내는 구원요청이었다. '뺀질이'는 대통령 클린턴의 별명이고, '고용된 총잡이'는 딕 모리스의 호칭이다. 이날의 접촉은 클린턴과 모리스의 재결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미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클린턴과 모리스, 두 사람은 1977년에 처음 만났다. 모리스가 정치 컨설팅회사를 설립한 후,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어렵게 첫 고객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클린턴이었다. 1년 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을 때, 그들은 함께 승리를 만들어 냈다. 그 이후 선거가 있을 때마다 모리스와 클린턴은 결합과 결별을 반복했다.
1980년 클린턴은 재선이 위기에 처하자 모리스에게 긴급 구원 요청을 했다. 하지만 모리스가 허겁지겁 달려갔을 때에는 상황이 너무 늦어 있었고, 클린턴은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리스는 곧바로 클린턴을 부활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1982년 그는 클린턴을 너끈하게 주지사에 당선시켰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클린턴은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고, 악마는 클린턴을 모리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고 평했다.
중간선거 대참패로 클린턴은 이제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다수당인 공화당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모리스는 클린턴에게 '미테랑 모델'을 제시하였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1985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시라크 수상과 동거 정부를 구성했다. 정당이 다르고, 이념도 다르고, 정책도 달랐다. 모든 사람들이 미테랑과 시라크가 사사건건 충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원 집정제에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정면충돌이 아니라 '파도'가 지나가게 내버려두는 방식을 취했다.
모리스는 자신의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공화당이 1994년 중간선거에서 제기한 이슈들을 신속하게 추진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공화당에게 승리를 안겨준 국민적 불만을 완화시키는 일이다. 파도가 해안을 휩쓸고 갈 때에는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그 에너지가 소진된다."
반대보다 대안 제시가 더 큰 무기모방이 모방으로 끝나면 그건 답습에 불과하다. 모방은 새로운 창조로 이어져야 한다. 환경이 다르면 변형이나 개량이 필요하다. 모리스는 미테랑 모델을 그냥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미테랑처럼 단지 지켜보기만 하지 않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즉, 공화당이 어떤 이슈를 들고 나오면 무조건 반대만 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 '안 돼'가 아니라 '그것보다는 이게 낫다'는 자세였다.
이러한 대응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안을 놓고 찬반 논쟁을 하는 것보다는 대안을 내놓고 어떤 안이 더 좋은지를 경쟁하는 구도가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모리스는 또 의회의 입법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고, 외교 영역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라고 권했다. 일하는 대통령,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정파를 초월한 통합자의 이미지를 낳은 첩경이다.
한편, 모리스가 클린턴에게 권한 중도전략의 키워드는 중산층이다. 중간선거의 열풍이 채 식기도 전인 1994년 12월, 클린턴은 '중산층 권리장전'이란 연설을 통해 중도정책들을 제시했다. 정파를 초월하여 폭넓게 움직이던 방침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클린턴은 이 연설을 통해 비로소 중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9%나 올라갔다. 중도노선을 주장한 모리스의 상큼한 첫 승리였다. 중도정책을 더 포괄적으로 제시한 1995년 시정연설로 지지도가 또다시 2% 상승했다. 이는 클린턴이 게임의 무대에 다시 복귀한 것을 의미했다.
전략가의 최대 적은 도그마클린턴은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광고에 지출했고, 또 일찍부터 광고를 내보냈다. 예비선거와 본 선거를 포함해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TV 광고에 약 4,000만 달러를 썼다. 1996년에 클린턴 선거캠프와 민주당전국위원회가 TV 광고에 쓴 돈을 합치면 8,500만 달러를 상회했다. 1992년에 치른 선거의 2배가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 투입이었다.
'광고만이 구세주다.' 이것이 모리스의 생각이었다. 클린턴이 우선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법률이나 아젠다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정치광고 개시보다 훨씬 '일찍'부터 광고를 시작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다. 클린턴에게 적대적인 언론환경을 고려할 때 국민을 직접 겨냥한 아젠다 세팅이 관건이고, 그 수단이 정치 광고라는 논리였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선거가 임박해 공화당이 내보낸 광고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클린턴의 조기 광고가 선거 주제의 '기본 틀'을 이미 형성한 것이었다. 닉슨은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조기 광고의 효과는 엄청났다. 여론조사 결과, 1996년 내내 클린턴의 지지도는 돌에 비해 평균 17%정도 앞서고 있었는데, 광고가 나간 주(洲)는 27% 앞섰고, 광고가 나가지 않은 주에서는 7% 정도 앞섰다.
대통령 스캔들을 잠재운 '가치 아젠다'란 면도칼1990년대 중반,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자신에 차 있었다. 경제에 대한 만족도가 지난 10년 이래 최고였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고 클린턴을 불신하기는 했지만, 생활수준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10∼20%의 유동층에서 확연하게 보였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기반이 약 40%라고 할 때, 이들 유동층은 결정적 관건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경제보다 도덕 결핍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은 생활 속의 가치와 관련된 문제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실직한 아버지가 부양가족들을 어떻게 재정적으로 책임질 것인지, 아이들을 쾌락과 폭력으로 내모는 TV 프로그램을 어떻게 중지시킬 것인지, 10대들의 흡연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지 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정치과정에서 무시되고 있고, 언론에 의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불만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게 정치다. 가치 아젠다는 그런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클린턴과 모리스의 정치였다. 가치 아젠다의 관점에서 수많은 정책들이 검토되고, 실행되었다. 가정 폭력 예방, TV에서 폭력 근절, 10대 임신 방지, 범죄 예방, 무단결석 막기, 컴퓨터 보급 확대, 학교의 야간 및 주말 개방, 불법 이민자 추방, 양자 입양시 세금 공제, 맑은 물 공급, AIDS 연구를 위한 기금마련 등등.
가치 아젠다는 장검이 아니라 면도칼이었다. 가치 아젠다는 8개월 동안 중단 없이 추진됐다. 언론에선 '지루한 소품'으로 평가절하 했으며, '스몰 딜(small deal)'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작은 정책들을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쏟아낸 것이야말로 클린턴이 국민의 마음을 얻은 요체였다. 국민들에게 가치 아젠다는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클린턴을 재신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유방과 장량 - 날건달 유방과 샌님 장량의 절묘한 조합
장량 읽기의 코드, 공심위상(攻心爲上)『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장량이 산책을 나갔다. 다리 부근에 이르렀는데, 남루한 노인이 일부러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장량에게 말했다. "어이, 꼬마! 저걸 좀 주워 와." 장량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뒤틀린 속내를 숨기며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노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노인은 "신겨 줘." 하며 한쪽 발을 내밀었다. 기왕에 내친걸음이라 장량은 노인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꼬마! 내가 좋은 걸 하나 주지. 닷새 후에 이 자리에 나오도록 해."
호기심을 느낀 장량이 닷새 후 이른 아침에 다리로 나갔다. 하지만 먼저 나와 있던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어른과 약속한 놈이 되레 늦어!" 노인은 다시 한 번 약속을 하자고 했다. 다시 닷새 후 장량은 잠도 자지 않고 아예 밤부터 다리 위에서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노인이 나타나서는 장량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책의 제목은 『태공병법』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 자네는 왕의 스승이 될 수 있어."
사마천은 왜 이런 황당한 신화를 『사기』에 실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 짧은 신화적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우선 장량이 몸을 철저하게 낮추었다는 점이다. 이름 모를 노인이 신발을 던져놓고 주워 오라고 하고, 그 신발을 신겨달라고 하고, 늦었다고 약속 날짜를 다시 변경하는 등의 수모에도 장량은 참고, 또 참았다. 은인자중하며 세월이 주는 시험을 견뎌내야만 천하를 경영할 경륜, 감정을 절제하는 얼음 같은 냉정함, 주변과 어울리는 처세술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다.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또 다른 것은 일면식도 없는 남루한 노인의 불합리한 지시에 순응했다는 점이다. 난세에는 특히 예상치 못한 변수나 요인에 의해 대세가 좌우될 수도 있다. 이른바 '불확실한 전환요인'이다. 돌발 변수의 출현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모른 척 외면하거나, 소홀하게 취합하는 데에 있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받고서도 묵묵히 수용한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돌출하더라도 짐짓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량이 받은 것이 병법서라는 대목이다. 병법서란 여러 사람의 지혜가 모이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간결하게 요약된 자료이다. 즉, '한 개인의 임의적 혹은 창조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검증된 지혜를 갖고 상황을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장량은 기책(奇策)이나 간계(奸計)가 아니라 상황에 지극히 합리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승리를 일구어냈다. 장량을 읽는 코드는 신산묘책(神算妙策)이 아니라 공심위상(攻心爲上)인 것이다.
건달 유방 vs 장군의 아들 항우유방은 어떤 인물인가? 건달이다. 돈벌이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닌 진짜 날건달이었다. 그런데도 패현의 하급 관리였던 소하와 조참은 그런 유방을 따랐다. 술만 먹으면 '나는 용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허풍쟁이에다가 빈털터리인 유방을 이처럼 사람들이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 곧 유방이 가진 불가사의한 힘이었다. 유방은 서른 살에 관리로 채용되었다. 자리는 정장(亭長)이었다, 정장은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정(停)을 책임지며, 경비 업무도 맡아보는 말단 관리였다. 유방이 40세의 나이에 거병하여 15살 어린 항우와 천하를 놓고 쟁패할 수 있었던 것도 유방이 정장으로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소하와 조참의 도움으로 패현의 현령을 죽이고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입성하여 패공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난세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 항우는 20살 즈음에 키가 8척(약 184cm)이나 될 정도로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막내 숙부인 항량의 손에 자랐는데, 항량은 초나라의 장군 항연의 아들이다.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7월에 항량과 항우는 거병했다. 이때 항우는 24세였다. 그들에게 범증이 찾아와 책사를 자임했다. 범증은 초나라의 강력한 반진 정서를 이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초나라 왕의 자손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초나라 회왕을 추대하였으며, 이때 유방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항우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싸움을 벌인 이후, 계속에서 항우에게 패한 유방은 형양성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었다. 장량은 형양성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활로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농성전이 성공을 거두려면 원군이 오든지 아니면 적의 후방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 적을 후퇴시켜야 하는데 지금의 대치 전선에는 그런 조건이 없다.' 이에 장량은 유방으로 하여금 관중으로 가서 다른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형양을 항우의 포위에서 구출하는 전략을 고안하였다.
유방은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남방전선을 펼치기로 했다. 남방전선이란 유방군이 무관으로 빠져나가 남방의 완성에 들어가 주변의 섭 지역을 장악하는 형태의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현재 북방의 형양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항우가 남방으로 주력군을 이동시킬 것이고, 이 때 한신을 움직여 항우의 발목을 잡자는 구상이었다.
유방은 팽월과 더불어 광역작전을 펼치며 항우 영역의 인접지역이나 보급로를 교란했다. 마침내 항우군과 유방군은 오창이 있는 광무산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명분에서는 유방이 유리했으나, 전력에서는 항우가 우세했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 양 군은 장량의 제안으로 유방이 내건 천하양분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항우도 한신과 팽월 등 제3세력의 활동이 맘에 걸렸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승부수! 승부수를 던질 때는 과감하게 던져야 한다. 광무산을 내려온 후 장량은 최후의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약속을 깨고 항우군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량은 이번에 결판을 보지 않으면 앞으로 유방이 항우와 대적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특히 세월을 더 지체하다간 북방의 한신과 팽월이 독립하는 등 군웅이 앞 다투어 일어나고, 그 결과 항우와 유방의 일대일 구도가 깨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유방군은 항우군을 추격했으나, 보기 좋게 패배했다. 1안의 실패였다. 유방은 고릉성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농성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장량은 2안을 실행에 옮겨 광역화된 전선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그 동안 장량은 한신과 팽월이 독자 세력화하는 것을 방치해왔다. 그들이 따로 마음껏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곧 항우에 대한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연합세력을 단일전선으로 모아야 했다. 문제는 한신과 팽월을 이 전선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들을 끌어들일 것인가? 장량은 한신과 팽월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진언했다. "수양 북쪽에서 곡성까지의 땅을 팽월에게 주어 왕으로 삼으십시오. 또 진나라에서 그 동쪽 바다에 이르는 땅을 한신에게 주십시오. 그리하면 이 두 사람을 지금이라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장량의 예상대로 한신과 팽월은 대군을 이끌고 유방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방은 항우를 사면초가에 몰아넣고 굴복시켰다. 항우는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오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역발산 기개세 항우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천하를 잃은 것이다. 항우와 맞붙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유방은 그마저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단 한 번의 승리로 천하를 얻었다.
장량은 시종일관 민심을 얻고자 했으며, 전투 하나하나에 매몰되지 않고 각 전투를 대륙 전체의 전쟁구도 속에서 관리하고자 했다. 항우가 싸우고 이기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장량은 시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항우가 모든 전투에 개입하고자 바쁘게 움직일 때, 장량은 유방을 중심으로 한신과 팽월 그리고 다양한 세력들을 활용함으로써 전선을 넓고 유연하게 운영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 - 희대의 간흉인가, 왕권중심체제의 설계자인가
천하경영의 뜻을 품고 백수생활을 견뎌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