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이철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무릇 참모에 굴하고 천하를 얻는다(克天下而 屈臣).'고 했다. 참모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건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적미적거리며 말도 없이 묵살하는 것은 특히 조심해야 할 금기다. 무릇 상대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만큼 확실한 동기 부여는 없다.



참모의 성패는 보스를 제대로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보스의 캐릭터와 스타일을 면밀하게 연구하여 그에 맞는 설득기법을 찾아내야 한다. 또 필요하다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어쨌든 보스를 설득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참모가 유능한 참모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되는 인물이 이세민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참모가 있었으나 단연 돋보인 것은 방현령과 두여희, 위징이란 세 명의 참모였다. 방현령은 인재를 찾아내어 천거하는 데 힘썼고, 두여희는 이세민이 외로운 처지에 빠졌을 때 그 곁을 끝까지 지킨 의리의 참모였다. 위징은 평생 동안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걸출한 참모 3인이 역할분담을 하는 체제가 갖는 강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필요에 따라, 참모의 특징에 따라 적절한 편제를 운영하는 것이 보스의 능력이다. 다만,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자신을 비춰줄 거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거울을 둘 것인지는 전적으로 보스의 몫이다.유능한 참모는 보스를 추종하지 않는다수양대군과 한명회 - 희대의 간흉인가, 왕권중심체제의 설계자인가

천하경영의 뜻을 품고 백수생활을 견뎌내다기본적으로 참모는 자리보다는 역할이나 관계를 뜻하는 용어다. 또한 보스가 가고자 하는 길의 동반자, 파트너가 참모다. 때문에 보스보다 한 발 먼저 생각해야 하고, 한치 넓게 살펴야 하고, 한 번 더 검토해야 한다. 가방이나 들고 다니고, 시킨 일이나 하며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 예스맨에게는 결코 참모란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참모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경세가 혹은 전략가이다. 경세가는 말 그대로 세상과 시대를 경영하는 사람이다. 전략가는 전체 흐름을 조절·운영하는 사람이다. 경세가의 전형인 정도전은 무려 500년 동안 지속된 국가운영시스템을 마련했다. 전략가였던 장량은 수많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경세가와 전략가는 지조를 중시한다. 보스에게 휘둘리거나,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보스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노(no)"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참모의 둘째 유형은 책사이다. 책사는 일을 도모하기 위한 책략을 짜내는 사람이다. 한명회가 대표적이다. 유능한 책사라면 계교나 권모술수에만 능해선 안 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풀어나가야 한다. 아닌 것을 고집해서도 안 되고, 틀린 것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항상 마스터플랜을 준비하고는 굽은 것을 펴주고, 막힌 것을 뚫어줘야 한다.



셋째는 모사꾼이다. 모사(謀士)는 짧은 순간에 유용한 간계나 네거티브한 술수를 꾸미는 사람이다. 이간, 음해, 강압, 왜곡, 사기, 거짓말에 능숙하다. 멀리 보지 못하고, 잔꾀에 밝다. 권력에 집착하고, 자리를 탐한다. 옳고 그름보다는 유·불리만 따진다. 아첨과 변설에도 능하다. 따라서 모사꾼은 참모 중에서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하류다. 삼국지의 가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가후는 그 빼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보스를 바꾸었다.칠삭둥이 한명회, 그는 1415년 어머니 뱃속에 있은 지 일곱 달 만에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긴 했으나 하도 허약하여 집안 식솔들이 내다버리라고 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늙은 노복이 거두어 솜뭉치에 싸서 돌본 덕에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명회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글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영특했으나, 얼굴은 영락 없는 당나귀 상이었다. 역삼각형의 얼굴에 코와 입이 유난히 컸다. 하지만 눈빛만은 영롱했다고 한다. 한명회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당대의 석학 유방선의 문하에 들면서부터였다. 유방선은 세종이 사람을 보내 자문을 구할 정도로 이름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들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내 문하에서 크게 될 인물은 한명회, 권남, 서거정이다."



한명회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대석학이 총애하는 제자로서는 의외다. 실력 때문인지 별다른 의욕이 없어 건성으로 본 탓인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에게 과거운은 없던 것 같다. 과거에 실패하고, 산천을 유람하는 가운데 한명회의 중요한 성격이 형성되었다. 등과도 못했고, 음서를 기대하기에는 이미 영락한 집안이었다. 출세를 꿈꾸기는 어려워 보였다. 정치는 해야겠는데, 길은 막혀 있다. 그렇다면 판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상에서의 배척, 이것이 한명회를 정변을 통한 입신양명으로 내몬 하나의 원인이었다.수양대군에게 전한 한명회의 메시지한명회-수양, 하륜-이방원의 파트너십을 벤치마킹하다세계는 오직 극단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치를 지닌다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루이 하우 - 참모의 예스는 먹기 좋은 독약이다

'지상의 정령'이 된 늙은 난쟁이하우, 보스의 7년 병상을 지켜내다수양대군을 만난 한명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기차게 움직였다. 수시로 수양을 만나 의논했고, 거사를 대비한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준비된 액션플랜이 들어 있었다. 그의 계획은 이방원과 하륜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항상 물리력을 순식간에 동원해 정몽주, 정도전, 형제들을 죽임으로써 위기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이른바 '이방원 해법'이다.

하륜도 조선왕조 창업에 공을 세운 형편이 아니라 찬밥 신세였기에 이방원을 선택해서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자 했다. 이방원의 장인을 통해서 소개받아 이방원의 브레인이 되었던 것이다. 출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던 한명회가 친구를 통해 수양대군을 만난 것부터 하륜의 인생 경영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하륜이야말로 한명회에겐 꿈에도 그리던 최고의 참모상이었다.



벤치마킹을 해보니, 문제는 물리력이었다.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있어야 이방원 해법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방원에게는 관례에 따라 인정되던 사병이 있었으나, 창업 60년이 지난 지금에는 관병만 있을 뿐 사병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명회는 무장력 준비에 나섰다. 홍윤성, 양정, 홍달손 등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무사들을 은밀히 모았다. 소수의 정예사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사병의 일부를 관군으로 들여보내, 관군의 요직 인사들을 포섭해나갔다.



다음으로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동시켰다. 조정의 돌아가는 사정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내시들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에게 총애를 받던 내시 엄자치와 전균을 포섭했다. 내명부 상궁들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수양대군-한명회-권남의 매치업이 안평대군-김종서-혜빈 양씨 쪽보다 약했다. 안평대군 쪽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한명회로서는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른 사실을 고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은을 가야 하는데, 김종서는 나이가 많아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수양은 이 사실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고명 사은사를 자청했다. 이미 태종 이방원이 그러했듯이, 고명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것은 정치적 이득이 자못 컸다. 밖으로 명나라에 기반을 다지고, 안으로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다만, 석 달 동안 도성을 비워야 한다는 허점이 있었다. 수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안평이 섭정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명회의 번뜩이는 기지가 묘수를 찾아냈다. 수양의 수행원으로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종사관으로 김종서와 황보인의 아들인 김승규와 황보석을 추천한 것이다. 신숙주는 안평대군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외국어에 능통한 외교통이었기에 누가 봐도 적임자였다. 이는 수양대군에게 신진 엘리트의 리더인 그를 사은사로 동행하면서 끌어안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의미가 있었다.



수양이 사은사로 결정됐다. 그리고 1453년 2월 수양대군이 귀경했다. 성공적인 사행이었다. 신숙주의 마음을 얻었고, 명나라 조정에 그 이름을 남겼다. 수양은 이제 조정의 힘을 꺾을 필요를 느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떠나기 전에 해놓은 인사를 뒤집어놓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괘씸했으며, 왕실을 강하게 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마침내 10월 정변이 시작되었다. 정변 당일의 순간순간은 매우 급박했지만, 크게 보면 정란의 구도는 매우 간단했다. 수양이 직접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면대하는 사이 수하들이 그를 철퇴로 내리쳤다. 마침 그날은 수양의 사병 출신인 홍달손이 궁궐의 감순을 맡은 날이라 8대문을 봉쇄했다. 그리고는 궐 밖에 나가 있던 단종을 감금한 뒤, 황보인 등을 불러들여 척살했다. 관군이 동원될 틈을 주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했다. 그러고 나서는 왕명을 빌어 정적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말았다. 안평대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계유정난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책봉됐다. 하지만 자청하여 말과 목장의 일을 살펴보는 종4품 자리에 머물렀다. 그 자리는 품계는 둘째치더라도 말똥이나 치우는 자리였다. 왜 그랬을까. 한명회에게 계유정난은 끝이 아니었다. 계유정난은 단지 수양이 왕위에 올라야만 마무리되는 프로세스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용의주도했다. 또한 자리를 탐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수양의 신임을 높였다.

한명회가 행한 역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정국 운영이었다. 세조 치세에는 그의 참모로서 국정 운영 전반에 조언했고, 민심 안정을 통해 세조 정권의 연착륙을 꾀했다. 세조 말에는 원상으로서 국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총괄했고, 후계 구도를 관리했다. 예종이 건강이 좋지 않자 한명회가 국사를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공신이라는 기반과 혼인관계, 그리고 치밀한 두뇌로 국정을 원만하게 관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신의 질투일까?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건강하기 이를 데 없던 루즈벨트가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었다. 1921년 8월, 피서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루즈벨트가 갑자기 오한과 두통을 느껴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음날 하반신 전체에 마비가 왔다. 의사는 소아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루즈벨트가 뉴욕 병원에 입원하자 정보가 새어나갈 기미가 보였다. 이런 땐 선수를 치는 것이 기본이다. 하우는 「타임즈」 기자를 불렀다. 그리하여 1921년 9월 16일자 신문에, 낙선한 부통령 후보가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이 신문 지면에 보도되었다. 하우의 신속한 대처로 신문은 루즈벨트의 병세를 경증으로 취급했으나, '루즈벨트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의사도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앉기도 어려울 것'으로 진단한 상태였다.



그 어려운 시련에도 꿈을 잃지 않고, 의지를 꺾지 않은 루즈벨트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욱 대단한 사람은 소아마비에 걸려 누가 봐도 정치생명이 끝난 이를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하우다. 이미 50의 나이가 된 그로서는 하루가 급하고, 일각이 여삼추였을 텐데, 하우는 감내하고 헌신했다. 그는 루즈벨트를 간호하고, 그의 아이들을 돌보고, 그의 이름이 정치권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기간이 무려 7년이었다.키는 유난히 작고, 형형한 눈빛으로 사람을 쏘아보며, 얼굴의 흉터는 보기에도 섬뜩했고 목소리는 낮고 메말랐다. 심한 천식증으로 기침을 하면서도,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45kg 정도의 바싹 마른 체구에 헐렁한 양복을 입은 사람. 그가 바로 루이 하우다. 오늘날 미국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킨 인물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라면, 그 루즈벨트를 만든 인물이 바로 하우다.



1912년, 전도양양하던 주(洲) 상원의원이던 루즈벨트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쓰러졌다. 이대로 선거를 포기해야 하나? 루즈벨트의 심정은 암담했다. 절망의 순간 루즈벨트는 유난히 눈이 아름다운 한 사내를 떠올렸다.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 기자였다. 그 사람은 기자생활을 통해 농촌문제를 꿰뚫고 있었다. 농촌이 대부분인 자신의 지역구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루즈벨트는 그에게 운명을 한번 맡겨보기로 했다. 하우는 루즈벨트의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하지만 후보도 없이 과연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하우의 정치인생은 이처럼 불가능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우는 후보도 없는 선거를 혼자서 거뜬하게 치러냈다. 믿을 수 없게도 루즈벨트를 당선시킨 것이었다. 돈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도 루즈벨트가 정력적으로 선거운동을 한 2년 전보다 많은 표 차로 이겼다. 1912년, 하우는 위기의 루즈벨트를 구하는 것으로 그와의 운명적인 파트너 인생을 시작했다. 그 해 루즈벨트는 30세였고, 하우는 41세였다.



그렇다면 하우는 후보도 없는 불가능한 선거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그는 농민, 노동자, 그리고 보스체제 등 몇 가지 이슈에 집중했으며, 곧바로 의회로 찾아가 농촌개혁과 관련된 법안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루즈벨트의 정책으로 제시했다. 루즈벨트는 농민의 친구로 받아들여졌다. 후에 루즈벨트가 상원농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되고, 농촌개혁법을 통과시키자 농민과 그의 유대는 더욱 깊어졌다."제가 돌아왔습니다." 1924년 절름거리는 다리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루즈벨트는 그렇게 선언했다. 루즈벨트가 단상으로 힘겹게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시간은 하우에게 지난 3년보다 더 길고 고통스러웠다. 마침내 루즈벨트가 단상을 짚으며 "제가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우는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재기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루즈벨트를 주지사로 보내자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8년 새해가 밝았다. 이제 루즈벨트는 부목을 하고서 대여섯 걸음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결심한 스미스가 루즈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 주지사에 입후보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하우는 출마에 반대했다. 스미스가 공화당 후보인 후버에게 질 것으로 판단하고, 낙선이 뻔한 선거에 면피용 후보로 차출당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우가 염두에 둔 루즈벨트의 정치 일정은 1932년 주지사 출마, 1936년 대통령 출마였다. 나이 60을 코앞에 둔 사람이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지! 사실 1929년 대공황을 초래한 책임으로 공화당이 몰락하기 전이었기에 하우의 계산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루즈벨트의 동의도 없이 그를 주지사 후보로 선출해 버렸다.



루즈벨트의 상대는 강적이었고, 전국적인 분위기도 공화당의 우세였다. 그래서 하우는 두 가지 전략에 집중했다. 우선 전(前) 주지사 스미스의 이름과 업적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자신이 왜 출마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스미스 업적을 주로 거론했다. 다음으로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했듯이 농촌 지역을 훑고 다니는 전략이었다. 원래 루즈벨트는 농촌 지역에서 강했다. 하우는 이 외에도 노동계의 지지와 여성 표를 효과적으로 동원했다. 하우는 선거 전략을 짜고, 일일 계획을 수립하며, 여론 동향을 매일 체크하고, 수없이 도착하는 편지에 루즈벨트의 이름으로 답장을 보내는 등 선거를 총괄했고, 모든 일에 개입했다.



마침내 루즈벨트는 신승했다. 불과 2만 5천 여 표, 0.6% 차이의 승리였다. 뉴욕 주지사를 지낸 대통령 후보 스미스는 뉴욕 주에서 오히려 공화당에 패배했는데, 14년이나 뉴욕 정계를 떠나 있던 루즈벨트는 승리했다. 선거 운동을 농촌 지역에 집중하고, 스미스의 인기에 기대어 도시 지역을 공략한 전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