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렁청진 지음 | 더난출판
사람을 알아보면 길이 보인다



인내로 천하를 얻고 자애로 다스리다 - 이세민




‘자애’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처럼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원칙이 없는 애정으로, ‘덕’보다 한 단계 더 높고 고귀한 가치이다. 따라서 개인적 수양에서의 자애는 일종의 정신과 지혜의 최고 경지인 동시에 처세를 위한 기지이기도 하다. 자애로써 사람들을 감복시킨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애를 충분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598~649)이 신하 장손무덕에게 보여준 것이 자애의 좋은 본보기이다. 장손무덕은 진숙보 등과 함께 현무문 정변에 참가하여 이세민이 권력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세민은 황위에 오르자마자 그에게 궁녀들을 하사하고 항상 궁궐 내에 거처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대했다. 후에 장손무덕이 관직을 이용해 뇌물을 받아 고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의 법률대로라면 중벌에 처해야 했지만 태종은 그를 내칠 수 없었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장손무덕은 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개국공신이오. 한 가지 흠이라면 학문이 깊지 못한 것이오. 그가 고금의 서적을 읽고 자신을 살피는 거울로 삼았더라면 지금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을 것이고. 그가 뇌물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짐도 몹시 당혹스럽소!” 그러면서도 태종은 그를 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정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비단 열 필을 하사함으로써 장손무덕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했다.

그러자 대리시소경으로 있던 호연이 간언했다. “장손무덕이 죄를 받아 마땅한데 처벌은커녕 어째서 비단까지 하사하십니까?” 태종이 대답했다. “사람에겐 기본 성품이 있는 만큼 처벌을 받는 것보다 이유 없는 상을 받는 것이 더 괴로운 법이오. 그래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금수에 불과할 것이고, 정말로 그가 금수에 지나지 않는다면 끌고 가서 목을 벤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손무덕이 이효상과 사사로이 결당하는 죄를 범하자, 이번에는 태종도 그를 보호할 수 없어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1년 후 태종은 그의 생활 형편을 알아보게 했는데 장손무덕이 매일 자책하며 술에 취해 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정의 신하들도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그에게 다시 택주자사의 관직을 주고 봉작과 식읍을 부활시켜 주었다.

한편 이세민이 천하를 얻은 것은 인내 때문이었다. 고조 이연의 태자 이건성이 동생 이세민을 연회에 초대하여 독을 탄 술을 먹인 적이 있었다. 이 술을 마신 이세민은 복통을 일으켜 집에 돌아와 피를 한 대야나 쏟은 다음에야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또 한번은 이건성이 이세민과 함께 사냥을 가면서 이세민에게 특별히 말 한 필을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이세민이 말을 타고 사슴 떼를 쫓기 시작한 순간 광분한 말이 발작을 일으켜 이세민을 허공으로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에도 이세민을 죽이려는 이건성의 음모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이 모든 박해와 압박을 참고 견디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현무문 정변’을 일으켜 일거에 태자 이건성과 그 잔당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부황 이연을 제압하여 황위에서 끌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인내의 도가 나라를 세우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인내의 가장 큰 용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균형이 중요하다



재상과 명장의 능력을 겸비한 인재 - 왕수인




다양한 장군의 품격 가운데 최고의 경지는 유장(儒將)이라 하겠다. 문무를 겸비한 유장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상호보완적 기능을 수행하여 그 만큼 인격적 매력을 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진정한 유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인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명대의 대학자였던 왕수인(1472~1528)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유장이었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였고 황실에 대한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명 무종 정덕 14년(1519), 강서에서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영왕 주신호가 각지의 중진을 함락시키고, 불과 사흘만에 파죽지세로 구강 등지를 장악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큰 혼란에 빠졌지만 군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할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였던 왕수인이었다.

감주를 출발하여 임강에 도착한 왕수인은 임강 지부에게 성을 지킬 책략을 지시해 주었다. “주신호의 용병에는 상중하 세 가지 책략이 있소. 그가 곧장 경사로 쳐들어간다면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될 텐데 이것이 상책일 것이오. 그 다음에는 남경을 점령하여 장기전 태세를 갖출 수 있는데, 이것도 큰 피해가 우려되며 이는 중책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그가 남경을 사수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하책이 될 것이오. 그때 가서 사방에서 공격하면 그는 항아리 속의 자라가 되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다양하게 조치를 취하시오.”

그리고 나서 왕수인은 길안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반군의 추격을 받자 그는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부하에게 자신의 관복을 입고 타고 있던 배에 남아 있게 했다. 주신호의 부하들은 이 배를 뒤쫓아 붙잡았으나 왕수인이 이미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되돌아갔다. 도중에 주신호가 공격하여 성지를 함락시킬 것을 우려한 왕수인은 밀정을 보내 조정의 밀지를 가장하여 양광과 호양의 어사와 남경과 북경의 병부는 즉시 장수들을 출동시켜 비밀리에 요충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주신호의 대군이 밀려오면 이들을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고는 이를 주신호에게 일부러 알리려고 우령 몇 명을 고용하여 이런 명령이 담긴 서한을 옷섶에 지니고 다니게 했으며, 영왕 태사의 가족들을 사로잡아 배에 태우고는 이런 명령을 우령에게 내리는 것을 듣게 했으며, 그들을 일부러 놓치게 하고서는 이들이 몰래 도망쳐 주신호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주신호는 우령들을 붙잡아 그들의 옷 속에서 서찰을 발견하고는 정말로 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오판하고 출병을 망설였다.

한편 무사히 길안에 도착한 왕수인은 길안 지부 오문정 등과 함께 주신호에 대한 방어 전략을 상의했다. “적병이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남경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들은 이미 내 계략에 의해 출병을 지연시키고 있을 것이오. 따라서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확보하고 병기와 배를 넉넉하게 갖춰 결전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오.”라고 지시했다.

주신호는 왕수인의 계략에 말려 감히 남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왕수인도 여전히 성을 지키면서 출병하지 않자 오문정은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지금은 반군이 성안에서 방비에 전념하고 있으니 공격이 쉽지 않소. 하지만 내가 공격을 미루면서 수비가 허술한 척 하면, 주신호는 참지 못하고 공격해 올 터이니 그때 가서 남창성을 수복하고 그의 본거지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가 다시 병력을 돌릴 때 양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오.”

주신호는 남창을 사수한 지 열흘쯤 지나도 관군의 공세가 시작되지 않자 정찰병을 보내 상황을 파악한 후에야 자신이 왕수인의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6만의 군사를 모아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남창에는 최소의 병력만 남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주신호는 안경에서 관군의 저항에 부딪혀 전진하지 못하고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 사이에 왕수인은 군대를 이동시켜 남창의 각 성문을 공격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북을 한 번 울리면 성문에 접근하고 두 번 울리면 성에 오르기 시작한다. 북을 세 번 울릴 때까지 성에 오르지 못한 자는 무조건 참수하고 네 번 울렸을 때 성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 부대장까지 참수할 것이다.” 마침내 결사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수비하는 적군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수인은 남창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안경성을 공략하던 주신호는 남창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때 이사실 등은 주신호에게 남창으로 군대를 돌려서는 안 되며, 안창을 포기하고 곧장 남경으로 가서 황위를 찬탈하여 천하를 호령하기만 하면 강서는 저절로 굴복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정확하고 결단력 있는 전략이었으나, 생각이 모자란 주신호는 이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려 남창으로 달려갔다. 결국 왕수인의 계략에 의해 주신호는 양쪽에서 공격하는 관군들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여 자결을 하고 말았으며, 주신호의 수하에 있던 장수들은 생포되고 사상자가 수 만에 달했다.

중국 군사사에서는 왕수인을 뛰어난 장수로 평가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가 훌륭한 군사전략가였음에는 이견이 없다. 그는 매사에 실제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이론만 중시하고 실제를 무시하는 유생들의 일반적인 단점을 극복했고 병법의 운용에 있어서도 적이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권한과 책임의 조화가 필요하다



국가와 군주를 혼동한 인재 - 주아부




주아부는 병법에 통달했고 군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난 명장이었지만 황제와 황실 인척들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한 문제 2년(BC 162), 주아부는 조후에 봉해졌고, 3년 전에는 하내 군수가 되었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민정과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최고 장관인 하내 군수로 부임하여 임기 동안 문무 양방으로 커다란 공적을 세웠고, 개인적으로도 군정사무 각 분야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한 문제는 매우 검소하고 신중한 성품을 지닌 황제로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국방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그는 직접 서군과 북군을 시찰했는데, 가는 곳마다 군대가 달려 나와 영접했다. 문제는 이럴 때 흉노가 기습해오면 어떻게 대적하겠느냐고 그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하지만 주아부의 군대를 방문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문제 일행이 주아부가 주둔하고 있는 세류에 도착해보니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창과 활을 들고서는 황제의 행렬을 가로막았다.

황제의 수레를 책임지는 자가 “천자의 수레가 도착했다.”고 외쳤으나 영문의 출입을 책임지는 군사는 “장군의 명령을 들은 바 없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는 수 없이 문제가 사람을 주아부에게 보내 “황제께서 친히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안다.”고 말하자 그제야 주야부는 명령을 내려 영문을 열게 했다.

황제가 영내로 들어왔는데도 주아부는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지 않고, 문제를 향해 간단히 읍을 하면서 “갑옷을 입은 상태라 엎드려 절을 올리지 못하니 군중의 예로 대신 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비로소 주아부의 투철한 군인 정신에 감동하여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주아부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문제는 주아부가 국가와 군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도 지나쳐 내심 황제의 존엄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자존심이 상했던 문제는 주아부를 중용할 수는 있어도 그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가 대사를 고려하여 임종을 맞이하여서는 태자에게 “장차 나라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면 주아부에게 중임을 맡기도록 하거라.”고 유언하였다.한 경제 초년에 오와 초 등 7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가 닥치자 경제는 문제의 유언에 따라 주아부를 태위에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반군을 진압하게 했다. 과연 주아부는 경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출병한 지 3개월 만에 오와 초의 반군을 평정하고 나머지 다섯 나라의 군대도 괴멸시킴으로써 7국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경제는 7국의 반란을 평정한 주아부를 중용하게 되었고, 경제 전원 7년에 주아부는 문관의 최고 관직인 승상이 되었다. 하지만 승상은 조금만 잘못해도 함정에 빠지거나 심지어 주살당할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는 자리이기도 했다. 주아부 같은 성격으로는 애당초 오래 보전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다. 가장 먼저 주아부를 골치 아프게 한 인물은 양왕 유무였다.

주아부가 반란을 평정할 당시 오초 연합군은 양왕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위기에 처한 양왕은 한 경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경제는 주아부에게 양왕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었다. 그러나 주아부는 전략상 양왕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오초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는 양왕을 내버려둔 채 오초 연합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양왕과는 원수가 되고 말았다. 양왕은 매번 조회가 있을 때마다 태후에게 주아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상과 모함을 일삼았다.

경제는 장자 유영을 황태자로 봉하였으나 그의 모친에 대한 총애가 사라지자, 왕황후의 아들인 유철을 태자로 교체하게 되었다. 주아부는 태자에게 과실이 없는 한 마음대로 태자를 폐하고 세우다가는 큰 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권모술수를 모르는 주아부는 고집스럽게 경제에게 맞섰으나, 경제는 태자를 폐하고 세우는 문제는 자신의 가정사인 만큼 다른 사람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주아부의 지나치게 강경한 성격이 황제로 하여금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경제 중원 3년, 태후는 경제에게 왕황후의 오빠인 왕신을 제후에 봉해줄 것을 요구했다. 외척을 제후에 봉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경제는 주아부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하고 먼저 그를 찾아갔다. 과연 주아부는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고조 황제께서는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거나 공적이 없는 자가 제후에 봉해지면 천하가 함께 이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는 주아부의 반대에 크게 격분했지만 신하들 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묵묵히 속으로 분을 삭였다. 주아부는 왕신을 제후에 봉하는 일을 저지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경제와 갈등이 깊어졌고 왕신에게도 커다란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이가 좋았던 양왕과 왕신은 손을 잡고 주아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의 여섯 부락 수장들이 투항해왔다. 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그 가운데 ‘타인’이라는 자는 이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한나라 장수 노관의 손자였다. 주아부는 노타인을 열후에 봉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는 경제에게 말했다. “그의 조상은 한조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항했는데, 지금은 다시 흉노를 배반하고 한조에 투항하려고 합니다. 그를 열후에 봉한다면 신하로서 군주에게 불충했던 책임을 어떻게 물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경제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경제는 주아부의 건의를 묵살하고 여섯 사람을 전부 열후에 봉했다. 사실 주아부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경제가 그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그의 뜻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계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주아부는 경제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사직 의사를 밝혔고 경제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비록 황제의 미움을 사긴 했지만 적지 않은 공로와 위세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는 그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주아부가 아들에게 자신의 장례 집기 등을 준비시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호상에 사용하기 위해 5백 벌의 갑옷과 방패, 목재를 다량으로 구입했는데, 이것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를 구실로 경제는 주아부를 당장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주아부는 투옥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들이 장례 준비를 그처럼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문관이 물었다. “왜 모반을 획책했는가?” “내 아들이 사들인 물건은 모두 장례에 쓰기 위한 것인데 어찌 모반을 운운하는 것이오?” 심문관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는 경제가 주아부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꼬투리를 잡아야 했다. 결국 그는 어이없는 억지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대는 죽어서 모반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주아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닷새 동안 음식을 거부하다가 굶어죽고 말았다. 일대 명장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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