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오만한 CEO 비틀스

래리 레인지 지음 | 나무생각
"나는 개처럼 열심히 일했다."(〈A Hard Day's Night〉에서, 1964년) : 1963년 2월 11일 록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라이브 공연을 시작한다.〈There's a Place〉로 시작해서 12시간 후에는 10번째이자 마지막 노래인〈Twist and Shout〉로 마무리짓는다. 40여 년 전의 음반 녹음은 하루만에 라이브로 녹음을 끝내는 감동의 현장인 것이다. 이런 모습은 비틀스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준비했고, 목표를 향해서 남아 있는 한 줌의 에너지까지 모두 쏟아냈다. 비틀스가 첫 앨범의 녹음에서 보여준 열정은 경이로움이었다. 비틀스는 '엘비스보다 더 뛰어난 록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어떤 난관 앞에서도 좌절이나 포기를 생각하지 않았다. 비틀스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Love Me Do〉를 녹음한 시기부터〈Strawberry Fields Forever〉를 발표한 때까지 기껏해야 4년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이들의 음악적 발전은 눈부실 정도였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아갔던 것이다.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정신과 그들의 노래를 대중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전해 준다는 비틀스의 원칙에 대해서 폴은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비틀스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가졌고, 그 목표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Mach Schau! Mach Schau!"(비틀스가 독일에서 6∼8시간 연속으로 공연했을 때 군중이 화답한 환성) : 비틀스처럼 되려면 어느 정도의 끈기와 에너지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1960~1961년 비틀스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클럽 밴드로 일하던 시절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함부르크는 비틀스가 체력과 끈기와 힘을 키웠던 인큐베이터였던 셈이다. 폴은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리버풀에서는 기껏해야 한 시간 짜리 쇼에, 정선된 곡을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는 하룻밤에 8시간씩 새로운 방식의 공연을 마음껏 실험해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단순한 로큰롤 연주를, 수많은 군중과 함께 호흡하는 이벤트의 밤으로 바꾸어 놓았다. 군중이 외쳐대는 "Mach Schau! Mach Schau!"("Make Show! Make Show!"라는 뜻이다)라는 함성에 비틀스는 더욱 격정적인 연주를 해낼 수 있었다. 1962년 고향의 청중에게 돌아왔을 때 비틀스는 더 이상 과거의 비틀스가 아니었다. 고향의 팬들도 처음으로 그들에게 환호하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당신은 그것을 할 수 없어요."(앨범≪A Hard Day's Night≫에서, 1964년) : 함부르크 시절은 비틀스에게 또 하나의 교훈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사(戰士)의 정신'이다. 외국의 도시에서 거의 무일푼으로 봉사하면서 힘겨운 밤을 이겨낸 후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단호한 결단력! 이것은 비틀스의 상징이 되었다. 힘있는 사람이 그들의 꿈과 다른 것을 요구할 때마다 단호히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전쟁은 음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과 첫 음반 계약을 맺은 직후에 있었다. 문제의 노래는〈How Do You Do It〉이었다. 내면의 감정을 작품에 솔직히 드러내던 비틀스는 이처럼 낯간지러운 감상적 노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How Do You Do It〉을 비틀스식으로 녹음함으로써 성의를 보이고 조지 마틴 앞에서〈Please Please Me〉를 연주했다. 그제야 조지는 비틀스의 음악성을 올바로 이해하고〈How Do You Do It〉을 포기하고 말았다.



≪With the Beatles≫의 재킷에서 4인방의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음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재킷이라 평가되지만, 당시 음반 회사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비틀스와 EMI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비틀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의 목표를 스스로 관리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용기의 승리였다. 그밖에도 비틀스는 확고한 비전으로 세계 음반업계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초인적인 노력, 끈질긴 인내심, 불굴의 의지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이다."친구여, 야단을 떨거나 다툴 시간이 없어요."(〈We Can Work It Out〉에서, 1965년) : 비틀스의 방식에서 경쟁은 예술적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 상대를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가짐이 비틀스를 성공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존과 폴은 작사·작곡가로서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비틀스의 두 기타리스트, 존과 조지가 벌인 우호적인 경쟁도 볼 만했다. 이런 우호적인 경쟁의식은 음악 세계의 동료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존이 미국에서 찾아낸 선의의 경쟁자는 밥 딜런(Bob Dylan)이다. 마찬가지로, 비틀스의 사운드가 음악의 미래임을 깨달은 밥도 1965년 말에 솔로 활동을 포기하고 록밴드를 결성했다.



비틀스는 작품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했다. 롤링 스톤스가 곤경에 처했을 때, 최고의 히트곡을 선물로 주었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작업 중에 있던 〈I Wanna Be Your Man(그대의 남자이고 싶어요)〉을 롤링 스톤스의 음색에 맞도록 편곡해서 주었다. 롤링 스톤스와의 우호적인 관계 때문에 비틀스의 세계가 위협받지는 않았다. 1971년 롤링 스톤스가 비틀스를 험담하는 발언을 했을 때 존은 이렇게 대응했다. "롤링 스톤스의 ≪Satanic Majesties≫는 ≪Sgt. Pepper≫를, 〈We Love You〉는 〈All You Need Is Love〉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롤링 스톤스는 음악계의 혁명가들이고 비틀스는 아니라고? 그런 평가에 내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틀스는 경쟁을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생각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경쟁이어야 했다.당신의 기업을 창업하라위기 관리"난 태양을 쫓아가리다."(앨범 ≪Beatles for Sale≫에서, 1964년) : 1966년 비틀 마니어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폴 매카트니가 통솔력을 발휘했지만, 갓 출범한 때부터 1966년까지 비틀스의 실질적인 리더는 존 레넌이었다. 비틀스가 존에게 리더십을 기대했던 이유는 바로 존이 갖춘 카리스마와 재능, 위트 때문이었다. 존은 16살의 설익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폴이 많은 점에서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폴을 내 그룹 쿼리맨(Quarrymen;'채석공'이란 뜻)에 데려온 사람은 폴의 친구이면서 내 친구였다. 나는 폴의 재능을 즉시 알아보았다. 당연히 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룹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그 결정이 있은 후 존은 다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느 날 폴은 조지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기타 연주를 들었을 때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조지를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쿼리맨의 기존 멤버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지의 현란한 기타 연주법은 전 세계의 기타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비틀스가 성공한 이유를 또 하나 찾아냈다. 존은 팀원을 동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리더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가야 했다." 이것이 존의 리더십이다. 존의 의사결정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또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냉철함이다! 비틀스가 첫 음반을 계약할 시점에 옛 밴드 멤버인 피트 베스트를 해고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들이 염두에 둔 드러머 링고 스타는 이미 '로리 스톰과 허리케인(Rory Storm and The Hurricanes)'이라는 그룹의 정식 멤버였다. 또한 피트가 비틀스의 인기를 높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문가의 귀에 피트의 드럼 솜씨는 완벽하지 못했다."내 방식도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세요."(〈We Can Work It Out〉에서, 1965년) : 존과 폴은 작사·작곡을 협업함으로써 비틀스를 로큰롤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막강한 그룹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다. 각자가 로열티를 50%나 포기하는 셈이었다. 비틀 마니아 시대에 공동 작업이 간혹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재협상은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Yesterday〉이다. 폴 매카트니가 단독으로 창작해낸 불후의 곡이지만 이 음반의 저작권 표시를 보면 '레넌과 매카트니'로 쓰여 있다. 더 큰 꿈의 성취를 위해서 희생했던 정신은 저작권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폴 매카트니가 비틀스에서 처음 맡았던 악기는 리드 기타였다. 1961년 누구도 베이스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은 기꺼이 베이스 기타를 맡았고, 결국 로큰롤의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존경받는 베이스 연주자가 되었다.



폴의 기억에 따르면 존은 칭찬에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었다. 남성다운 기질의 항구 도시 리버풀에서 자란 탓에 그들은 무언의 격려로 만족했다. 아마도 앨범 ≪Rubber Soul≫에 실린 한 곡을 화제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런데 존이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부르는 것보다 자네가 부르는 것이 훨씬 멋지게 들리더군!'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 번도 그와 같은 칭찬을 존에게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혹 불쑥 던지는 조용한 칭찬은 예상 외의 효과를 갖는다. 비틀스가 해체될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존의 완벽하게 계획된 칭찬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존은 칭찬을 최대한 아끼는 동시에 개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주었다. 그것이 존의 칭찬법이었다.



팀의 칭찬은 연대감과 단결력 그리고 충성심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1964년 조지는 비틀스의 유대감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다. "우리 개개인이 뛰어난 음악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룹으로는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룹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비틀스는 모든 일을 함께 처리했다. 녹음실에서나 라이브 공연장, 심지어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갈 때도 각자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며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비틀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간단하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민주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라.""자연스럽게 행동하라."(앨범 ≪Help≫에서, 1965년) : 비틀스가 가르쳐 주는 성공의 지혜는 자신에게 솔직할 때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당신 본연의 것을 지켜라!" 비틀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R&B, 로큰롤, 솔(soul)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추구했다. 비틀스가 다른 그룹들과 달랐던 또 하나의 특징은 성적인 매력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중요시한 내면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들의 재능과 인간적 매력을 앞세웠다. 본능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필요할 때 맞서 싸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론은 그들에게 비난을 퍼부어댔고, 1면을 장식해 줄 실수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들은 스타가 되고 싶은 욕심에 굶주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목표가 자존심까지 버려야 할 정도로 소중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내가 그대와 사랑에 빠진다면!"(〈If I Fall〉에서, 1964년) :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재능과 열정을 쏟아 부을 팀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비틀스가 성공한 첫 번째 요인은 네 사람의 핵심 멤버였다. 비틀스가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듯이 그들도 각자가 종사하는 업종에 필요한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과 비틀스를 맺어준 것은 정직과 성실 그리고 충성심이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27살이던 1967년 비틀스를 만나게 되었고, 32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매니지먼트 계약서를 한 번도 체결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비틀즈의 측근에 있었던 두 번째 인물은 음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이었다. 코미디계에서 쌓은 경험으로 색다른 음반을 제작하려는 성향 때문에 EMI에서도 엉뚱한 사람으로 평가되었고, EMI는 팔로폰이란 자회사의 운영권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다. 1962년 런던의 모든 음반 회사가 비틀스에게 고개를 돌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지는 비틀스와 계약을 끝내고 그들을 마케팅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Love Me Do〉를 청했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폴이 리드싱어를 맡아주고 존이 하모니카로 뒷받침해 준다면 멋진 연주가 될 듯 싶었다. 폴이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존이 반음을 낮춰 거의 콧소리에 가까운 독특한 음색으로 화음을 넣었다. 나중에 비틀스 음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화음이었다. 그것이 비틀스의 마케팅 포인트였다! 비틀스가 성공했다고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계약대로 EMI에서만 봉급을 받았을 뿐이다." 조지는 비틀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각자 솔로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매니저로서, 조지 마틴은 음반 프로듀서로서 비틀스가 세계 정상의 로큰롤 그룹으로 우뚝 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비틀스와 가까웠던 사람들을 좀더 살펴보자. 앨프 비크널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즉 비틀스가 세계 순회공연을 다니는 동안 로드 매니저와 운전사 역할을 한 사람이다. 비틀스가 꿈에도 그리던 일, 즉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는 캘리포니아의 집으로 찾아간 날 밤이었다. 모두가 엘비스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것을 보고 앨프는 링고에게 몸을 기대며 이렇게 말했다. "엘비스는 한 사람인데 수십 명의 도움을 받고 있네요. 그런데 당신들은 넷이나 되는데 일하는 사람은 우리 셋뿐이군요(우리 셋은 닐, 맬, 그리고 앨프였다)." 비틀스가 엄청난 인기를 누릴 때도 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인용한 일화이다. 그들은 비틀스의 꿈을 공유했던 까닭에 초인적인 능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비틀스라는 위대한 그룹을 탄생시킨 주역일지도 모른다."그대, 그대는 알아요. 그대는 내 이름을 알아요."(〈You Know My Name〉, 싱글로 발표된 〈Let It Be〉의 뒷면, 1969년) : "당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해 낸 이미지를 끝까지 지켜라!" 비틀스는 마하트마 간디의 이런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사실 비틀스에 참여하기 전부터 리처드 스타키라는 본명을 바꾼 링고 스타를 제외하면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같은 이름들은 연예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다. 물론 그룹의 이름인 '비틀스(beatles)'에서는 천재적 발상이 번뜩인다. 누가 그 이름을 처음 제안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텍사스 출신의 로커였던 버디 홀리를 좋아했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버디 홀리의 백업 밴드 이름이 크리켓(Crickets)이었기 때문이다.(크리켓은 '귀뚜라미'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Beetle'을 'Beatle'로 살짝 바꾸었다.(Beetle은 '딱정벌레'라는 뜻이지만, Beatle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름을 지어내는 비틀스의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관련된 사업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애플 레코드 사'란 이상한 이름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름과 초록빛 사과를 이용한 로고는 폴이 소장했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추리 게임〉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이다. 폴의 설명을 들어 보자. "우리가 거둔 성공 중 하나가 '애플'이란 이름의 저작권이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도용해서 부당 이익을 챙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대로 적중했다. 애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