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방법 포르셰
슈테파니 빈터 지음 | 룩스북
1. 목표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포르셰의 CEO인 벤델린 비데킹은 열심히 포르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전체 직원의 1/3을 줄였다. 이때 회사를 떠난 중간 경영진의 비율은 이보다 더 높았다. 비데킹의 구조조정은 철저했으며 그는 오직 이것만이 성공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의 확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비데킹은 1992년에 회사를 맡고 난 후, 4일만에 약 700명의 인원을 감축했으며, 그 이후에도 추가적으로 1,850명의 인원을 더 감축했다. 6개의 경영 파트 중에서 2개를 포기했고, 프로핏 센터(profit center) 모델을 확산시켜 비용을 3년 안에 1/3로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포르셰에서는 비데킹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원감축을 통한 변화가 시도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급진적인 개혁을 위한 총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거나 개혁과정을 일관되게 이끌고 나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런 시도들은 오히려 회사의 존립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때 포르셰의 상황은 '낙원'과도 같았다. 상당기간 동안 구조의 효율성을 꾀하거나 그를 위한 관리감독을 시행할 필요조차도 없을 정도로 자금이 충분하였다. 회사의 경영이 몇 년 동안 매우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흑자가 계속되었다. 포르셰가 시장의 법칙에 따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위기가 절정에 다다르고 난 뒤였다.
비데킹은 간략하면서도 구체적인 생존전략을 수립하였다. 첫째로 자동차 모델을 재정비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비용을 대폭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공격적인 판매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간단한 생존전략에 담겨있는 요점은 기존의 재고나 채무에 연연하지 않는 미래 지향적인 태도였다. "채무에 매달리고 잘못을 과거에 돌리려 해서는 현재의 문제점들을 처리할 수 없다. 현재의 부진에 대한 원인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곧바로 개선방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데킹은 말했다.
비데킹은 포르셰의 경영을 맡게 되자 곧바로 기술자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도요타와 다른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을 방문하여 주목할 만한 새로운 방식들을 철저하게 기록하였다. 돌아올 때 일본의 전문가들을 독일로 초빙하여 미시적 분석프로그램을 진행시켰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생산과정의 각 단계를 효율적으로 개선하였다. 2년 뒤 수익과 판매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였을 때, 비데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포르세의 실적은 크게 개선되었다.
2.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라벤델린 비데킹은 우선 생산 공정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부품 납품업체를 시스템 공급업체로 키우고 내부 작업공정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팔리지 않는 상품의 생산라인을 과감하게 중단시켰다. 이 결과 주력 상품인 911 모델은 더욱 성장했고, 저렴한 모델인 포르셰 복스터도 시장에 선보일 수 있었다.
포르셰는 과연 무엇인가? 혼란스러운 모델 개발, 경영혁신 등을 겪으면서도 포르셰는 여전히 스포츠카로 남았다. "다른 브랜드의 경우 고객은 그 브랜드의 대표적인 자동차를 금방 떠올리기 힘들다. 단지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포르셰가 필요하지 않다. 포르셰를 선택하는 사람은 이 자동차 안에 담겨 있는 정서와 가치도 함께 원한다."라고 비데킹은 지적했다.
비데킹은 브랜드의 핵심적 요소인 최고의 품질, 성능 그리고 고급 원자재를 유지하면서도 과도하게 사치스러운 내·외장을 벗어 던졌다. 포르셰라는 브랜드에 독특하고 올바른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의식이 동반된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 조류에 부응했다.
1993년 1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포르셰 복스터가 선을 보이자 그때까지 '저렴한 포르셰'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했던 고객들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으며, 참가자들은 매력적인 차의 모습에 열광했다. 함부르크 시사 주간지는 균형잡인 몸매를 갖춘 품위 있는 포르셰 복스터의 기사를 특집으로 실었다.
비데킹의 시도는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1996년 가을로 예정된 공급일이 되기도 전에 이미 1만 5천 대로 계획된 한 해 판매량의 2/3에 해당하는 예약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복스터의 가격이 저렴하더라도 BMW나 벤츠의 웬만한 모델들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비데킹은 "우리는 싸구려 양철로 된 차는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포르셰가 너무 오랫동안 911 모델 하나에 의존해서 돈을 벌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포르셰의 전문 영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동차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위탁 개발이었다. 따라서 자동차의 판매실적이 떨어질 때에도 포르셰는 위탁 개발을 통해 수익을 보충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되었든 롤스로이스가 되었든 누구나 포르셰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비싼 돈을 지불하고 모터 혹은 자동차 전체의 개발을 위탁하였다. 포르셰를 지탱하는 이 기둥은 예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자신이 특히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기업은 발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바이싸흐에 있는 포르셰 개발센터는 기술과 디자인 분야에서 포르셰의 세계적 명성을 이끌어내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포르셰는 나사 하나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르셰의 부품 자체 생산비율은 업계 최저수준인 20퍼센트 이하이다.
한편, 자동차를 작은 업체에서 비싸고 비효율적으로 직접 제작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린 생산방식은 기적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린 생산방식이란 공장의 생산시설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생산방식으로 도요타 자동차회사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1950년 유럽에 미국식 모델의 대량생산방식이 막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인 기술자 도요타 에이지는 디트로이트를 방문하여 도요타 자동차회사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는 포드 사의 대량생산방식을 보면서 일본에는 그러한 방식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당시 일본의 내수시장은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량생산체제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최소한의 공정만 처리하면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긴급상황이 아니고서는 작동을 멈추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품 생산과정의 중간단계에서 잘못이 발생하더라도 벨트의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잘못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똑같은 오류를 지닌 자동차들이 무한정 생산될 수밖에 없었다.
도요타는 이런 소모적 구조를 바꾸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팀으로 묶고 전체 조립공정에 대한 책임을 그 팀에 부과하였다. 각 팀장들은 직접 조립공정에 참여해야 했고 그밖에도 각 팀에는 기계 청소, 간단한 고장처리, 품질검사와 같은 '특별 업무'도 주어졌다. 또 각 팀은 주어진 노동시간의 일부를 좀더 효율적인 작업과정을 개발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이제 도요타에서는 더 이상 컨베이어 벨트의 독선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구나 즉각 벨트를 세울 수 있었다. 각 팀은 잘못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잘못이 발생한 원인까지도 제거하였다. 처음에는 벨트를 멈추게 하는 빈도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점점 그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1993년에 비데킹은 신기술 컨설팅 팀을 만들어서 포르셰 직원들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워크숍 은 새로웠고 직원들의 사고방식을 금방 바꾸어 놓았다. 참석자들 중에는 경영진도 다수 있었다. 비데킹은 경영진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업대 앞에 앉은 직원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우리 경영진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방법을 다 잊어버렸고 오히려 그들에게 물어보아야 할 지경이다."
포르셰의 전 경영진이 모두 새롭게 바뀌어야 했다. 이제 현장의 작업반장과 기술자들은 자율적으로 그들의 작업장을 꾸미고 특수한 보조수단도 스스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예산도 충분히 할당되었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시장에 가서 직접 구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커다란 창고나 선반, 불필요하거나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정 등은 더 이상 생산과정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JIT(Just In Time)"은 그렇게 간단했다. 수십 년간의 혼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제 새로운 체험을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포르셰 직원들의 몫이었다.
3. 정체는 퇴보를 의미한다비데킹이 1991년 말 포르셰를 맡았을 때, 회사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포르셰의 연간 생산량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미국에서의 실패는 특히 심각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간 3만 대 이상이 판매되던 시장에서 이제는 겨우 1만 대도 팔리지 않았고, 그 다음 해에도 해외 판매량은 다시 1/3로 줄어 전 세계로 수출된 자동차는 11,656대가 전부였다.
이렇게 급격한 하락에도 불구하고 포르셰가 망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 회사는 여전히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단기 채무'를 제외하면 은행 빚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능력이 오히려 포르셰가 침체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포르셰의 모델 정책은 주로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고, 차종에 따라 사용된 부품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제작도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사정책에는 지속성과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꼼꼼한 비용관리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산업 전반에 걸쳐 발생한 이런 변화의 영향이 자동차 업계에도 미쳤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포르셰는 기존의 가치에만 매달렸을 뿐, 가치의 내용과 장래성을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변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포르셰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자동차 경주에서도 포르셰는 고통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기업에 자원이 풍족하지 않았다면 이런 무절제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아무리 재정상태가 좋다고 하더라도 계획의 근거와 목적, 실행기간 정도는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포르셰는 마치 이런 일들이 불필요한 듯이 행동했다. 풍족한 재정 앞에서 목표는 사라져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목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1992∼93년 사이에 포르셰는 1,850여 명의 인원을 감축했고, 전체 판매량도 15,000대 아래로 떨어졌다. 1993년 여름까지도 '비데킹의 폭풍'은 계속되었다. 생산파트의 전체 임원 중 40퍼센트가 감축되었다. 직원노조의 동의를 얻어 불량을 수리하는 시간은 무임금으로 계산하기로 정해졌다. 부품 자체 생산비율이 줄고 있음에도 공급업체의 수를 1,000개에서 300개로 줄였다. 생산방식을 모듈화하고 상이한 차종에도 동일한 부품을 사용하는 형태로 생산 공정도 바뀌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에「월스트리트 저널」은 "한때 시동이 꺼질 뻔했던 포르셰가 이제 다시 순조롭게 달린다."라고 하면서 포르셰가 예전처럼 다시 날씬하고 건강해졌다고 보도했다. 1995년에 포르셰는 복스터를 가지고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주목할 만한 기업 회생을 이룩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요소로 비데킹은 팀 작업을 꼽았다.
개선작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팀 단위로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비데킹은 밝히고 있다. 각 팀들은 작업과정의 효율화를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하였다. 설정된 목표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 것인지는 작업반장들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었다. 회식이나 워크숍, 세미나 등을 통해 새 아이디어들이 모색되었고 작업규칙들이 수립되었다.
4. 세계화는 덫이 아니다독일의 산업계에서는 독일이 지닌 입지조건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고용주들은 세금부담, 임금, 법적 규제, 교육요구 수준 등이 너무 높고 엄격해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연방은행의 금융정책을 좋게 평가하지도 않았다. 강한 마르크 화가 독일의 업체들을 세계시장에서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 스스로가 'Made in Germany' 상품이 너무 비싸서 독일에서는 더 이상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바데킹은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Made in Germany'가 미래에도 확실한 구매력을 보장해 주는 단어가 되리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고객 설문조사에 따르면 포르셰 구매자의 20퍼센트는 독일에서 생산되지 않은 포르셰를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응답자의 70퍼센트는 이 '상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독일에서 생산되지 않은 자동차에 대해서는 좀더 낮은 가격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1997년 1월「비르트샤프츠보게」는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포르셰가 생산라인의 일부를 외국으로 이전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미 포르셰는 소규모 형태로 외국에서 현지 생산을 하고 있었다. 1995년부터 멕시코에서 연간 60대에서 80대 정도의 911 모델이 조립되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50대에서 200대 사이의 수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포르셰는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서 멕시코와 인도네시아의 수입금지 조치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복스터의 핀란드 이전은 이들과 규모가 달랐다. 핀란드의 발멧 사에서는 1997년부터 연간 최소한 5천 대가 생산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포르셰 경영진들은 생산이 밀려 고객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고 변명했다. 'Made in Germany'는 잔인한 납품기일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새 고객들이 복스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가을에 독일 시장에 처음으로 선보인 이 차세대 포르셰는 곧 회사의 견인차로 자리잡았다. 곧 미국에서 독일에 버금가는 주문이 잇따랐고 핀란드 공장에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이미 독일의 생산능력은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포르셰가 이전부터 항상 국제적 목표를 지향하는 기업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50년에 추펜하우젠에서 본격적인 생산라인이 가동되기 시작한 이래로 포르셰는 먼저 유럽 시장을 석권하였고 미국에 까지 점점 시장을 넓혀갔다. 현재 총 매출의 2/3는 외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메일 시대에 편지를 쓰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인 것처럼 지금과 같은 국제적 상황 속에서 독일 내에서 생산을 고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품 자체 생산비율이 20퍼센트에 불과하고 외국의 부품 공급업체를 통한 모듈 형태의 수입이 점점 증가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생산공장 차체가 독일 밖으로 이전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과연 포르셰에 붙어 있는 'Made in Germany'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5. 자기 스스로에게 충실하라2000년 벽두에「매니저 매거진」에서 개최한 이미지 콘테스트에서 포르셰는 이제까지 늘 우승하던 벤츠나 BMW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승리의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비데킹은 "우리는 시장의 추세에 따르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충실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비데킹은 최근 업계의 대기업들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내세울 게 없다고 말한다. 포르셰도 한동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몰랐던 때가 있었다. 그때 포르셰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준들에 스스로를 끼어 맞추려 했었다. 이런 부정적인 차별화는 포르셰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도처에 널리 퍼져 있던 일반적 현상이었다.
포르셰는 기본적으로 거대화에 반대한다. 포르셰는 골리앗이 아니며 그렇게 되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다. "골리앗에 대항하는 다윗. 그것이 우리의 생존을 위한 핵심명제이다. 작은 기업이 거대한 공룡 기업에 맞서서 그들의 전횡을 막으며, 자신의 생존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비데킹은 직설적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