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ers & Dreamers
모겐 위첼 지음 | 에코리브르
Builders & Dreamers
모겐 위첼 지음/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2002년 10월/389쪽/16,500원
1. 더 이상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비즈니스와 경영의 세계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영웅이 존재하지 않을까? 세상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 데는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람들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오래 전부터 상업, 무역, 산업은 인류 문명에서 전쟁, 정치, 외교, 종교, 예술,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중세 무렵 ‘발견의 시대’를 이끈 사람은 사업가였고, 18세기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놀라운 과학기술을 선보인 사람도 사업가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는 달리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웅이 존재하지 않고, 전통도 없으며, 과거의 위대한 신화도 발견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헨리 포드를 거론하겠지만 그것은 그가 만든 상표가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영자들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영감의 근원도 존재하지 않으며,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즈니스의 기본 문화와 기본 요소를 제공해 주는 전통도 찾아볼 수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경영의 역사를 가르치는 경영대학원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경영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즉 지식과 영감의 부족 등은 결국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열정은 사라지고 판단력은 흐트러진다. 역사가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영웅에게도 한계가 있으며, 그들도 때로 실패를 경험한다.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전통이 조직의 숨통을 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연구해 얻어낸 지식은 우리를 현재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현대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속성이 아니라 변화라고 믿는 경영자와 경영학자들은 영원한 경영 원칙이 존재한다는 시각에 호감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 시장 혁명이 세상의 일부, 아마도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겠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연속성과 변화는 늘 나란히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비즈니스는 물론 경영자와 지도자들은 문명이 시작된 후 지금껏 항상 변화와 맞서왔다. 새로운 것이 몰려온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변화와 연속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절대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상과학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1970년대에 발표한 소설 『파운데이션(Foundation)』에서 셸던 박사의 시스템은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은 연속성 상에 존재하며, 그리고 완전하게 분석하는 데 필요한 요소만 찾아낼 수 있다면 마치 도로 지도처럼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당연히 경영자들의 삶도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와 자율성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비논리적이고 분별 없고 심지어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확실한 예측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뛰어난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처럼 과거를 참고삼아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과거의 지식이 필수적이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서 발생한 금융위기와 3년후 유럽과 미국의 하이테크 관련주에서의 폭락에서 경제 관측가들은 금융 공황과 시장 붕괴 사이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계속해서 언급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없었는지 똑같은 실수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은 금융 거품이 다시 만연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경험을 참고하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든 남의 경험이든 간에 -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상황을 판단하는 적절한 경험과 지식 덕분에 시장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위험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경영사를 연구하는 일은 조직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연구는 조직의 지식 관리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두 가지 측면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는 시장이나 문화를 연구할 때 도움이 되는 일반적인 역사다. 중국 전문가라면 누구나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중국사에 대한 이해라고 답할 것이다. 두 번째, 기업들은 자사의 역사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몰론 많은 기업이 회사 연혁을 갖고 있지만 이 연혁들은 대부분 단조로운 사건의 나열, 자화자찬의 선전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내용에서 효용성이나 신뢰성은 부족하다. 어떤 형태로든 회사가 과거에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제시하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역사를 분석해 미래에 대한 지표로 삼는 기업은 더욱 드물다.
2. 경영 이전의 경영자들
과학과 경영이 만나다 : 산업혁명과 이후
1767년 래어셔의 이발사이자 가발 제조업자인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시계 제조공 존 케이와 함께 목화에서 실을 뽑아내는 정방기(精紡機) 제작에 몰두했다. 노팅엄으로 건너간 아크라이트는 자신을 도울 동업자를 구해 첫 번째 면사 방적소를 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크라이트의 영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선 면직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각 과정을 세분화했다. 그 다음 스스로 고안했거나 다른 발명가들에게서 ‘빌려온’ 여러 기계적 수단을 통합해 모든 장치가 수력으로 움직여 방적사를 생산하는 기계적 시스템을 완성했다. 1775년 더비셔의 크롬포드에서 세계 최초의 기계화 공장을 세운 아크라이트는 비즈니스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섰다.
기계적 기술을 이용하는 데 역사상 그와 대적할 만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공장 시스템 전체를 특허 출원한 그는 경쟁자들이 법원에 청원해 특허권 무효 판결을 받아낼 때까지 6~7년 동안 기술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경쟁 우위를 확보했고, 이후에도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량, 개선하여 언제나 경쟁자들보다 낮은 가격과 높은 능률로 옷감을 생산했다. 그는 자기 자본을 이용하거나 동업자들에게 자금을 끌어다 공장을 세우기도 했고, 다른 업자와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맺기도 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는 다른 사업자들은 그의 기술을 훔치거나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각 공장에서 필요한 관리자의 수는 매우 적었다. 대개 한 명의 감독관, 공장의 규모에 따라 수가 달라지는 보조 감독관, 각각의 기능 단위와 과정을 담당하는 근로자 소집단을 관리하는 현장 주임 정도가 필요했다. 자신들이 제조한 물품을 직접 판매했던 메디치 가와 달리 아크라이트와 다른 공장 소유자는 도매업자나 대리인과 판매 및 마케팅 도급 계약을 맺었다. 이런 시스템은 관리하기가 쉽기 때문에 관리자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리자는 대부분 기술 엘리트였다. 그들은 모두 기계와 설비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관리하는 법도 알아야 했다. 공장 감독관으로서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춘 기사들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높은 임금을 받았다. 이때부터 숙련된 전문가들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 옮겨다니는 인력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옮겨다닐 때마다 그들이 배운 기술들은 방직업뿐 아니라 다른 업종으로도 퍼져 나갔다. 1800년 무렵이 되자 다른 산업에서도 공장 관리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아크라이트의 밑에서 일하던 한 관리자가 독립을 이룬 미국으로 건너가 뉴잉글랜드에 미국 최초의 방직공장을 세웠다. 그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고 1840년대에는 방직업에서 사용하던 대량생산 기술이 화학 무기 공장에 도입되었다. 대량 생산 체제에 기반하여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는 대량생산 기술을 응용하였고, 헨리 포드 이후에도 이런 방식이 반복되었다.
아크라이트의 업적에서 대량 생산 체제와 관리 기법의 전파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과학을 비즈니스와 경영에 실질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의 시대인 18세기는 자연철학의 전성기였다. 교육을 과학적 발견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영국에서는 역학, 화학, 광학, 의학 등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과학자들이 넘쳐났고, 과학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신념이 커져갔다.
아크라이트 이후 과학은 비즈니스에서 뚜렷한 역할을 차지할 정도로 뿌리를 내렸다. 그때부터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경영 관행에서도 과학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이 하나의 과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가장 비범한 인물이었던 수학자이자 컴퓨터 발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천재였던 찰스 배비지가 1840년에 쓴 책을 통해서였다.
배비지가 연구했던 것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과학적 원리가 적용되는 경영의 필요성이었다. 그의 연산 체계는 과학적 원리의 실행을 돕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기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큰 번영, 보다 나은 수입과 노동자의 생활 향상, 질서 있고 이성적인 사회 건설 등 보다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3. 경영 혁명
과학적 관리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이 이룬 놀라운 산업 발전은 고통, 유혈투쟁, 인명손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이다. 사업장에서 벌어진 폭력은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파업과 공장 폐쇄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때로 광포하기까지 했다. 수백 곳의 공장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권총과 장총을 동원하여 무장 경비원들이나 경찰들과 대치했다. 경찰이 기관총을 동원하자 노동자들은 병기고를 부수고 대포를 꺼냈다. 기업가들이 정부에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주의, 노조지상주의, 무정부주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폭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업장에서도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는 경직되었고, 양측은 서로를 꺼렸다. 태업과 업무 소홀이 만연했고, 사업장의 생산성은 형편없었으며, 생산량과 품질은 크게 저하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 면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이 느낀 바와 같이 문제의 핵심은 고용자와 노동자 간의 관계, 특히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하고 임금을 얼마나 지급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이론적으로 사람들은 생산량에 비례하여 임금을 지급하면 노동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생산을 최대한으로 자극할 지에 대해 이윤분배제, 작업량에 따른 보수 지급, 작업 속도에 따른 보수 지급이라는 이론들이 등장했다. 가장 널리 사용되고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이윤 분배제로 이 개념은 유럽 대륙에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집단 중심적인 전통이 강한 문화권에 국한되어 효과를 발휘했고, 개인적 성향이 강한 미국 같은 곳에서는 종업원들이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여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업량에 따른 보수 지급 제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본 수당과 개인 생산량에 기초한 차등 상여금을 결합한 제도, 작업 속도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 모두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어 채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종업원이 어떤 속도로 일을 할지 어떻게 합리적으로 예측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은 결국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에게서 나왔다.
1895년 필라델피아의 철강공장의 현장 주임이었던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생산성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성과급 액수를 낮추는 고용주들을 호되게 공격했다. 그는 완료된 작업량이 아닌 과업 완료에 걸린 시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고, 합리적으로 설정된 과업 수행 속도에 따라 종업원들의 보수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 시스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최적 시간을 효과적으로 측정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테일러는 분업의 원칙을 최대한 활용했다. 직무의 구성 부분들이 논리적으로 더 이상 세분될 때까지 계속 나누어 초시계를 이용해 종업원이 각 하부 과업을 수행하는 시간을 측정한 후 그 자료들을 분석하여 최적 시간을 추산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차례대로 더해나감으로써 각 직무를 합한 전체 공정의 최적 시간을 계산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과학적’이란 용어는 접근 방식을 뜻하는 것으로 측정과 분석이 적절히 결합되었다는 의미다. 이것은 모든 행동이 측정에서 출발해야 하며, 효과적인 측정이 이루어진다면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그 당시의 과학적 신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과학적 시스템은 이제 복잡하고 세부적이며, 복합적인 시스템으로서 독자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학습과 이해를 위한 체계도 형성되었다. 시스템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관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테일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이 시스템의 실행을 돕는 컨설턴트로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 시스템을 싫어했는데 특히 영국에서는 테일러주의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한데 뭉쳐 전문가들이 수집하는 자료를 왜곡시킴으로써 전체 시스템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했다.
4. 마케팅, 원점으로 돌아오다
제품 : 특화와 품질
중세 유럽의 비즈니스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역 시장에 초점을 맞추는 특화된 소기업과 국제무역에 관여하는 고도로 다각화된 대기업이 구별된다는 점이다. 또한 자본의 규모도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였다. 자본을 쉽게 조달해 해외 무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사업가는 위험 감소 전략의 하나로 가능한 한 다각화를 시도했다. 반면 소상인들은 대개 제한된 범위의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제품 범위를 확대하기 힘들었던 그들은 대신 품질을 강조했다.
오늘날의 품질 관리 운동은 그 뿌리를 중세의 생산 관행, 그 중에서도 특히 여러 업종별 길드들이 시행한 방식에 두고 있다. 서유럽의 소규모 생산업자 대부분은 자신의 브랜드를 내거는 대신에 특정 도시나 지역이 연합해 만든 ‘조합 브랜드’를 활용했다. 이 조합 브랜드에서 중시되었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품질이었다. 직물 생산에서 규정된 중량이나 색상을 만족시키지 못한 제조업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길드에서 축출하여 거래를 하지 못하게 했다.
다각화 기업도 생산을 특화했는데 그 당시에는 농산품을 비롯한 많은 상품에 대해 심한 가격 규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품질이 개별 기업이나 길드에게 주요 경쟁 수단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유명 브랜드가 탄생했다. 이때부터 우수한 품질의 브랜드는 과대 광고 없이도 판매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시각이 생겨났다.
19세기 후반에는 고품질 제품은 별다른 판매 촉진 기법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으로 광고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지만 초기의 고도 성장 이후 성장세가 둔화되자 품질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광고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80년대의 H. J 하인즈 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의 황금기에 활동했던 많은 기업들은 제품은 최상의 품질을 유지해야 하며, 그 표준에 미달하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소비자를 저버리는 행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제품의 품질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제품에 붙이는 품질을 증명하는 표식에 의해) 제조업자는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수익은 증대될 것이라는 찰스 바베지의 품질향상의 필요성은 20세기 과학적 관리 운동에 부수적이지만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가격 : 규제와 가치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지역적 상황이 유통과 제품 공급에 상당히 영향을 미침에 따라 가격은 큰 폭으로 변동했고, 때로는 매우 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물가 안정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게 중요한 정책이 되었고, 중동과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도 이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의 경제 이론가들은 물가를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파멸을 몰고 올 경쟁으로 이어지고, 너무 낮은 가격은 생산자들이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가격 규제 정책이 일반화되었지만 사람들에게 가격은 주요 관심사였다. 특히 해외 시장에서는 더욱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격 규제가 시행되지 않는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기업은 개별적 가격 체계를 따랐는데 이는 고객들과 협상한 후 서로 동의하여 현물 가격을 작용한 것이다. 이에 비해 단일 가격 정책(누가 언제 사는가에 관계없이 제품은 일정한 가격을 갖는 체제)을 시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긴 했지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