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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

하워드 슐츠 지음 | 김영사
1961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날, 아버지가 직장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당시 나는 일곱 살이었다. 학교 뒤 운동장에서 한참 눈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파트 7층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빠가 사고를 당하셨어, 병원으로 가봐야겠다!"

아버지 프레드 슐츠는 한 달 이상이나 집에서 쉬셔야만 했고 일을 못 하셨으므로 봉급도 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도 당시 임신 7개월이셨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식탁에서 나와 누이가 말없이 저녁을 먹는 동안 부모님은 누구한테 얼마를 꿀 수 있는지를 의논하곤 하셨다. 저녁에 가끔 전화벨이 울리곤 했는데 만일 빚쟁이면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라고 시키셨다.

양키즈팀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주말이면 우리와 같이 야구를 해 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패배자였다. 트럭 운전, 공장 노동, 택시 운전 등 블루칼라 일을 전전하면서 결코 집 한 채 소유해 보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노력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무책임함과 비참한 현실에 화가 났다. 1988년 1월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저축도 연금도 없었다. 그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당신이 종사하셨던 직업에서 아무런 긍지도 만족감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아버지를 부당하게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사회에 버림받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만일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사람들을 가장 중시하리라.'

스타벅스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과 성공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류의 회사들과는 전혀 다른 회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식적으로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스타벅스는 내 아버지의 살아 있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그것은 한 회사가 어떻게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동시에 돈도 벌 수 있느냐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이다. 스타벅스는 고객, 주주, 종업원 등의 사람들과 정서적인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 기업은 단지 이윤 추구가 아닌 진정한 가치에 의해 경영될 때 열정과 개성을 잃지 않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이다. 나는 모든 커피 한 잔 한 잔에 나의 마음을 쏟아 붓는다.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나의 파트너들도 마찬가지이며, 고객들 역시 그것을 감지할 때 우리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야르짜이트'라고 하는 유대 민족의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일 전날 밤에 가까운 친척들이 24시간 촛불을 켜 두는 의식이다. 나는 매년 아버지를 위해 그 촛불을 켠다.

제1부 커피의 재발견



상상, 꿈, 그리고 초라한 어린 시절




내가 세 살 때인 1956년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아파트에서 정부 보조 공동주택단지인 베이뷰로 이사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모두 일하는 가난뱅이였다. 우리의 가정형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은 것은 나이가 더 들어서였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중국집에 갔는데, 부모님은 그날 아버지의 지갑 속 현금 액수에 맞춰서 어떤 음식을 주문할 것인가를 의논하시곤 했다. 세 아이 중 맏이인 나는 빨리 성장해야만 했다. 즉 어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항상 어머니께 번 돈의 전부를 드렸다. 어머니가 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나는 보조 주택단지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뉴욕에서 온 한 소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내게 몇 마디를 물어 보는 동안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지는가를 똑똑히 보았다. 너 어디 사니? 브루클린에 사는데요. 브루클린 어디? 카나지요. 카나지 어디? 베이뷰 보조 주택단지요. 오 저런!

1975년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나는 뉴욕에 있는 제록스 사에 취직해 세일즈 교육을 받았다. 나는 그 곳에서 대학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나는 잠재 고객에게 하루에 50통의 전화를 하면서 6개월을 보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나타내는 반응은 비즈니스를 위한 대단한 훈련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고가 되고자 노력했고 그 일을 잘 극복해 나감으로써 세일즈맨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수료를 받는 프로 세일즈맨이 되었다.

1979년 나는 쉴 새 없이 바빴지만 더 큰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가정용품을 파는 해마플라스트라는 자회사를 미국에 진출시키려는 스웨덴 회사에 대해 말해줬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아 그 자회사의 부사장이자 총 매니저로 뉴욕으로 발령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75,000달러의 연봉뿐 아니라 회사차, 판공비, 1년에 4차례의 스웨덴 방문을 포함한 무한정의 여행권을 제공했다. 겨우 스물여덟의 나이에 나는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어퍼이스트 사이드에 멋진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6년 만에 성공적인 직업 경력과 함께 높은 봉급과 아파트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모님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이러한 성공 뒷편에서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서서히 감지하고 있었다. 점점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를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고, 특히 나의 부모님은 더했다.

원칙 외에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1981년 해마플라스트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시애틀에 있는 조그만 소매업체가 이례적으로 한 종류의 드립식 커피 추출기를 대량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온병 위에 플라스틱 여과필터를 얹어 놓은 간단한 커피 추출기였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커피를 전기 퍼콜레이터나 드립 커피 머신으로 만들고 있는데, 왜 시애틀에서는 이 구식 제품을 선호할까?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시애틀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도착하자 나는 스타벅스의 판촉 매니저인 린다 그로스맨을 만났다. 그녀는 유서 깊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구역에 위치한 스타벅스의 본점으로 나를 안내했다. 닳아서 반질반질한 나무로 만든 카운터 뒤에는 수마트라, 케냐, 에티오피아,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의 각종 커피를 담은 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피 하면 캔 커피를 연상했지 커피의 원두를 연상하던 때가 아니었는데 오직 진정한 원두 커피만을 파는 숍이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린다는 왜 고객들이 콘 모양의 보온병 커피 추출기를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타벅스는 손으로 직접 커피를 추출하는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전기 커피메이커로 추출하면 커피가 덜 추출되며 그 주변에 달라붙어 타 버리기 때문입니다."

린다는 나를 태우고 스타벅스의 배전 공장(커피 원두를 볶는 공장. 원두를 볶기 전 상태를 '그린 빈'이라고 하며 이 때는 커피 맛이 나지 않는다)으로 데리고 가서 회사의 소유주들인 제럴드 벌드윈과 고든 보우커를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당시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이미 10년 전에 스타벅스를 창업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두 사람 모두 영리하고 지적이며 견문이 풍부한, 고급 커피에 대한 절대적인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반해버렸다. 내 앞에는 얻어야 할 지식, 개척해야 할 것들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문화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럴드는 스타벅스의 초창기와 정통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스타벅스, 이 회사의 창업자들은 원래 사업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문학이 전공인 제럴드는 영어 교사였고 고든은 작가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파트너인 제브 시글은 역사 교사였다. 스타벅스의 정신적인 대부는 미국에 강배전(강하게 볶는 것) 커피를 처음 도입한 네덜란드인 알프레드 피트였다. 그는 세계적인 고급 커피나 티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몇 시간이고 시간을 내주는 사람이었다. 제리와 고든은 피트가 운영하는 조그만 스토어에서 커피를 우편으로 주문해 마셨는데 1970년 8월의 어느 청명한 날 갑자기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렇게 커피를 사러 다닐게 아니고, 시애틀에 직접 커피 스토어를 열어보자!'

1960년대에 미국 커피 회사들은 가격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품질과 향을 무시하고 값싼 원두를 섞어서 캔에 담아 팔았으며, 캔 커피는 커피가 찌들 때까지 슈퍼마켓 선반 위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캔 커피의 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커피가 굉장한 맛이라고 떠들며 광고했다. 그러나 제리와 고든, 제브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들 셋은 결국 그들의 고급 커피가 단지 소수의 커피 애호가에게만 팔릴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커피 스토어의 개점을 강행했던 것이다.

나는 자기 제품에 대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스타벅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였다. 나는 물 같은 기내 커피를 한 모금 먹어 보고는 얼른 치워 버렸다. 나는 가방에서 수마트라 커피 원두를 꺼내 뚜껑을 열고 그 그윽하고 자극적인 냄새를 가득히 들이마셨다. 나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스타벅스에는 내가 사업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열정과 진실성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케네디 공항에 착륙했을 때 나는 마음 속 깊이 '아! 바로 그거다!'하고 느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스타벅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스타벅스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이후에도 변함없이 제품의 질을 회사 윤리 강령의 가장 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의사 결정이 힘들 때나 기업의 관료주의적인 발상이 들 때, 나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있는 스타벅스의 첫 번째 스토어를 방문한다. 이제는 낡아버린 목재 카운터를 쓰다듬으며 강배전 커피 원두를 한 움큼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본다. 손에 묻은 반짝반짝 빛나는 향기로운 커피 기름을 바라보면서 나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그 전에 왔던 고객들에게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항상 최고 품질의 원두 커피를 팔아야만 한다는 원칙! 이 원칙 이외에는 모든 것을 고치고 혁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타벅스의 유산이다.

제2부 커피 경험의 재창조



눈을 크게 뜨고 꿈을 펼쳐라




스타벅스의 마케팅 책임자로 처음 들어간 후, 1987년에 스타벅스는 드디어 나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너무 흥분되고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스타벅스 코포레이션'의 전신은 일 지오날레다. 일 지오날레는 1985년 설립되어 1987년에 스타벅스를 합병한 이래 그 이름이 스타벅스 코포레이션으로 바뀌었다. 제리와 고든이 설립한 그 최초의 회사는 스타벅스 커피 컴퍼니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이름에 대한 권리도 양도했다. 나는 그 때 34세로서 굉장한 모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스타벅스 인수 계약을 마무리한 후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니 8월의 오후 햇살이 나를 반겼다. 다음날 아침, 예전에도 수없이 해 왔듯이 낡은 배전 공장 앞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곧 배전 기계로 향했다. 갓 배전하여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에 손을 넣고 한 움큼 집어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벼 보았다. 배전한 커피를 만져 보는 것은 오늘의 스타벅스가 있기까지 나의 원칙이자 매일의 습관이 되었다.

오전 10시, 전체 모임을 갖기 위해 배전공장 마루에 모든 이들을 소집했다. 그 이후로 이어질 수많은 회의 중 첫 번째였다. 불안하기보다는 흥분되었다. 난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5장 정도의 메모지에 몇 가지 강조점들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일단 말을 시작한 다음에는 메모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년 전 이 회사를 위해 내 삶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의 열정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일원이 되기를 평생 꿈꾸어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그 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나는 이 회사를 사랑하므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이 회사가 상징하는 비전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함께 일함으로써 시애틀 사람에게 그토록 소중한 스타벅스의 모든 것을 지키고, 아울러 전국적으로 스타벅스에 대한 사랑을 늘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커피에 대한 사명을 더욱 폭넓게 나눌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뒤로 홀로 남겨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회사가 상징하는 바를 희석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의 목표는 우리 모두 자랑할 수 있는 원칙과 가치관을 가진, 그리고 전국에 스토어를 가진 회사의 구축이라고 말했다. 회사의 성장에 대한 비전을 토론했고, 어떤 면에서나 스타벅스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다짐했다.

독단성과 융통성의 사이에서



모든 기업은 무엇인가를 대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믿을 만한 제품이 그 기업의 핵심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고객이 요구하는 것에 '예'라고만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 하나가 프랜차이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프랜차이즈로는 품질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공적인 향을 첨가한 커피였다. 우리는 우리의 고급커피를 화학물질로 망가뜨리지 않는다. 또 하나는 슈퍼마켓 판매였다. 우리는 커피가 상할 수 있는 투명 플라스틱병에 우리의 커피를 넣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상의 생두를 구입하여 완전하게 배전한, 완벽한 커피 한 잔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깨끗한 브랜드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우리의 가치와 욕구는 때로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다른 기업이 그렇게 한 것처럼 슈퍼마켓 판매로 2배 또는 3배를 팔 수도 있었지만 식료품 가게 커피와 분명한 구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커피를 팔지 않기로 결정했다. 경쟁회사들이 프랜차이징 방식을 이용하여 전국적 영업망을 확장할 때도 우리는 직영 스토어를 주장했다. 나는 점차 타협의 필요성도 배우게 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의 가치들은 타협하지 않는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우리는 오랫동안 열심히 토론했다. 그리고 우리가 상징하는 완벽성을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할 때에만 새로운 방법들을 채택했다.

우리의 가장 독단적인 견해 중 하나를 버리게 한 사람은 하워드 비하였다. 우리는 그가 입사하기 전까지 커피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워드는 달랐다. 그가 1989년에 스타벅스에 합류했을 때 그는 이미 소비자로서 스타벅스에 친숙했다. 그는 즉시 스토어를 자주 방문하여 고객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고객의 소리 카드를 읽어 본적이 있습니까? 무지방 우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나는 금년에 무지방 우유를 사용했었는데 그 맛이 좋지 않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누구에게 맛이 안 좋았나요?" 하워드는 나의 대답을 몹시 못마땅해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나와 데이브 올센이 맛을 보았지요." "고객의 소리 카드를 읽어 보십시오. 고객은 무지방 우유를 원합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무지방 우유를 주어야 합니다."

스타벅스 역사의 그 시점에서 무지방 우유를 언급하는 것은 배신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의 목표는 순수한 커피를 지향하는 이태리 에스프레소 바를 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우리의 가장 충성스러운 한 직원이 그의 사무실 밖 복도에서 하워드와 마주쳤다. 얼굴을 맞대고 서서 그가 하워드에게 말했다. "당신의 그런 정신은 우리 커피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야. 우리는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하워드 비하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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