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아는 왜 세계 제일인가!
다케스에 다카히로 지음 | 동방미디어
노키아는 규격을 공통화·표준화함으로써 시장 확대를 유인한 뒤 경쟁하는 전략을 지향한다. 노키아 모바일폰 부사장 우리요 네우보는 그 결과가 노키아의 단독 우승일 필요는 없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휴대전화 분야에서 상당히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 지위를 유지하고 싶지만 타사와 함께 공동 작업함으로써 승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 나온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술 표준화와 경쟁은 상반된 것이 아니다. 우선 같은 무대를 만들 것, 그것은 정보통신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다. 인터넷 세계의 추이를 보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가상 세계의 공유를 실현한 인터넷은 정보 산업뿐만 아니라 산업 구조나 사회 구조, 문화까지 바꾸어 가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초래한 충격은 일찍이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경쟁은 시장을 키운다. 그러나 그 경쟁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노키아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한 회사가 키우기보다 여러 회사가 경쟁하면서 시장을 키우는 편이 얻게 될 파이는 더 커진다. 그리고 그 파이가 커지면 규모의 이점은 더 위력을 발휘한다.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회사로서의 생산 능력과 공급 능력을 지닌 노키아에게 그 이점은 크다. 시장이 커지면 휴대전화 부품의 수요는 증가한다. 부품 공급 회사 수도 늘어난다. 대량 생산의 효과로 부품 한 개의 비용이 적어지면 그 부품을 쓰는 회사의 비용은 절감된다. 가격 경쟁력이 거기서 생기는 것이다.
물론 모든 기업이 공통의 플랫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노키아를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경쟁 상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실제로 공통의 플랫폼을 만들지만 노키아를 비롯해 각 기업의 전략은 더욱 복잡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강한 자는 더 강해지는 것이 정보통신 업계의 흐름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노키아에서는 금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승자임을 항상 잊으려고 한다. 그것은 자만을 야기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개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이동통신의 통신 사업자에게도 휴대단말기 사용자에게도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인터넷 세계는 '도그 이어(dog year)' 상태에 있다. 개의 수명은 인간의 1/7정도, 요컨대 인간의 1년은 개의 7년에 해당된다. 도그 이어란 인터넷 세계는 불과 1년이 다른 분야의 7년과 맞먹을 만큼 치열하고 맹렬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추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마치 그것이 필연이었다는 듯이 휴대전화 시장에도 밀려 왔다.
인터넷은 컴퓨터, 통신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온갖 산업과 사회 구조를 융합하는 20세기 끄트머리에 태어난 세계의 통합자이다. 휴대전화 사용 인구는 1999년 말에 3억 명을 넘었다고 추정된다. 이 놀라운 보급과 기술 혁신 속도는 인터넷이라는 통합자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휴대전화는 인터넷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
휴대전화 인구가 2003년에는 10억 명이 될 것이란 대담한 예측이 나오고 있지만 설사 과장된 예측을 낸다 해도 이제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노키아에게 이러한 상황은 정말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도그 이어로 변모하는 휴대전화 시장은 '변화하기 위해 태어난' 노키에게는 절호의 무대였다.
34세의 덴마크인 보 이르제는 놀라울 만큼 의기양양했다. 어쩌면 노키아 사람들도 모두 그런지도 모른다. 부담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두들 빨리 앞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노키아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시속 180km의 맹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차가 분해될 순간, 누가 말한다. '액셀을 더 밟아라!'" 속도를 질기는 사람들에게 노키아의 세계는 안성맞춤이다.
요르마 올리라는 1999년에 노키아의 사업을 이렇게 돌아보았다. "지난 5년 동안에 통신 업계의 가장 중요한 조류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이었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이 둘이 융합해 매우 흥미진진한 시기가 될 것이다. 노키아는 여러분의 주머니에 인터넷을 넣어 주고자 한다. 다음 5년 안에 실제 그렇게 되리라 확신한다."
노키아 사람들은 그들이 겨냥하고 있는 세계를 "모바일 정보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올리라는 정보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무실에서만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무실만이 아니라 이동하는 차 속에서도 항상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휴대전화나 PC처럼 다양한 유형의 정보 기기가 등장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작업 환경에 맞춰 기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장애 없이 정보 통신에 접속해서 여러 서비스를 아무 탈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러한 모바일 정보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것, 그것이 신경제 발전으로 이어진다."1. 인구 515만의 나라에서 탄생한 세계적 기업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CEO밑바닥에서 최고로 뛰어오른 기업2. '선택과 집중'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1992년 1월의 결단노키아는 1865년, 제지펄프 공장에서 출발했다. 일본에서도 19세기에 창업해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은 있다. 미쓰이, 스미토모 등 구 재벌계 기업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구 재벌계 기업으로 노키아처럼 가장 현대적이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될 것이며, 또한 산업 전체의 기초가 될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은 아직 없다. 그뿐인가. 새 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해 계열 기업이라는 낡은 틀에서 어떻게 탈피해야 하는지 세계적 금융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인 채 여전히 부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 기업이 내린 결론은 기껏해야 대대적인 합병을 통한 자본 강화뿐이었다.
제지회사로 출발한 노키아는 잇달아 사업을 확대했다. 제지 공장과 더불어 고무장화 회사, 통신용 케이블 회사가 합병되고 복합 기업으로서의 노키아 그룹이 형성되어 갔다. 사업 확대는 끝없이 계속되어 금속, 화학, 가전제품, 전자, 통신 기기, 나아가 휴대전화로 뻗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노키아는 해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노키아가 만약 우유부단한 기업이었다면 단순히 복합기업에 머물렀을 것이며, 오늘의 정보기술 혁명에 뒤져서 조만간 유럽이나 미국의 대기업에 인수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노키아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 노키아는 확실히 과거의 방식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많은 전통적 기업들이 그렇듯이 성장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좀더 큰 기업에 합병됨으로써 생존하는 방법을 노키아는 택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것은 과감한 사업 재구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그룹의 전통적 사업을 차례로 다른 회사들에 매각해 떼어 버리면서 통신 사업 분야의 전문 기업으로 특화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노선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은 이가 요르마 올리라였다. 올리라가 CEO에 취임하기까지 노키아는 절정기 때에는 44,000명의 사원을 거느렸다. 그것이 구조조정을 통해 1993년에는 26,000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불과 6년 뒤에는 50,000명이 넘는 사원을 끌어들일 만큼 힘차게 부활했다. 정보통신 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완전히 변신하여 당당히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회사로 자리잡은 것이다.1992년 1월, 올리라가 노키아의 CEO로 선임되자 "이제 노키아는 끝났다."라고 탄식하는 사원도 있었다. 올리라는 임원 가운데 서열도 가장 낮고, 경영자로서의 경험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노키아는 이미 빈사 상태였다. 그런 때에 젊고 그만큼 경영자로서의 경험도 적은 사람이 1865년에 창립된 전통 있는 기업의 CEO가 되다니 그것은 마치 자포자기한 처사로 보였다.
CEO가 된 올리라에게 임원들은 노키아의 향후 5년간의 기본 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물었다. 올리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통신 분야와 함께 살거나 죽는다. 남은 사업은 격하한다." 그는 노키아를 통신 분야에 특화할 것이고 다른 사업, 예컨대 가전 사업이나 케이블 사업은 조만간 정리할 생각임을 표명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휴대전화기가 기업의 임원 등 일부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통신 기기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사용할 시대가 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92년 시점에서 올리라를 비롯한 노키아 임원들은 1999년의 전 세계 휴대전화 사용자가 4,00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1999년 현재 휴대전화 사용자 수는 3억 명에서 3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플러스로 빗나간 것이 노키아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장 신화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인 모바일폰 사장인 알라후타는 올리라와 함께 고락을 나눈 임원의 한 사람이다. 박사학위를 가진 기술자인 그는 노키아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노키아는 전략의 초점을 좁혀야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사업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초점을 좁힌 분야가 바로 통신이었습니다."
당시 통신 업계에는 두 가지 큰 상황이 있었다. 하나는 통신 서비스의 규제 완화이고 또 하나는 이동 통신망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한 것이다. 91년 중반부터는 지금 휴대전화의 세계 표준 규격인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이 쓰이게 되었다. 그 시장에 노키아가 선두 주자로 뛰어들었다. 두 가지 변화가 급속히 세계로 진출할 계기가 된 것이다. 자금은 없었지만 이 상황은 노키아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노키아의 휴대전화는 카폰이 보급되던 시절부터 개발 능력은 정평이 나 있었고,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을 촉진한 환경은 핀란드의 자유로운 통신 시장이었다. "통신 업계의 구성을 살펴보면 1980년대는 아직 휴대전화가 국지적 규격이고 시장도 세분화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요 국가의 시장은 각국의 국내 공급자가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쟁이 상당히 진행된 시장은 핀란드 외에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시작되지 전에 노키아는 이미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최초로 GSM의 상업용 네트워크에 성공한 노키아는 자국의 자유 시장을 통해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기회를 재빨리 손에 넣어 위험을 큰 수익으로 바꾼 것이다.무슨 생각을 했는지 노키아는 다른 통신 기기 회사들보다 먼저 디지털 휴대전화 사업에 깃발을 세웠다. 경쟁 기업들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그들에게는 1960년대부터 축적해 온 디지털 기술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1990년에 노키아 모바일폰 사장에 취임한 요르마 올리라는 GSM 시장에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91년에 세계 최초로 GSM 대응 디지털 휴대전화의 상용화에 성공했다.
노키아는 늘 신기술을 한 발 앞서 개발하고 새로운 시장에 먼저 진입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리고 선견지명과 기술력이 노키아의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도 있다. 확실히 노키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세계 최초'란 타이틀이 붙는 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1988년에는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 표준 규격에 의거한 ISDN 교환기를 실용화했다.
그러나 노키아가 디지털 기술을 핵심으로 한 첨단 기술만을 가진 기업이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성공을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첨단 기술 경쟁이라면 노키아에 뒤지지 않을, 아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그 이상의 연구개발 능력과 인력을 갖춘 세계적 기업은 얼마든지 있다. 노키아의 성공은 그들이 첨단 기술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통신 사업자나 휴대전화 사용자에 대한 마케팅과 서비스에 중점을 둔 데에서 비롯된다.노키아는 스스로의 경영 스타일을 '노키아 웨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 앞에서도 지적한 노키아 밸류이다. '고객만족, 개인존중, 목표달성, 계속학습'은 노키아가 중시하는 가치이며 종업원은 모름지기 이 4가지 가치를 기본으로 비즈니스에 임해야 한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은 더 있다. 속도, 품질, 개방성, 그리고 성실함, 협동, 겸허 등이다. 노키아의 경영진은 때로는 고집스러울만큼,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게 이들 키워드를 입에 올리며 실천하려고 하고 있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가?
노키아 모바일폰의 인사 담당 부사장 유니하 호카넨은 말한다. "예컨대 능력은 많지만 오만한 사람과 능력은 적어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노키아가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후자입니다. 우리는 향상하려는 의욕, 자세가 굳건한 인재를 찾는 일에 늘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오만하면 손 쓸 도리가 없다. 그 가치관을 바꾸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공부하려는 자세가 있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6. 3세대 휴대전화가 세계를 바꾼다
"일본에서 선도 기업이 되겠다."2001년, 3세대 거대시장노키아의 초대 CEO 베스터룬트는 전자 부문에 반송파연구소를 설립했다. 사실 연구소라고는 하지만 사무실 일부를 칸막이로 구분한 이름뿐인 것이었다. 당시 전자 부문 매니저였던 쿠르트 빅스테트는 사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디지털광이었다. 그리고 디지털팀의 개발 담당자 마크 테리는 대학을 갓 졸업한 25세의 엔지니어였다.
그들이 노린 것은 전화선의 음성 신호를 디지털화하는 PCM(Pulse Code Module) 기술의 실용화였다. 소리와 목소리는 음파가 되어 귀에 전달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전화는 소리의 파형을 전압 변화로 바꾸어 보내는 소위 아날로그 신호이다. 반면 이러한 소리의 파형을 0과 1의 부호로 바꾸어 보내는 것이 디지털 신호이다. PCM은 음성의 파형을 디지털화하는 기술이다.
노키아의 첫 디지털 기술은 1969년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의 표준 규격에 준한 PCM 방식의 통신 기기를 업계 최초로 판매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이 위원회는 통신의 여러 규격을 검토해 표준화하기 위한 세계적인 조직이다. 그 PCM 시스템 기기는 핀란드의 여러 섬들에 납품되었다. 1970년대가 되자 스웨덴이나 소련으로 수출되고 서서히 노키아의 기술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 들어 전자 부문은 세 갈래로 분리된다. 하나는 사카리살미넨이 책임을 맡은 텔레커뮤니케이션 부문이다. 다만 당시 텔레커뮤니케이션 부문은 노키아 그룹 전체 매출액의 5%에 불과했다. 또 하나는 무선전화 부문이다. 노키아 그룹이 탄생하기 전부터 핀란드 케이블회사(노키아는 핀란드의 종이, 고무, 전선 3사의 합병으로 시작됨)는 이미 휴대전화의 전신이 된 무선전화 개발을 하고 있었다. 첫 제품은 반도체를 응용한 프로페셔널 모바일 라디오 시스템으로 1963년에 발매되었다. 라디오폰이라 불린 이 무선전화는 주로 군사용, 정부 기관, 공공 사업체, 구급 서비스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무선전화 부문은 이윽고 살로라 사의 무선전화 부문과 합병되어 모비라(Mobira)가 되었다. 그리고 1989년 노키아 모바일폰으로 이행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문이 전기통신 부문이다. 전화 교환기와 통신 시스템 등 통신 인프라를 개발하는 사업부였다. 이 부문은 1992년에 노키아 텔레커뮤니케이션(지금의 노키아 네트워크스)에 통합된다. 요컨대 핀란드 케이블회사의 전자 부문이 오늘날 노키아의 전략 사업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노키아의 승승장구를 뒷받침한 바탕은 왕성한 기술 개발력과 가격 경쟁력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