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벌써 절망합니까
정문술 지음 | 청아출판사
1. '미래'라는 에너지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총 714회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무려 1,330여 회에 달하는 삼진아웃을 당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삼진 한 번을 당할 때마다 그는 반드시 실패요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삼진을 당할 때마다 느꼈을 심한 외로움과 열패감은 결과적으로 그를 강인하게 키워냈다. 1,330여 회의 삼진아웃은 714회의 홈런을 가능하게 했던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우리 엔지니어들에게 무엇이건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권하고 실패하더라도 진심으로 격려한다. 그리고 '연구개발에 있어서는 경제 개념을 갖지 말라.'고 말한다. 경제 개념을 없애라는 말은 어떠한 실패도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연구개발에는 언제나 열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성공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열 번의 실패가 무섭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시도조차 포기한다.
우리 공장의 한 구석에는 개발에 실패한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실패를 잊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지만 실패와 익숙해지자는 뜻이기도 하다. 미래산업이 그 동안 개발한 장비들은 대략 30종류 가량 된다. 그 중에서 20여 종은 기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대여섯 종은 그럭저럭 개발비 정도는 건졌다. 나머지 서너 종의 장비들이 결국 지금까지 미래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어떤 성공도 없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단점들에 쉽게 좌절하면 아무런 발전도 없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그 '모든 경우'란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을 같이 일컫는 말이다. 움직이는 모든 행위에는 흑자가 숨어 있다. 그것을 발굴하여 곱게 갈무리할 능력과 안목만 있다면 어떠한 실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흑자경영법'이다.
1995년 12월, 모 대기업이 실시하는 협력업체 사업실적 평가에서 미래산업이 국산화 부문 금상을 수상하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는 첨단측정기를 구입했다. 별도로 회사 돈 2억 2천만 원을 들여 전 직원에게 200%의 특별보너스를 지급했다. 이런 기분 좋은 '빌미'를 미래산업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이 대기업 흉내내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흉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어느 회사가 더 직원들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인지 한 번 판가름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선의의 경쟁이라면 충분히 의미도 있지 않은가. 회사가 발전해야 직원들의 삶의 질도 발전할 수 있다. 직원복지는 회사에 재투자하고 남은 돈에 대한 직원들의 권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회사는 고급스럽고 기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참아주어야'하는 회사보다는 '자꾸만 출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 우리 직원들은 간혹 '해피한 우리 회사'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말을 듣는 사장의 기분은 최고다. 그래서 더 '해피'하게 해 주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해피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내 노력을 직원들도 알아주어서인지 14년 동안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가 떠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2. 마흔 셋의 절망나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2년 동안 허송세월만 하다가 결국 군 입대를 결심했다. 신병훈련이 끝나가던 어느 날, 적성검사와 지능검사가 있었다. 그 후 나는 육군행정학교에 배속되었고 거기에서 기획관리, 문서관리 등 서구식 행정실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후반기 교육이 끝나자 나는 육군본부에 배속되었다. 육군 부관 감실 통계과에서 일하면서 당시 육군업무 전산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컴퓨터와 통계, 분석작업의 기초 등을 습득하게 되었다. 군복무 중이던 1961년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어쨌든 다행히 반역자(?)로 몰려 처단되는 일 없이 나머지 군 생활을 거기서 보냈다. 간부들은 나를 중앙정보부로 데려갔고 5급 공무원(현재 9급)을 거쳐 1976년 7월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나는 거기서 정말 순조롭게 지냈었다. 1979년 12.12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1980년 5월 나는 강제퇴직을 당했다. 그 때 내 나이 마흔 셋이었다.
이후 아는 사람의 소개로 풍전기공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출근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문제가 생겼다. 빚쟁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채권자들이 한두 달 사이에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알고 보니 공장에 있는 기계들까지 담보로 걸려 있었다. 순식간에 2천만 원을 날리고, 껍데기뿐인 공장을 인수한 것이 내 경영의 시작이었다.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중에 옛 은사의 소개로 백정규를 만났다. 그를 얻은 후 현장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장경험은 백정규가 보완하고 관리업무는 내가 보았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금형사업을 시작했다.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나는 수소문 끝에 시오이 세이치라는 일본인 퇴역 기술자를 초빙해 왔다. 풍전기공 직원들은 그로부터 고도의 금형기술을 새로 익혔다. 오래지 않아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풍전기공으로 가라.'는 말이 부천공단에 나돌 정도로 우리의 기술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금형제작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대신 사업적인 안정성과 비전이 없었다. 게다가 빚쟁이들과 많은 배신,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풍전기공을 포기했다. 물론 얻은 것도 많았다. 주먹구구로나마 사업과 경영이란 것을 배웠고 많은 사람들을 겪었다. 그리고 몇 명의 사람도 얻었다. 나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 후 나는 공무원 시절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알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과 술을 내는 대가로 잡다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한동안은 증권 객장에 출근하다시피 나가면서 증권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도 배워두었다.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일상이었지만 와신상담의 고사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새로운 아이템을 고민하는 동안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결론은 반도체였다. 반도체 제조장비 쪽이라면 내가 뛰어들 만한 사업도 있을 것 같았다. 관심을 갖고 시장을 분석해 본 결과 굳이 외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몇 가지 제조장비들이 전량 수입되고 있음을 알았다.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제품들이 절박한 내 눈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미래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마치고 풍전기공 식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총 자본금 8천만 원에 사장까지 포함해서 전 직원이 여섯 명밖에 안 되는 아주 조그만 회사였다. 1983년 2월이었다. 3개월도 되지 않아 우리의 제품이 시장을 온통 장악했다. 대여섯 명의 직원들로는 터무니없는 주문물량이 몰려들었고 우리는 급하게 사람을 충원했다. 순식간에 매출액이 억 단위로 뛰어올랐고 미래산업은 일약 반도체 조립장치 업체의 반열에 올랐다. 참으로 살맛 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 싶었다. 모험과 도전이 그리워 새로운 장비 개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자만으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아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집은 날아갈 판이 되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몇 년이 지나도록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 의욕도 없어 포기하려던 중 개발 중인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기계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4배나 느린 멍청한 기계... 이것을 누가 사준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패기와 만용을 착각한 결과였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래서 죽을 결심을 하고 소주 한 병과 수면제를 챙겨들고 청계산을 올랐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대로 실패한 인생으로 마감되기도 싫었다. 잃었던 오기도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뛰듯이 산을 내려왔다.
비록 다년간의 연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동안 축적했던 기술력만은 믿음직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술력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정해서 남들보다 잘 만들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핸들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입수한 핸들러 관련 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차분 설계도와 개발계획서를 작성했다. 나와 백정규는 이것을 들고 부천의 S사로 찾아갔다. 샘플을 검토해 보더니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거래의 시작을 위해 우리는 프로토타입을 차에 싣고 그 곳으로 찾아갔다. 시험가동에 들어가자 감동스럽게도 테스트 결과는 매우 훌륭했다. 당시 그 곳에서 사용하고 있던 일본 태섹의 'TO-92'보다 생산량이 오히려 훨씬 높게 나왔던 것이다. 하늘이 도운 덕분으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3대의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기술지원 차원에서도 계약조건도 우리측에 매우 유리하게 떨어졌다. 그들로서도 우리의 가능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산업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모험을 준비했다. 미래산업의 상표를 붙인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개발한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30대를 S사에 납품했다. 그것은 미래산업의 주력 모델인 'MR-5000'시리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계의 수도 너무 많았고 발생하는 에러도 대부분 처음 접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MR-5000'을 대충 잡아놓으니 이번에는 'MR-3000'을 비롯해서 일제 복제품, 개조했던 장비 등 비메모리 핸들러들이 한꺼번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현장 상황을 내가 직접 확인하고, 장비 30여 대를 모두 새것으로 교환해줌으로써 겨우 상황이 수습되었다. 미래산업의 핸들러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90년, 미래산업을 창업한지 꼬박 8년째였다.
한편, 테스터 업체인 미국의 테라다인은 우리와 꽤 인연이 있는 편이었다. 우리가 처음 개발한 MR-3000 핸들러는 S사로 납품되었고, 그곳에서는 우리의 핸들러를 테라다인의 테스터와 붙여서 사용했다. 이후에 우리가 MR-5000을 개발하자 테라다인에서는 미래산업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테라다인의 목표는 경쟁사인 '어드밴'의 타도였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 번은 테라다인의 수석 부사장 조지 다벨로프가 미래산업을 찾아왔다. 테라다인의 테스터와 미래산업의 핸들러가 뭉치면 '타도 어드밴'은 시간 문제라며 좋아했다. 나와 장대훈은 곧바로 미국 보스턴에 있는 테라다인 본사를 찾아갔고, 얼마 후 보스턴으로부터 실무협상단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조지 다벨로프와 한국계 통역 한 사람을 포함한 임원진이었다.
그런데 실질적인 합작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기술이전 문제만 나오면 말꼬리를 자꾸 돌렸다. 테라다인은 우리의 핸들러만 탐냈을 뿐 처음부터 기술이전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모처럼 이루어진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미국계 테스터 회사 3개 사, 일본의 2개 사와 협의하고 제휴를 추진했지만 결과는 테라다인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모테이 역시 핵심기술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핵심기술만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술이 곧 무기'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장대훈과 나는 어렵겠지만 처음부터 우리 힘으로 시작해 보자는 것에 합의했다. 테스터 개발업체인 테스텍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핵심기술을 전수받겠다는 허황된 바람은 깨끗이 포기했다. 다만 '우리가 주는 만큼 너희도 달라.'는 태도로 당당히 맞섰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른 무엇보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우리는 결국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모테이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기술 후진국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우리는 모테이측에 거꾸로 훈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감격적인 주객전도의 상황이었다. 아무 것이 없어도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래산업과 함께 하는 동안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테스텍에서 키워지고 있는 엔지니어들은 언젠가 테라다인과 어드밴테스터에 버금가는 훌륭한 반도체 테스터를 개발해 낼 것이다.
3. 거꾸로 경영
백 프로 믿고 맡겨라 - 신뢰 경영창업 초기에 잠시 관련을 맺고 들락거리던 어느 스프링 제조업체가 있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그 회사에서 실시하고 있는 '초 관리'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회사는 일본에서 시도하던 '5S운동'부터 '초 관리운동', '사력 0.01운동'으로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회사가 도입한 '초 관리운동'이란 연간 근무일수의 총시간을 초로 환산하고 다시 이것을 연봉으로 나누어 직원의 1초당 임금을 계산하는 것이다. 연봉 1,400만 원을 받는 직원의 연 근무일수가 250일이고, 1일 근무시간이 8시간이라 치자. 이 사람의 초당 임금원가는 2원이다. 이 사람이 담배를 한 대 태우는데 350초가 걸렸다면 700원이 낭비되는 셈이다. 화장실에서 동료와 100초 동안 잡담을 하면 200원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출근시간이 오전 8시임에도 불구하고 전 직원들은 7시에 나와 회의를 하고 교육을 받는다. 업무시간에는 '돈 버는 일'만 하자는 것이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요즘 가볼 일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 회사를 머릿속에 떠올리자면 거미줄로 가득한 미로를 연상하게 된다. 귀에는 항상 '2원, 4원…'하고 계량기 도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매스컴을 위해 사진 찍힐 때 말고 과연 그 회사에 웃음이나 있기나 할까.
미래산업에는 사훈도 없고 운동도 없다. 그저 편안하게 믿고 맡기니 결국은 다 잘 되더라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오히려 연구원들에게 '제발 절약하지 말고 돈 좀 열심히 쓰라.'고 독려한다. 창조적 사고가 먼저 있고 여건이 뒤따라야 물건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의 머리가 여건에 맞춰 제한되면 결국 죽도 밥도 안 된다.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가장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 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직원들을 자유롭게 풀어두자니 간부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이 불안과 초조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문화는 사라지고 기형적인 관료조직만 남는다.
관료조직은 속성상 보다 견고한 관료조직을 모방한다. 악순환이다. 나는 직원들에게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직장에서 즐겁게 보내라. 행복하게 일해라. 일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해라. 회사는 환경만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요, 일하는 행복을 모르고 그저 벌어먹기 위해 고달프게 사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임을 명심해라."고 말이다. 우리는 필요 없는 강요와 간섭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힘이다.
인재는 키워서 써라 - 텃밭 경영미래산업은 사람 욕심이 많은 기업이다. 그래서 다소 먼길을 돌아가더라도 일찌감치 투자하고 오랫동안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 정도 미리 내다보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모습을 알아야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오늘 구할 수 있다. '리더십의 제1요체는 선견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미래산업을 창업하자마자 인재양성에 매달렸다. 기술력은 사람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강원도나 전라도 쪽의 공업고등학교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필요한 인원보다 좀더 많은 인원을 수련생으로 입사시켰다. 일을 시켜보고 가능성 있는 아이들은 정식으로 채용해서 꾸준히 일을 가르쳤다. 성장하는 만큼 대우해 주려고 노력했다. 모험이긴 했지만 이왕 시작한 이상 성패가 분명해질 때까지 멈추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