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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제국 진시황가의 CEO들

진문덕 지음 | 위즈덤하우스
1장 창업, 그 험난한 여정



유가 사관의 중국 역사가들은 지금까지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로 진 왕조를 왜곡해왔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육국연표」 서문을 보면 완전히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원래 벽지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중원 여러 제후국에게 만족(蠻族) 취급을 받았으나 뛰어난 제후의 연이은 출현으로 마침내 중국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 다소 무리하게 통치한 점이 없지 않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을 개혁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뛰어난 공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의 학자들은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진 왕조가 단명한 것을 비웃을 뿐 그 치적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기』에 따르면, 진의 시조 대업씨(大業氏)는 그 어머니가 새의 알을 삼키고 낳은 아들이라 한다. 이는 은연 중에 대업씨가 '새(鳥)' 토템 문화를 가진 부족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업씨는 이미 순제(舜帝) 시대에 '영'이란 성을 하사 받을 정도로 지체 높은 지배계급에 속했다. 그의 자손은 상(商) 탕왕(湯王)이 하(夏) 걸왕(桀王)을 물리치고 대업을 이루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워 상 왕조 내내 상당한 권력을 가진 부족장으로서 세습 지위를 누렸다. 더욱이 이들은 정권 유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서쪽 방비를 책임지고 있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은[殷, 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중국 왕조, 상(商)이라고도 한다]의 마지막 군주이자 희대의 폭군으로 정평이 난 주왕(紂王) 시대, 대업씨의 후손인 비렴과 악래 부자는 은의 국방부장관이었다. 은은 건국 후 400여 년이 흘러 주왕 시대에 이르러, 점차 세력을 잃기 시작했다. 영민하고 완력 또한 뛰어나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눕힐 정도였던 주왕은 사람됨이 교활하고 지나치게 음주와 여색을 즐겼다. 당시 천하의 민심은 주왕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주왕이 국정을 맡고 있던 대부족의 수장 서백, 구후, 악공 중에 심기를 건드린 구후와 악공을 처형하고 서백을 유리(은의 유명한 감옥)에 감금하자, 수많은 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서백의 아들 희발은 구명활동을 펼쳐 보물과 미녀를 주왕에게 바치고 아버지를 가까스로 구출했다. 서백은 풀려나자 주왕에게 충성 서약을 바쳤다. 주왕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앞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없을 것이라 자신하고 서백을 서쪽 제후에 임명했으나 그것이 실수였다. 서백은 주(周)로 돌아와 강태공을 군사로 추대하여 세력을 날로 키웠다. 강태공의 계책에 따라 겉으로는 충성을 보이고 주왕의 자만심을 부쳐 은 타도의 기치를 든 것이다.

서백의 계획은 그의 아들 희발에게 이어져 결국 은 왕실은 주 나라를 중심으로 한 제후국 연합군에 의해 종말을 맞이했다. 당시 왕실의 군대, 즉 주왕의 주력부대는 비렴과 악재가 이끌던 '영' 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끝까지 주 무왕(희발)에게 저항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들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세상이 앞다투어 새로운 중원의 패자 주(周) 무왕 앞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했으나 오직 비렴만이 '영'씨 일족을 거느리고 마지막까지 무왕에게 항거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결국 비렴은 죽음으로 은(殷) 주왕에게 마지막 충성을 바쳤다."

이들은 폭군 주왕에 대한 제후국들의 맹공이 시작되자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다가 주군에게 마지막 충성을 바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후대 사가는 물론 주 무왕까지도 이들의 충성심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성대한 장사를 치러줬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후손과 일족에게는 가혹하리 만치 철저한 복수가 단행됐다. 결국 무왕으로 인해 '영'씨 부족은 1급 전범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비렴의 아들 악래에게는 여방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멸문의 와중에 극적으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여방의 후손 중에 후일 비자(非子)라는 출중한 인물이 태어났다. 비자의 명성을 들은 주 효왕은 그를 불러 주 왕실의 말을 돌보게 했다. 세월이 흐르자 왕실의 말들은 날로 불어나 몇 배에 이르렀고, 훈련 또한 잘되어 모두 준마가 되었다. 효왕은 크게 기뻐하여 과거 순 임금이 그의 조상에게 하사했던 영씨를 회복시키고 진(秦)이라는 봉읍까지 하사했다. 이리하여 계속되던 부족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고 작지만 제후의 반열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진나라의 기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후 진 왕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목공과 효공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중원의 제후국으로서 당당히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목공은 야심만만한 대전투 집단의 총수이자, 좌절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걸출한 지도자였다. 그는 국가 역량을 키우기 위해 널리 인재를 양성하고 외부 인사를 기용하여 진의 창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져갔다. 더군다나 그는 놀라운 인내심과 포용력을 지닌 사람으로 모든 이가 존경해마지 않아, 부하들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이러한 선조들의 노력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의 밑거름이 되었다.

진 왕조의 뿌리를 이룬 씨족의 기원에서 국가의 건국과 통일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종합해 보면, 일관되게 이어가는 전통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우수한 전투력이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호전적 색채가 강한 전투 부족이었다. 부족의 탄생이래 계속 전투를 치르며 쌓은 다양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여 새 토템족 중에서도 상당히 우월한 지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창업자의 지혜



신생기업의 창업자는 맹목적 전진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설사 좀 더디게 발전하더라도 백년대계를 위해 올바른 기업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기업을 보호하고, 험난한 경영 환경을 헤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든든한 토대를 마련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진 제국은 시조가 되는 비렴을 비롯하여 조상 대대로 굽히지 않는 신념과 강인한 의지로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 기업경영의 표상이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어려운 시대와 환경을 잘 개척해 왔으며, 수없이 반복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이어왔다. 또한 조상에게 물려받은 무인정신(武風)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결국 중원의 다른 제후국과는 뚜렷이 차별되는 진나라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강조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들은 전투집단의 속성상 정착하기보다는 광활한 활동 무대를 배경으로 왕성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미개척지를 누비며 야만인과도 스스럼없이 융합했다.

일찍이 주 무왕은 바로 이 같은 진인의 특성과 저력을 간파하고, 언제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르는 이들의 조직과 전통을 말살하고 부족 해체라는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했다. 주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비렴 일족의 특성은 분명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진인들은 주 왕실에 대한 자신들의 '한(恨)'을 누구보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완벽하게 해소하는 뛰어난 생존 전략을 구사했다. 조부나 비자 일족은 경솔하게 주 왕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 멸망을 자초하기보다는 오히려 충성심을 통해 경계심을 없애고, 이를 기회로 재빠른 신분 상승과 세력권 확보라는 실리를 얻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중원의 가장 큰 위협이던 서융으로부터 중원을 사수한다는 명목 하에 암암리에 자신들의 무장 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무인정신을 국가의 정신적 근간으로 계승, 발전시켜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한 무적군단을 창조해 냈다. 바로 이 점이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을 있게 한 창업 초기 CEO들의 지혜였다.

2장 이상국가 건설



진의 국가 조직 체계화 법령은 위대한 창업자 목공에 의해 확립됐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러한 업적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목공 사후 등장한 10여 명의 우매한 지도자는 최강의 제후국을 이어받았음에도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선왕의 제도만 답습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점차 고립되고 도태되었다. 이들의 과오는 단지 시대 변화에 맞는 적절한 응전을 회피한 채 그저 선대의 예만을 좇아 어떠한 개력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목공의 뒤를 이른 강공(康公)은 재위 기간 내내 선왕 말년부터 시작된 진(晉)과의 전쟁을 수행하느라 엄청난 국력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공공(共公)은 재위 5년 만에 죽고, 다시 그의 아들 환공(桓公)이 옹립되었으나 너무 어린 나이였다. 재위 24년에 환공은 진(晉)과 다른 제후국들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환공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이 즉위했으나, 이미 진의 국력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경공 이후, 애공, 이공, 혜공, 도공에 이르기까지 진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더욱이 여공에 이르러서는 애공 이후 제후들이 단명하여 어린 왕자들이 제위에 오르면서 권신 발호와 왕권 상실이라는 위기까지 봉착했다.

상앙변법



권신과 왕실 간의 대립으로 진나라의 내란이 정점을 향해 치닫게 되던 당시, 중국은 춘추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약육강식의 대혼란기 전국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격변기에 진나라의 미래를 뒤바꿀 영웅이 나타났다. 바로 효공(孝公)이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효공은 뛰어난 지도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의 중심에는 위나라 출신의 상앙이 있었다. 상앙은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한 경세제민의 치술을 펼치고자 했다.

상앙이 실시한 상앙변법의 주된 목표는 국정 전반에 걸친 전면적 개혁을 통해 진나라의 기본 골격을 이루던 부락제를 타파하여 부족장들의 고질적인 왕권 침탈 행위를 막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연좌제로서, 부락제를 해체하고 군사 통수권을 부족장이 아닌 국왕의 직접 관할 하에 둔 '십오제도', 이 연좌제는 요즘 상황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하고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 분가를 시켜 새로운 토지 개간을 목적으로 한 가족 제도의 개혁, 그리고 군공(軍功)을 장려하기 위한 이십등작제가 상앙의 1차 개혁이었다. 상앙변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부족장의 지위는 격하시켜 아무리 종실이라 해도 군공이 없으면 봉작을 얻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원전 350년, 더욱 강력한 의지를 지닌 제2차 변법, 즉 전통적 부락제 폐지, 전세(田稅)의 국가 직접 징수, 그리고 도량형 통일을 추진했다.

1,2차 변법에 의해 진나라는 반봉건적 국가체제에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대전환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목의 그림자가 있었다. 1차 변법 때 태자가 죄를 지은 일이 있었고, 상앙은 지휘고하를 막론한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태자의 스승인 공자 건이 대신 형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더욱이 2차 변법 때도 태자가 죄를 지어, 그 벌로 공자 건이 코를 베는 중형에 처해졌었다. 이로써 태자를 둘러싼 차기 대권 그룹과 상앙은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원한 관계가 형성됐다.

이러한 원한은 효공이 서거하고 태자가 혜문공(惠文公)으로 즉위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보복으로 돌아왔다. 상앙에게 체포령이 내려진 것이다. 몸을 피한 상앙은 진의 함곡관에 이르러 작은 여인숙에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을 재웠다간 낭패를 당한다는 주인의 말에 상앙은 탄식했다. "내가 만든 법에 오늘날 내가 화를 당하는구나." 결국 상앙은 자신의 봉읍에서 저항하다 처참히 살해되고 만다. 혜문공과 그의 측근들은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시체에 다시 차열형을 가하고 가솔들을 남김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혜문공이 상앙을 처벌하긴 했으나, 그가 남긴 변법은 그대로 채용하여 국정 운영의 토대로 삼았다. 상앙 변법은 뒤를 이은 혜문공의 적절한 선택에 의해 더욱 탄력적인 운용의 묘를 살리며 후일 대제국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경영 포인트 - 성장기의 전략전술



영업형 기업은 신속한 움직임 뿐 아니라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재창조하는 속도까지 빠른 기동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영업형 기업은 구성원들의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행동만을 강조하고 실적 위주의 평가에만 치우치다 보니 상대적으로 충분한 사고나 치밀한 준비기간을 필요로 하는 기획에는 취약하다. 또한 개인의 우수한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오로지 지도자, 즉 최고 경영자의 개인적 매력이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경영자가 소멸하는 경우 추진하던 제도나 전략 또한 함께 소멸해버리는 악순환이 거듭되어 경영 안정을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진 제국 또한 1대 패주 목공이 죽자 곧바로 권력 공황 상태에 빠져들면서 성장을 멈추고 장기간에 걸친 정체기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도의 정비 및 수입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우선 기득권층의 저항에 대처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이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실효를 발휘하기 힘들다. 또한 현제도를 개혁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고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앙변법이 성공한 것은 그것이 상앙이라는 걸출한 기획자와 효공이라는 절대적 지지자의 합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완벽한 제도라도 조직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진 효공과 상앙의 경우 수많은 저항과 위협을 맞이하긴 했지만, 10여 년에 걸친 진행과 오랜 연구를 통해 기본 취지인 왕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많은 인내심과 지속적인 연구, 그리고 뚜렷한 개혁의지와 강한 용기만이 이러한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3장 천하통일



상앙의 개혁이 효과를 드러낼 즈음, 그를 총사로 한 진나라 군대는 뛰어난 전투력으로 위 혜왕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놀라운 전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정점으로 진나라는 과거 무적군단의 영광을 완전히 회복하고,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한 명실상부 중원의 새 강자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혜문공은 즉위 후 과거 상앙변법에 반기를 들었던 진의 보수적 토착세력을 재등용하는 등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암암리에 왕실에 반감을 지닌 대부족장들을 제도권 안으로 포용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다.

앞서 보았듯이, 진나라 경영진은 서쪽 변방에 치우친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중원의 패자로 거듭나기 위해 출신을 불문하고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왔다. 토착세력의 이익에 야합하지 않는 이들의 정책은 왕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고, 진을 최강의 부국강병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이러한 진의 성장을 지켜보던 제후들간에 상앙과 같은 희대의 책략가를 얻기 위한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독특한 아이템을 지닌 책사나 외교가임을 내세우는 유세가들로 당시 각국 조정은 매일같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러한 유세가들 중에 소진과 장의가 있었다. 소진은 처음 진나라를 방문하여 6국을 정복할 것을 권고하다 거절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해 6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을 종용해 진과 대항하는 합종책을 만든 인물이다. 소진의 합종책은 진에게 분명 부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에게 큰 도움을 줬다. 다른 제후국에게 필요 이상으로 진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효공 말년부터 혜왕에 이르는 약 20여년 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전까지 중원의 대다수 제후들이 중원 변방에 위치한 후진국이라 무시하며 오랑캐의 침략에서 중원을 사수하는 파수꾼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진이 어떻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까? 사료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진과 나머지 6국의 군사력을 비교 분석해 보면, 실제 진의 역량이 호들갑을 떨 만큼 위협적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제후국들이 진을 '호랑지국(虎狼之國)'이라하여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바로 소진과 같은 인물의 놀라운 선전술의 결과였다. 실제로는 전술과 전략, 군사력으로 이기지 않은 진나라의 승리를 자신들의 출세와 야망을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과장된 표현으로 떠들고 다닌 종횡가들의 세 치 혀가 빚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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