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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세기

스튜어트 크레이너 지음 | 더난출판
제1장 1900~1910 스톱워치 과학



경영이론의 발굴스톱워치를 지닌 르네상스인제4장 사람의 발견(1931~1940)



사람을 위한 불을 켜다테일러는 노동을 발견했다. 포드는 대규모 노동을 발견했다. 슬론은 노동을 조직했다. 하지만 아무도 노동의 주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엘튼 메이요는 『산업 문명시대의 인간문제』에서 생물학자로서 기업을 유기적 체제,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간주하여 "살아있는 유기체는 다수의 변수로 인식하는 것이 좋다. 이들 변수 중 하나라도 변화하면 그 변화가 조직 전반에 걸쳐 도입되면서 서로서로 균형을 유지한다."라고 썼다. 메이요는 인간의 조직은 인간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역기능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였다.2차 세계대전은 경영의 실행과 이론의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인간 중심의 사상을 그보다 앞서 40년 동안 발전해왔던 대량생산 기술과 결합시켜 주었다. 생산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었다. 미국의 GDP는 1941년 913억 달러에서 1945년 1,666억 달러로 치솟았다. 제조업 생산량도 거의 두 배가 되었고 농업 생산량 역시 22% 향상되었다. 전쟁을 지배한 것은 단순한 산업생산만이 아니었다. 전시는 경영 컨설턴트와 경영대학원의 역할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하버드의 고급 경영 프로그램의 시발점이 된 것은 1943년 전시 경영훈련 프로그램이었다.패전국 일본 재건의 뿌리에는 강건한 기업가적 정신, 사회적, 인간적 양심을 지닌 경영과 결합된 기업이 있었다. 일본 부흥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소니의 부흥이었다.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는 라디오 부품과 전기밥솥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다. 1957년 이 회사는 주머니 크기의 라디오를 생산했고, 1960년에는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TV를 생산하였다. 1961년 소니 미국지사는 월스트리트에 진입한 최초의 일본기업이 되었으며, 1989년에는 미국 영화의 자존심 콜롬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다. 모리타와 소니의 재능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소니의 개척정신을 모리타는 이렇게 설명한다. "소니는 개척자이며 진보를 통해서 세계에 봉사하고자 한다. 소니는 언제나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 추구자가 될 것이다. 아울러 소니는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항상 한 개인에게서 그 사람이 지닌 최고의 것을 끌어내려고 애쓴다. 이것이 소니의 결정적 힘이다."



마쓰시타 고노스께도 소니에 버금가는 거대제국을 만들었다. 1917년 마쓰시타 마쓰시타 일렉트릭을 창립하고 첫 제품으로 플러그 어댑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절연판 주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혁신적인 자전거 라이트를 개발했다. 전쟁의 광풍과 함께 사업 팽창은 지속되었고 420억 달러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브랜드의 하나인 파나소닉(Panasonic)을 보유하게 되었다. 마쓰시타는 미처 서구 사회가 눈뜨기도 전에 '고객 서비스'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는 "고객에게 이익이 될 제품을 팔아라. 또한 판매 후 서비스가 판매 전 고객에게 조언을 해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영구적인 고객을 얻는 것은 바로 그런 서비스를 통해서이다."라고 말했다.새로운 인간의 거래제5장 전쟁의 교훈(1941~1950)

훌륭한 전투를 하라재건을 주도하다6장 꿈을 실현하다(1951~1960)



서구인의 프로젝트와 기업인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는 페욜이 경영의 본질이라는 광범위한 이론 수립에 매달린 것과 달리 실용적인 목표를 가진 문제 해결사였다. 그는 발명가로 공구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강철을 처리하는 기술인 '테일러-화이트공정'을 탄생시켜 금속절단에 혁명을 일으키고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였다.빌리 듀랜트는 헨리포드의 경쟁자인 데이비드 뷰익과 동업자로서 1908년 올즈모빌 주식의 75%를 사들여 올즈와 뷰익을 합병하여 제너럴 모터스 사(GM)를 만들었다. 알프레드 프리차드 슬론은 1918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유나이티드 모터스가 GM에 의해 흡수 합병되어 듀랜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듀랜트의 경영이 슬론을 가장 불안하게 한 것은 조직운영에 관한 문제였다. 듀랜트는 거대 기업을 세웠으나 그가 세운 기업은 대체로 관리하기 힘든 조직이었다. 슬론은 듀랜트의 산만한 1인 지도체제를 명확히 공식화된 정책과 재능 있는 경영진으로 대체시켰다. 50년에 걸쳐 그는 GM의 조직을 재구성하고 경영 방식을 재창조하였다. 그가 남긴 업적은 첫째 자신의 영감을 따르기보다는 유용한 정보를 토대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지극히 전문적 균형감각을 갖춘 지적인 간부 그룹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체스터 버나드는 이를 두고 "슬론은 최초의 위대한 전문 경영자였다."고 표현했다.엘튼 메이요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1926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신규 연구 프로그램을 위해 하버드에 합류하였다. 그 당시는 과학적 관리가 생산성 혁명을 일으키는 데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당혹감이 기업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과학적 관리의 논리는 너무나 강력하여 반발의 여지가 없었으나 이를 노동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노동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업은 여전히 생산성 극대화만을 원하고 있었다. 이 연구는 노동자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것으로 1927년과 1932년 사이 일리노이 주 시서로에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호손 공장에서 시행되었다.

호손 연구는 먼저 조명과 생산성에 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고 연구 결과 의외의 사실들이 밝혀졌다. 첫째, 그룹 내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구조의 다양성이었다. 둘째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여러 가지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셋째, 복잡하게 보이는 개개인 활동의 역학관리였다. 메이요는 "업무상 동료와 지속적으로 결합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경영층이 조금이라도 무시하거나 억제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즉시 어떤 형태로든 경영자체의 실패를 초래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비공식 조직의 이해가 성공적인 경영을 위해 필수 요인임을 강조했다.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경영이 탄생하는 극적인 모습을 목격해 왔다. 경영은 하나의 분명한 전문직으로 자리잡았으며 일상적으로 분석되고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논평되는 공식적인 활동으로 변화해 왔다. 경영이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절정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1900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경영은 인류의 문명이 동트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해 왔다. 하지만 최근 1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조직되고, 분석되고, 검토되고, 공식화되었다. 실로 20세기는 '경영의 세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경영에 대한 논의도 종종 비즈니스에 국한된 것으로 제한되어 왔다. 그러나 경영은 비즈니스의 세계 너머까지 적용되는 가치이다. 경영은 마케팅이다. 전략이다.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위탁하는 일이다. 그것은 복잡하여 현대 경영의 틀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이론적 가닥이 많고 다양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경영이론 형성에서 프랑스인 앙리 페욜의 공헌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페욜은 광산 엔지니어로 프랑스 광산회사에서 근무하였으며 위기에 처한 회사를 파산에서 구했으며 1888년에서 1918년까지 이사로 있을 때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페욜의 공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영의 보편성을 인식하였다. 즉 경영은 프랑스 광산에도, 회사에도, 병원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둘째, 경영이 그 나름대로의 권리를 지닌 학문이라는 것을 밝혔다. 오늘날에는 전혀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경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셋째, '경영의 일반적인 1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페욜은 경영자들이 이 원칙들을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실행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조직하고, 명령하고, 협력하고, 그리고 통제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영에 관한 초기 사상가들의 연구 중에서 페욜의 이론은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무시되고 있다.포드 기업의 창시자 헨리 포드는 지금까지 대량생산을 위한 효율적인 라인의 창시자로서 그 업적을 칭송 받았다. 포드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날로 비대해 가는 공장들이 그 물리적 크기에 적합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만들어 낸 데 있었다. 바로 이동식 조립라인, 즉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등장이다. 포드의 이동식 조립라인은 식품가공 조립라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포드사에 도입된 것은 1913년 4월 포드사의 하이랜드 파크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다. 포드는 완성품으로 조립하는 데 20분이 소요되던 자석발전기의 조립과정을 테일러식 형태로 29개의 개별작업으로 분리시켜 조립 소요시간을 5분으로 줄여 생산능률을 약 4배나 증가시켰다.1903년 6월 포드 자동차는 디트로이트의 한 공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하기 시작, 8개 모델을 생산하였으며 1908년까지 생산고는 하루 100대 정도였다. 주주들은 이 실적에 황홀해했다. 그러나 1909년 포드가 앞으로는 오직 한 가지 자동차 모델 T만 생산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자 주주들은 경악했다. 모델 T는 포드의 비전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색상은 모두 블랙이었고 와이퍼도, 연료계도, 속도계도, 배터리도, 심지어 백미러도 없었다. 포드의 비전은 곧 현실이 되었다. 생산 첫해에 1만7천 대 이상의 모델 T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모델 T가 존재한 19년 동안 포드가 판매한 자동차는 미국이 1천5백5십만 대, 캐나다가 100만 대 이상이었으며 전체 생산량은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이었다.현대의 경영간부제8장 1971~1980(조직적 마비)



난간 밑에서보다 좋은 방법볼보는 어떻게 했나제9장 1981~1990(뛰어난 모험)



서구는 어떻게 깨어났는가조직의 본질이라는 주제에 대해 테일러와 포드로부터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그들의 이론과 실천이 조직에 대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고민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였다. 베버는 산업적 추세, 감독관과 중간관리자를 지닌 공장들, 새로운 사업의 자연적인 규모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막스베버는 사후에 출판된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이론 (1924)』에서 산업화의 결과 형성된 거대 조직의 궁극적인 형태는 개인의 야심보다 조직의 이익에 충실하도록 요구하는 관료주의 형태의 조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베버에 의하면 관료주의적 시스템은 위계질서, 비인격성, 문서화된 행동규칙, 성과에 따른 승진, 노동의 특별 분업화, 그리고 고효율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체스터 버나드는 1927년 뉴저지 벨의 회장이 된 사람이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20세기 경영 이론가와 실천가 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존재이다. 그의 베스트셀러 『경영의 기능』은 오늘날에도 상당 부분 공감을 얻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최초로 전문적 경영의 핵심까지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누구나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서 모든 사람이 그 조직의 목적에 결속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전략 경영을 실천하는 사람은 전문 경영인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비로소 경영이 전문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이 새로운 전문가를 가장 많이 제공한 곳은 경영대학원이었다. 미국에서 처음 설립된 경영대학원의 기원은 1881년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와튼 스쿨이다. 1900년에 세워진 다트머스의 터크스쿨이 최초로 대학원 학위를 수여한 이래 1908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설립되어 1910년 최초의 경영학 석사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들어 경영대학원은 미국 내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는 유럽 본토에도 전파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전세계의 명망 있는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비즈니스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주었으며 중추적인 전문 경영인들을 배출하고 있다.1980년 12월 존 프랜시스 웰치 2세는 45세에 GE의 역대 CEO 중 최연소 CEO로 임명되었다. GE는 1878년 토마스 A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 전등회사를 모태로 설립되어 1892년 톰슨 휴스턴 일렉트릭사와 합병을 거쳐 오늘날의 GE사로 탄생했다. 잭 웰치가 CEO가 되어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GE의 비즈니스를 철저히 조사하여 불필요한 것은 퇴출시키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채택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GE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그로 인해 60억 달러 이상이 절감되었다. 웰치는 너무나 잔인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1980년대가 끝날 무렵, GE는 보다 가볍고 보다 탄력이 뛰어난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잭 웰치의 2단계 작업은 '워크아웃' 작업이었다. 워크아웃에 관한 착상은 웰치가 대학교수 커비 워렌 교수와의 대화 도중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조직 밖으로 내몰았으니 그 업무(work)의 일부분은 언제쯤 밖으로 내몰(out) 계획이십니까?"라는 질문에서 나왔다. 웰치는 즉각 20여명의 대학 교수와 컨설턴트들에게 그 개념을 현실화하여 줄 것을 의뢰하였다. 웰치는 워크아웃을 "우리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 보다 좋은 방법을 기업 전반에 걸쳐 끝없이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불렀다. 워크아웃은 GE 직원들이 그들의 노동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극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웰치 혁명의 다음 단계는 품질 프로그램의 도입이었다. '식스 시그마'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은 1995년 말 출범되었다. 식스 시그마는 기본적으로 품질에 대한 책임을 확산시켰다. "이제 그것은 지도자의 임무, 경영자의 임무, 피고용인의 임무다. 모두의 임무가 곧 품질이다."라고 웰치는 말했다.

발전의 세 단계 - 파괴, 창조, 그리고 품질-는 GE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 1997년이 되었을 때 GE의 총 자산은 3천40억 달러, 총 수입은 9백억 8천4백만 달러이며 82억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고 시장가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3천억 달러가 되어 있었다. GE가 성공한 것은 분석보다는 상식에 의해 추진되는 전문경영, 힘있는 문화, 그리고 엄격하고 사려 깊은 리더십이 결합된 때문이었다.앞의 성공기업의 예로 든 ABB, GE, 도요타, 델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들이 무엇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기업을 어떻게 조직하고 경영하느냐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업이 업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성공 여부에 있어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물질에 대한 지능의 승리이기도 하다. 지적인 힘은 경쟁적 우위를 안겨 주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노동자들의 목적이 성취된 것을 뜻한다.



지적 자본이라는 개념은 드러커의 1969년 저서 『불연속의 시대』에서 '지식노동자'라는 용어를 소개한 이래 자주 쓰이게 되었다. 드러커는 1992년 저서 『미래를 위한 경영』에서 "지금부터 열쇠는 지식이다. 세계는 노동 집중이 아니라 경영자 집중으로, 에너지 집중이 아니라 지식 집중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지식을 정보시대의 기업 경쟁력의 결정적 요소로 지적했다. 지적자본이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진 뒤에는 이를 어떻게 측정하는 가하는 문제와 이를 어떻게 끌어내어 기업 내에서 활용할 것인가 라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오늘날 경영은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이념에 살고 이념에 죽는 전문직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경영 이념의 많은 부분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념, 새로운 해석, 그리고 새로운 치료책을 탐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영은 이제 학습이라는 개념에 점점 더 몰두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들이 직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연간 1천억 달러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낭비되고 목적 없이 집행된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경영교육 시장은 120억 달러를 초과하는 시장인 것으로 추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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