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천하제패 경영

구스도 요시아키 지음 | 경영정신
프롤로그, 영락전과 표주박과 일장기



전국시대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일본이라는 나라'를 재건설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뛰어난 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경제에도 능통한 사나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상과 패기, 기백은 저마다가 전쟁터에서 심벌로 삼았던 '하타지루시(깃발에 새긴 표지)'와 '우마지루시(장수의 소재를 알리던 일종의 대장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노부나가는 영락전(永樂錢)을 그려 하타지루시로 삼았고, 금으로 된 지우산을 그의 우마지루시로 삼았다. 히데요시의 우마지루시는 표주박이었는데 그 표주박은 금을 입혀 놓았기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실 만큼 반짝거렸다. 전쟁터에 내건 깃발은 물론 휘장까지도 금 투성이였다. 히데요시는 그야말로 금으로 둘러싸인 권력자였던 것이다. 반면 이에야스는 흰 천에 '염리예토 흠구정토'라고 쓴 하타지루시를 썼다. 또한 금을 입힌 다섯 개 부챗살로 된 부채에 빨간 태양을 크게 그린 우마지루시를 자신의 심벌로 삼았는데, 이 세 영웅의 하타지루시와 우마지루시는 각자의 성격과 시대 변혁에 대한 의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영락전을 그린 노부나가의 하타지루시는 새 시대가 열렸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상징이었으며,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는다는 상징의 금으로 된 지우산은 천하를 노리는 노부나가의 권위를 의미한다. 반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는 원래 우마지루시도 하타지루시도 없었으나 노부나가의 허락을 얻어 거적 깃발을 자신의 심벌로 삼게 되는데, 농민 출신다운 히데요시의 지혜였다. 바닥부터 시작한 그는 실전을 통해 전투 습관이나 방법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놀라운 전공으로 노부나가에게 충성했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신의 우두머리 자리에 올라선 히데요시는 거적 하타지루시와 삼베 우마지루시를 표주박으로 바꾸었는데, 표주박은 히데요시가 31세 되던 1567년, 기후 성(城) 공략을 위해 정찰에 나섰을 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을 의미한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움켜쥐면서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황금으로 된 다실과 지붕, 세계 최대의 금화 제조 등은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벼락부자의 속성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금으로 된 표주박 우마지루시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사치욕은 조선 침공으로 이어지고, 이때부터 일본의 경제는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는 하얀 깃발을 휘날리며, 태양을 크게 그린 금부채를 우마지루시로 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거품 경제의 청산, 그리고 경제의 완만한 발전을 추구하며 충족한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이에야스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 영웅의 하타지루시와 우마지루시는 세 사람의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흥미롭게 도 그 시대를 표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경제정책과, 그리고 그 사회를 세밀 히 관찰해 보자."

1장 오다 노부나가 - 구체제의 타파, 유통경제의 출범



명예보다 경제를 택한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무로마치 막부의 제15대 쇼군)를 떠받들고 오와리, 미노, 북부 이세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원군을 합쳐 6만의 대군을 이끌고 1568년 9 월 26일, 드디어 교토에 들어갔다.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기치를 내걸었던 노부나가가 서 른 다섯 살의 나이에 마침내 꿈을 실현한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자신을 아시카가 15대 막부로 만들어준 노부나가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그에게 '무용(武勇) 천하 제일'이라는 감사장을 하달하며 부(副) 쇼군이나 '간레이(정무를 총괄하는 벼슬)'에 임명하겠다고 했으나 격식뿐인 감투가 싫었던 노부나가는 이즈미의 사카이와 우우미의 구사쓰 및 오오쓰를 직할령으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이쿠노의 은 광산에 자신을 대리한 행정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노부나가의 새로운 시대 감각을 알 턱이 없었던 요시아키는 즉각 이를 허락하였고, 노부나가는 풍부한 은 광산과 무역항, 그리고 철포의 주산지를 손에 넣게 됨으로써 대표적인 경제적 중심지를 그의 영향력 아래 놓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상경의 발진 기지가 된 곳은 '기후'라는 곳이다. 기후는 원래 '이노구치'라 불렸으며, 그의 장인인 사이토 도잔이 가마쿠라 시대부터 있던 성채를 확대하여, 이나바 산의 기슭과 정상에 저택과 성채를 세운 곳이다.

'이구노치'는 원래 '산기슭을 흐르는 나가라 강의 물을 취수하는 입구'라는 뜻인데, 이 이름이 못마땅했던 노부나가가 고대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기산(岐山)에 도읍을 정해 은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천하쟁취의 고사에 빗대어 지명을 '기후'로 바꾼 것이다. 또한 노부나가는 천하에 무를 떨쳐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자신의 기개를 드러내기 위해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만들었으며, 선정(善政)과 평화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 기린의 '린'자를 자신의 화압(花押, 문서 말미에 적는 서명)으로 삼았다. 이처럼 노부나가는 '기후', '천하포무', '린', 그리고 앞서 말한 천하 제패의 상징인 지우산으로 된 우마지루시로 천하를 취하겠다는 뜻을 표출했으며, 기후를 비롯하여 자신의 영지였던 오와리, 미노 등지에서 영락전의 하타지루시로 상징되는 과감한 경제 시책을 펼쳤다.

전국시대의 규제 철폐



노부나가는 '기후'를 빼앗은 지 불과 두 달 뒤에 포고령을 내리고 자신의 영지에 상인들이 모여드는 것을 환영하고 이를 보호했다.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지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가노 시장에서 상인에게 부담을 주는 차전, 차미, 차지료 따위를 일절 받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는 1568년 9월에는 '라쿠자령'을 내려 완전한 '라쿠이치 아쿠자'의 시행에 나섰다. 여기서 말하는 '라쿠(樂)'는 온갖 규제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쿠이치는 자유경제 원리에 입각한, 규제가 없는 시장을 가리키는데, 노부나가는 현재의 벤처기업들이 표방하는 것처럼 자유경쟁에 의해 새로운 상인들이 탄생하는 것을 환영했던 것이다.

또한 노부나가는 영지를 확장할 때마다 그 곳에 있는 '세키쇼'를 철폐해 나갔다. '세키쇼'는 국경에 설치되어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고, 유통상품의 관세를 뜯어내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을 통과하거나 다리를 건널 때, 배로 강을 건널 때에도 '세키전'을 받았다. 오늘날 자동차를 이용하여 고속도로를 지나다닐 때 통행세를 내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당시 이런 제도는 통행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노부가나는 1569년, "세키쇼를 영원히 폐지하고, 앞으로 세키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자유로운 경제에 장애가 되는 '세키쇼' 철폐에 대한 노부나가의 강한 의지는 히데요시 정권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밖에도 노부나가는 3화 제도를 축으로 한 화폐경제를 장려하기도 했는데, 이와 더불어 앞에서 설명한 '라쿠이치 아쿠자'의 추진, '세키쇼' 철폐 등의 그의 시책들은 그가 싸움 잘하는 무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발군의 경제감각을 가진 정치가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경제감각을 어떻게 습득했을까? 노부나가를 잘 아는 제1급 사료인 '오타규이치'는 그의 저서 『노부나가 공기』에서 '젊은 시절의 노부나가는 불량소년과 같은 측면과, 열심히 공부하고 예리한 감성으로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양면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노부나가 공기』에서 노부나가의 비범함을 알아볼 수 있다면, 『무공야화(武功夜話)』에서는 그의 뛰어난 경제감각이 언제 어떻게 길러졌는지 알아볼 수 있다.

세이슈 성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고마'라고 불리는 저택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이곳을 방문했다가 이 저택의 딸인 '기쓰노'에게 홀딱 반해, 그녀와의 사이에서 노부타다, 노부카쓰, 노리히메를 낳았다. 『무공야화』는 이고마 집안을 '재와 기름의 가업이 있음. 금은을 많이 가져 인근에 견줄 부가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노부나가는 바로 이 이고마 집안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론 아버지 노부히데의 풍부한 재력이 노부나가의 경제적 역량을 발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노부나가는 경제에 밝고 무용도 뛰어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장했고, 그런 아버지가 남긴 유형무형의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아, 마침내 오와리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리적인 정신을 길러준 '대항해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인들은 세상에는 일본과 당나라, 그리고 인도를 지칭하는 천축(天竺) 이 세 나라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포르투갈 인들이 일본에 오고 나서야 천축이 유럽을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런 시대에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가져온 지구의를 보았다. 그는 이 세상에 '지구'라는 것이 존재하며, 더구나 지구는 둥글고, 지구 반대편에는 유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그 포르투갈 사람은 이 지구의 머나 먼 반대쪽에서 달려온 것이다. 또한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이 일본의 동쪽 바다 저 멀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모든 것이 놀랄 만한 소식뿐이었다.'

그는 그 선교사의 말을 황당한 소리로 여기지 않고 가슴깊이 새겨 놓았다. 그는 선교사들과 상인들이 일본을 식민지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속셈을 이미 읽고 있었으나, 지구 반대쪽에서 대량의 병력을 파견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쇄국과 봉쇄보다는 그들의 높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일본과 서양의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문명의 충돌에 의해 받는 정신적 흥분을 즐겼다.

이처럼 넓고 선진화된 세상을 접하게 된 노부나가는 종래의 전쟁에 대한 개념을 바꾸기도 했다. 더 이상 무사(사무라이)정신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간파한 그는 제아무리 더러운 손이라도 이용하여 '이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드세게 밀어붙였다. 적을 속이는 계략에도 힘을 쏟았으며, 무엇보다 '경제'를 전쟁에 도입했다. 그는 철포 생산의 원동력인 풍부한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돈으로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했으며, 기술 있는 자를 끌어들이고, 돈을 이용해서 노동력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천하 통일의 싸움을 계속하여 지배하에 들어온 영지를 경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었고, 건설을 위한 파괴였을 뿐이다.

전국제재패를 위해 타협하다



노부나가는 맹렬한 기세와 번개 같은 속도로 전국(戰國)을 휩쓸었다. 고착상태에 빠진 시대의 문을 예리한 감성으로 헤쳐나갔으며, 그로 인해 일본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그 시대의 문을 열기는 했으나 대담한 구조개혁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찬전령 을 내려 경제를 매끄럽게 이끌고자 했지만, 바로 자신의 관할 지역에 악전이 집중되고 상 품 유통이 막혔다. 세키쇼의 폐해를 타파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지, 또는 힘 으로 장악한 지역에 국한되었다.

혼란했던 전국시대에 많은 적과 대치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하는 일을 이상만으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구분 상 근세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시작하지만 그 시대는 여전히 낡은 체질과 타협을 되풀이했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가 취한 정책에는 낡은 중세와, 이윽고 시작될 근세의 사고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그가 과거와 타협한 것은 노부나가가 자신의 첫 번째 꿈인 전국 제패를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자신의 뜻을 반밖에 펼치지 못한 채 1582년 6월 2일 새벽, 교토의 혼노사에서 49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이상을 이어받아 일본의 구조를 개혁하게 된다.

2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자유경제의 기본 틀을 만들다



히데요시는 코스트 삭감 전문가였다




히데요시는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일본의 정형(定型)'을 만든 사나이이다. 그의 얼굴은 원숭이를 빼다 박은 듯했고, 키 150센티미터의 단신이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부리는 애교는 주변 사람들을 웃기기에 충분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난쟁이가 전국시대 무사들을 제치고 천하를 움켜지고, 천황을 대신해서 정치를 돌보며 출세의 길을 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오와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말이다. 칼쓰는 것을 싫어해서 사람을 벨 수 없는 인간, 칼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찔려죽고 말 인간인 히데요시가 그토록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고에 깔린 '경제'였다. 그는 전쟁의 세계에 '경제'를 끌어들였고, 사람들의 심리를 치열하게 조종하여 새로운 전법을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경제 감각이 상당히 뛰어났다. 절약, 그리고 물건을 팔아 이익 을 남기는 부문에서는 단연 천재였다. 게다가 다음 수까지 읽고 행동하는 선견성에 있어 서도 발군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상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마을로 나가 산에 있는 나무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는데 미리 숫자를 헤아려 나무에 도장을 찍어둬 속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땔감에 드는 비용을 대폭 줄였다. 이처럼 그는 철저한 계산과 계획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무공야화>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가장 미천한 신분인 마구간 담당으로 노부나가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짚신 담당, '고비토가시라(잡일을 맡은 하인의 우두머리), 하급 무사로 차례차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가 보여준 놀라운 경제적 수완이었다.

'경제'를 전쟁에 도입하다



히데요시가 돈, 즉 '경제'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노부나가로부터 아사이의 영지였던 오우미를 받아 이 지역의 영주가 되고 나서이다. 돗토리 성에서의 '말려 죽인 싸움'이라 불리는 전투에서는 병사들은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하여 죽은 사람의 살까지 도려먹었다고 전해진다. 왜 이런 지옥도가 그려졌을까? 가난한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에게는 다른 무장들처럼 자신을 보필해 줄 가신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재산인 병졸들을 전쟁에서 다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하면 아군 사상자를 내지 않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세상이 돈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파악한 히데요시는 돗토리 성 공격을 계획하면서 많은 돈을 들여 돗토리 성의 곡식들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시장가격의 두 배나 지불하면서 곡식을 매각해 주겠다는데, 돈에 눈 먼 사람들이 이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돗토리 성을 수비하는 중신들마저 높은 가격에 현혹되어 성에 비축해둔 군량미마저 팔아치웠다.

돗토리 성의 곡식을 모조리 실은 배가 아니바를 떠나자마자, 마치 임무 교대를 하듯이 밀려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히데요시의 군대였다. 제 아무리 군량미를 확보하려 해도 이나바에는 이미 한 톨의 곡식도 남아 있지 않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두 배나 값이 뛴 식량을 사들일 군자금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군대에 포위 당하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돗토리 성은 금방 인육을 먹는 지옥으로 변하고 말았으며, 히데요시는 아군을 한 명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적장 요시가와 쓰네이에가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평화가 있어야 재정이 안정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천하를 통일했다.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한 야망을 실현한 것이다. '오닌의 난' 이래 120여 년에 걸친 전란은 막을 내렸으며 걸핏하면 전쟁의 불똥으로 불안해하고, 농산물 수확이 격감하여 배를 곯는 고통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천하통일은 평화로운 시간이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농촌의 수확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도회지의 기술자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일에 매달렸다.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비로소 상업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