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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천하제패 경영

구스도 요시아키 지음 | 경영정신
이에야스는 에도와 교토, 오사카 사이의 교통이 빈번해질 것을 예상하여 해안을 따라가는 도카이도와 내륙부를 잇는 나카센도의 정비를 명했다. 근세에 와서 물류의 흐름이 활발해지자 에도를 천하의 중심으로 정한 이에야스는 당연히 에도와 교토, 오사카 사이의 교통망을 정비해야만 경제의 흐름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에야스는 시나가와(品川) 숙소를 시작으로 도카이도의 전마와 숙소를 정비했다. 이들 숙소는 자치조직으로 인정받았고, 특별한 보호와 감독을 받았다.



또 도심 주변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세키쇼도 세웠는데, 이 세키쇼는 과거 유통경제를 방해하던 부정적 성격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었다. 가도에는 가로수가 세워졌다. 이 가로수는 나그네들의 피로를 씻어주고, 더위를 피하게 해 주었으며, 센바람을 막아주었다. 이쯤 되니 숙소에는 오고가는 천황들의 사신들과 파발꾼, 상인들로 북적거렸고, 가도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경제 정책에 의한 일원 지배그는 그 선교사의 말을 황당한 소리로 여기지 않고 가슴깊이 새겨 놓았다. 그는 선교사들과 상인들이 일본을 식민지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속셈을 이미 읽고 있었으나, 지구 반대쪽에서 대량의 병력을 파견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쇄국과 봉쇄보다는 그들의 높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일본과 서양의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문명의 충돌에 의해 받는 정신적 흥분을 즐겼다.



이처럼 넓고 선진화된 세상을 접하게 된 노부나가는 종래의 전쟁에 대한 개념을 바꾸기도 했다. 더 이상 무사(사무라이)정신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간파한 그는 제아무리 더러운 손이라도 이용하여 '이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드세게 밀어붙였다. 적을 속이는 계략에도 힘을 쏟았으며, 무엇보다 '경제'를 전쟁에 도입했다. 그는 철포 생산의 원동력인 풍부한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돈으로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했으며, 기술 있는 자를 끌어들이고, 돈을 이용해서 노동력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천하 통일의 싸움을 계속하여 지배하에 들어온 영지를 경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었고, 건설을 위한 파괴였을 뿐이다.노부나가는 그 시대의 문을 열기는 했으나 대담한 구조개혁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찬전령 을 내려 경제를 매끄럽게 이끌고자 했지만, 바로 자신의 관할 지역에 악전이 집중되고 상 품 유통이 막혔다. 세키쇼의 폐해를 타파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지, 또는 힘 으로 장악한 지역에 국한되었다.혼란했던 전국시대에 많은 적과 대치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하는 일을 이상만으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구분 상 근세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시작하지만 그 시대는 여전히 낡은 체질과 타협을 되풀이했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가 취한 정책에는 낡은 중세와, 이윽고 시작될 근세의 사고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그가 과거와 타협한 것은 노부나가가 자신의 첫 번째 꿈인 전국 제패를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자신의 뜻을 반밖에 펼치지 못한 채 1582년 6월 2일 새벽, 교토의 혼노사에서 49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이상을 이어받아 일본의 구조를 개혁하게 된다.전국시대의 제 무장을 절묘하게 빗댄 말이다.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환한 빛으로 길을 밝혀준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라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높은 세금과 거품 경제의 어려움에 봉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반쪽의 성공을 고스란히 넘겨 안아, 구조 개혁에 성공한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만든 시스템을 적절히 이용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금과 은이 나오는 광산을 몰수하고 나가사키 등지의 무역항을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교통의 요충지까지 자기 세력권 내에 두었던 것처럼, 이에야스 역시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쿠노 은산을 빼앗는 등 주요 광산을 독차지했다.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1603년의 기독교 자료에는 '이에야스는 가장 부유한 권력자로 거액의 금은을 쌓아 두었다.'고 나와 있으며, 후시미에 있는 저택의 한 방이 금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려앉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또한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중요시 한 자유 무역 도시 '사카이' 또한 갖고 싶어했다.



무역을 중시한 이에야스의 정책은 1600년 '분고'에 표류해 온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를 외교 고문으로 앉혀 우대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에야스는 아담스와 의논하여 남만선이 자신의 성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성곽을 설계했으나, 홍수의 위험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이 다이묘로 있던 시절에 건설한 슨푸성을 확대하는 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그가 광산과 무역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경기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순환한다고 한다. 활황기가 있으면 불황기도 있고, 성장기가 있으면, 쇠퇴기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논리라면 거품으로 부실해진 경제는 과감한 구조 개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오늘날 일본은 불황과 취업난, 구조조정의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더 큰 아픔을 수반하는 개조가 절실한 실정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전국 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노부나가, 시대의 흐름과 경제를 꿰뚫고 있던 히데요시, 그리고 사회의 변혁을 예리한 판단력으로 착실하게 수행했던 이에야스. 그런 영웅들이 보여준 전국시대 말기부터 근세 초기까지 취한 과감하고 용단 있는 정책은 혼란스런 21세기를 맞은 우리에게 한없이 큰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다케다 신겐의 화폐 경제를 계승하다'그런 시대에 노부나가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가져온 지구의를 보았다. 그는 이 세상에 '지구'라는 것이 존재하며, 더구나 지구는 둥글고, 지구 반대편에는 유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그 포르투갈 사람은 이 지구의 머나 먼 반대쪽에서 달려온 것이다. 또한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이 일본의 동쪽 바다 저 멀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모든 것이 놀랄 만한 소식뿐이었다.'무로마치 시대의 일본인들은 세상에는 일본과 당나라, 그리고 인도를 지칭하는 천축(天竺) 이 세 나라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포르투갈 인들이 일본에 오고 나서야 천축이 유럽을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전국제재패를 위해 타협하다노부나가는 맹렬한 기세와 번개 같은 속도로 전국(戰國)을 휩쓸었다. 고착상태에 빠진 시대의 문을 예리한 감성으로 헤쳐나갔으며, 그로 인해 일본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2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자유경제의 기본 틀을 만들다

히데요시는 코스트 삭감 전문가였다'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부터 이듬해까지 대판(大判), 소판(小 判), 일푼판, 정은, 두판은 등을 제조했다. 이런 금은 화폐의 제정은 도쿠가와 막부의 화 폐제조에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금은 화폐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 되었다.'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광산과 항구, 교통 요지, 경제의 거점을 직할지로 삼 았다. 그러면서 창고를 다이묘의 지배지 안에 지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량미를 조달하 기 편하고, 또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1615년 이에야스는 연호를 '게이초'에서 '겐나'로 고쳤다. 이는 평화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의 연호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미 늙었다고 생각한 이에야스는 평화를 향한 정책을 시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툼의 근원이 되는 성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이에야스는 무용지물이 된 성의 철거를 명령하고 원칙적으로 '한 다이묘에 하나의 성'이라는 '1국 1성령'을 공표했다. 또한 새 성의 건축을 금지하고, 성의 수리는 허가를 받을 것, 그리고 다이묘 집안끼리의 결혼도 막부의 허락을 받을 것을 규정했다. 그는 천황이나 귀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금중(禁中) 및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천황과 귀족을 상징적인 존재로 못박았다. 이밖에 절의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에의 개입을 봉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에야스의 정책은 노부나가가 기획하고 히데요시가 수행했던 정책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노부나가는 전란의 시대에 천하통일을 목전(目前)에 두고 눈을 감았고, 노부나가의 야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히데요시는 자유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부풀린 거품 경제로 인해 몰락했다. 이에야스는 이 레이스의 마지막 주자로서 평화의 정착과 구조개혁을 통한 발전 지향적인 경제 궤도에 일본을 올려놓은 사람이다.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원은 똑바로 그려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자신의 중심을 무력에만 집중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한편에서는 오사카의 히데요시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한 축성과 무기 구입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도시 에도의 건설이라는 대 프로젝트를 감행하며 추구하는 경제발전 정책을 수행해나가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시대를 이미 '이에야스 색채'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경제정책에 의한 강력한 일원 지배 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상업주의에 의한 경제의 번영과 현란한 문화의 꽃은 에도에서 서서히 그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붕괴된 일본의 경제는 '에도'라는 신흥 도시를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에도는 개척지라고는 하지만 예로부터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와 황량한 들판이 이어진 드넓은 평야였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가지고 이에야스의 수하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들의 이동으로 경제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성곽은 험한 지형의 산지에서 평야 지역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새로운 성과 성시 건설로 경기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농민들도 황폐해진 농경지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력을 되찾았고, 일거리가 부쩍 많아진 터에 실업률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에서의 승리는 시대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활성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히데요시의 대판이 유통용이 아니라 포상과 선물, 저장용으로 만들어졌듯이 이에야스의 대판 역시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거액의 결제에 한해서는 유통이 가능한 화폐라는 점이 다르다. 다케다 신겐을 존경하던 이에야스는 일찍부터 신겐의 금화 화폐 경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영향으로 이에야스도 일찍이 금화 유통을 시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찌되었든 이에야스는 전국에 유통되는 통화를 만든 다음에도 가이 지방에 한해서는 고슈금의 주조를 허가하고, 이를 유통시켜 일본 경제를 본격적인 화폐 경제 시대로 인도하였다.가도 정비에 힘을 기울인 이에야스에도와 교토를 중심으로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물류와 경제발전을 불러오는 인프라가 차 츰차츰 점과 선을 잇듯이 생겨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게 되었다.평화로운 가운데 구조개혁을 관철하다에필로그 - 현대에도 유용한 거품경제와 불황의 교훈이에야스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수행했다. 그리고 1616년 4월 17일, 75세의 생 애를 마감했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의 야망에서 비롯된 나라 만들기, 근세 일본의 구 조 개혁은 56년간의 세월에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라는 세 영웅의 연계 플레이 로 비로소 완성되었고, 태평세상이 출현한 것이다.농촌의 부를 빼앗아간 조선 침략 전쟁3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 경제 안정을 위한 구조개혁에 성공

'천하'라는 떡을 가만히 앉아서 먹은 사나이'오다가 반죽하여 도요토미가 구운 천하라는 떡을 가만히 앉아서 먹은 도쿠가와'히데요시는 상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마을로 나가 산에 있는 나무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는데 미리 숫자를 헤아려 나무에 도장을 찍어둬 속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땔감에 드는 비용을 대폭 줄였다. 이처럼 그는 철저한 계산과 계획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무공야화>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가장 미천한 신분인 마구간 담당으로 노부나가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짚신 담당, '고비토가시라(잡일을 맡은 하인의 우두머리), 하급 무사로 차례차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가 보여준 놀라운 경제적 수완이었다.'경제'를 전쟁에 도입하다평화가 있어야 재정이 안정된다세상은 밝아져 '라쿠이치 라쿠자'의 천국이 되었으며, 상인과 기술자는 마음껏 장사도 하 고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히데요시가 돈, 즉 '경제'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노부나가로부터 아사이의 영지였던 오우미를 받아 이 지역의 영주가 되고 나서이다. 돗토리 성에서의 '말려 죽인 싸움'이라 불리는 전투에서는 병사들은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하여 죽은 사람의 살까지 도려먹었다고 전해진다. 왜 이런 지옥도가 그려졌을까? 가난한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에게는 다른 무장들처럼 자신을 보필해 줄 가신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재산인 병졸들을 전쟁에서 다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하면 아군 사상자를 내지 않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세상이 돈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파악한 히데요시는 돗토리 성 공격을 계획하면서 많은 돈을 들여 돗토리 성의 곡식들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시장가격의 두 배나 지불하면서 곡식을 매각해 주겠다는데, 돈에 눈 먼 사람들이 이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돗토리 성을 수비하는 중신들마저 높은 가격에 현혹되어 성에 비축해둔 군량미마저 팔아치웠다.



돗토리 성의 곡식을 모조리 실은 배가 아니바를 떠나자마자, 마치 임무 교대를 하듯이 밀려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히데요시의 군대였다. 제 아무리 군량미를 확보하려 해도 이나바에는 이미 한 톨의 곡식도 남아 있지 않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두 배나 값이 뛴 식량을 사들일 군자금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군대에 포위 당하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돗토리 성은 금방 인육을 먹는 지옥으로 변하고 말았으며, 히데요시는 아군을 한 명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적장 요시가와 쓰네이에가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태평성대(太平聖代)에 히데요시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봉건 영주에 의한 일원 지배를 확립하고, 관고제를 버리고 석고제를 택했다. 또한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무사와 토지와의 연결을 끊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경제적으로 징병자를 확보했다. 노부나가의 자유경제 정책을 이어받아 성시에는 소작료나 부역 따위를 면해주고, 다른 지방의 상인들의 출입을 환영했다.그러나 히데요시가 만년에 일으킨 대륙 획득의 꿈, 조선 침략전쟁(임진왜란)에 의해 그의 경제는 파산하고 만다. 무거운 전쟁 비용을 몽땅 농민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조선 침략전쟁으로 커지는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동분서주하다 보니 예전에 보여주던 농민에 대한 온정은 터럭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1592년에 시작해서 히데요시가 죽기까지 계속된 7년간의 전쟁으로 농민과 어민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히데요시의 무모한 해외 침략은 농민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쑤셔 넣었으며, 농촌의 부를 빼앗았다. 조선침략이라는 실정(失政)으로 거품경제는 붕괴되고, 도회의 자유 경제 아래 꽃핀 기능공 문화는 '모모야마 문화'를 키워 히데요시와 가깝던 어용 상인이 부를 쌓게 해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근세사회는 세키가하아 전쟁을 거쳐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천하를 통일했다.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한 야망을 실현한 것이다. '오닌의 난' 이래 120여 년에 걸친 전란은 막을 내렸으며 걸핏하면 전쟁의 불똥으로 불안해하고, 농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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