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월스트리트 100년

찰스 R. 가이스트 지음 | 좋은책만들기
1. 1900년대와 1910년대



20세기가 시작되자 미국은 들뜬 분위기였다. 그 무렵 미국은 제조, 농업, 기술개발에서 세계최고의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공화당의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은 대기업에 우호적이었으며, 금융부문에서는 대합병이 일어났다. J.P. 모건(Morgan)은 카네기 철강(Carnegie Steel)을 5억 달러에 매입 후 다른 회사들과 합병하여 미국 강철(U.S. Steel)을 탄생시켰다. 이로 인해 자산가로서 모건의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는 계속해서 AT&T, 노던 시큐리티, 인터내셔날 하베스터와 같은 대기업들을 설립해 나갔다.

1910년 이전에 주식시장은 두 번의 대규모 공황을 겪었다. 1차 공황은 U.S 스틸(Steel)의 설립에 뒤이은 투기 결과로 발생하였으나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반면, 1907년에 발생한 2차 공황은 많은 실패자를 양산했으며, 적지 않은 은행가들과 중개인들을 감옥에 보냈다. 증시안정을 위해 은행가들과 재무성이 힘을 합쳐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냈고, 모건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섰다. 그의 노력 덕분에 뉴욕 증권거래소는 개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몇 차례의 공황과 재정 실패를 겪고 나자 미국은 절실하게 안정을 추구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20년 전에 설립된 몇몇 대기업들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과 듀크(James Duke)의 아메리칸 타바코(American Tabacco)가 독점 혐의로 대법원에 제소되었다. 1912년에는 의회가 월스트리트와 은행가들을 조사했다. 1912년의 푸조 청문회(Pujo Hearings)를 계기로 월스트리트의 일급 은행가들이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미국의회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를 창설, 월스트리트는 새로운 중앙은행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전쟁이 벌어져 시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1914년 4/4분기 동안에는 주식 시장이 열리지 않기도 했다. 시장이 다시 열리자 지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고, 투자자들은 이를 적극 환영했다. 이들의 파티는 2년 동안 지속되었다.

1910년대는 두 거대 독점기업(스탠더드 오일과 아메리칸 타바코)의 해체와 더불어 의회 청문회 개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창설, 저명한 금융인들이 함께 한 1912년 타이타닉 호의 침몰 등 20세기의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1913년에는 소득세 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1917년, 결국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자 시장은 하락하기 시작하여 1917년은 최악의 해가 되었다. 여기에 1918년 유행성 인플루엔자가 발생해 전 세계적으로 약 2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18년 드디어 전쟁이 끝났고, 1920년대가 다가오자 재계에 축하할 일이 생겼다. 연방대법원이 정부가 제소한 U.S 스틸의 해체를 기각하자 다우지수는 1906년 이후 세 번째로 100선을 돌파한 것이다.

2. 포효하는 1920년대



1920년대에 월스트리트는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함께 경험했다. 전쟁이 끝나자 경제는 1921년까지 일시적으로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가 이후 소비자들이 새로운 상품을 찾기 시작하면서 전후 번영의 시대가 시작됐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자동차와, 집, 라디오 등을 구입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만 해도 라디오가 있는 가정이 흔치 않았으나 1929년에는 미국 내 1천만 가구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하게 되었고 더욱 많은 소비자들이 새로이 자동차를 구입했으며 전화 사용율도 기록적인 수치로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중개인들이 전에 없이 자신들을 대중들에게 광고하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의 투자 기술을 선전하는 광고를 잡지와 신문에 게재했다. 대형 은행들도 여기에 동참했다. 뉴욕 내셔날 시티뱅크는 총 1만2천 마일에 달하는 통신선으로 연결된 수백 개의 증권사 지점들을 개설했고, 최고경영자 찰스 미첼은 모든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주식시장의 열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1920년대는 총체적인 투기의 시대였다. 대중 투자자들이 처음으로 주식에 눈을 돌리기 시 작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빠른 시간에 부자가 되기 위해 주식에 뛰어들었다. 주 식과 채권거래 금액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중개인들도 늘어나고 새로운 투자상품도 개발 되었다. 뉴욕 장외거래소가 1921년 실내로 들어오면서 뉴욕 증권거래소의 좋은 경쟁상대 가 되었다. 나스닥(NASDAQ)의 전신인 장외시장도 조직되어 거래소에 등록되지 않은 회사 들의 주식이 거래되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은 1928년 기존 12개 주식에서 30개 주식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대에는 벼락부자가 되는 미덕을 격찬하는 잡지 기사들이 등장했고, 따라서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 신문과 잡지들이 큰돈을 버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알려주는 기사를 실음으로써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을 널리 알리고 부추겼다. 전문 거래인들은 투자 풀을 이용해 주식 시세를 조작함으로써 1920년대에 큰돈을 벌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주식 시세를 올리기(혹은 내리기) 위한 투자모임을 결성했다. 이들 중 자동차 왕에서 주식 투기 전문가로 변신한 듀랜트(Billy Durant)의 성공은 월스트리트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제너럴모터스를 창립했던 그는 회사에서 쫓겨난 후 주식 투기를 했고, 투자 풀을 결성한지 몇 년 만에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투자에 대한 강렬한 관심으로 월스트리트는 이제 관광명소가 되었다. 강세장에 대한 관심으로 멀리 캘리포니아에서도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관광객들은 거리에 줄을 서서 중개인들이 영웅 같은 모습으로 출근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끝없는 신화가 이어질 것 같던 월스트리트도 1929년 3월이 되자 눈에 띄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주가 수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며, 주가의 급락을 막기 위해 내셔널 시티뱅크의 미첼이 주식시장에 개입하여 은행 자금을 투입하였으나 결국 재앙을 막지 못했다.

1929년 10월 24일! 거품은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이다가 갑자기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뉴욕 증권거래소는 시가 총액의 가치가 12퍼센트나 줄어들었다. 며칠 동안 팔자가 계속되었고 그 해가 끝날 무렵 다우 30은 시가 총액의 3분의 1을 공중에 날려버렸다. 은행이 도산하기 시작했고, 개인 파산도 증가했다. 불행히도 20세기 경제사의 최악의 재앙인 대공황이 이제 그 가공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3. 1930년대와 1940년대



1930년대가 시작되자 1920년대의 좋았던 시절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재즈 시대는 순식간에 끝나 마치 누군가가 전축을 꺼버린 것 같았다. 대공황은 채 1년도 안되어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10년은 더딘 경제성장률과 높은 실업률, 미래에 대한 비관론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정부는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경제계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는 불경기로 인한 은행의 도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많은 은행들이 불경기로 부실화된 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도산했다. 예금보험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객들은 돈을 인출하러 몰려갔고, 이는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심각한 신용문제를 파생시켰다. 재정 시스템에 대한 신념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한때 잘 나가던 근로자가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림으로써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차츰 월스트리트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의 거래소 거래인들은 불황이 깊어지면서 값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들을 공매도하여 하락장에서도 이득을 챙기기에 급급했고, 이는 상품선물(先物)시장의 거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시장교란에 대해 분노한 후버 대통령은 수사를 명령했고 부당한 이득을 취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많은 이들이 수년간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실과 이를 위해 동원된 갖가지 편법, 그리고 여러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대중들 사이에 월스트리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급격히 번지기 시작했다.

대공황 초반기에 주식시장은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다우지수는 1929년 최고 350에서 1932년 41로 급락했다. 그리고 1930년대를 고작 150으로 마감한다. 1933년 뉴딜 정책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의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주가가 붕괴하 자 시장은 다시 주저앉았다.

1933년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즉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933년 3월 루즈벨트는 은행 대란을 정비하기 위해 은행휴업을 명령하였고 의회에서는 증권법(Securities Act)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34년에는 월스트리트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증권거래법(Stock Exchange Act)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새롭게 조직된 증권거래위원회는 시장을 규제하고 거래 규정을 제정했으며, 투자 은행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뉴욕 증권거래소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시장은 계속 침체를 유지하다가 1935년이 되어서야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에 중립을 유지했던 루즈벨트 행정부는 곧 연합국 지원체계를 세우고 참전을 결정했다. 이제 루즈벨트 정부의 고민은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월스트리트가 전쟁 채권을 판매하여 정부에 재원을 마련해 주었으나, 1940년대의 월스트리트는 정부와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정부는 정부 기관들을 동원해 자체적으로 재원을 조달하고 스포츠 행사와 모금으로 590억 달러 조성에 성공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재무부의 대규모 자금 조달책이 시행되고 있었음에도 1940년대의 다우지수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1940년 150에서 1945년 말 200으로 상승했을 뿐이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산업은 소비자 지향 경제로 복귀했다. 1946년 텔레비전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1년 뒤에는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었다. 배급과 궁핍으로 몇 년을 보낸 국민들에게서 다시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4. 1950년대와 1960년대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월스트리트의 과도기였다. 20년 이상의 혼란기가 끝나자 미국 경제는 번영의 시기로, 월스트리트는 강세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이 끝나자 소비재나 집, 주식 등에 대한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했다. 월스트리트로서는 수십 년 만에 처음 맞는 반가운 일이었다. 정치도 월스트리트에 우호적이어서 전쟁 영웅으로,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주식시장의 성장을 장려하였고 향후 20년 동안 성장은 투자의 유력한 테마가 되었다.

주식시장에서는 수익 증가율이 높은 회사의 가치가 가격이 높게 형성되자 항구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1920년대의 강세장이 투기적 거품이었다면, 1950년대의 강세장은 튼튼한 펀더멘털에 의해 지지되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중산층 투자자들도 주식에 뛰어들었다. 1920년대의 대공황과 은행 도산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했지만, 1930년대의 은행과 중개인들에 대한 불신은 이제 새로운 혁신으로 바뀌었다. 30년간의 공백을 깨고 뮤추얼 펀드가 다시 개발되어 경제 성장의 이득을 함께 누리려는 소액투자자들은 뮤추얼 펀드에 투자했다. 그리고 주주권 행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정기총회는 더 이상 회사와 기관투자가의 조용한 만남으로 끝나지 않았고 소액투자자들은 전에 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는 냉전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다. 러시아가 1957년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의 재래전이 아닌 세계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첨단 무기와 재료를 생산하는 기업의 주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방위산업체가 주식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회사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기존의 미국의 산업가 계열과 다른 새로운 기업가들에 의해 거대하고 다양한 회사들을 묶은 새로운 거대한 복합기업(conglomerate)이 등장했다. 거대 복합기업은 다양한 산업을 했지만 핵심은 방위산업이었다.

주식시장은 한국전쟁에 힘입어 1954년부터 지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은 1950년대에 거의 세 배나 올랐다. 미국에 한창 교외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소비자들은 주택과 자동차, 그 밖의 소비재에 많은 돈을 지출했다. 전국적인 고속도로 시스템이 출범하자 자동차는 확실한 필수품이 되었다. 자동차 제조업체, 방위산업체, 컴퓨터업체, 제약회사, 첨단기술회사 등이 재래산업을 젖히고 우량주로 떠올랐다.

1960년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치변혁, 암살의 시대였다. 1960년대에 월스트리트에서는 현대적 인수합병이 시작되었다. 대기업이 다른 회사를 인수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새로운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로 인수합병이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유명한 기업들도 인수합병 대상이 되었고, 적대적 입찰이 영문조차 모르고 있는 회사를 인수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이런 대기업들은 종종 적대적 인수자, 값만 적당하면 이미 탄탄하게 기반을 잡은 회사도 쓰러뜨리는 총잡이 등으로 묘사되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은 주식 시장에 악영향을 미쳐 주식과 채권의 수익률을 떨어뜨리기도 했으나, 월스트리트는 미국 전역에 많은 중개소를 열어 대중들이 더욱 손쉽게 주식시장에 접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뮤추얼 펀드에 관한 관심도 여전히 높았다. 성장을 중시하는 회사들은 즉각 투자자들의 선호 대상이 되었고 주식 가격도 상승했다. 대기업들이 그런 목록에서 상위를 차지하면서 1920년대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주식 가격을 보여주었다. 많은 대기업들이 가전제품의 이름이 되고, 최고경영자는 언론 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등장했다.

1960년대 말이 가까워지자 월스트리트에서는 과열현상의 붕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성장을 이룩했던 회사들의 재정 문제에 연루된 사기 사건이 대대적으로 밝혀졌다. 월스트리트는 단순히 서류 처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거래소는 문서작업 처리를 위해 휴일을 선포하기도 했다. 1960년대가 끝날 즈음에는 150개 이상의 회사가 도산해 월스트리트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제 월스트리트는 1930년대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밖에서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내부의 필요에 의한 변화였다.

5. 1970년대와 1980년대



월스트리트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처럼 대조적인 경우도 없었다. 주식시장은 뜻밖에도 수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느린 시장 행보의 주범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973년 시작된 세게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유가 인상은 한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주기적인 유가상승 외에도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사건 등이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971년 증권거래인협회(NASD)는 자동시세 시스템, 즉 나스닥(NASDAQ)의 탄생을 발표했다. 장외시장이 전산화되자 잠재적으로 심각한 경쟁자를 만난 뉴욕 증권거래소는 곧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 사이 다우지수는 계속 상승해 곧 1,000을 돌파할 것처럼 보였으나 곧바로 천장을 치고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1973년과 1974년에 주식시장은 50퍼센트 이상 하락하는 사상 두 번째 최악의 폭락을 겪었다.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자 다우는 600선 아래로 떨어졌다. 석유 금수조치가 내려졌고 시장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1975년 월스트리트는 대개혁을 실시, 우량 고객들에게 수수료를 낮춰주는 차등수수료를 실시했다. 새로운 수수료 체계로 개인 고객들에게 낮은 요율을 적용할 수 있게 된 할인 중개업자들이 번창했다. 그 조치는 투자 환경의 위험성을 낮추어 소액 투자자들이 주식 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이란 인질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 유가는 1970년의 15배인 배럴당 30으로 올랐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