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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가지 위대한 결정

스튜어트 크레이너 지음 | 더난출판
산업발명가



빌 게이츠, IBM에 MS-DOS 사용권을 넘겨 시장을 장악하다




이 이야기는 빌 게이츠와 동업자인 폴 앨런이 미래에 대한 비전과 기회를 잘 포착한 반면 IBM은 판단 착오를 일으켰던 의사결정에 관한 것이다. 컴퓨터 산업 초기만 해도 IBM은 그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 본체에 관한 한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IBM이 개인용 컴퓨터(PC) 부문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 IBM이 PC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했을 당시, 데스크탑 컴퓨터를 개발한 애플의 시장 규모는 1억 달러 정도였다. IBM의 최고 경영자였던 프랭크 캐리는 직원들에게 1981년 8월까지 IBM 상표를 부착한 PC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미 시작부터 뒤쳐진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직원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PC의 핵심요소 두 가지를 회사 밖에서 조달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마이크로칩은 인텔에서, 운영체제는 시애틀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였던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공급받기로 했다.

IBM 임원들은 '비핵심 분야'를 아웃소싱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이 되는 컴퓨터 본체를 직접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즉, IBM이 생산한 본체 없이 마이크로소프트 브랜드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미래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IBM이 시장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소프트웨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일종의 표준을 정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한 빌 게이츠는 Q-DOS가 그 표준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Q-DOS는 빌 게이츠가 다른 회사로부터 고작 50달러에 산 운영체제로, 마이크로소프트가 MS-DOS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 빌 게이츠 자신도 이것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시장상황에만 잘 대처하면 자사의 운영체제인 MS-DOS가 산업 표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IBM의 PC는 출시하자마자 상업적인 면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나 PC 판매에서 얻은 대부분의 이익을 앞서 말한 두 하도급자에게 나눠줘야만 했다. 최초 계약에 따라 IBM은 MS-DOS의 개발비용을 제공해야 했고, 마이크로소프트만이 제3자에게 이 시스템의 사용권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IBM을 쇠락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PC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경쟁자들이 대거 시장에 진입했지만 모두 MS-DOS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IBM의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IBM은 근본적인 실수를 깨닫고 나서도 재계약을 하거나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고위간부들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장점유율을 깰 수도 있는, IBM에서 자체 개발한 운영체제를 폐기해버렸다는 점이다.

결국 IBM은 10여 년 이상 다른 어떤 회사들보다 컴퓨터를 많이 생산했으면서도, PC 생산 부문에서는 계속 적자를 보았다. 오히려 많은 이익을 낸 쪽은 마이크로칩과 운영체제를 공급하는 회사였다. 그 결과 컴퓨터 산업에서는 지금까지도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이 두 브랜드가 독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마케팅 매직



필립 모리스, 말보로를 터프한 사나이들의 담배로 바꿔 강력한 브랜드로 만들다




1950년대에 담배회사 R.J. 레이놀즈의 제품은 시장 점유율이 35%에 이르렀다. 이렇게 높은 점유율은 미국 담배산업 부문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숨가쁘게 추격하던 회사들 중 6위를 기록한 필립 모리스는 시장 점유율이 10%도 되지 않았다. R.J. 레이놀즈의 경영진들은 회전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자사 제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 채 앞서고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한편 필립 모리스는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상표 중 하나인 말보로를 가지고 필사적인 결의를 다졌다. 그들은 1920년대에 이미 여성 흡연자들을 타깃으로 '5월처럼 부드러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말보로를 시판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카멜, 럭키 스트라이크, 체스터필드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보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절반이 넘는 애연가들이 이 세 가지 브랜드만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다시 시판된 말보로에 대한 반응도 미진했다. 애연가들에게 말보로가 여성담배라고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립 모리스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우선 폐암에 대한 위험과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필립 모리스는 말보로에 필터를 넣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보로에 달린 필터가 니코틴 해독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로 말보로의 여성적 이미지를 벗겨내고 남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 레오버넷이라는 광고회사를 찾아갔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문신한 남자가 등장하는 1955년의 광고이다.

결국 말보로는 일터를 누비는 터프한 사나이들의 담배로 다시 태어났다. 목장의 카우보이, 해군장교, 비행사와 같은 남성적인 직종과 작업현장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말보로는 노동자를 상징하는 문신을 넣었고, 남성으로서의 과거 경력과 오늘의 성취를 만끽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 광고에 등장하는 말보로 맨은 즐겁게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차츰 과묵한 사나이로 바뀌었다.

말보로 브랜드의 발전에는 강렬한 색상의 담뱃갑도 큰 역할을 했다. 이 담뱃갑은 남성을 상징하는 회원증 같은 역할을 했다. 심지어 도심에 살면서 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말보로만 가지고 있으면 마치 카우보이처럼 보였다.

1989년까지 말보로는 미국 담배 판매의 25%를, 단일 브랜드로는 시장 점유율의 43%를 기록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누구 하나 말보로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고, 곧 없어질 상표라고 생각했다. 단 한 편의 광고를 통한 마케팅의 변화가 하룻밤 사이에 말보로와 필립 모리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셈이다.

행동으로 보여준 리더십



존슨앤드존슨, 타이레놀을 전량 폐기하여 윤리경영의 모범이 되다




1982년 한 정신병자가 청산가리를 일부 타이레놀 캡슐에 집어넣어 이로 인해 여덟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타이레놀을 생산하는 회사인 존슨앤드존슨은 긴급대응책으로 창고에 있던 재고물량을 전량 폐기 처분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미 방출된 타이레놀 총 3,100만 병을 회수했다. 이 일로 회사는 1억 달러를 지출했다. 사고가 존슨앤드존슨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모든 비용을 기꺼이 감수했다.

존슨앤드존슨의 대응은 매우 솔직했는데, 그 좋은 예로 존슨앤드존슨은 즉시 미디어와의 완전 공조체제를 선택했으며, 청산가리가 들어갔던 타이레놀 캡슐 제품을 모두 알약으로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수백만 달러가 들어갔다. 당시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결단력 있는 대응을 한 주역은 바로 회장, 짐 버크였다. 그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는데 정직하고 직설적이며 책임감이 매우 강한 경영자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짐 버크는 상황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 TV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사람들은 존슨앤드존슨에 대해 비난을 보내기보다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존슨앤드존슨이 사건에 대처한 모습은 존슨앤드존슨이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 솔직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번 독극물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음을 알린 것이다."라고 워싱턴포스트지는 평했다.

이 사건 이후 존슨앤드존슨은 비처방 진통제 시장점유율 37%라는 과거의 영예를 되찾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짐 버크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는 막대한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지만 타이레놀의 선도적 위치를 되찾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이것은 사업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꼭 필요한 것이다." 결국 존슨앤드존슨은 올바른 상황파악과 신속한 대응을 한 덕택에 판매고가 급속히 회복되었다. 현재 타이레놀은 처방전이 필요 없는 의약품 중 가장 잘 팔리는 제품 중 하나이다.

타이레놀 사태는 회사 이념이나 강령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존슨앤드존슨은 즉흥적인 계획을 수행하는 대신, '회사의 이념과 강령'에 포함된 원칙과 가치를 실현시킴으로써 회사의 목적을 달성했다. 대중들이 존슨앤드존슨을 통해 본 것은 원칙 있는 리더십이었다.

경쟁우위



루 거스너, IBM 분할을 중단하여 기업에 활기를 불어넣다




맥킨지의 컨설턴트를 역임했던 IBM의 새로운 주인 루 거스너는 1993년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르자, 전임자 존 에이커스가 그때까지 준비해 왔던 IBM의 분할을 중단시켰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 거스너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해왔다. 거스너는 IBM이 이제까지 지진과 같은 엄청난 경제적 충격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하나의 지진은 IBM이 필요로 했던 마지막 것이었다. 과장할 것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일하고 관리하는 것이 거스너의 메시지였다.

거스너가 경영하면서 IBM은 놀랍게 회복했다. 회사는 현실을 이겨나갈 자신감을 회복했고, 눈앞의 고객은 물론 잠재적 고객들과도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인터넷 시대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라. 1993년 IBM에서 오랫동안 간부로 일해온 패트릭은 모든 사원이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가져야 하고, 회사도 웹사이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라. 만약 당신이 외부에서 관심을 받게 되면 당신은 회사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패트릭은 주장했다. 정신무장을 주장한 패트릭의 요구가 결국, 적극적인 대외접촉과 내부의 원활한 의사소통이라는 회사의 첫 번째 행동강령을 확인한 정도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유일한 차이점은 패트릭은 행동강령을 수행하는 데 최신 정보를 응용하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IBM의 문화는 바뀌었다. 그 증거는, 아주 서서히 움직이던 과거의 획일적인 조직에서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활기찬 방식으로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1995년에는 전체 종업원 22만 명 가운데 2명만이 자바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를 닮아가는 변화였다.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발한 사람들을 고용하기도 하고, 또 규칙들을 깨가며 조직을 유연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스너는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정하며, 필요할 땐 리더십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현대 리더십의 교본처럼 보인다. 그것은 고용인을 통제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는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현실도 직시하고 있었다. 거스너는 이렇게 말한다. "신중하게 계속 전진해 나가면 성공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의 영광을 돌아보지 말고 미래의 위협요인들을 미리 예측하며, 겸손함과 열정, 영특함을 가지고 끝없이 도전해야 한다."

그가 인터넷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의 반응은 여느 새로운 것에 접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대단하다. 이것은 비즈니스의 새로운 채널이다. 이것을 어떻게 고객을 위해 사용할까? 어떻게 이것으로 돈을 만들지?" 고객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윤이라는 이 기업의 철칙은 IBM의 부흥과 번영, 브랜드 가치의 추락과 상승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고 있다.

IBM은 시장과는 별개로 성장해 왔다. 거스너는 회사의 고객을 재결합시킨 것이다. IBM은 100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회사로 분리될 뻔했다. 회사를 여러 개로 분리하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IBM 브랜드의 힘과 반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해체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이 거스너의 생각이었다.

베네통, 선진 의류공장에 과감한 투자를 하여 독보적인 섬유 회사가 되다



베네통의 첫 번째 혁신적인 결정은 길리아나 베네통이 화려한 색상의 스웨터를 짜기로 결정한 1965년에 내려졌다. 30년 후 길리아나 형제들은 120개국에 화려한 색상의 스웨터를 취급하는 소매점 7,000개를 갖게 되었다. 현재 200명이 넘는 디자이너를 보유한 베네통은 하루에 20만 벌 이상의 의류를 생산하고 있다. 연간 총 판매고는 1,530억 달러. 베네통의 성공요인으로는 물류와 제조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하여 생산비용을 대폭 낮추고 시장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성장을 가속화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베네통의 이러한 전략은 기업이 시대를 선도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증명해 준다. 베네통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아웃소싱 붐이 일기 전부터 그것의 유용성을 깨달은 기업이다. 1982년 당시 베네통은 200개 업체를 통해 원단과 부품은 물론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외부에서 조달해 왔으며 단지 9개 공장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소비자 요구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여 소매업자들에게 신속하게 제품을 공급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였으며, 다품종 소량판매를 통해 경쟁에서 높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베네통은 그들이 구축한 물류적 이점을 이용해 재고율과 창고비용을 낮출 수 있었고 미국의 의류업계보다 30% 정도 더 높은 마진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공 비결은 정보수집에 크게 투자한 것이었다. 성공의 기폭제가 된 위대한 결정은 베네통이 16억 달러나 넘는 총 매출을 올리면서 세계 무대에 우뚝 섰던 1992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베네통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그러나 루치아노 베네통은 회사를 더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베네통은 1억 2,80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여 첨단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의 소프트웨어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백 개 매장에서 직접 전해오는 정보를 분류해 다음 시즌에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기계에 지시한다. 전통적인 시스템으로 이와 같은 규모의 일을 하려면 적어도 400명은 필요하지만 베네통은 단지 19명이 이 시스템을 관리한다. 베네통은 이처럼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의 구축과 브랜드 인지도를 제고시키는 꾸준한 노력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레이 크록, 맥도날드를 프랜차이징하여 시장 기반을 확대하다




딕과 모리스, 두 맥도날드 형제는 1940년 바비큐 식당을 차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손님들이 좀더 빨리 식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고, 바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식사를 빨리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1948년 12월 맥도날드 형제는 식당을 패스트푸드점으로 바꿨다. 특별하거나 세련된 음식점은 아니었지만, 손님들은 차를 운전해 들어와서 첫 번째 창에서 주문하고 두 번째 창에서 주문한 것을 받아갈 수 있었으며 가격도 저렴했다.

손님이 몰리자 맥도날드 형제는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식당은 여덟 개로 늘어났다. 이때 주방기기 판매업자이며, 밀크쉐이크 혼합기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던 레이 크록이 그들의 성공에 주목했다. 그는 맥도날드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평생에 햄버거를 사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이제 이곳에 매료되어 버렸다."

1954년 크록은 맥도날드 독점 판매권을 270만 달러에 샀고, 1961년에는 전세계 판매권을 모두 사들였다. 바로 맥도날드라는 다국적 기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금, 그곳이 한때 미국 시골의 조그만 식당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크록은 자신만의 뚜렷한 경영철학을 기존의 아이디어에 결합시켜 모든 체인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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