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e-비즈니스(Evangelical Business)
김재헌 지음 | 엘맨
친절경영의 대명사(일본 MK택시 유태식 사장)1994년 한국에 IMF의 고통이 오기 훨씬 전에, KBS방송을 통하여 소개된 일본의 한 택시회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중교통문제가 최악인 상황 속에서 공항 택시의 경우 바가지 요금은 말할 것도 없고 엉뚱한 곳에 내려주기, 먼길로 돌아가기에다가 폭언, 폭행, 납치까지 자행되는 현실에서 공영 방송이 보여 준 일본 MK택시의 실상은 전 국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재일 교포가 경영한다는 MK택시는 친절하기로 소문난 일본에서조차도 매스컴에서 극찬할 정도로 화제가 되는 택시 회사였던 것이다.
MK택시의 기사들은 손님이 승차하면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MK택시의 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내릴 때에는 "감사합니다. 잊으신 물건은 없으십니까?" 하고 반드시 예의를 갖추어 말하게 한다. 혹시 기사가 이런 인사말을 하지 않았다면 요금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표시판까지 내걸고 있다. 택시기사의 유니폼은 일류 디자이너가 고급 소재로 만들고, 택시 운행이 적은 심야에는 구급용 택시를 대기시키고, 기사들에게 구급요원 자격증을 따게 했다.
교토에서 시작된 MK택시는 유태식 장로 형제가 세운 재일동포 기업이다. 이들은 20년 전 일본으로 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일을 하여 어느 정도 자본이 모였을 무렵, 파산 직전에 놓인 일본 택시 회사를 인수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도 먹고살기에 바빠서 친절이라는 개념이 사회 저변에 깊이 인식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3D업종 중 하나인 택시 서비스는 기대 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 MK택시의 친절경영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MK택시에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에 대한 편견 이전에 질투의 대상이 먼저 되었기 때문이다. 경쟁회사들은 직원 빼돌리기 작전으로 방해사기 시작했다. MK택시를 고사시키기 위하여 온갖 회유와 핍박을 가하고 높은 임금을 제시하면서 기사들을 빼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MK택시는 사장도 직접 차를 몰고 나가서 영업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결국은 유태식 장로 형제만 남기고 거의 모든 기사들이 출근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태식 장로 형제는 흔들림 없이 기도하며, 묵묵히 옳다고 생각한 일들을 해 나갔다. 직원자녀들의 교육과 후생에 많은 투자를 했고, 장애인 우선 승차와 택시 요금인하 등을 담대하게 시행해 나갔다. 생각해 보라! 친절한 데다 요금까지 싸다면 당신은 어떤 택시를 타겠는가? 장애인을 안아 택시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으며 미소를 잃지 않는 기사들을 누가 욕하겠는가? 결국 서서히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업계의 택시 회사들도 MK회사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는 동경에 있는 유수한 회사들이 앞다투어 직원연수를 위탁하기도 했다. 지금 MK택시는 기사만 해도 2,000여 명에 이르는 초대형 택시회사가 되었다.
MK택시 경영진이 생각한 것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손님에게 친절하라.' 이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 단순한 진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지켜야 될 가장 큰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요, 또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둘째 계명이다(마22:37~40)'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구치'를 만들겠다(성주인터내셔널 김성주 사장)1997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김성주를 '차세대 세계 지도자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았고, 1997년 10월 홍콩에서 열린 동남아경제각료회의 연설자로 초청했으며, 1998년 7월에는 세계여성지도자회의(Global Summit of Women) 총회에 아시아 대표 연설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호주의 경제잡지 '비즈니스 클라스'는 '1998년 세계 10대 여성 기업인' 중 한 명으로 주저 없이 김성주를 꼽았으며 1998년 10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주최한 아시아경제회의(HAPO)는 일본과 중국의 최고 경제 실력자들과 나란히 김성주를 한국 대표 연설자로 초대했다. 이런 국제적인 활동과 명성들은 김성주가 거쳐 온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 이룩한 값진 열매이자 이 시대 기독교 여성 실업가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을 던져주는 일련의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MBC TV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 그녀는 "사실 저는 기업을 하는 데 온갖 악조건이란 악조건은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여자였고, 외국 브랜드를 수입하는 데다 부잣집 딸이고 국제결혼을 했다는 것, 아직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여자가 무슨...' 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며 MBC에서 자신을 선정했을 때도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까봐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결과는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방영한 이래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김성주 사장은 높은 시청률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첫째,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글로벌화를 추구하는 자신을 보며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인구의 반인 여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좋은 예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셋째, 투명하게 일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넷째, 부잣집 딸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는데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성공한 것을 중산층이 공감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재벌그룹의 막내딸로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김성주는 딸이라는 이유로 감수해야 했던 불평등과 여러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하버드 대학 동문인 캐나다인 남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국제결혼을 함으로써 집안에서 배척 당하게 된다. 그때부터 밑바닥 생활이 시작되는데 백화점 창고일, 식당일 등 이를 악물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국내에 돌아와서 아버지 회사의 통역 일을 맡으면서 인정을 받아 마침내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 한 후, 1991년 성주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였다.
김성주에게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술 상무, 흰 봉투, 가짜 영수증이다. 한국처럼 '면식 장사가 특화된 곳'에서, 향응 없는 비즈니스는 상대에게만 적용하는 사업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에누리없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의 사업철학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IMF위기가 터지고 난 후부터였다고 한다. 다른 기업들이 골프 접대며 술 접대며, 뒤늦게 거품을 빼느라 부산떨 때 김성주는 느긋할 수 있었다.
한때 한국사회에서 세계화란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말을 가장 많이 쓰던 그 해에 IMF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 있어 세계화란 OECD 가입과 함께 경제 위기로 인식되었다. 진정한 세계화란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컴퓨터와 영어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도 출퇴근 할 때 그의 차 안에는 늘 책이 수북하다.
"그렇게 해도 세계 흐름을 따라 갈까 말까 해요. 주말마다 골프 치고 밤마다 술 마시는 기업가들을 보면 용하다 싶어요." 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성위주의 기업문화를 비웃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진정한 기독 여성사업가이다. 그녀의 성공은 원칙대로 사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맨손으로 일구어 낸 주의 기업(유성컨트리클럽 강민구 회장)박세리가 미국 LPGA에서 마침내 US오픈을 거머쥔 감격적인 순간에 멀리서 함께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지켜보던 칠순의 신사가 있었으니, 바로 유성컨트리클럽 강민구 회장이다. 사실 유성컨트리클럽은 세계 어느 골프장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골프장이다. 난이도도 세계적인 골프장 수준이기에 유성컨트리에서 자유롭게 운동을 한 박세리가 세계무대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세리 외에도 장정 선수와 같은 꿈나무 골퍼들을 지원하고 있다. 단순히 클럽의 이름을 내세우려는 목적이 아닌, 골프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운동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라고 한다.
대대로 양반 문중 선비 집안의 후손인 강 회장의 아버지는 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등 집안 일을 해야만 했는데, 그가 8살이 되던 해에 아직 어리기만 한 2남 1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 계모가 들어왔고 계모 밑에서 소년기와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계모는 7남매를 낳았는데, 그는 흥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요셉을 만들고 계셨던 것이다.
비록 가난한 집안에 형제들도 많았지만 배움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체신공무원 양성소에 가면 학비가 전액 면제되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체신공무원 양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단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2년 과정이 끝나고 1943년 강릉 우편국을 시작으로 60년대 말까지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김인득 장로와의 만남이었다고 한다. 김인득 장로와 함께 벽산을 이끌어 나갈 때 여러 차례 세상 유혹에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으나 강 회장과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곁길로 가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는데, 건설업 경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직접 강 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수주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벽산건설은 한때 7대 도급업체로까지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19년 동안의 벽산에서 최선을 다한 후에 79년 말, 종무식에서 미래를 위해 사장직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벽산을 떠났어도 김인득 장로와 교분을 유지하며 벽산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젊은이들의 육영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주를 위해 함께 일했다.
그가 살아온 생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경북의 한 시골에서 끼니걱정을 하던 소년가장이 체신 공무원 훈련원과 중앙신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내무부 총무과장에 이어 벽산그룹 사장과 국제 라이온스 클럽 서울대회 위원장, 한국 기독실업인 회장으로 그리고 '기업이윤 사회환원'에 앞장서는 기독경제인의 표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일부 경제인들의 부정 부패가 날로 그 도를 넘어서 비판과 질타를 넘어 국민들을 경악케 하고 있는데 그가 보여준 청교도적인 복음주의자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업을 통해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 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회원들의 영적 성장과 전도역량을 향상시켜 기도와 전도, 양육, 제자육성 과정을 통한 비즈니스 사회의 복음화 확산을 강력히 추구하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고희를 훨씬 넘겨 1998년에 한국 기독실업인회 회장을 맡으면서 밝힌 포부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성실하고 정직한 기독교 실업가의 표본이 되는 강민구 장로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
인간완성, 패션창조의 인격판매 기업(엘칸토 김용운 회장)"우리에게 시련을 주심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단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십시오. 회사를 살리는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1998년 잠시 화의 신청을 한 엘칸토의 경기도 하남시 공장 기독 임직원과 가족들은 잔설이 남아 있는 운동장에서 깔판만 깐 채 회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신우회가 주축이 되어 기도회를 기획하여 마련된 자리였지만 전직원이 한마음이 되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회사 임원들은 강당이나 교회에서 열 것을 제의했으나 고통을 분담한다는 의미로 운동장에서 열 것을 고집한 것이다.
이 기도회에서 회사를 살리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직원들의 노력이 외부에 알려졌다. 이들은 화의 신청을 한 후에도 정상적으로 근무를 하여 결국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화의를 마감하고 정상에 오른 기업이 되었다.
200여 개의 납품업체나 협력업체 또한 40여 년 동안 제화업계의 외길을 걸어온 엘칸토를 신뢰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납품하고 협조함으로써 승리한 것이었다. 사실 주력기업인 (주)엘칸토가 순익을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금사 등의 무리한 대출금 회수로 빚어진 엘칸토 그룹의 좌초에 대해서는 제화 패션업계에서 조차도 동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엘칸토는 평양에서 단신 월남한 김용운 장로가 1957년 명동에서 미진양화점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게를 열고 얼마 안 가서 주문이 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6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하루 2,000족을 생산하는 기계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성장했으며, 나중에는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미진양화점은 미국에 지점을 두고 성장 일로를 달리던 중, 수출했던 미국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면서 파산하였다. 그 시절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재기하기 위하여 사업을 시작할 때에 미진이라는 이름 대신 '엘칸토'를 사용했다고 한다. 엘칸토는 엘로힘의 엘과 칸(CAN)토(DO)의 합성어로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용운 장로는 회사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 할 일이 없다는 마음에서 회사 이름을 아예 바꿔 버린 것이다.
제화업계에서 비교적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난 엘칸토는 주력기업인 (주)엘칸토를 비롯하여, 캐주얼 브랜드인 (주)무크, 브랑누아를 생산하는 (주)윌다크, 여성패션 브랜드인 (주)카슈 등 4개 계열사를 갖고 있다. 연간 4~5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굴지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이는 김용운 회장의 제품개발에 대한 남다른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업계에서 최초로 KS마크를 받는가 하면 세계 제품 콘테스트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기도 했다. 엘칸토는 정전기를 중화 방전시키는 '산타롱'이란 신소재를 사용해 기능성 구두를 선보였고, 관절염 환자용 '건강구두'와 키가 커 보이는 '키 높이 구두'등을 내놓아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면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채우시고 섭리해 주심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 실업인들에게 언제나 선교와 봉사에 앞장설 것을 강조합니다."
엘칸토의 전 계열사 직원은 2,500명에 이른다. 김 장로는 이들에 대한 사원 복음화에 남달리 노력한다. 미진양화점을 경영하던 시절 사업이 확장되고 미국에까지 지점을 두고 승승장구하자 교회를 멀리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무리하게 사업을 하다 실패한 쓰라린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치도 오차가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련과 고통을 지나 승리의 날을 지내고 있는 김 장로의 확신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은 믿음의 사람(세광알미늄 유재원 대표)그리스도인은 사업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는 이와 반대로 기독교인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가 어렵고 심지어는 문을 닫게 되는 경우가 생겼을 때, 그 경영자나 직원들의 신앙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