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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e-비즈니스(Evangelical Business)

김재헌 지음 | 엘맨
재벌그룹의 막내딸로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김성주는 딸이라는 이유로 감수해야 했던 불평등과 여러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하버드 대학 동문인 캐나다인 남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국제결혼을 함으로써 집안에서 배척 당하게 된다. 그때부터 밑바닥 생활이 시작되는데 백화점 창고일, 식당일 등 이를 악물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국내에 돌아와서 아버지 회사의 통역 일을 맡으면서 인정을 받아 마침내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 한 후, 1991년 성주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였다.



김성주에게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술 상무, 흰 봉투, 가짜 영수증이다. 한국처럼 '면식 장사가 특화된 곳'에서, 향응 없는 비즈니스는 상대에게만 적용하는 사업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에누리없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의 사업철학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IMF위기가 터지고 난 후부터였다고 한다. 다른 기업들이 골프 접대며 술 접대며, 뒤늦게 거품을 빼느라 부산떨 때 김성주는 느긋할 수 있었다.



한때 한국사회에서 세계화란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말을 가장 많이 쓰던 그 해에 IMF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 있어 세계화란 OECD 가입과 함께 경제 위기로 인식되었다. 진정한 세계화란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컴퓨터와 영어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도 출퇴근 할 때 그의 차 안에는 늘 책이 수북하다.



"그렇게 해도 세계 흐름을 따라 갈까 말까 해요. 주말마다 골프 치고 밤마다 술 마시는 기업가들을 보면 용하다 싶어요." 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성위주의 기업문화를 비웃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진정한 기독 여성사업가이다. 그녀의 성공은 원칙대로 사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박세리가 미국 LPGA에서 마침내 US오픈을 거머쥔 감격적인 순간에 멀리서 함께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지켜보던 칠순의 신사가 있었으니, 바로 유성컨트리클럽 강민구 회장이다. 사실 유성컨트리클럽은 세계 어느 골프장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골프장이다. 난이도도 세계적인 골프장 수준이기에 유성컨트리에서 자유롭게 운동을 한 박세리가 세계무대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세리 외에도 장정 선수와 같은 꿈나무 골퍼들을 지원하고 있다. 단순히 클럽의 이름을 내세우려는 목적이 아닌, 골프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운동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라고 한다.

대대로 양반 문중 선비 집안의 후손인 강 회장의 아버지는 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등 집안 일을 해야만 했는데, 그가 8살이 되던 해에 아직 어리기만 한 2남 1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 계모가 들어왔고 계모 밑에서 소년기와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계모는 7남매를 낳았는데, 그는 흥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요셉을 만들고 계셨던 것이다.



비록 가난한 집안에 형제들도 많았지만 배움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체신공무원 양성소에 가면 학비가 전액 면제되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체신공무원 양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단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2년 과정이 끝나고 1943년 강릉 우편국을 시작으로 60년대 말까지 공무원 생활을 했다.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김인득 장로와의 만남이었다고 한다. 김인득 장로와 함께 벽산을 이끌어 나갈 때 여러 차례 세상 유혹에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으나 강 회장과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곁길로 가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는데, 건설업 경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직접 강 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수주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벽산건설은 한때 7대 도급업체로까지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19년 동안의 벽산에서 최선을 다한 후에 79년 말, 종무식에서 미래를 위해 사장직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벽산을 떠났어도 김인득 장로와 교분을 유지하며 벽산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젊은이들의 육영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주를 위해 함께 일했다.



그가 살아온 생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경북의 한 시골에서 끼니걱정을 하던 소년가장이 체신 공무원 훈련원과 중앙신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내무부 총무과장에 이어 벽산그룹 사장과 국제 라이온스 클럽 서울대회 위원장, 한국 기독실업인 회장으로 그리고 '기업이윤 사회환원'에 앞장서는 기독경제인의 표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일부 경제인들의 부정 부패가 날로 그 도를 넘어서 비판과 질타를 넘어 국민들을 경악케 하고 있는데 그가 보여준 청교도적인 복음주의자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업을 통해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 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회원들의 영적 성장과 전도역량을 향상시켜 기도와 전도, 양육, 제자육성 과정을 통한 비즈니스 사회의 복음화 확산을 강력히 추구하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고희를 훨씬 넘겨 1998년에 한국 기독실업인회 회장을 맡으면서 밝힌 포부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성실하고 정직한 기독교 실업가의 표본이 되는 강민구 장로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우리에게 시련을 주심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단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십시오. 회사를 살리는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1998년 잠시 화의 신청을 한 엘칸토의 경기도 하남시 공장 기독 임직원과 가족들은 잔설이 남아 있는 운동장에서 깔판만 깐 채 회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신우회가 주축이 되어 기도회를 기획하여 마련된 자리였지만 전직원이 한마음이 되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회사 임원들은 강당이나 교회에서 열 것을 제의했으나 고통을 분담한다는 의미로 운동장에서 열 것을 고집한 것이다.



이 기도회에서 회사를 살리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직원들의 노력이 외부에 알려졌다. 이들은 화의 신청을 한 후에도 정상적으로 근무를 하여 결국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화의를 마감하고 정상에 오른 기업이 되었다.



200여 개의 납품업체나 협력업체 또한 40여 년 동안 제화업계의 외길을 걸어온 엘칸토를 신뢰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납품하고 협조함으로써 승리한 것이었다. 사실 주력기업인 (주)엘칸토가 순익을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금사 등의 무리한 대출금 회수로 빚어진 엘칸토 그룹의 좌초에 대해서는 제화 패션업계에서 조차도 동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엘칸토는 평양에서 단신 월남한 김용운 장로가 1957년 명동에서 미진양화점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게를 열고 얼마 안 가서 주문이 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6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하루 2,000족을 생산하는 기계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성장했으며, 나중에는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미진양화점은 미국에 지점을 두고 성장 일로를 달리던 중, 수출했던 미국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면서 파산하였다. 그 시절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재기하기 위하여 사업을 시작할 때에 미진이라는 이름 대신 '엘칸토'를 사용했다고 한다. 엘칸토는 엘로힘의 엘과 칸(CAN)토(DO)의 합성어로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용운 장로는 회사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 할 일이 없다는 마음에서 회사 이름을 아예 바꿔 버린 것이다.제화업계에서 비교적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난 엘칸토는 주력기업인 (주)엘칸토를 비롯하여, 캐주얼 브랜드인 (주)무크, 브랑누아를 생산하는 (주)윌다크, 여성패션 브랜드인 (주)카슈 등 4개 계열사를 갖고 있다. 연간 4~5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굴지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이는 김용운 회장의 제품개발에 대한 남다른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업계에서 최초로 KS마크를 받는가 하면 세계 제품 콘테스트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기도 했다. 엘칸토는 정전기를 중화 방전시키는 '산타롱'이란 신소재를 사용해 기능성 구두를 선보였고, 관절염 환자용 '건강구두'와 키가 커 보이는 '키 높이 구두'등을 내놓아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면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채우시고 섭리해 주심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 실업인들에게 언제나 선교와 봉사에 앞장설 것을 강조합니다."



엘칸토의 전 계열사 직원은 2,500명에 이른다. 김 장로는 이들에 대한 사원 복음화에 남달리 노력한다. 미진양화점을 경영하던 시절 사업이 확장되고 미국에까지 지점을 두고 승승장구하자 교회를 멀리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무리하게 사업을 하다 실패한 쓰라린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치도 오차가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련과 고통을 지나 승리의 날을 지내고 있는 김 장로의 확신이다.그리스도인은 사업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는 이와 반대로 기독교인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가 어렵고 심지어는 문을 닫게 되는 경우가 생겼을 때, 그 경영자나 직원들의 신앙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에게 기업의 성공이란 봉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세광알미늄의 유재원 대표는 "우리는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믿으며 그들에게 공정하게 임금을 지불하고 서로를 정직하게 대하며 개인 성장을 돕는 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의 고객들 또한 중요하다고 믿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정직하게 대하면서, 그들의 발전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비스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므로 지속적으로 개량,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회사가 존속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윤도 창출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기독교 경영연구원의 이사이기도 한 그는, 이 땅에 기독교적 경영 이념을 세우는 일에 사명을 가진 몇 안 되는 기독실업인 중 한 사람이다. '경영학자, 실업인, 전문인으로 구성된 기독교 경영연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 확장의 비전을 갖고 연구하면서 교육하고, 봉사하는 기관으로 뿌리내릴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영역의 성공은 결국 회원은 물론 많은 기독인들의 기도와 후원'이라고 한다. 기독연구원을 통해 많은 기독경영인이 배출되어 경제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광알미늄의 주방용품은 소비자들에게 최고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세광알미늄이 연구 및 개발을 통한 신제품 개발로 승부를 걸어왔다는 얘기다. 특히 압력솥의 대명사였던 풍년 압력솥은 공업진흥청의 검사 결과 독일제품과 비교하여 품질이나 기능은 비슷한 반면 가격은 최고 5배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눈앞의 이익보다는 소비자를 섬긴다는 기독교인의 세계관에서 나온 경영철학으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이다.승승장구하던 사업과 불황을 모르던 약국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72년 어느 날이었다. 사채를 빌려 준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박효석 회장은 그 돈을 받기 위해 대신 부도를 막아 주고, 사채를 끌어다 그 회사에 빌려주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결국 회사는 빚만 늘어난 채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공약품 공장에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모두가 인화물질이었으므로 공장은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두 손 들고 모든 것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박 회장은 한순간에 가족은 갈 곳도 없는 알거지가 되고 이미 2남 1녀의 세 자녀를 둔 박효석 회장은 정말 기가 막혔다. 우선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던 서초동 꽃동네의 단칸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젊지 않으냐?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속은 한없이 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밤잠 안 자고 모은 재산이 그토록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고난은 항상 우리에게 손해보다는 더 큰 성숙과 지혜를 주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반쪽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박효석 회장은 서울에서 가장 싸게 약국을 열 수 있는 곳이 어딘가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새로운 시각에서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갈 곳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그래, 달동네다." 그는 당시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던 봉천동의 작은 가게를 전세 30만원에 얻어 새로 약국을 열었다. 물론 약은 모두 외상으로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산에 올라 멀리 한강을 내려다보며 꼭 성공해서 다시 한강 다리를 건너 한강 이북으로 입성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또 다른 면을 체험하게 된다. 달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약국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던 세계가 있었다. 단돈 몇 백원이 없어서 고통을 참는 사람들도 많았고, 끼니가 없어 굶주리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그들을 볼 때마다 그는 가슴이 미어져 왔다."이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의 인생관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만약 봉천동 약사 생활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독화장품의 회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위의 이웃을 위하여 무료 조제해 주고 식량을 나누는 등 작은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 장사가 잘 되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약국을 비워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서너 번. 하나님께 건물을 갖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의 아내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는 말씀을 응답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하 3층 지상 7층의 건물을 짓는데 돈이 필요할 때마다 건물 임대 계약이 한 층씩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은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 왜 자신도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런 축복이 없는가 하고 말이다.



박효석 회장은 '최선을 다하는 신앙, 최고를 드리는 자세, 최대로 섬기는 믿음이 나의 신앙 모토'라고 말한다. 1995년에 한독화장품을 설립하고 직원을 뽑을 때도 우선 순위를 신앙에 두었다고 한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자, 우수한 연구원이 쉽게 구성되었고 공장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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