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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오버

클레멘스 슈타틀바우어 지음 | 참솔
1944년 에릭 블레어가 자신이 쓴 풍자적인 우화소설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 그는 자신에게 닥칠 앞날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했다. 그가 이전에 공들여 쓴 원고들도 출판사로 부치기가 무섭게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1929년작 『바다의 신』의 반송이유는 이랬다. "책을 내기엔 아직 한참 부족하다." 친절하게도 원고 검토자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덧붙였다. "섹스가 너무 많다. 사건이 조금 덜 단순하다면 매력적일 텐데." 1934년작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에 대해 출판계는 "너무 짧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전철을 밟듯 최근에 보낸 원고도 발신자에게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출판인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견해와 함께 이런 회답을 보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이 원고를 출간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동물농장』이고, 에릭 블레어는 조지 오웰의 본명이다. 세계 정세를 주시한 출판인들은 너나없이 이 원고에서 '돼지'를 빼야만 출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지배계층이 왜 하필이면 돼지입니까. 돼지만 아니라면 좋을텐데요. 이 점은 민감한 사람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인이 가장 이 점에 민감하겠지요."



그런데 한 출판사에서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출판사는 전혀 다른 이유로 출간을 거절했다. 곧 "미국에서 동물 이야기는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를 주인공으로 한 것과 미국에서 동물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졌다. 출간된 『동물농장』은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이 팔렸고, 조지 오웰에게는 문학적 돌파구가 되었다.누구에게나 바로 어제처럼 생각되는 날이 하루쯤 있게 마련이다. 하비 볼에게는 1945년 4월 21일이 그런 날이다. 이 날은 2차대전에 참전한 하비에게 가장 끔찍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후 4시, 일본군이 하비와 다른 네 명 미군 병사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계곡을 통해 오키나와로 나아가기로 하고,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언덕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그때 폭탄이 그들 머리 위에서 터졌고, 다섯 명의 병사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비는 이 폭발의 유일한 생존자다. 하비는 생각했다. "왜 저들이 아니고 나일까? 그들은 모두 아이가 있어. 하지만 난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왜 그들이 아니고 나일까?"



1963년 12월 어느 날 아침, 하비의 집 전화벨이 울렸다. 생명보험회사의 호출이었다. 용건은 생명보험회사의 이미지에 걸맞은 로고나 도안을 만들어 달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하비는 작은 도시 우스터의 당시로서는 하나뿐인 그래픽디자이너였다. 더구나 그는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만만치 않았다. "독특하고, 건설적이며, 생명보험에 뭔가 친근한 이미지를 줄 수 있어야 해. 게다가 직원들의 윤리의식을 높여야 한다니 일이 보통 힘들지 않겠는걸."



이윽고 하비는 아내에게 도움을 청한다. "위니프레드, 친절하다는 걸 떠올리면 뭐 생각나는 게 없소?" "하비, 디자이너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며 위니프레드는 이를 드러내며 한번 씩 웃어보였다. 하비는 아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위니프레드, 방금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영감이 떠오르자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옮기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비는 일단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점을 두 개 찍었다. 그리고 그 밑에 반달 모양의 둥그런 선을 그렸다. 그러자 사람의 웃는 얼굴이 완성되었다. 그는 눈에 더 잘 띄고, 긍정적이면서도 친절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그림 전체에 노란색을 칠했다. '스마일리'는 이렇게 태어났다. 하비는 스마일 마크를 도안한 대가로 45달러를 받았다.



생명보험회사의 부사장 존 애덤스는 '행복한 미소'가 그려진 수백 개의 버튼을 직원들의 옷에 달게 했다. 노란 스마일을 친절과 일하는 기쁨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64년판 회사연감에 노란 버튼을 달고 있는 사진을 게재하게 했다. 이 사진은 후일 스마일의 역사를 입증하는 증거물이 되었다. 아무튼 노란 스마일은 대단한 인기를 얻는다. 1960년대 말까지 노란 스마일은 곳곳에 출몰했다. 권투선수의 트렁크, 커피 잔, 넥타이에 새겨졌다. 하비의 스마일은 토끼가 번식하듯 숫자가 불어났다.



하비는 1998년 7월 1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기사가 매사에 기분 좋고 활달한 하비의 웃음을 일순간에 빼앗아버렸다. 그 기사에서 M. 프랭크린 루프라니라는 프랑스 기업가가 바신이 바로 스마일 마크의 창시자라고 아주 진지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68년 학생운동이 일어난 후, 이 스마일 마크로 폭동 후의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묘사했습니다."

1971년 스마일 마크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은 루프라니는 그 때까지 이미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앞으로도 수백만 달러를 더 버는 것이 보장돼 있다. 자신이 '행복한 미소'의 최초 고안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루프라니는 1998년 미국에서도 스마일 마크에 대한 특허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는 하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가 스마일 마크를 디자인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권리를 갖느냐입니다. 우리는 그 권리를 따냈습니다. 그러므로 스마일은 우리의 것이며, 시장에 내다 팔 권리가 있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고소라고요?" 하비가 객쩍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비는 루프라니를 고소할 생각이 없다. 하비에게 친절의 상징 노란 스마일로 인한 분쟁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40년 전의 그에게 특허권이나 상표권에 대한 생각이 매우 낯설었듯 이제는 누구와 싸운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다만 우스터의 디자이너에게는 정의가 중요했다. 그래서 변호사인 아들 찰스 볼과 함께 스마일의 창시자가 누군지 가리는 싸움에 응했다.



하비는 '월드 스마일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세워 '더 밝은 내일'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하비 볼 시그네이처 스마일리' 곧, 원조 스마일을 시장에 판다. 하지만 돈 버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루프라니의 몫이다. 대신 이익금은 전 세계 어린이를 돕는 자선사업에 쓰인다. 하비가 '스마일리'의 대가로 45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은 세기의 웃음거리로 통하고 있다. 어떤 팝 스타나 배우보다 유명한 것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 보잘 것 없는 까닭이다. 이에 대해 하비는 이런 말은 했다. "나의 스마일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192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태어난 알베르토 코르다가 사진작가가 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자유로운 어린시절은 보낸 코르다는 반강제로 판매직 수습사원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서는 사진을 향한 애정이 싹트고 있었다. 어느 날 사진 스튜디오에 물건을 팔러 간 코르다는 상담을 하던 중 탁자 위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꺼내 놓았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코르다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코르다는 패션사진작가로 출발했다. 사진 외에 그의 관심사는 온통 여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코르다는 여자들만 찍어댔다. 그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고,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냈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코르다지만 그 역시 혁명의 열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59년 1월 8일 카스트로가 진군나팔을 불려 아바나에 입성하자 코르다는 즉각 사태를 파악했다. "이 남자가 앞으로 적어도 몇 년간은 쿠바의 모든 유행을 지배할 것이다." 코르다는 카스트로를 찍으며 보도사진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사가 된 코르다는 카스트로의 사진 1만 2장을 찍는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은 카스트로의 사진이 아니다.



코르다의 대표작은 1960년 3월 5일, 하루 늦춰진 혁명 1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나왔다. 전날, CIA가 개입한 폭탄 테러로 아바나 항구는 폐허가 되었고, 136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혁명 기념행사는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행사의 성격이 짙었다. 아바나의 묘지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은 매 단락이 '사회주의 아니면 죽음'으로 맺어지는 카스트로의 연설을 심드렁하게 듣고 있었다. 코르다 역시 그랬다. 코르다는 느긋하게 순간들을 포착했다. 그를 고용한 쿠바 일간지 「혁명」은 만족할 것이다. 모든 시점에서 찍은 관들, 고통으로 오열하는 유족들의 표정, 그리고 정치가의 몸놀림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지도자'의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틀림없이 카스트로의 사진은 내일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다.



코르다는 좀더 특이한 대상을 찾았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 라이카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이곳저곳을 훑었다. 장 폴 사르트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야, 이미 너무 많이 찍혔어." 셔텨 위에 올려진 그의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매혹적인 모습도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진부한 소재였다. 다시 연단 위의 카스트로와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는 고위 간부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었다. 사진 찍기를 그만두려 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가 파인더에 나타났을 때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과 같았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황홀한 두 눈동자였다. 한순간 알베르토는 너무 놀라 꼼짝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단 1초도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이토록 신비롭고 광적인 젊은 혁명가를 포착할 기회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찰나의 문제였다." 알베르토 코르다는 90밀리미터 렌즈, 조리개 수치 5.6, 100분의 1초 노출로 셔터를 두 번 눌렀다. 사진의 주인공은 당시 쿠바 국립은행 총재 체 게바라였다. 이튿날 신문사에서는 예의 카스트로의 사진이 선택되고 체 게바라의 사진은 잠시 잊혀졌다.



1967년 5월 어느 날 이탈리아의 출판인 잔자코모 펠트리넬은 쿠바 정부의 신임장을 앞세워 코르다의 스튜디오를 찾는다. 펠트리넬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를 통해 수완을 발휘한 인물. 그는 『의사 지바고』를 서방세계로 밀수해 노벨문학상과 베스트셀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했다. 펠트리넬이 이번에는 볼리비아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체 게바라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게바라의 사진이 필요했다. 그래서 코르다의 스튜디오를 찾았던 것이다. 펠트리넬은 코르다에게서 두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을 선물로 받는다. 체 게바라가 죽고 나서 처음 6개월간 코르다의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는 1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그 포스터의 한 귀퉁이에는 '에디토리얼 펠트리넬니'라는 표식을 달았다. 어느새 저작권이 펠트리넬리 출판사로 귀속된 것이다. 반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을 찍은 주인공은 그 대가로 단 1페소의 수입도 건지지 못했다.믹서 도매상 레이먼드 크록은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버거운 나이인 52세에 결단을 통해 거부가 되었다. 레이먼드는 믹서를 팔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보통 레스토랑을 방문하면, 자신의 회사 제품 '프린스 캐슬 멀티 믹서'를 한 개나 기껏해야 두 개를 파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그 정도면 웬만한 레스토랑에서는 장사에 큰 불편이 없었다. 레이먼드가 유창한 말투로 다소 과대 선전하는 대로 '기술의 기적'을 실현한 그 기계는 한 번에 다섯 잔까지 밀크 셰이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의 레스토랑은 자그마치 여덟 대의 믹서를 구입했다. 레이먼드는 한꺼번에 40잔의 밀크 셰이크를 만들어야 하는 레스토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 레스토랑은 팔각형이다. 모든 벽은 유리로 돼 있다. 서빙하는 사람들은 유니폼을 입었고, 하얀 종이로 만든 테 있는 모자를 썼다. 모든 게 반짝반짝 빛나고 윤기가 흐르는 걸로 봐서 청결에 특히 신경을 쓰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좌석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은 플라스틱 접시에, 또는 그릇이 아니라 종이 싸여 제공되었다. 음료수 역시 딱딱한 종이컵에 담겨 나왔다. 레이먼드의 눈에는 이 모든 광경이 자신의 미래처럼 보였다. 더 특이한 점은 계산대 앞에 뱀꼬리처럼 늘어선 손님 중에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놀랍게도 긴 줄은 순식간에 바뀌곤 했다. 줄 서 있는 이들은 금방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길래 이런 일이 가능할까? 레이먼드는 은밀히 레스토랑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두 형제의 비밀이 몹시 궁금했다.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널드 형제는 영화배우가 되는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왔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형제는 계획을 바꿔 할리우드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드라이브인 - 자동차에 탄 채로 음식을 먹는 - 레스토랑을 인수했다. 언제나 손님으로 꽉 차는 것을 레스토랑 경영의 제1원칙으로 정했다. 경영 원칙을 지키기 위해 형제는 메뉴를 크게 줄였다. 25가지의 다양한 요리를 9가지로 줄였다. 기준은 조리방법이 얼마나 간단해서 음식이 빠르게 완성되며, 가격이 저렴하냐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단연 부각된 것은 햄버거였다. 형제는 싼값에 즐길 수 있는 세트 메뉴도 만들었다. 몰려오는 손님들을 위해 이들은 레스토랑보다 훨씬 큰 주차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 형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계획했다. 장차 대기업으로 성장할 레스토랑을 위해 상징물도 제작했다. 뉘인 활처럼 생긴 M자를 아주 커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하지만 이 일을 맡은 건축가들은 미관을 해칠 거라며 이 마크를 싫어했다. 레이먼드가 샌버너디노의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맥도널드 분점은 26개가 있었다. 레이먼드는 27호점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맥도널드 형제는 더 이상 분점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10만 달러의 연수입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범국가적인 체인망을 만들겠다는 초창기의 야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레이먼드는 맥도널드 형제와 맥도널드 라이선스 사용권을 950달러에 팔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레이먼드가 수입의 1.4%를, 맥도널드 형제가 0.5%를 갖는 조건이었다.



1955년 4월 15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데스플레인스에 첫 레스토랑을 개업한 레이먼드는 첫날 366달러 12센트의 수입을 올렸다. 레이먼드는 프랜차이즈 경영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생산과정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햄버거의 표준화가 선결과제였다. 결국 지름 9.49센티미터, 무게 45그램, 지방함량 최대 19퍼센트가 표준치로 정해졌다. 고기 위에 얹을 양파, 오이, 겨자, 케첩도 정확히 규격화했다. 또, 레이먼드는 자신과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상대를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 대우했다. 그는 마치 메시아처럼 전국을 돌며,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패스트푸드 신앙을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네바다에 사는 맥도널드 고객은 델라웨어에 사는 맥도널드 고객이 먹는 햄버거와 정확하게 똑같은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

1961년에는 뉴욕의 투자자를 통해 모은 270만 달러로 맥도널드의 형제의 지분을 사들인다. 이로써 레이먼드는 맥도널드 상호에 대한 실질적이고 완전한 소유자가 된다. 오늘날 맥도널드는 전세계적으로 2만 5천 개가 넘는 분점을 거느리고 있다. 매년 약 1,700개의 분점이 새로 문을 연다. 맥도널드의 연매출액은 360억 달러에 이른다.맥 라이언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선택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이 영화는 93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흥행작이다.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귀여운 여인〉은 4억 달러를 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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