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
도널드 T. 필립스 지음 | 시아출판사
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
도널드 T. 필립스 지음
시아출판사 / 2001년 5월 / 382쪽 / 10,000원
제1부 리더로서의 준비빨간 벽돌로 지어진 조그만 2층 건물의 계단에 올라섰을 때, 스물다섯 살의 마틴 루터 킹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편에 있는 낡은 주(州) 의사당 건물 꼭대기에서는 남부동맹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펄럭이던 깃발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가 남부동맹 깃발 아래에 있다는 것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킹이 들어가려던 건물은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로, 목사가 된 그의 첫 부임지였다.
1954년의 몽고메리는 인종 분리의 온상이었다. 압제와 절망이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곳이 바로 몽고메리였다. 예를 들어 버스에 타더라도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을 수 없었다. 만일 흑인 옆자리에 백인이 앉으면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에 서야 했다. 심지어 승객의 75퍼센트가 흑인이었지만 그들의 자리는 늘 버스 뒤편이었으며,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도시 조례에 따라 벌금을 내거나 구속되었다. 운전기사는 모두 백인으로 이들에게는 규정을 강제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우리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기에 덱스터에 왔습니다.” 첫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어둡고 음울한 우리의 하늘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전쟁의 화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모든 흑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혼란과 갈등, 자포자기, 의미 없는 절망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덱스터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을 평화와 구원의 언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한 덱스터를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몽고메리의 신임 목사는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킹이 몽고메리에 부임한 이듬해, 미국의 민권운동에 불을 붙인 중요한 사건이 한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재단사 보조로 일하던 로라 팍스라는 42세 여성이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몽고메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흑인 지도자 집단은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였다. 즉, 에버너디가 주창한 몽고메리 개선위원회(MIA)라는 이름의 새로운 조직에 전체 지도자들이 호응하였고, 의장으로는 놀랍게도 킹이 추천되었다. 킹은 그 자리에서 의장직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가 적임자라면, 기꺼이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집회는 기도와 성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의장으로 선출된 킹 목사가 일어서서 15분간의 개막 연설을 시작, 로라 팍스 여사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그녀가 겪은 사건을 다시 한번 언급한 후 강한 어조로 연설의 끝을 맺었다. “이제 우리 민중들은 지쳤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그동안 우리를 지치게 만든 사람들, 잔인한 압제의 발길질로 우리를 혹사시킨 사람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저항뿐입니다.” 우레와 같은 군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버스 거부 운동은 몽고메리의 흑인 지도자 집단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였다.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마땅한 교통수단 없이 버틸 수 있단 말인가? MIA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운의 모든 택시 회사와 계약을 맺어 버스와 동일한 운임인 10센트에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합승 운동(car pool)을 고안하여, 도시 전역에 40곳의 승하차 정류소를 지정한 후 사람들이 공동으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승용차를 보유한 수백 명의 시민들이 자원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킹은 몽고메리의 저항 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중의 소망에 귀를 기울였다. 즉 상대방을 알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럼으로써 킹의 신뢰성은 대중의 입을 통해 확산되었다. 진정한 리더는 대중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경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행동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만일 이 과정이 배제된다면 무슨 수로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특정의 목표, 즉 그들의 기대와 욕구, 열망과 기대’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버스 거부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서 버스회사에서는 운행 거리 1마일당 22센트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 결과 운동을 막기 위한 갖가지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래서 일부 흑인 거주 지역의 노선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적자는 오히려 더 늘어만 갔다. 경찰청장까지 나서서 택시 회사를 상대로 승객 1인당 법적 최저 요금인 45센트를 받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합승 정류장에까지 경찰이 동원되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해산시켰다. 1956년 10월 말, 마침내 몽고메리의 지방 검사들의 요구에 의해 법원에서는 임시 명령을 통해 합승 운동의 중단을 명령하였고, MIA 지도자들 역시 더 이상은 계획을 진행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불리해 보였다. 거의 1년간 버스를 외면하면서 이용하던 값싼 대체 교통수단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법원에 구속된 상태에서 시 당국에 맞서려면 변호사 비용도 필요했고, 15,000달러라는 벌금도 감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킹은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합승 운동은 이제 끝났습니다.” 킹은 언론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을 묶어 두는 명령을 내릴 법정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따라서 우린 걷거나 서로의 차를 함께 이용하면서 이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11월 13일, MIA 의장으로서 시 당국에 의해 핵심 피고로 몰려 피고석에 앉아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마틴 루터 킹은 한 장의 쪽지를 건네받았다. 대법원에서 앨라배마의 버스 인종차별 법이 위헌이라는 하급 법원의 결정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몽고메리 버스 거부 운동은 381일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흑백 양측에서 수십만 달러의 비용을 쏟아 부었다. 4만 명 이상의 군중이 정부에 대해 ‘대규모 비협력 운동’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였으며, 비인간적인 버스를 타는 것보다 당당하게 걷는 것이 훨씬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7년, 115명의 흑인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몽고메리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흑인 지도자들은 선거인 등록에 초점을 맞추며 몽고메리 방식의 민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를 발족시키고 킹을 만장일치로 새 단체의 의장으로 선임했다.
킹은 대중들에게 폭력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비폭력주의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유약하고 비겁한 방법이 아니라 강하고 대담한 접근법’임을 주장하며 비폭력주의를 변화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에게 비폭력주의는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며 ‘성취 수단’ 그리고 ‘정의와 진실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이러한 전술은 흑인 대중과 백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흑인 대중에게 비폭력주의는 그들의 가슴과 영혼에 무언가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던 자존심과 열정,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비폭력주의는 백인들의 양심에 영향을 미쳤다. 백인들의 도덕적 방어막을 허물어뜨렸으며, 그로 인해 잃어버렸던 양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제2부 민권운동과 리더유능한 리더는 사람들의 행동을 격려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상황이 호전될 때는 격려의 강도를 약간 낮출 수 있지만, 상황이 불리할 때는 그 강도를 끌어올린다. 유능한 리더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격려한다. 몽고메리에서 발생한 위기 상황에서 킹은 ‘끊임없이 주장하라, 날 수 없으면 뛰어라, 뛸 수 없으면 걸어라, 걸을 수 없으면 기어라.’고 역설했다.
잦은 시련으로 때론 참고 기다려야 했지만, 킹은 물러서지 않았다. “운명의 날 앞에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그의 이러한 충고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호소가 담겨있었다. 1963년 버밍엄 교도소에서 쓴 유명한 편지에는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인종차별의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다려라’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고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물에 빠뜨리는 악한 사람들을 볼 때, 분노에 눈이 멀어 우리 흑인 형제자매들에게 욕을 퍼붓고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경찰을 볼 때, 흑인을 받아주는 모텔이 없어서 자동차 안에서 쭈그리고 자야 할 때, 날이면 날마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성가신 표지를 보며 굴욕감을 느낄 때, 여러분의 이름이 ‘검둥이’가 되고 중간 이름은 여러분의 나이에 상관없이 ‘애송이’가, 그리고 성은 ‘녀석’이 돼 버릴 때, 백인들이 여러분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절대 ‘여사’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을 때,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밤낮으로 고통당할 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초조함 속에서 속으로는 공포를 밖으로는 분노를 느끼며 살아갈 때, ‘쓸모없는 놈’이라는 퇴행적인 인식과 싸워야 할 때, 여러분은 왜 그저 기다리기가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62년 9월,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의 SCLC 총회 - 마틴 루터 킹이 기조연설을 하다가 누군가의 주먹에 얼굴을 맞는 것으로 끝나버린 - 가 끝난 후, SCLC의 버밍엄 지부 대표였던 프레드 셔틀스워스는 애틀랜타에 있는 SCLC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틴 루터 킹에게 버밍엄에서 대대적인 민권운동을 벌여보자고 제안했다. “만약 당신이 민권운동의 승리를 원한다면 버밍엄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킹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흑백 통합의 조짐이 보이면 버밍엄의 백인들이 집요하게 맞서 싸운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킹은 버밍엄을 ‘전국에서 가장 철저하게 인종 차별이 가해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토마스 제퍼슨, 권리장전과 헌법 서문, 그리고 제13, 14, 15차 헌법 개정안,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차별을 불법화하는 미 대법원의 1954년 판결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초기의 토론은 셔틀스워스와 킹의 전화 통화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킹이 SCLC에 제기한 질문이 중심이었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가 과연 버밍엄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버밍엄 시 당국이 가장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버밍엄에서 그들의 뜻을 성취한다면, 전 남부를 통틀어 그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그 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토론은 그 일에 대해 상세한 계획을 짜는 일로 이어졌다. SCLC는 이 계획을 ‘프로젝트 C’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C는 ‘대결(Confrontation)’을 의미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간에 버밍엄에서의 운동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킹은 회의 마지막 날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엄중히 경고했다. “나는 여기 모인 모두가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자신이 정말로 이 운동에 참가하기를 원하는지 판단해주기를 바랍니다. 내 판단으로는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운동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지 못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점에 대해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 발언은 SCLC의 투쟁 계획 과정이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위는 시간이 흐르자 확실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4월 6일에는 소규모의 시위자들이 평화적인 행진을 한 후 체포되어 호송차에 실려 끌려갔다. 또 일련의 공공 도서관에서의 연좌 농성과 신중하게 선택한 백인 교회에서의 예배 시위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부활절 기간에 이르러 불매 운동의 여파가 뚜렷이 느껴지자, 버밍엄의 기업가들은 시 당국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4월 10일에는 법정에서 주장을 펼칠 기회를 줄 때까지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는 법원 명령서가 발부되었다.
킹은 그 명령서에 대한 대응 방침을 생각해보기 위해 조직원들을 다시 모았다. 개스턴모텔 30호실에서 몇 시간 동안 토론한 끝에 그들은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앨라배마 법정이 부정과 차별을 영속화하기 위해 사법 절차를 오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킹은 말했다. 성 금요일인 4월 12일 킹과 랄프 애버너디 그리고 수많은 시위자들은 버밍엄 다운타운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다섯 블록을 채 지나지 못해서 그들은 경찰국장 불 코너를 비롯한 수많은 경찰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현행 법원의 금지 명령을 어겨서 체포한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시위자들을 경찰 호송 차량에 태웠다. 버밍엄 감옥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한 곳에 몰아넣었다. 킹은 어두운 독방에 매트리스도, 담요도, 베개도 없이 감금되었다. 그에게는 전화 통화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의 변호사도 킹을 만날 수 없었다.
킹이 투옥됨에 따라 버밍엄 시위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리더 없이 11일을 지냈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4월 22일, 킹과 애버너디를 비롯한 시위자들은 재판을 받았고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법원 명령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사는 그들에게 5일간의 구류와 5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킹은 버밍엄에서의 민권운동을 쇄신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보석금을 지불하고 변호사들에게 항소 신청을 하도록 지시했다.
킹이 풀려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운동의 참가자들을 모아 조직을 재구성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버밍엄 지역에 거주하며 운동에 기꺼이 참가할 만한 흑인 성인들 대부분이 이미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행동팀들은 버밍엄에 있는 흑인 고등학교를 찾아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책자를 돌렸다.
고등학생들이 행진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5월 2일, 한 고등학교의 교장이 학생들이 학교를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교문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담을 넘어 행진 출발점인 10번가 침례교회로 향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어린 수백 명의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들도 참가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 어린 학생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앤드류 영과 제임스 베벨이 이끄는 행렬을 따라 출발했다. 이들은 다시 경찰청장 불 코너와 만났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경찰관들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경찰견, 소방용 호스, 장갑차까지 동원되었다. 첫 번째 무리의 학생들은 경찰 호송차에 끌려 올라가면서 ‘아무도 우릴 돌려보내지 못하네’, ‘우리는 끝내 이기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무리의 학생들에게는 소방수들이 소방용 호스로 학생들에게 물을 뿌렸는데, 수압이 너무나 세어서 나무껍질이 벗겨질 정도였다. 어른들과 고등학생들은 그 물을 맞고 건물에 부딪히거나 말 그대로 쓸려 내려갔다. 어린이들은 독일산 셰퍼드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어른들 중에는 너무나 분노하여 벽돌과 병을 던지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비폭력에 대한 암묵적 약속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은 곤봉을 쥐고 몰려와 때리고 차고,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매질을 해댔다. 시위 군중들은 마침내 흩어져 서둘러 교회로 되돌아왔다. “저 검둥이들 도망가는 꼴 좀 봐!” 하고 불 코너가 외쳤다. 하지만 이 오만한 인종 차별주의자인 경찰청장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뉴스 카메라 앞에서 그는 무고한 희생자들에게까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다음 날 언론은 요란한 보도로 들끓었다. 어린이들을 물어뜯는 경찰견, 소방용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쓰러지는 십 대 청소년들, 어른들을 잔인하게 구타하는 경찰관들의 사진이 곳곳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