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그리고 리더십
김윤태 지음 | 성안당
조선왕, 그리고 리더십
김윤태 지음
성안당 / 2023년 3월 / 358쪽 / 19,800원
대업을 이뤘으나 불행했던 왕, 태조 이성계(1335~1408)전투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 능력 있는 무장.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고, 병사와 백성에게 인기를 얻은 장수. 22세까지 원나라人으로 살았던 그에게 고려보다 중요한 것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 대업을 이루는 것과 이루어 낸 업적을 번영시키는 것은 또 다른 목표였지만, 다음을 위한 목표와 비전을 그리지 못해 쓸쓸한 노년을 맞았다. 최고 리더의 자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리더십이어야 했다.
야망을 가진 자세상은 누구나에게 기회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실력을 갖추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기회를 알아보지도, 잡지도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찾아오고, 준비된 자만이 그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나라가 약해지고 명나라가 강해지는 원명 교체기인 그즈음 고려 공민왕은 반원 정책의 기조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공민왕 10년(1361) 한족의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범하면서 청년 이성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청년 시절부터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실력과 경험을 쌓아 자기 분야에서 확실히 이름을 낼 만큼 인정받는 무장이었다.
삽시간에 남하한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했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파천하게 된다. 고려는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이성계는 휘하의 친병 2천 명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의 군사들은 공병(公兵, 국가의 급여를 받고 복무하는 병사)으로 복무 기간이 끝나면 고향으로 내려갔다. 반면 이성계의 부대인 가별초(家別抄)는 가문에 예속된 군사들로 공병과는 다르게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기마 부대로 전투 경험도 많았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탁월한 활솜씨를 뽐내며 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가장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동북면 쌍성을 침입했을 때, 아버지 이자춘의 관직이었던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된 이성계는 함흥평야에서 그를 격퇴했다. 20대부터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전장을 누빈 변방 장수 이성계는 이 두 번의 전투로 중앙 정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스타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참고로 당시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계속된 전투로 무장들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장수들이 출세를 하던 시기였는데, 그들 중 단연 돋보였던 무장은 최영과 이성계였다. 둘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무예가 출중하고 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아무튼 홍건적을 물리치면서 처음 등장한 이성계는 변방 장수의 이미지를 벗고 무장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았으며, 황산대첩에서 크게 활약해 중앙 정계와 백성들에 믿음을 주는 스타급 장군이 됐다.
변화, 그리고 시작1392년 7월 17일, 마침내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이성계는 의욕에 차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조절했다. 왕조가 바뀌는 큰 변화에 혼란스럽지 않도록 국호도 ‘고려’라는 이름을 유지하다가, 1393년 2월 15일에서야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그는 정도전이 말하는 백성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참고로 고려가 소수의 귀족들에게 부와 명예, 권력이 집중되는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였다면,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폭넓은 사회로 개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좀 더 민주화된 사회로 발전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관료 사회로서의 시스템이 보완돼 이전보다 균형 잡힌 국가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개국 이후, 태조 이성계가 우선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새 수도로의 천도였다. 그는 즉위 직후 한양으로 천도할 뜻을 비쳤으나, 정도전과 신하들이 반대했다. 기반이 잘 닦여 있는 수도를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는 아직 ‘조선’이라는 국호도 사용하기 전인 초창기에 왜 이렇게 서둘러 수도를 옮기려고 했을까?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무장이었지만, 개성의 귀족들에게는 여전히 변방 장수였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텃세와 비협조로 마음이 불편했던 그는 천도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태조 이성계는 결국 태조 3년(1394) 8월, 무악대사와 정도전의 동의를 얻어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하게 된다. 한양의 지형적 이점을 살펴보면,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서쪽으로 인왕산과 동쪽으로 낙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산이 도시를 품는 형태로 산에 둘러싸인 도시로 방어에 아주 유리했다. 또한 남한강과 북한강이 육지와 연결돼 교통과 물류 수송에도 아주 이로운 위치였다. 서해안의 뱃길을 이용해서 조세를 걷기에도 편리해 한양의 뱃길 근처에는 창고가 많았다.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있는 창고가 광흥창, 풍저창, 용산창 등이다. 이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였고, 권중화와 정도전 등을 한양으로 보내 터를 정하고 12월 4일 태조가 직접 지켜보는 속에서 종묘의 터를 닦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29일 새 궁궐이 완성됐다.
새 수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정도전의 천재성은 빛을 발한다. 수도 건설의 총책임자로서 궁궐의 위치부터 모양, 규모와 쓰임새, 건물마다의 이름과 그 뜻을 정하는 모든 것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온다. 궁궐뿐만 아니라 수도 한양의 형태를 만들어 가면서 4개의 대문과 소문을 만들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었다. 정도전의 머리와 손으로 그려지는 모든 것이 실제로 세워지고 지어졌다.
한편 정도전은 수도가 완성된 이후 활발한 집필 활동으로 조선의 뼈대와 근간을 잡아갔다. 그래서 조선 왕조 500년 역사는 그의 설계를 근본으로 유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근간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지분이 있는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조선 창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태조실록』「정도전 졸기」를 보면, 정도전이 술에 취해 중국 한나라 고조인 유방이 장량(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말은 자신이 이성계를 선택해 조선을 건국했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조선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설계했던 정도전. 과연 그가 없었다면 조선 창업은 이뤄질 수 있었을까?
리더가 진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이 말은 산을 오를 때 높이 오를수록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는 말이다. 리더에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정말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 건국 후 한 달 만에 이성계는 여덟 아들 중 막내인 11세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된 배경에는 태조의 막내에 대한 사랑도 있었지만, 신덕왕후 강씨의 입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역성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면, 다음은 왕실의 안정을 위해 상식적인 후계자 선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상식적이지 못한 태조의 악수는 혈육 간에 피를 불러왔고, 본인도 불행한 노후를 보내며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태조 이성계가 피 값으로 얻은 조선의 미래와 안정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뼈아픈 실책인 것이다.
태조는 탁월한 무장으로써 부하 장수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며 통솔력을 발휘한 성공적인 리더였다. 하지만 정치인 이성계의 모습은 달라야 했다.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판단해야 했다. 뛰어난 무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이성계가 57세에 왕이 된 후 긴 시간 몸에 밴 리더십 스타일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에게는 현재 시점에서의 문제 해결보다 미래 시점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나갈 수 있게 하는 리더십이 더욱 요구된다. 이성계가 준비된 왕이었다면 왕조의 안정과 번영에 대한 비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세자를 세우는 실책을 하고 만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이 일에 대한 이성계의 후회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ㆍ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가 없을 것이다. -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의 『동각잡기』는 이성계의 인품에 대해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하고 존중했기에 많은 병사들이 이성계 부대에 속하길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손으로 주변의 신망을 얻는 좋은 인품을 가졌다. 그의 매력의 핵심은 포용력과 소통 능력으로 보인다. 당시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 의지는 강했지만 권문세족에 밀려 힘이 없었을뿐더러 기회도 잡기 어려웠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사람이 힘과 인품을 갖춘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젊은 신진 사대부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그들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포용력과 소통 능력을 보여줬다. 또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채우려는 의지도 있었다.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능력도 출중했으며, 야심도 있었다. 한 마디로 이성계의 개인적 자질은 뛰어났다. 이러한 부분이 최영과 조민수 등 경쟁자들을 제치고 젊은 개혁가들의 추대를 받은 결정적인 이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리더로서의 중요한 덕목인 책임감과 선택 상황에서의 냉정함에는 의문 부호가 붙는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은 주변의 평가와 관계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주변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던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에 반대했는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이성계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역적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끝까지 목표 중심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또한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후계자를 선정한 것은 그간 그가 보여 준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망스런 결정이었다.
출중한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리더의 자리에 올라 대업을 이뤘지만 번영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던 조선 창업자 이성계. 그가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리더였다면, 조선의 창업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천재 리더, 세종(재위 1418~1450)피의 시대를 넘어 가치의 시대로 진정한 조선을 출범시킨 학습 군주 세종. 지식 인재 양성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탁월한 지도자. 문화 강국을 꿈꾸고 민족의 글과 천문 과학을 발전시키며 천재성을 발휘한 군주. 북방 정책을 통해 군사 강국의 자존심을 지키며 무기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왕. 무엇보다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백성들이 겪는 세금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전 국민투표를 실시한 애민 정신의 끝판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각종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고 결국 많은 성과물을 남긴 멘탈갑의 슈퍼맨이었다.
모든 걸 아버지에게 물어봤던 허수아비(?) 왕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세종이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장자인 양녕대군이 아닌, 셋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의 안목이 역사의 큰 틀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세종의 집권 초기는 우리가 아는 세종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국왕의 자질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파파보이였다. 세종은 신중한 성품이기도 했지만, 임금으로서 주체적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상왕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 신하들은 왕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세종 집권 초기는 전혀 기강이 서지 않는 시기로 왕의 권위조차 찾기 어려운 시기였다.
세종은 왜 왕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을까? 세종은 애초에 왕이 될 계획이 없었다. 세자인 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에 갑작스레 세자가 된 세종은 책봉 두 달 만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가 된 것도 갑작스러웠지만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차기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습과 준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에게 철저히 복종적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을 태종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왕으로서의 모습보다 아들로서의 모습으로 임금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렇다면 태종은 왜 이토록 빠르게 세종에게 양위를 한 것일까? 태종은 자신이 건재할 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폐위는 됐지만 양녕대군의 지지 세력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혹시 모를 반란의 위험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태종의 계산이었다. 안정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한 박자 빠른 양위였다. 그러면서 국정 운영을 옆에서 도우며 아들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는 아버지 태종의 섬세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조선 초 최대의 뇌물 스캔들, 부패를 몰아내다고려 말 김원룡이라는 상인이 당시 세력가인 임견미에게 뇌물을 주고 김생의 가족들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었다. 하지만 임견미가 사망하고, 조선이 시작된 후 이들은 모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됐음을 인정받아 양인 신분으로 회복됐다. 세월이 흘러 김원룡의 아들인 김도련이 노비를 되찾기 위해 당대의 권력가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426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을 노비로 삼겠다며 김도련은 당시 권력가들에게 총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의 노비를 뇌물로 상납했다.
그런데 당시 최고 권력가인 병조판서 조말생이 김도련에게 노비 24구를 뇌물로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김도련의 노비 뇌물 사건은 세종 4년의 일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세종 8년 사헌부에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수사하게 됐고, 전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참고로 조말생은 태종의 오른팔로 7년 동안이나 승지(비서실장)를 역임한 최측근이었다. 또한 그는 태종이 실시한 첫 번째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아들을 태종의 사위로 만들어 왕실과는 사돈지간이었다.
이런 조말생의 뇌물 스캔들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권력형 비리 사건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조말생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종은 함경도로 사람을 보내 강력한 재조사를 명했다. 특검으로 여죄를 밝혀내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조말생이 노비와 장물 등 780관(현재가 15억 원 정도)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 아버지 태종 때부터 권세를 쥐고 있던 그의 민낯이 드러나게 됐다. 그런데 뇌물 80관(1관=3.75㎏) 이상을 받은 자는 교형에 처한다는 당시 법률을 근거로 하면 780관을 받은 조말생은 사형에 처해져야 했지만, 세종은 그간의 공을 참작해 유배형으로 조말생의 비리 사건을 처리했다. 아무튼 김도련이 관리 17명에게 노비 132구를 뇌물로 바친 이 사건은 조선 초 정치사에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됐는데, 이를 기점으로 태종대의 권력가(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사람들로 채워 나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드디어 세종 시대로 출발하게 됐다. 이전까지는 고려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조선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은 사람들이 왕과 신하로 자리를 잡는 진정한 조선이 된 것이다.
그러면 4년 전 사건인 뇌물 스캔들이 다시 쟁점화된 것은 우연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의 신하들과 기싸움을 하며 움츠렸던 세종이 이 권력형 비리 사건을 처리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중요한 기점이 됐는데, 이는 바로 세종의 기획으로 보이며, 지난 사건을 끄집어내 처리하면서 정세를 유리하게 주도하는 아버지 태종의 이른바 묵은지 전술을 아들 세종이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