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신동준 지음
미다스북스 / 2017년 9월 / 391쪽 / 15,000원
강력한 1인자 VS 더 강력한 2인자 - 태조와 정도전
1인자의 강력한 결단력
고려는 14세기 말이 되자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안으로는 권문세족들의 부정과 횡포로 집권 체제가 약화되며 왕권이 쇠퇴했다. 밖으로는 왜구가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이때 고려 최고의 무장 최영과 신흥 군벌인 이성계가 등장했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왜구를 격퇴하면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요동을 관리하겠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해오는 사건이 있었다. 고려 우왕은 이성계에게 군사권을 주며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령했다.
최영과 이성계는 입장이 갈렸다. 처음부터 요동 정별에 반대한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인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췄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해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이 힘들고, 습기로 활이 풀려 전투가 여의치 않으며,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상서를 올렸다. 회군을 청한 것이다. 최영과 우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시 회군을 결행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최영이 정벌군과 싸우려 했으나 병력 없는 텅 빈 왕실이 승리할 리 없었다. 결국, 최영과 왕실을 몰아낸 이성계는 고려를 접수했고 1392년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조선이 탄생한 것이다.
1인자라면 인문학을 공부하라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는 무사(武士)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왕조 교체의 난세에 무인이 일시적으로 보위에 오른 경우는 있으나, 수백 년 동안 유지한 새 왕조의 건립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이는 반드시 득천하(得天下)와 치천하(治天下)의 방략을 훤히 꿰는 책사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했다. 조선의 건국에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문(文)과 담을 쌓은 단순한 무사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다. 비록 체계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으나 일정 수준의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정도전의 권유로 『맹자』와 『대학연의』등을 탐독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문’의 상징인 성균관에 들어가 문무겸전의 지략가로 성장한 것도 그가 학문을 중시한 결과였다. 이성계가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정도전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도 정도전과 대립한 권근을 중용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리 생각하고 한발 앞서 조치하라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왕자의 난’에 의해 제거당하는 극적인 삶을 보냈다. 조선을 세우고 조선에 버림받은 정도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정몽주와 이방원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과 우익에서 이성계를 도왔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도 그들을 거들었다. 어지러운 고려를 바로잡겠다는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고려 왕조라는 토대 안에서 중흥을 꾀한 타협적 노선이었다. 반면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새로운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급진론자였다. 결국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 부패한 고려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할 때, 정몽주는 그의 정치적 스승 이색과 함께 반발하고 나섰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성계를 제거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아들 중 정치적 감각이 가장 예민했던 방원은 정몽주의 움직임을 읽고 먼저 문신들의 기선을 제압했다. 그래도 죽기를 각오하고 이성계의 집으로 향한 정몽주와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던 방원이 맞닥뜨렸다. 먼저 방원이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정몽주의 마음을 떠봤다. 이에 정몽주가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답했다. 이를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가 자신과 뜻을 같이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결국 자신의 휘하 조영규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암살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뜻을 같이했던 정도전도 제거했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종종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장자방이 그를 키운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이 말은 정도전 자신이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스스로 왕이 되기보다는 임금의 자질이 충분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내세운 뒤, 정치는 조정대신들이 맡아서 하는 강력한 신권주의(臣權主義) 국가를 꿈꾸고 있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왕권 국가를 지향한 이방원과 재상을 중심으로 한 신권 국가를 만들려는 정도전의 이념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과한 욕심은 무덤과 같다
정도전이 세력을 손에 쥐었을 때 이방원은 공신 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난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병제도마저 없애 무력 기반을 완전히 잃게 된 그는 정도전에게 몰려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정도전이 이방원의 손에 사라졌으니,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결과다. 정도전이 죽은 뒤 권근은 성리학에 대한 최고 권위인 해석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는 어부지리와도 같았다. 당시 성균관에서 권근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하륜이 신권을 내세운 정도전과 반대로 성리학을 왕권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 세조 때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통치이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1457년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이 등극하면서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이 중앙정계에 등장했고, 신권 국가를 지향한 정도전의 통치 이념이 서서히 주류로 진입했다. 길재의 학풍은 의리를 중시하며 신권 국가를 지향한 점에서 정도전과 일치했다.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의 기묘사화, 명종의 을사사화 모두 관학의 주류를 장악하려는 권근의 왕권 중심 성리학과 정도전의 신권 중심 성리학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권근과 정도전의 사상적 대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인자는 2인자로 경계하라
권근을 적극 끌어들여 정도전과 병존시키면서 조선 건국이념의 기본 틀을 다진 이성계의 리더십 역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다만 초기에 정도전의 주장에 휩쓸린 나머지 권근과 하륜 이외의 고려 유신들을 모두 끌어안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도전을 과도하게 칭송하는 현행 학계의 잘못된 흐름이 크게 수정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IBM의 인공지능 ‘왓슨’이 가장 창의적인 CEO를 뽑았다. 바로 애플의 팀 쿡이었다. 쿡은 스티브 잡스에 이어 애플을 여전히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이끌고 있다. 애플의 전직 임원은 ‘스티브 잡스가 제품 개발을 이끌었다면, 팀 쿡은 회사를 현금 더미로 만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잡스가 기기의 혁신을 이뤘다면, 쿡은 관리의 혁신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도 한다. 잡스가 애플의 1인자로서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쿡의 든든한 관리와 뒷받침이 있어서였다. 애플은 혁신적인 1인자 잡스와 치밀한 2인자 쿡의 이상적인 조합으로 더욱 강화된 것이다.
탁월한 1인자 VS 소통하는 2인자 - 세종과 황희
상황에 맞춰 인재를 발탁하라
태종 이방원은 집권 과정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를 죽이고 정권을 창출한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업적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취한 패업인 휼패(譎覇)로 평가받았다. 반면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와 애민사상, 조선의 주체성 확립 및 인재 양성 등으로 올바른 패업인 정패(正覇)로 평가받았다.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지만 태종과 세종의 리더십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뭉치는 지점이 있다. 맹사성과 황희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태종은 두 사람을 뛰어난 재상이 될 것으로 내다봤고, 이들을 세종의 재위 기간 중 활약할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일단 내쳤다가 다시 기용함을 반복했다. 세종이 두 사람을 치세의 지렛대로 활용한 것은 태종과 세종의 인물을 보는 능력이 일치된 결과였다.
태종이 난세의 성군이라면 세종은 치세의 성군이다. 치세의 1인자 리더십과 이에 절묘하게 반응한 2인자 리더십을 분석하는 데 황희와 맹사성만큼 좋은 대상도 없다. 두 사람은 류관과 함께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 불렸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조선조 초기에 활약한 세 사람의 청백리란 뜻이다. 맹사성은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데다 음률에 밝아 풍류를 즐긴 까닭에 재물을 모으는 데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것이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운 데다 늘 청백하게 선비들을 예우한 점과 사치하지 않은 삶을 영위한 것만은 확실하다.
2인자에게 힘을 실어주라
그러나 황희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선초삼청’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노복과 논밭을 갖고 있었다. 그의 졸기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이를 대변한다. “세종은 황희가 동산역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에 사직을 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남이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풍문에 불과하다는 글을 올려 구했다. 아들 황치산에게 관청에서 몰수한 과전을 바꾸어줄 생각으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했다. 황중생이란 자를 서자로 삼았다가 이후 그가 죽을죄를 범하자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고는 성을 바꾸게 하니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이는 그가 청렴결백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일가친척의 각종 비리 혐의를 무마하려 백방으로 손을 쓰는 등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펼쳤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세종은 황희를 무려 18년 동안 줄곧 영의정의 자리에 앉혀놓았다. 세종은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 세종은 조선이 여전히 건국기의 난세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비록 태종 때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통치이념에 대한 신권 세력의 저항이 셌다. 따라서 세종이 새로운 세제개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무려 17년간 여론을 수렴하면서 신하들과 토론과 숙의를 거듭한 것을 왕도의 전형으로 평가하는 것은 한쪽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결과다. 신하들이 세종의 세제개혁 방안에 거듭 이의를 제기한 것은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황희와 맹사성 역시 이들과 같은 편에 서 있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새로운 방안이 척박한 토지를 가진 빈농에게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으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의도를 놓지 않았다. 이미 태종이 발호 가능성이 큰 신권 세력을 소탕했음에도 세종 때 들어 만만치 않은 신권 세력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는 표면상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우면서 사실상 신권 우위의 통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성리학을 통치이론으로 채택한 결과였다. 세종이 맹사성과 황희를 중용한 배경도 이 같은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직언을 하는 사람을 발탁하라
맹사성은 세종 7년에 문신으로서 최초 삼진도진무가 되었다. 세종 9년에는 마침내 정1품의 우의정에 오른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잠시 대간들의 탄핵으로 파면당하기도 했으나 이내 혐의가 풀려 복귀했다. 당시 맹사성은 『태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는 중이었다. 편찬이 끝나자 궁금한 세종이 한번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단호히 거부했다. “군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종은 맹사성의 말이 옳다고 판단해 그의 의견에 따랐다. 실록의 편찬 과정에 군왕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통은 여기서 시작됐다. 맹사성은 세종 13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해 5월에는 『태종실록』의 감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흑우를 타고 다니기를 즐겼다. 한편 세종은 국가대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때로는 조정에 나와 황희와 함께 대사를 논의할 정도로 그는 조선의 정치 발전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고향에서 숨을 거둔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험한 일도 기꺼이 해야 인재다 / 중재의 리더십은 필수다
황희가 보여준 리더십의 특징은 세종과 신료, 그리고 신료와 신료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한 것이다. 맹사성의 겸허하며 신중한 행동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세종은 ‘중재’와 ‘겸신’으로 대표되는 두 사람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해 성세를 구가했다. 황희가 깊은 안목으로 갈등의 중재자로 활약하며 위정자의 위민정신을 실천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한 그의 2인자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두문동에서 빠져나와 조선에 참여한 것이 결코 일신상의 영화를 도모하는 단순한 ‘변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고 통치자의 최고 덕목은 적재적소에 올바른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다. 세종은 이를 훌륭히 수행해냈다. 그는 민생안정을 겨냥한 부국책을 성공적으로 실시해 이를 토대로 강병책을 구사했다. 또한 문무(文武)의 모든 측면에서 조선의 위상을 사방에 널리 떨쳤다. ‘문’의 차원에서 집현전을 세우고 나서 신숙주와 성삼문 등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육성했다. ‘무’의 차원에서는 김종서와 최윤덕 등을 발탁해 조선의 북방 강역을 대폭 확장하면서 북로남왜의 화근을 제거했다. 이런 위업을 이룬 군왕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오로지 세종이 유일하다. 세종은 ‘중재’와 ‘겸신’으로 요약되는 두 사람의 다른 2인자 리더십을 최대한 활용해 1인자 리더십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갈등의 조화와 결단력이 요구되는 이조와 병조 등의 업무는 황희, 유연하면서도 섬세함이 필요한 과거시험 감독과 학문 교습 등의 예조 업무는 맹사성에게 맡긴 것도 이 때문이다.
디즈니의 전 CEO 마이클 아이스너는 2인자 프랭크 웰즈가 헬기 사고로 죽을 때까지 행복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웰즈와 편안한 동료처럼 지낸 아이스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엄격한 예산을 세우고 뛰어난 투자감각을 지녔던 웰즈의 사무실을 하루에도 10번 이상 찾으며 조언을 구했다. 아이스너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웰즈는 ‘결점만 보는 사람’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여 디즈니의 경영 목표인 ‘최고 아이디어의 성공 보장’을 도왔다.” 1인자에 대한 2인자의 냉정한 판단과 평가가 무너지면 어떤 조직이든 오래가지 못한다.
치밀한 1인자 VS 부응하는 2인자 - 정조와 채제공
상황을 파악하고 실행에 옮겨라
정조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늘 선비와 같은 점잖은 군주로 묘사된다. 호학군주로서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을 이끈 성군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막후정치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경험 많고 교활한 정치가였다. 재위 기간 중 붕당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노론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정국의 동향을 알고자 노력했고,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미리 입을 맞추고 그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정조가 심환지에게 자필로 써 보낸 300통의 어찰이 2009년 후손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정조는 세종에 버금하는 호학군주였으나 여러 측면에서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군주로서 신하들과 지혜를 다투고, 현실과 동떨어진 도학군주를 자처하고, 스스로 감정을 절제하기 못해 화병을 키우고, 기만적인 ‘막후정치’를 시행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편견없이 인재를 발탁하라
정조의 즉위를 계기로 벽파와 시파를 대표하는 김종수와 채제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채제공이 우의정에 제수된 정조 12년 이후 죽을 때까지 번갈아 정승으로 지내면서 각각 벽파와 시파의 당론을 대표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여러 측면에서 대조를 이뤘다. 이들이 보여준 2인자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정조의 1인자 리더십에 대한 평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상황에 따라 해법을 찾아라
바람직한 통치체제로 김종수는 신권 국가를, 채제공은 왕권국가를 지향했다. 김종수가 남송시대의 주희를 기본 사상으로 삼는 송학(宋學)을 추종한 데 반해, 채제공은 원시유학에 충실했던 전한시대의 한학(漢學)을 높이 평가했다. 천주교와 불교의 수용에 관해서도 김종수는 이단으로 규정해 강력히 배격했으나, 채제공은 정조와 함께 이단으로 규정하면서도 이를 믿는 사람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후에 천주교와 관련한 사건에서 채제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국부의 계책에서도 김종수는 전통적인 중농주의 입장이었으나, 채제공은 중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가 정조 15년에 시전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상업 활동 자유를 확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채제공의 사상은 이가환, 정약용 등에게 그대로 이어져 그는 사후에도 남인들 내에서 확고한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