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신 정주영 vs. 마쓰시타
김진수 지음 | 북오션
경영의 신 - 정주영 vs. 마쓰시타
김진수 지음
북오션 / 2017년 4월 / 324쪽 / 15,000원
정주영과 마쓰시타의 등장 : 16세기 말 ? 20세기 초의 조선과 일본
‘20년’이라는 시차의 의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정주영보다 20여 년 먼저 태어났다. 그런데 ‘20여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현상을 살펴보면, 일본을 뒤쫓아 가는 상황이 전개되어 왔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의 뒤를 추격하는 간격이 대략 20-25년 정도였다. 비교적 큰 이벤트로는 도쿄올림픽(1964)과 서울올림픽(1988)을 들 수 있고, 오사카만국박람회(1970)와 대전세계박람회(1993)를 들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나라의 사회적 현상으로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진행되어간 패턴도 20여 년의 격차를 두고 그대로 나타났다. 문화적 현상으로는 아이돌 그룹의 등장이 일본에서는 1980년대 초에 1세대가 나타났는데,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1세대가 등장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지방마다 전개되고 있던 특유의 ‘마츠리’(축제)가 한국인에게 신기하게 보였었는데,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주최하는 특색 있는 각종 축제가 전국 지방마다 열리고 있다.
한편 산업생산과 상품수출 부문에 대해서는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았고, 일부 품목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뛰어넘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이 아직 일본을 못 따라가는 부문이 있다. 물질적인 부문에서는 일본을 따라잡고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까지 왔지만, 시민의식과 국민의식과 같은 정신적인 부문에서 한국은 일본에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적인 의식 수준에서 일본인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찬란한 우리 조상의 역사를 거꾸로 쓰고 있는 못난 후손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시작된 19세기 이전까지 한국인은 일본인을 가르쳐 온 솔선수범의 롤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업의 첫 문을 어떻게 열었을까 : 자전거 점포와 쌀가게
마쓰시타
13세 소년, 자전거 한 대를 팔기 위한 눈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쓰시타 마사쿠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약 18만 4천 평이나 되는 부농이었다. 하지만 마쓰시타가 4세 되던 해에 부친은 쌀 선물 거래에 투자했다가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부친은 지인이 경영하는 맹아원에 사무직으로 취직이 되어 큰 도시인 오사카로 가서, 학업을 포기한 막내아들에게 일자리가 있다며 오사카로 불렀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처음 들어간 곳은 ‘미야다’라는 화로를 만들어 파는 상점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9살이었다. 화로 상점에서의 생활은 불과 3개월로 끝났다. 주인의 사정으로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 후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고다이 상점이라는 자전거 점포로 옮겨 이곳에서 5년 정도 일했다. 자전거 점포에 들어간 지 5년 쯤 되는 1910년 무렵에 오사카 시내 곳곳에는 전차부설 공사가 한창이어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눈에 보인 것은 ‘전기’라는 신천지였다. 그리고 ‘전기’에 대한 그의 열망은 오사카 전등회사(현재 칸사이 전력)에 이끌렸고, 지인을 통해 오사카 전등의 옥내배선 부서에 취직했다.
오사카 신혼, 전셋집 다다미를 뜯어내고: 이후 마쓰시타는 검사원으로 하루 5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기기구 연구에 매달려 마침내 ‘개량 소켓’의 시제품을 개발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시제품을 들고 가서 상사에게 보고했지만 상사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1917년 마쓰시타는 오사카 전등을 그만두고 독립을 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오사카 이카이노의 셋집을 개조하여 주거 겸 공장으로 사용했는데, 아내 무메노와 처남 이우에 도시오(후일 산요전기 창업자)가 일을 도왔다. 또 오사카 전등 시절의 동료였던 모리타 엔지로, 하야시 이산로가 가세하여 5명이 일을 시작했다.
뼈아프게 통감한 판매와 시장의 중요성: 독립하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쓰시타는 벽에 부딪혔다. 자신 있게 만들었던 전구 소켓을 도매상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판매의 중요성, 시장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판매를 할 수 없으니 공장을 계속 운영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었다. 결국 동료 두 명은 공장을 떠났다. 자신과 아내와 처남만이 남아서 공장을 지켰다. 생활은 전보다 더 곤궁해졌다. 하지만 전기기구 개발에 대한 열망은 접을 수가 없었는데 뜻밖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지내던 전기기구 도매상점 주인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가와기타 전기라는 선풍기 제조공장에서 선풍기의 바닥판을 도기에서 인공수지로 바꾸려고 하는데, 마쓰시타의 소켓 제조기술을 응용하여 만들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1차로 선풍기 바닥판 1천 개의 주문이 들어왔다. 밤낮으로 일했다. 드디어 160엔의 매출에 80엔의 이익이 생겼다. 다음해 1월엔 2천 개의 주문이 들어왔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하게 되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다시 소켓을 만들기로 했다. 오사카의 오오히라쵸의 조그마한 2층 집을 월세로 빌려 ‘마쓰시타 전기기구제작소’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 날이 1918년 3월 7일로,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일이다.
정주영
가난은 싫다, 네 번의 가출과 쌀가게: 정주영은 1915년 7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마쓰시타와 다르다. 마쓰시타는 아버지가 취직을 부탁해서 화로 가게에 들어갔지만, 정주영은 취업하기 위해 스스로 가출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출은 네 번이나 실행됐는데, 4차 가출은 1934년 그의 나이 19세 때다. 정주영은 같은 마을 친구 오인보와 함께 고향을 탈출했다. 서울에 도착하여 오인보는 서울에 남고, 정주영은 인천부두 하역장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맡는다. 그리고 하역 일이 없을 때는 공사판 현장에서 막노동 일을 했다. 정주영은 막노동 일을 다니다가 ‘엿 공장’에 첫 취직을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1년도 안 되어 ‘엿 공장’을 나온다. 배울 게 없어서 나왔다는 게 그만둔 이유다.
정주영은 곧이어 쌀가게 ‘복흥상회’의 배달꾼으로 취직이 되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23세 때 주인집 아들이 노름과 방탕한 생활을 하여 쌀가게를 닫을 형편이 되자 주인의 권유로 정주영은 ‘복흥상회’를 인수하게 된다. 1938년 1월 정주영은 서울에서 으뜸가는 쌀가게를 운영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상호를 ‘경일상회(京一商會)’로 변경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불행을 맞는다. 다음해에 조선총독부에서 미곡을 전면 통제물품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쌀 배급제가 실시되고 경일상회는 문을 닫는다.
자동차수리회사 설립, 담보 없이 사업자금 마련: 1940년 25세 때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라는 간판을 달고 자동차수리회사를 시작한다. 자기 자금이 700원뿐이라 동업자가 800원을 출자하고 경일상회 시절 알게 된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 사장으로부터 3천5백 원을 빌려 총 5000원의 사업자금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개업한 지 20일 만에 공장에 불이 났다. 이런 참사에도 정주영은 좌절하지 않았다. 빚더미를 짊어진 정주영은 용기를 내어 오윤근 사장을 찾아간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다시 3천5백 원을 빌린다. 정직, 성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고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의지와 끈기와 패기를 가진 정주영에게 오윤근은 희망의 불씨를 지펴준다. 정주영은 신속한 수리, 남다른 서비스로 3년 만에 빌린 돈 7000원과 이자를 모두 갚고 어느 정도 자금에도 여유를 만들었다. 1943년이 되자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기업통제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한다. 정주영이 창업한 아도서비스는 더 큰 회사인 ‘일한공업소’에 흡수 합병될 운명에 처하고 총독부 정책에 반기를 들 수 없는 신세인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를 넘겨준다. 이후 정주영은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모아 중고트럭 39대를 매입하여 운수업을 새로 시작한다. 1943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2년 동안 정주영의 운수업은 계속된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한반도에 광복이 찾아온다. 광복과 더불어 정주영의 사업구상도 새롭게 바뀐다. 평소에 그는 자동차 관련 사업이 전망 좋은 미래산업이 될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업을 다시 구상한다. 1946년 4월 정주영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적산토지 200여 평을 불하 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회사의 구성원은 정주영 본인과 부인 그리고 매제 김영주 등 3인으로 시작하여 금새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1년 후에는 7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
그들은 어째서 실패한 적이 없는가 :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
마쓰시타
마쓰시타식 사업부제와 경리사원 파견제: 1935년 마쓰시타는 일본에서 최초로 기업에 사업부제도를 시행한 경영자이다. 그가 사업부제도를 처음 시도했을 때는 새로운 영역이었던 건전지 사업과 라디오 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당시 마쓰시타 전기는 건전지를 타사로부터 구입하고 있었는데, 건전지 사업 진출은 완전히 신규사업 분야였으므로, 이질적 사업을 기존의 조직에 맡기기보다 효율적인 경영관리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내 사업부제를 신설하여 각 사업부가 독자적으로 매출을 형성하고 이익을 창출하도록 해서 독립 경영하는 형식을 취했다.
1935년에 새로운 사업부는 새로운 회사로 분사하게 된다. 사내 사업부제도에서 사외 분사제도로 바뀐 이유는 세제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 주식회사로 전환하기 위한 면이 강하다. 각 사업부를 새로운 독립회사로 분사를 시행한 결과 마쓰시타 전기는 자체의 사업을 소유하지 않는 지주회사의 성격으로 변했다. 이렇게 하여 마쓰시타 전기는 일본 최초로 지주회사 형태를 취한 기업이 된다.
마쓰시타의 전기는 각 사업부 또는 독립한 계열회사에 지주회사인 본사에서 경리사원을 파견했다. 이 경리사원은 사업부에서 직접 채용하지 못했고, 계열회사에서도 직접 채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경리사원은 모두 본사에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직접 채용하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각 사업부장이나 자회사의 사장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경영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리사원을 함부로 자르거나 다른 부서로 전환 배치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경리사원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열려 있었다.
사례를 들면 어느 사업부장이나 자회사의 사장이 대규모 투자가 걸린 신규 사업계획을 작성하여 마쓰시타 고노스케에게 올리게 되면, 그는 이미 본 건에 대하여 경리사원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으므로 사업 추진 여부에 대한 검토를 빨리 할 수 있었다. 그는 정보 보고에서 올라온 경리사원의 판단과 사업부장이나 자회사 사장의 판단을 종합하여 사업계획에 관한 신규투자 여부를 직접 차질 없이 챙길 수 있었다. 한편 마쓰시타 그룹 계열회사의 수가 늘어나서 국내외에 500여 개 사를 거느리고 있을 때부터 이러한 경리사원제도는 사라졌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사장, 회장을 거쳐 상담역으로 물러나서도 현직 사장, 회장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경리사원으로부터 직접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시절, 많은 대기업들이 사업부제도를 도입하여 사내 독립채산제를 시행하고 그룹 회사를 거느리게 되었을 때 마쓰시타 그룹과 유사한 스타일의 경영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일본식 사업부제도의 독특한 스타일로 일본 경제계에 정착하게 된 것이며, 총괄적으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서구식 사업부제와 다른 점이다.
정주영
정주영의 인간ㆍ문화ㆍ교육ㆍ정치적 태도: 정주영은 희망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는 치유의 삶을 살아왔다. 그가 바라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그의 정치 입문 역정을 고찰해 보면 사실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정주영의 성공을 이끌어 낸 결정적 요인은 경제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인간적 태도, 문화적 태도, 교육적 태도, 정치적 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주영의 인간적 태도는 취학 이전에 서당에서 배운 유교 경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문화적 태도는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끊임없이 문화계, 학계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가져 오면서 새로운 지식과 폭넓은 문화의식을 소중한 경영자산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교육적 태도는 지역사회교육협의회 후원회장을 맡아 25년간이나 꾸준히 ‘교육복지’를 실천해 온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태도는 아산재단을 만들 때의 이념이었던 복지공동체의 실현과 인류의 보편적 국가이념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불행한 시해사건으로 서거한다. 이어서 전두환 군사정부(7년)가 들어서고 노태우 정부(5년)로 이어져 12년 동안 신군부 통치가 이뤄졌는데, 이 시기가 정주영에게는 고난의 시절이었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민간경제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인 정주영은 신군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 주도의 통제경제 압박을 온몸으로 막아내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정주영은 정부의 부조리와 부패를 가장 싫어했다. 그의 이런 생각과 태도는 신군부 집권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을 격화시키는 상황을 만들었다. 전두환 정부시절 그는 전경련 회장 사퇴 압력을 받는다. 그런데 고분고분하지 않자 신군부 정권과는 관계가 더욱 멀어지게 되고, 드디어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산업개편’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다.
정치에 뛰어든 것은 노욕이고 실패였나: 1992년, 전두환과 노태우 정부의 신군부정권(1980-1992)이 끝날 무렵, 정주영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78세 때다. 통일국민당 창당 45일 만에 치른 총선거에서 득표율 17.5%를 얻어 그 자신을 포함한 국회의원 31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통일국민당은 한국의 정당정치사에서 대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유일한 정당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정당이었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정당 창당의 기획은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반면 정주영은 정당 창당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는 정주영의 외로운 결단과 불굴의 의지와 불도저 같은 도전의 결과물이다.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성장 역사가 보여주듯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고 그가 선택한 새로운 영역은 뜻밖에도 정치였던 것이다. 타이밍은 절묘했다. 마침 군인정치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치가 시작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12월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고 선거에 나선다. 정주영의 정치 도전은 여기까지였다. 대선투표 결과 16.3%의 득표로 낙선했다. 당시 대선에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나와서 3파전을 벌렸는데,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김영삼 정부 말기, 한국에 IMF 외환위기 사태가 도래했을 때 정주영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혹자는 나의 대통령 출마에서의 낙선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고 주장하던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고 얘기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 오늘의 현실을 보자. 5년 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지도자(YS)의 실패이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여기에서 지나간 선거에 대하여 가정해 보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통일한국을 겨냥하는 국가건설을 위해 정주영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을 때 그를 선택했더라면 한국은 IMF를 피할 수 있었을까? 정주영을 잘 아는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교육복지’, ‘의료복지’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천해 온 장본인으로 국민을 자상하게 배려할 줄 알았고, 무역ㆍ외환의 중요성과 세계경제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국민과 국가에 이익이 되는 깨끗한 정치행위라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경험하고 강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