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전 나의 열정
정몽준 지음 | 김영사
나의 도전 나의 열정
정몽준 지음
김영사 / 2011년 9월 / 320쪽 / 14,000원
제1장 나의 삶, 나의 이야기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 속에서 북한산을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쉬지 않고 오른다. 땀이 목을 타고 흘러 등을 흠뻑 적신다. 대남문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린다. 성벽에 기대서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산 아래에서는 높게 보이던 빌딩들이, 여기에서는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심각하고 무겁게 생각되었던 일들이, 여기에서는 그냥 담담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현대 직원들을 자식처럼 돌보시다: 어릴 적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한 말을 귀담아 들으셨다가 아버지께 에둘러 말씀드리곤 했다. 우리 형제들은 큰 나무 밑에서 햇빛을 피하듯 어머니에게 기대어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통천 사람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스물한 살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결혼식만 올린 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쌀가게를 인수하고, 석 달 뒤에 어머니를 불러올리셨다. 아버지가 마련한 신혼집은 무허가 판잣집 문간방이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물지게로 물 두 통을 길어놓고 일하러 나가셨다. 이후 형편이 피자 아버지는 통천의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들이셨다. 스무 살도 안 된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비롯해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 살림을 하느라 허리 펼 틈이 없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리자 어머니는 식구들 밥을 해놓고는 공장에 나가 직원들 밥을 지었다. 사업이 잘되어 직원이 60명으로 늘어나도 어머니는 직원들 밥을 다 해먹이셨다.
한국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회사 직원들까지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다. 피난 중이지만 아버지는 사업을 쉬지 않으셨다. 현대건설도 그때 시작되었다. 나는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나서 두 달 뒤인 1953년 9월 서울로 올라왔다. 세 살 무렵이었다. 서울로 올라왔지만 집안 형편이 나아진 건 없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무리 곤란한 지경에 빠져도 얼굴에 티를 내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을이면 메주를 쑤어 처마에 걸어 말렸다. 손수 만든 메주로 된장도 담그고 직원들한테 나눠주기도 하셨다. 아버지 사업이 잘될수록 처마에 매달린 메주가 늘어났다. 어머니에게 현대 직원은 자식이었다. 광화문에 8층 사옥이 생긴 뒤에도 어머니는 꼭대기 층에 있는 식당에 나가 직원들 밥을 챙기셨다. 현대의 초기 임원들은 어머니를 기꺼이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8년 만에 가까스로 박사학위를 받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나는 대학 3학년 때 ROTC에 들어가 ROTC 13기생으로 졸업한 후 2년 4개월간 복무하고 예비역 중위로 만기 제대했다. 우리 집 큰아이 기선이도 30년 후에 ROTC 43기로 임관해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77년 12월 초, 어머니의 눈물 배웅을 받으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나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들어가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얼마 후 보스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입학 허가가 나서 학교를 옮겼다.
MIT에서 MBA 공부를 마친 후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일하던 나는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지로 포기한 뒤, 본의 아니게 두 번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서울대 교수였던 이홍구 전 총리가 전공을 바꿔보라고 권유하셨다. 귀가 솔깃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으니, 그걸 바탕으로 국제 관계를 연구해보면 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워싱턴의 존스 홉킨스 대학 국제관계대학원(SAIS)에 지원했다. SAI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지도자들이 외교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박사과정은 오로지 공부로 일관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 당시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던지 지금도 어느 책 어느 장에 무슨 글이 있는지 기억이 날 정도이다. 그러나 1988년으로 접어들면서 논문 준비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해 4월 나는 울산에서 선거를 치르고 국회의원으로 정치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역구 관리와 바쁜 의정 활동을 소화하면서 논문을 준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학위는 어떻게 됐냐고 물으셨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뜻을 세웠으면 끝까지 해보아야지, 중간에 그만두면 되겠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아버지 말씀에 용기를 얻고 다시 시작했지만 시간을 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논문은 5년이나 걸려서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다.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한 지 8년 만인 1993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 "도련님, 제 친구 동생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넷째 형수님이었다. "키가 아주 크고 영어를 잘 해요." 1978년 여름, 그렇게 해서 싱거운 남자와 키 큰 여자가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내의 첫인상은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웠다. 아내의 큰 눈은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이다. 아내는 딸이 넷이나 되는 딸 부잣집의 막내딸이다. 우애가 돈독한 자매들끼리 서로 잘 챙기면서 정을 주고 자유롭게 자랐다. 무뚝뚝한 남자들이 많은 데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우리 집안 분위기에 아내는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4남매를 두었다.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추우나 더우나 새벽 5시까지 교회에 간다. 그리고 6시에 집으로 와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밥을 챙겨준다. 아내는 내가 바빠서 못 채워주는 부모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사실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도 다 아내 덕분이다.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세계 각국을 방문할 때는 아내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잘하는 데다 사교성이 좋아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친목을 쌓았다. 아내는 국제 축구계 인사들로부터 '미세스 스마일 월드컵'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다. 아내의 따뜻한 외교력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제2장 나는 아버지에게 인생을 배웠다
서울 올림픽이라는 불가능에 도전한 아버지: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198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마란치 위원장의 '서울' 개최 선언이 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울 올림픽 유치의 주역이던 아버지였다.
서울 올림픽 유치전을 앞둔 1981년,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밀고 나가자니 일본에게 질 게 뻔하고, 그만두자니 그럴듯한 유치 포기의 명분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은 나고야와 서울이 표 대결을 벌일 경우, 서울이 얻을 수 있는 표는 IOC 위원 82표 중 많이 잡아서 4표라고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남덕우 총리는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유치 활동을 벌여도 절대로 일본을 이길 수 없고, 만에 하나 유치에 성공해도 올림픽 때문에 경제가 파탄나서 나라가 망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올림픽 유치에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어야 할 김택수 IOC 위원 역시 비관적이었다. 그는 한국이 두 표는 얻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한 표는 자신의 표이고 다른 한 표는 미친 사람의 표라는 말이었다.
전경련 회장인 아버지가 올림픽 유치추진위원장을 맡으셨다. 사전에 상의 한마디 없이, 정부가 내린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이건 나를 망신 주자는 거지, 올림픽을 정말로 유치하라고 뽑은 게 아니야. 그렇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해보자. 매사는 사람 하기에 달렸다." 아버지는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억지춘향으로 일을 맡기면서 유치추진위원장 밑에 각부 장관들을 전부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회의에 나온 사람은 이규호 문교부 장관 한 사람뿐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발 벗고 나서야 할 IOC 위원과 서울시장조차 불참했다. 명색이 서울 올림픽인데 말이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그 무렵 나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 좀 도와줘야겠다. 독일말 잘하는 거 아꼈다 무엇에 쓰겠느냐? 나랑 같이 독일로 가자.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데,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거고, 흥하게 계획하면 흥하는 법이다. 기왕 맘먹은 거 유치를 못 하는 게 바보지, 유치만 한다면 얼마든지 손해 안 나게 치러낼 수 있다." 억지로 맡겨진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미 자기 일로 받아들이신 듯했다. "경비는 어떻게 충당하시게요?"
아버지는 숨도 쉬지 않고 한달음에 말씀하셨다. "외국 손님들을 모시려면 지하철이나 도로 공사는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일은 올림픽이 아니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올림픽 경비로 잡을 필요가 없다. 경기장과 숙소도 올림픽을 위해서만 신축할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각 대학의 시설들을 고쳐서 활용하면 된다. 좋은 부지에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아파트를 지어 미리 팔고, 올림픽 때 먼저 사용하도록 만들면 정부 돈을 한 푼도 안 들이고 숙소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기자촌이나 프레스센터도 기업들이 어차피 지을 신축 빌딩을 찾아내서 먼저 기자들이 쓰게 하면 된다." 아버지의 어조에서 내키지는 않지만 나라를 위한 일이니 자신이 맡아서 꼭 성공시키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1981년 9월 18일, 정부의 공식 유치단이 독일로 출국하기로 결정되었다. 총회 개막일인 20일부터 현지에서 본격적인 유치 활동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개최지 발표는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리는 제84차 IOC 총회 마지막 날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며칠 먼저 영국으로 향했다. 우리가 서울 올림픽을 유치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정부 인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없었다. 약소국가인 데다 독재정치니 군사정치니 하는 말들로 해외 언론에 오르내리던 나라가 한국이었다. 유치단은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개최라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일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외국에 나와서 겨우 창피만 면하고 돌아간다면 그거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버지는 새로운 도전에 의욕이 솟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통역 겸 수행비서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내 마음이 비장했다. 아버지와 나는 손을 꽉 잡았다. 철들고 나서 처음 잡아보는 아버지의 손이었다.
분단의 나라에서 세계 평화의 무대를 올리다: 1981년 9월 15일,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IOC 위원 두 사람과 점심을 먹었다. 영국 IOC 위원들은 우리한테 지나치리만큼 냉소적이었고 대한민국 정치 상황을 얕보고 있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이미지는 아주 좋지 않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또한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본에 싼 이자로 200억 달러를 꿔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 국가이고 경제적으로는 파탄이 나다시피 한 나라가 유럽인들이 보는 대한민국이었다. 유럽인들 입장에서는 그같이 '야만적인 나라'에서 올림픽을 하겠다고 하니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뒤 식사 막바지에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일본은 이미 한 번 올림픽을 치른 나라입니다. 아시아에 국가가 일본밖에 없습니까?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올림픽이 되려면 이번엔 다른 나라에서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만일 또다시 일본이 올림픽을 열게 되면 일본의 제철과 자동차산업은 더욱 발전할 테고, 결국 그 분야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잡을 겁니다." 아버지의 말에 영국 위원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일본의 급속한 성장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일 우리는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현지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나고야 시는 총회 개막 전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IOC 위원은 개막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각국의 IOC 위원들이 투숙한 호텔은 IOC 위원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부랴부랴 파리에 머물던 IOC 위원을 현지로 불러들였다. 그때가 벌써 23일이었다. 다 접어버리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전화로 회사 업무를 챙긴 다음 어김없이 올림픽 유치 전략회의를 소집했다. 아침 회의가 끝나면 모두 바깥으로 나가 온갖 인맥을 동원해 각국의 IOC 위원들과 접촉하고 밤 11시가 되어야 숙소로 돌아오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되지도 않을 일에 목숨 건다며 마뜩잖아 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나라 IOC 위원이 도착한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외교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갯벌 사진 한 장으로 조선소 지을 자금을 받아냈을 때처럼, 인지도가 전혀 없는 서울의 미래를 걸고 각국의 위원들에게 호소했다. 아버지가 보여주는 것은 가난한 현재가 아니라 풍요로운 미래였고, 전쟁과 독재의 나라 한국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꽃피는 대한민국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올림픽의 가치를 스포츠 제전에서 세계 평화의 도구로 올려놓았다. 앞서 열린 모스크바와 LA 올림픽은 냉전 시대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반쪽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확정된다면, 이념 때문에 동족이 남북으로 갈린 아픔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세계인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가 펼쳐지는 것이다. 발표일인 30일이 가까워지면서 여기저기에서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투표 하루 전날인 29일에 있었던 신청 도시 프레젠테이션에서 우리는 일본을 압도했다.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150여 개에 달하는 질문과 답변을 미리 준비해서 수없이 반복 연습한 결과였다.
투표 당일, 비장한 각오로 회의장으로 갔다. 마침내 발표 시간이 되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연단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 개최지가 적힌 메모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가 나의 손을 잡아 쥐셨다. "세울 52! 나고야 27!" 이게 뭔 소린가? 내 귀를 의심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압승이었다. 회의장 가득 함성이 터졌다. 우리 대표단은 일제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사마란치 위원장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메모를 다시 확인한 뒤, 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세울! 코레아!"
바덴바덴의 기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한 열흘은 기적을 만드는 시간들이었다. 88 서울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이 '손에 손 잡고' 모두 참가한 세계화합의 무대였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독재와 가난을 넘어 선진 민주국가로 성큼 나아가게 됐다.
이때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모두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밀어붙여 끝내 해내고 마는 승부사였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애국지사였다. 지금도 노령의 나이를 잊고 머나먼 타지에서 분투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존경심이 인다.
현대중공업을 맡아라: 1982년 봄에 몽필 큰형님이 49세로 돌아가셨다.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트레일러와 충돌하여 자동차가 전소되는 끔찍한 사고였다. 장례를 마치자 아버지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몽준이가 중공업 맡아라."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니가 쓴 논문 읽어봤다. 니 말이 다 옳다. 기업은 지 혼자 저절로 크는 게 아니다. 기업 하는 사람은 처음 물건 팔릴 때의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된다. 배운 너야 유식한 말로 썼다마는 그게 다 그 말 아니냐? 그만하면 아버지가 보기엔 노벨상감이다. 이참에 중공업에 가서 네 뜻을 펼쳐 보거라." 그해 나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졸업 논문을 보완해 『기업경영이념』이란 책을 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책이었는데, 아버지가 읽어보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