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송자 지음 | 올림
함께
송자 지음
올림 / 2011년 12월 / 256쪽 / 12,000원
1 나의 삶, 나의 신앙하나님과의 첫 만남_ 내 인생 축복의 시작: 고등학교 2학년 때, "네 동생이 앞을 못 보니 교회생활에라도 재미를 붙이도록 네가 도와주어라."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동생을 데리고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하셨습니다. 나는 동생을 위해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불러주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생각 없이 동생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를 찾는 내 발걸음에 분명한 목적이 실렸습니다.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영혼의 우물에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생활의 중심축은 교회와 공부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고2 때 기독교에 빠진 것은 거의 맹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전쟁이 막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절대자를 갈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회의하기보다는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 삶을 보살펴주고 힘이 되어주는 분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전지전능함을 믿고 또한 말씀의 길을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교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학교로_ 충청도 시골뜨기의 서울 유학기: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나는 가족들에게 "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라며 내 뜻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당시 법관이셨던 큰아버님께서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네가 궁극적으로 신학을 하고 싶어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학에 매달리기보다는 좀 더 폭넓게 다른 학문을 섭렵한 다음에 신학을 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구나."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큰아버님께서는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북아현감리교회(현 아현중앙감리교회)의 김성렬 목사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김성렬 목사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큰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말씀처럼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모로 고민한 끝에 큰아버님과 김성렬 목사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단, 한 가지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대학에 가되 기독교계 대학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차 내 평생의 대학이 될 연세대학교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대학 4년은 강의실과 도서관, 대학 채플 그리고 아현중앙감리교회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입학하자마자 나는 강의 시간표를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짰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 시간표에 듣고 싶은 모든 과목을 빽빽이 적어 넣었습니다. 물론 도강이나 청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다 툭하면 생기는 휴강 때면 나는 지체 없이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덕분에 대학 4년 동안 문과대와 정법대, 상경대에 개설된 거의 모든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김성렬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아현중앙감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 목사님은 내게 초중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직을 맡기셨습니다. 원래 내성적이었던 나는 이때부터 조금씩 외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목회자보다는 교수가 되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될 탁순희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교회에서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생 사은회 날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졸업생 각자가 4년 동안 학교생활에서 느꼈던 것, 건의할 이야기 등을 한두 가지씩 준비해서 총장님께 말씀드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학문 연구를 위한 도서관이 더 넓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충전을 위한 채플도 더욱 활성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백낙준 총장님께서 나의 건의 사항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국 유학 건으로 총장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낙제나 하려고 미국에 온 줄 아십니까_ 한국 촌닭의 미국 유학기: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나를 아껴주시던 황일청 교수의 조언 덕분이었습니다. 황 교수의 추천으로 학장이신 이정환 교수님의 조교로 지내면서 한 학기를 보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백낙준 총장님을 만나고 오신 이 학장님께서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송군, 총장님께서 자네를 미국 유학생으로 추천하셨네. 우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의 워싱턴대학교에 우리 학교 출신의 경영학도를 보내서 장차 교수로 키우실 모양인가 보네."
얼마 뒤 총장님은 유학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나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송군! 자네 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학교에 남지 않고 대우가 좋은 일반 기업체에 취직하지는 않겠지?" "절대 신의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백 총장님 앞에서 나는 모교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1960년 1월 23일, 나는 드디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벙어리나 다름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1주일 동안 공부해야 할 분량도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벅찼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밤에 잠을 잘 때도 라디오를 켜놓았습니다. '만약 낙제라도 하는 날에는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불안감을 기도로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성경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첫 시험인 '경기 예측' 과목에서 B+를 받았고, 이제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영어 실력이 부쩍부쩍 늘어나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학생활 2년째 봄 학기부터는 성적이 뚜렷하게 향상되기 시작하여 여름 학기 때는 수강 과목 중 한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A학점을 받았습니다. "송군, 자네 성적이 괄목할 만큼 향상됐어. 기대가 크네." 유학 올 당시부터 내게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지도 교수 뷰켄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뷰켄 교수와의 면담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오도록 인도하신 데는 분명히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뷰켄 교수는 내 말에 약간 놀란 듯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덕 본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송자"라고 즐겨 말하곤 했습니다.
1961년 8월에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밟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병역 문제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해 10월 귀국, 12월에 자원입대를 해 육군본부에서 번역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이때 업무로 인해 알게 된 고위 장교들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육군 상병 신분으로 연세대에 출강, 63학번 학생들에게 '회계원리'를 강의했습니다. 아마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전역 후에도 1년간 시간강사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63학번의 1학년과 62학번의 2학년생들이 주로 내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당시 가르쳤던 63학번 학생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964년, 연세대에서의 1년간 강의를 마치고 나는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두 번째 유학생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셸던 리슬리 부부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알게 된 것은 1차 유학 당시,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한 학기에 한 번씩 열리는 어느 파티에서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리슬리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리슬리 부인은 나를 남편에게 소개시켰습니다. 그들은 주말마다 내가 있는 기숙사까지 찾아와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곤 했습니다. 덕분에 나는 그들을 통해 미국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배울 수 있었으며, 낯선 외국에서의 외로움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박사과정 유학을 준비할 때 내가 다시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국인 중 누군가가 입학 재정보증을 서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내 주변에서 재정보증을 서줄 후견인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리슬리 부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학비는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마련할 테니 일단 입학할 수 있도록 재정보증만 서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답장이 왔습니다. '필요한 학비를 전액 지원해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은혜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나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었고, 나 역시 그들을 친부모 이상으로 따랐습니다.
1980년, 리슬리 씨가 작고했을 때 나는 그의 부음이 적힌 전보를 손에 쥐고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 잃은 슬픔이 그러했을까요.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고인의 묘소를 찾았을 때도 나는 슬픔으로 몸이 떨려 리슬리 부인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리슬리 부인은 20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인은 내가 도착하기 2시간 전에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죽을 때까지 이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1964년 2월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박사과정 이수에 필요한 30학점 전부 A를 받았습니다. 각종 시험도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이때도 나는 매일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당시 내게 큰 용기를 준 구절은 누가복음 11장 9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964년 6월 말 한국에서 인턴 과정을 끝낸 약혼녀 탁순희가 미국 의사 시험에 합격해 미국으로 왔고 그해 8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66년 12월, 나는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립니다. 제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부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듬해 나는 뉴잉글랜드의 화약안전폭발회사에 취직했습니다. 1년 계약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기 위해 야간에는 뉴헤븐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습니다.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주경야경'이었지요.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나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967년 가을 코네티컷 주립대학교 조교수로 자리를 옮겨 풀타임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2년 나는 코네티컷 주립대 부교수로 승진하면서 종신 교수(tenure)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내도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소아과 의원을 개업했습니다. 그 무렵 영주권도 받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제 미국 생활의 기반이 완전히 다져진 셈이었습니다.
다시 조국으로_ 보장된 삶을 뒤로하고 선택한 '낯선' 고국 생활: 1973년 연세대에서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지원을 받아 오늘날의 석좌교수에 해당하는 특임교수직을 신설하고 나에게 귀국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국내 사정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친구들은 내가 귀국할 뜻을 비치자 누구랄 것도 없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종하 학장님의 권유에 따라 연세대의 특임교수직을 수락하고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코네티컷 주립대에는 휴직 신청을 해놓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귀국한 지 6개월 만에 아내는 병원 개업의 어려움, 생활고, 문화적인 차이 등을 견디지 못하고, 역시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큰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이는 그 뒤 6개월 동안 내가 혼자 길러야 했습니다.
나도 1년간의 강의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으로 가자마자 나는 1학기 동안 안식년 휴가를 얻어 영구 귀국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지난날 백 총장과 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군 복무 시절 가르쳤던 63학번들의 귀국 요청도 되새겼습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고민한 끝에 마침내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내가 처음 미국에 건너올 때 조국을 위해 그리고 모교를 위해 일하겠노라고 각서를 쓰지 않았던가. 목사님 앞에서도 서약을 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앙적 양심 때문이다. 바로 이 길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돌아갈 때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갈 수 없다.'
10년 동안 강의를 해온 코네티컷대학교에도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내게 특별 배려를 하면서까지 나를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이 확고하게 서 있던 나는 그들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내도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개업 중인 소아과 의원을 갑작스레 그만둘 수가 없어 정리를 마친 다음 뒤따라오기로 했습니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경영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열심히 가르치는 만큼 학생들도 열성적으로 따라주었습니다.
그 결과 내가 강의를 맡은 뒤 치른 첫 공인회계사 시험에서 연세대 학생들의 합격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내게 감사패를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동안은 한 학기 강의를 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름 학기 강의,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을 학기, 겨울에는 다시 미국행…, 78년 봄 학기까지 4학기를 이런 식으로 강의하며 태평양을 넘나들었습니다.
1978년 8월,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자신도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한편 76년부터 연세대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분명한 제목을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나는 될 수 있으면 강의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보직을 맡으면서 강의 시간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산업경영연구소장, 재무처장을 거쳐 1980년에 상경대학장을 맡았고 1984년에는 기획실장이 되었습니다.
92년에는 연세대학교 총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나는 소견 발표를 통해 대학이 현재 위기에 처해 있고,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동문과 학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합니다. 또 학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학이 적극적으로 인재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교수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져 결국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총장에 취임하면서 내가 세운 목표는 연세대를 세계 100대 대학 안에 드는 학교로 키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인지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다'는 확신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것은 재정 확보였습니다. 이를 위해 기금 모금 전담 기구를 설치하고 '대외협력 부총장제'를 도입했습니다. 또 국내 최초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학교채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