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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팽이

최신규 지음 | 마리북스


멈추지 않는 팽이

최신규 지음

마리북스 / 2011년 10월 / 291쪽 / 14,000원



제1장 팽이는 과학이다




자존심을 지킬 수 없으면 시작도 마라

1999년 5월, 일본 도쿄 지바현 마쿠하리메세 컨벤션센터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자신감에 넘쳤다. 도쿄 토이쇼가 열리는 마쿠하리메세는 기회의 땅이 될 것이다. 비즈니스 룸에는 일본 완구회사 다카라의 임원인 와다비키 전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카라와는 1990년대부터 로봇 완구분야에서 서로 협력해온 사이였다. 와다비키 전무와 함께 우리의 새로운 파트너 사가 될 미쓰비시의 스요시 카지 부사장을 만났다. 그들은 내가 어떤 제안을 내놓을지 무척 궁금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팽이를 가지고 뭘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 완구업계의 메이저 업체인 다카라의 입장에서 팽이는 자신들이 출시한 수많은 제품군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팽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장난감이라고 확신했다. 고층 빌딩의 숲에서 아이들이 차지할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팽이야말로 좁은 골목길은 물론 거실이나 하물며 작은 밥상 위에서도 가지고 놀 수 있으니, 팽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장난감은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은 "게임 포털이 대세인 시대에 무슨 팽이냐!"라며 내 의견에 반대했다. 그들의 눈에 팽이는 그저 한물간 구식 장난감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달랐다. 팽이로 아이들을 게임 포털에서 끌어낼 수 있다면 부모들의 한숨과 걱정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30억 원이나 내는데 손발 노릇이나 하라고?: 다카라의 베이블레이드 팽이를 처음 접했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이거다! 팽이의 혁명을 가져올 물건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대까지만 해도 베이블레이드는 상품으로 출시는 되었지만, 시장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라는 애니메이션에도 더 이상 투자할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TV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시장을 더욱 키워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앞서 있었다. 완구의 특성상 TV 애니메이션이 뒷받침되어야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다. 나는 베이블레이드를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팽이를 알릴 애니메이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제안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새 팽이와 관련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파트너인 다카라를 중재자로 내세워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미쓰비시 그룹의 책임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카라는 예상대로 새 팽이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젝트에 투자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그룹과 나는 이 프로젝트를 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 30퍼센트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투자금은 22억 원이지만, 마케팅비와 금형 제작비를 합하면 30억 원이 훨씬 넘는 비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애니메이션을 한국에서 제작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면 고용 창출을 할 수 있어 만화업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미쓰비시는 이 제안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카라는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지분은 없었다. 대신 새 팽이가 나오면 일본 내 판매권을 가져가기로 했다. 손오공은 한국에서의 개발권과 판매권에 대한 영구적인 권리를 가지며,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로열티는 투자한 만큼 나눠 갖기로 했다.

다음 회의는 중립 지역인 도쿄 다카라의 사무실에서 열렸다. 회의 의제는 제작 및 기획 문제로 넘어갔다. 새 팽이의 이름은 최고라는 이름을 담아 '탑블레이드'로 결정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콘셉트를 둘러싸고 한일 간의 시각차가 불거졌다. 미쓰미시의 스요시 카지 부사장은 우리 회사의 기획 내용 가운데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가장 먼저 지적한 문제는 주인공들이 일본 정서에 맞게 기모노를 입어야 하고, 일본 성향에 맞는 배경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성향이 뚜렷해야 자국 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본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는 일본 파트너 측의 주장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대로 기모노와 일본 배경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에서는 방송심의 통과도 안 된다. 이 상품과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는 성공하고 한국에서 실패한다면 30억 원이 넘는 거금을 투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라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제작해서는 한국에서 방송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이 애니메이션은 글로벌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프로젝트를 일본 한 나라에서 끝내겠다는 뜻이냐며 일본 측을 압박했다. 해결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도심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구촌 어린이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만약 이 부분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탑블레이드,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가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애니메이션 <탑블레이드〉는 2001년 4월 일본에서 먼저 방송했고, 같은 해 9월 한국의 SBS에서 방영했다. 〈탑블레이드〉는 방송 일주일 만에 인기 폭발이었다. 곧바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난리가 났다. 동방신기나 소녀시대 같은 아이돌 그룹도 탑블레이드만큼 순식간에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 성격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내 제안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린이 선물가게들은 팽이를 미리 확보한 상점만 생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일 양국에서 탑블레이드 팽이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완구와 애니메이션의 시너지 효과가 드디어 폭발했던 것이다. 질서를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 시장의 폭발적인 반응은 '이성을 잃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일본의 탑블레이드 판매 매장에는 줄이 끝도 없이 늘어졌다. 한 사람이 팽이를 하나밖에 살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고, 나중에는 프리미엄도 붙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본 상인들은 한국으로 건너와 탑블레이드를 싹쓸이해 갔다. 당시 일본 상인들이 한국의 완구 도매시장에서 완구를 수집해간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는데, 이는 탑블레이드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탑블레이드 팽이는 컨테이너로 실어가도 끝이 없었고 비행기로 실어가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2001∼2002년 전 세계 매출이 1조 원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완구시장의 전체 규모가 연간 5천억 원이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탑블레이드 팽이 한 품목으로 1조 원어치를 팔았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실적이었다. 탑블레이드는 한국 완구와 애니메이션 역사에 새로운 신화를 썼다. 한국의 기획력과 일본의 상업적 감각이 제대로 결합한 모범 사례였다.

우리의 삶엔 여의봉이 필요하다

왜 회사 이름이 '손오공'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엔 '도깨비'로 하려고 했다. 도깨비 방망이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다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바람이 방망이에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왠지 도깨비로 이름을 붙이자니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완구업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도깨비 같은 놈'이라고 놀림을 받을까 봐 망설여졌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서 곰곰이 생각하다 반짝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도깨비 방망이 못지않은 것이었다. 바로 손오공의 여의봉이었다. 여의봉은 어른 아이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갖고 싶은 꿈의 무기일 것이다. 손오공과 여의봉은 세상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지켜줄 수도 있다. 어린이들과도 잘 어울린다. 아이들에게 친근한 분위기는 물론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키운 상상력과 감성 덕분에 지금의 손오공이라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2장 콘텐츠 사업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빚지고 있는 감각

나의 콘텐츠 감각은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빚지고 있다. 5형제가 뿔뿔이 흩어지고 막내인 나만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 산 넘어 산을 누비며 다녔다. 집이 있고, 땅이 있는 사람들이 어린 내 눈에는 어찌나 부러웠던가. 하지만 '엄마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절대 외롭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의 짧았던 학창 시절: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와중에도 나를 영등포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내겐 매우 신나는 일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해 3학년 1학기까지 상장이란 상장은 싹쓸이했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아들의 신발과 옷만큼은 늘 깨끗하게 챙겨주었다. 그러나 3학년 1학기부터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머니가 한글을 몰라 전학 수속을 놓치고 말았다. 그때부터 학교를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생활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나면 텅 빈 동네에서 혼자 놀았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 몰래 아이스케키를 판 적이 있었다. 하루 만에 150원을 벌었으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을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한테 내밀었다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다. 어머니는 나를 때리고 나서 많이 울었다. 행상이 어떤 일인지 잘 아는 어머니는 아들까지 행상에 나서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내게 기술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머니가 물색한 취직자리는 금은방이었다. 금세공공장에서 신참은 청소부터 한다.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6시 30분까지 영등포시장에 있는 백성당으로 출근해 제일 먼저 진열장의 유리를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그런 다음, 목걸이 만드는 공장으로 가서 청소를 한 뒤 기술을 배웠다. 손가락 끝에 피가 맺혔고 줄로 손톱이나 살갗을 쓸기도 했다. 망치로 금을 벼루다가 손가락을 때려 너무 아파 입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 단련이 되어 참을성이 절로 몸에 뱄다.

세계를 평정하려면 아이들의 시각으로 만들어라

한때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었던 로봇 완구 역시 아이들의 눈높이로 다가갔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89년대 후반 어느 날 나는 아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백화점 진열대에서 로봇 완구를 본 아들은 로봇을 끌어안고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이가 큰 로봇을 가슴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게 산업 아이템이 되겠구나.'라는 직감을 얻었다. 당시 국내에는 제대로 된 로봇이 없었다.그래서 나는 1990년, 통역을 한 명 구해 일본의 다카라를 찾아가 기술 제휴를 요청했다. 다카라 같은 회사가 한국의 작은 회사를 믿어줄 리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짝퉁을 만들고 해적판이 판치는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마침 다카라 창고에는 팔지 못한 로봇 완구들이 쌓여 있었다. 일단 거래를 트는 차원에서 재고의 일부를 싼 가격으로 가져와 한국에서 팔았다. 그러나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은 기술 제휴였다. 내가 엔지니어라는 것에 신뢰를 가지고 다카라는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다카라 또한 선친의 대를 이어 내려오는 엔지니어를 기반으로 이끌어가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 제휴를 요청했고 마침내 다카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다카라의 로봇 완구를 한국에서 만들어 일본에 역수출하게 됐다. 손오공은 이 일을 계기로 세계 최고의 로봇 완구 제조 기술을 얻었다.

상품을 사용할 고객 속으로 철저히 파고들어라: 1990년대 나는 한국에서 로봇 완구 시장을 키워나갔다. 시장에 내놓는 로봇마다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 되면 상점에서 손오공 제품은 완전 매진된다. 상점 쇼윈도에 진열한 전시품까지 없어지고 만다. 손오공의 브랜드를 가진 완구의 인기는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린이 제품은 어린이가 가장 잘 안다. 나는 새로운 로봇 완구를 만들면 유치원에 다니던 우리 아이에게 먼저 가지고 놀게 해 문제점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는 "아빠, 여기가 잘 안 맞아!" 하면서 제품의 문제점을 족집게처럼 찾아냈다. 아무리 직원이 품질관리를 잘했다고 해도 아이에게 걸려들곤 했다. 나아가 나는 전자제품만 AS가 되는 것이 아니고 완구도 AS가 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고객이 고쳐달라고 하면 부속품을 무상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런 서비스는 당시 시장에서 큰 이슈가 됐다. 손오공 제품은 품질도 좋았고, 다른 회사에선 생각지도 못한 AS를 해주고, 아이들에게 로봇 완구를 갖고 놀게 해서 문제점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열심히 했다. 손자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白戰不殆'라고 했다. 사업을 하려면 무조건 덤빌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상품을 사용할 고객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철저히 알아내야 한다.

제3장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고 낙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너무 거창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을 때는 열심히 한다. 하지만 조금 해보다가 도저히 자신의 손에 잡힐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낙담하고 포기하고 만다. 목표는 원대하게 세우되 가장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하면 어떤 일도 못할 게 없다. 시작이 작고 초라하다고 해서 목표까지 작고 초라한 것은 아니다.

정신력으로 지탱했던 시간들: 1986년에는 사출기(플라스틱 찍는 기계)를 사야 했다. 거래처에서도 신뢰를 얻고 있었고, 업계에도 좋게 소문이 나 있어 영업은 별 걱정이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공장이 잘되면 집은 다시 살 수 있지만, 공장 문을 닫으면 다시 열기 어렵다. 중요한 결단의 시점이었다. 나는 아내의 동의를 구하고 집 보증금을 빼서 공장에 투자했다. 신혼 때 가져온 아내의 짐은 큰형 집에 맡겨놓고 작은 단칸 사글셋방을 얻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몇 달 만에 쫓겨났다. 사실 월세를 주지 못할 정도로 공장 유지 비용이 많이 들어갔다. 그래도 개발과 영업 확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집도 없으니 여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여관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침 9시면 여관 주인이 나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갓난아기가 있어 방도 잘 주지 않으려고 했다. 11월이라 바깥 날씨도 무척 추웠다. 나는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아내는 아기를 업은 채 온종일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서 인천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해가 지면 공장 앞에서 직원들 모르게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덕에 1987년 봄, 다시 사글셋방을 얻었다. 어려운 가운데 개발한 완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100만 원짜리 한 다발을 건넸다. 그때 "이 돈 어디서 났느냐?"며 놀라던 아내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내는 그 돈을 1년이 넘도록 장롱에 넣어두고 쓰지 않았다. 얼마나 어렵게 번 돈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오로지 정신력으로 지탱했던 시간들이었다. 직원들이 점심 먹으러 갈 때도 시간이 아까워 나는 기계를 붙들고 제품을 만들었다. 공휴일에도 잠시나마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제4장 간발의 차이가 세계를 제패한다



간발의 차이가 세계를 재패한다

금세공공장을 나온 후 나는 주물공장에 취직했다. 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에 나는 형과 함께 수도꼭지를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셋째형은 선반을 잘하는 엔지니어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영업을 맡았는데 제품을 배달하는 일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공장이 있던 신길동에서 인천까지 자전거로 싣고 가서 팔아야 했다. 멀기도 하거니와 갑자기 제품을 찾는 곳이 있으면, 공장에 갔다 오는 동안 다른 업체 제품을 살 수도 있으니 늘 싣고 다녔다. 수도꼭지를 수백 개씩 싣고 다니다 보면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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