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왕의 리더십

박기현 지음 | 원앤원북스


왕의 리더십

박기현 지음

원앤원북스 / 2011년 7월 / 292쪽 / 13,000원



1부 조감도를 그려내는 선구자형 리더십




소서노, 모진 운명까지도 개척해내는 담대한 리더십



SWOT 분석

약점 -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둘 딸린 흠 많은 여인: 소서노는 북부여왕의 서손 우태에게 시집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우태가 죽어 미망인이 되고 난 뒤 혼자 살았다는 것이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전하는 그녀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과부였다. 그것도 자식이 둘이나 딸린. 요즘이라 해도 이런 환경을 딛고 일어설 여인이 얼마나 될까?

위협 -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라 토사구팽의 위험: 소서노 입장에선 여덟 살이나 연하이던 주몽에게 과부로 재가한 것이었기에 언제든 토사구팽 당할 우려가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일부다처제가 유행하던 사회였다. 즉 관습과 전통이라는 장벽이 소서노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강점 - 빼어난 소통력과 긍정적인 자신감: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계루부 족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국경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취하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 딸이 셋 있었는데, 둘째 딸이 소서노였다. 그런 아버지가 거대 부족의 생사권을 쥐고 국경무역단을 운영해갈 막중한 자리를 둘째 딸에게 쥐어줬다는 것은 그만큼 소서노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진취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서노의 강점은 넘치는 자신감과 상단 간에 무역으로 승리를 쟁취하며 살아온 그녀만의 소통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설복시키는 장점이 있었다.

기회 - 고조선 멸망 후라서 깃발 꽂을 곳이 많았다: 고조선 멸망 후라서 혼돈의 시절이었다. 다시 말하면 도처가 전인미답이라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소서노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주저하지 않았다.

열세를 우세로 바꾸기 위해 주몽과 결혼하다

남편이 죽으면서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소서노는 친정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주몽이 북부여에서 피난을 나와 졸본부여로 망명해왔다. 기원전 37년경이다. 활을 기가 막히게 쏘는 신궁에다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젊은이를 보자 소서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게서 미래의 이상국가와 강력한 군주에 대한 조감도를 그렸다. 한편 혈혈단신 남의 나라로 도망쳐온 주몽으로서는 자신의 배경이 되어줄 가문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소서노는 주몽과 결혼을 했고, 함께 고구려 창건에 뛰어들었다.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안팎으로 비류국, 행인국, 예족과 동부여 등을 공격하며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주몽도 고구려 건국을 함께한 그녀를 어여삐 여겨 왕비로 삼고, 그녀가 데려온 두 아들 비류와 온조도 왕자로 삼았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이별을 통보한 담대함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18년 만에 위기로 돌변한다. 이들 부부 사이의 문제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과 친아들(유리)이 등장하면서 불거졌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되던 해였다.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두 아들과 자신의 장래를 고민하던 소서노(48세)는 문제의 핵심인 왕권의 후계라면, 차라리 여기서 싸울 것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아들들에게 살 길을 찾아주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이를 주몽에게 통보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기원전 19년에 두 아들과 뒤를 따르는 심복 열 명, 추종하는 백성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훨씬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했다. 당시 고향과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고만고만한 부족국가들 간의 쟁패와 곳곳에 좋은 위치를 선점한 낯선 부족과의 전투가 필경 뒤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서노는 꿈을 품었고 한창 패기 충만한 두 아들을 격려하고 이들과 싸워가며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러고는 바닷가 근처 미추홀에 나라를 세우며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하지만 옛 마한 땅이라 불리던 이 지역에는 적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온조는 땅이 너무 무르고 사방이 열려 있어 위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 더 남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류는 더 열린 가능성을 생각하며 이곳에서 버티며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소서노는 이제 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의 편을 들어야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섰다. 그녀는 의연하게 온조의 편에 섰고, 비류를 두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위례성에 정착해 나라를 백제라 칭했다. 한편 비류는 정착이 어려워지자 바다를 이용해 일본 땅으로 방향을 틀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비류백제의 일본 기원설이 나온 배경인데, 일본 역사책의 행간에는 비류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 누구라고 설득해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용감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어느 누구와 소통해도 상대를 설득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고구려가 강성해지는 모습을 지켜봐온 그녀는, 주몽의 배신을 바라보며 비굴하게 굽혀 들어가기보다, 차라리 그를 떠나 다시 일어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신감이야말로 리더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소서노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고 십제의 건국에도 공헌한, 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녀를 가리켜 이렇게 칭찬했다.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다.' 참고로 기원전 6년경에 동아시아 최고의 여걸 소서노는 세상을 떠났다.

소서노가 현대 여성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

지금에 와서 소서노가 새로 각광받고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이 신파적이고 비극적인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한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대화로 문제를 풀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시작함으로써, 담대한 자신감과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 소서노의 역사다. 그것이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도 망설이는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대목이다.

2부 오직 실력으로만 말하는 카리스마 파워 리더십



광개토대왕, 과업수행에 올인한 전력질주의 리더십



SWOT 분석

약점 - 계속된 전쟁과 고립무원에 식량난까지 겹쳤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사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내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의 형편은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무래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동서남북으로 사방이 적이니 전쟁 수행 능력이 떨어지고 민심은 술렁거렸다. 게다가 가뭄이 계속되어 식량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태자 시절부터 이런 참상을 바라보며 부국강병의 꿈을 간절히 키워왔기에 자국의 약점을 딛고 일어서 최강 고구려를 탄생시키게 된다.

위협 - 동아시아 전체가 이합집산의 난리통이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무렵은 극심한 혼란기였다. 후진, 후연, 서진, 서량 등 중국의 북방은 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전란과 쟁패가 끊이질 않았고, 남쪽에서는 동진이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세를 떨치고 있었다. 또 백제는 가야, 왜와 손잡고 고구려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야말로 일어서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강점 - 강온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다: 광개토대왕은 지금 시점으로 말하자면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는 육군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제대로 아는 수군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또 전략가이면서 뒤에 숨어 말로만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쟁의 최전선에 나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이끌어가는 기관차형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평화를 생각해 양손에 강온 양면 전략을 적절히 구사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한편 그가 무력을 사용해 정복전쟁만 수행한 무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오히려 문(文)을 숭상해 글과 제도와 시스템을 우선시했다.

기회 - 신라가 동반자적 위치로 서길 원했다: 신라 역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다 보니 남하정책을 간절히 원하는 고구려와 동병상련의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고구려마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선 것이다.

익숙한 것, 관행은 모두 버려라

4세기 중반 동아시아 거의 모든 나라는 중국에 복속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중국을 '천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구려는 달랐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그는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갔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훈련되고 준비된 지도자로 왕권을 물려받다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고국양왕이 지병으로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4국과 패권을 다투거나 중국의 제후국들과 싸우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준비된 지도자였다. 6년간의 태자 훈련 과정에서 그는 전쟁을 시작하는 법과 마무리하는 법, 그리고 적과 싸워 살아남는 비법 등을 몸으로 익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다. 큰 체격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가장 큰 장점이다. 뜻이 고상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여색을 밝히거나 명예를 좋아하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할 리가 만무하다. 오히려 검약하고 학문과 무술을 숭상하며 나라의 안녕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전력 질주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진퇴의 적확한 타이밍으로 승리를 거머쥐다

국가를 세우고 정책을 마련하며 사업을 전개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이 그토록 많은 정복전쟁을 계속하면서 실패를 몰랐던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을 개시하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적용했기 때문이다. 미처 적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아직 적들이 준비되지 않은 시기, 그리고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라며 마음을 놓고 있을 때에 그는 진군나팔을 불었다.

꿈을 꾸는 곳마다 정복의 깃발을 꽂다

영웅과 리더가 평범한 이들과 다른 점은 이들이 훨씬 더 넓고 큰 미래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광개토대왕 역시 정복전쟁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정복전쟁을 멈추면 적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들이 기습한 전쟁은 반드시 보복전을 펼쳐 함부로 적이 기동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또한 눈앞의 적보다 더 멀리 있는 적을 경계하고 이들을 공격해 무릎을 꿇렸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은 북방 공략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가 정복한 지역은 남쪽으로는 예성강, 충주, 영일만을 잇는 경계선, 동쪽으로는 연해주지역 전체, 북쪽으로는 흥안령 산맥 북부지역의 흑룡강까지를 아우르는 북만주벌판 전체, 서쪽은 요하의 넓은 지역 전체였다.

외정 못지않은 내정을 완성한 지도자

흔히 외정을 성공한 군주나 장군들에게는 공격적인 리더십만 조명하는 습관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런 면에서 내정도 성공적으로 리드한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버지 때까지 계속되었던 극심한 가뭄과 기아를 해결해냈다. 남방을 정벌해 식량의 공급 기지를 확대한 것이다. 또 392년, 평양에 사찰 9개를 중건했다. 불교가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불사를 일으켜 정신적 통일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해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다. 아울러 적이었으나 귀순한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이렇게 열린 가슴으로 나라를 이끌다가 413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상대 경쟁사를 이겨내려면 광개토대왕처럼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보자. 그는 이길 수 있는 전쟁에 총력을 투입하고, 전광석화처럼 병력을 빼내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 또한 해양전(당시로서는 첨단과학전쟁)을 중시해 수군을 기습전에 활용하고, 병력과 군량미를 신속하게 보급해 전투에 차질이 없게 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고대 전쟁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전술을 활용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인물이었다. 만약 광개토대왕이 지금 살아온다면 오늘날 가장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으로 "휘하에 있는 모든 병력(R&D 담당 엔지니어, 홍보전문가, 마케팅 전문가, 과학자, 판매담당 전문가 등)을 동원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력을 집중 투입하고 경쟁사를 이겨낼 수 있는 인물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3부 평화 시에도 개혁을 추진한 지혜의 리더십



문종, 균형 감각으로 38년간 선보인 통합의 리더십



SWOT 분석

약점 -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신하들의 계속된 도전: 신권(臣權)의 강화로 인해 문종은 송과의 교역이나 외교관계 회복, 인재 발굴과 추천, 국방력의 증대 등에서도 신하의 눈치를 보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문종에게는 강력한 집권을 방해하는 약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위협 - 거란의 자극과 동여진의 출몰, 해적의 도전: 고려 초기 거란은 큰 위협거리였으나 문종 시절 외교적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되면서 비교적 소강상태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종 8년과 28년에 거란이 고려를 심각하게 자극해 변방을 소란스럽게 한 일이 있었다. 한편 여진은 고려시대 내내 변경을 소란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이들은 고려와 거래하면서 거란과도 거래하는 등거리 외교책을 통해 자신의 민족을 지켜왔다. 당연히 고려와 거란은 이들의 지배권을 놓고도 서로 쟁패를 계속해왔다. 참고로 문종 때만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져 동북해안지방은 편한 날이 없었다.

강점 - 강력한 국방력과 탁월한 외교술로 무장: 문종은 어느 군주보다 지혜로웠다. 그는 37년간 끊임없는 대내외의 격렬한 도전을 받았으나 가장 태평한 시대를 이룩해냈는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바로 국방력을 강화한 덕분이었다. 각지의 요새를 보강하고 축성을 계속했으며, 또 무기의 제조와 병참기지의 증대, 적절한 인재를 배치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적국의 욕심을 사전에 차단했다. 게다가 문종은 홍보 전문가였다. 그는 숨길 것은 숨기고 알리고 싶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림으로써, 고려가 가진 국력 이상으로 실력을 드러내 보였다. 아울러 그는 신하의 의견을 듣고 귀 기울여 그에 응대하거나 조정해주는 조정자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했다.

기회 - 대송 무역과 대일 교역 증대: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중국의 지배자와 늘 마찰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거란은 송나라를 압박하고 고려를 견제해 강력한 국가체재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 시절 고려는 거란의 견제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송상(宋商)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문물의 거래가 활발했다. 또한 문종은 할 수 있으면 폭넓은 외교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절대 패자가 없는, 이른바 백가쟁명의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의 교류도 신라를 계승한 고려였기 때문에 그동안 소원했으나, 문종은 이를 극복하고 양국의 교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어의 걸출한 등거리 외교

서기 1046년 서구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망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시절, 동아시아에선 거란과 송(宋), 하(夏)의 패권 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고려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치열한 군사, 외교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문종은 즉위 후 이 힘의 대치 상황 속에서 걸출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강력해진 고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거란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하들이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반대했지만, 문종은 거란에 굽실거리기만 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또 문종은 거란이 힘으로 밀어붙여 단절시킨 송과의 국교를 회복하는 결단력을 내렸다. 이 역시 신하들은 거란이 보복하기 위해 전쟁을 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반대했지만, 문종은 과감하게 등거리 외교를 감행했다. 고려, 송, 거란, 이 삼국이 정립되면서 고려는 국제적인 위상도 높이고, 당분간 전쟁의 위협을 피하게 되어 내치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외교전이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