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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

전도근 지음 | 북오션
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

전도근 지음

북오션 / 2011년 2월 / 236쪽 / 12,000원



1.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정신




고정관념을 가장 먼저 버려라

당신을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어떤 대상에 이끌려 끊임없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의 주범은 바로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첫 시발점이다. 창조성은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켜 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의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만 있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가능성이 큰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정주영의 고정관념 깨기는 그의 일생 동안 멈추지 않았다. 만약 정주영이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거론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자신의 생활에 안주했다면, 한국사에 '현대'라는 이름 역시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자고 일해 쌀가게 주인이 되었고, 정신없이 달려 건설회사를 세웠으며, 결국 현대그룹의 창시자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재능만 있으면 인터넷 쇼핑몰을 차릴 수 있고(10대에 재벌이 된 인물도 있다), UCC를 통해 자신의 기능성을 세상에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주영이 태어난 190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자신의 노력보다는 역사에 의해 인생이 정해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정주영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오직 살기 위해 장시를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사업을 하게 되었다. 강원도 촌놈으로 태어난 사람이 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무에서 유로 가는 어렵디 어려운 과정이다.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육상에서 선박을 건조해냈으며, 이러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한국 조선사업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다." 이 말은 2004년 현대중공업이 육상에서 배를 건조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에 대한 세계 각 언론사들의 뜨거운 반응들이었다. 물론 이 일은 그가 고인이 된 후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내 존재는 없어져도 내 사업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그의 강렬한 예언이 이뤄진 셈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황에 안주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시대의 변화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정주영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물론, 그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결코 멈추지 않는 그의 머리와 가슴은 언제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조선소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고정된 틀에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가져라

중동신화의 서막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 공사는 현대건설에게 20세기 최대의 일감이었다. 주베일 공사는 금액만으로도 당시 최고의 일이었지만, 공사에 들어가는 자재의 규모면에서도 최고였다. 항만공사에 들어가는 콘크리트 소요량이 5톤 트럭으로 20만 대 분량이 동원됐고, 철강 자재만도 1만 톤짜리 선반 12척 분량이 들어가는 대공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큰 공사를 사우디아라비아 자체에서 진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우선 시간적으로도 많은 무리가 따를 뿐만 아니라, 막대한 원자재를 수입해서 쓰면 다른 나라에 이익이 돌아가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 한국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침체된 상태였다. 때문에 정주영은 국내 경기에 도움이 되고 현대의 힘을 세계에 알리고자, 국내에서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물을 조립해서 운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원자재를 한국에서 주베일까지 끌고 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10층 빌딩 크기의 철조 구조물 89개를 바지선으로 옮기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토목 역사상 유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대형 바지선으로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운반했다. 1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장거리를 태풍과 암초의 위협, 그리고 온갖 비웃음을 물리치고 열아홉 차례나 왕복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공사를 마쳤다.

결국 현대건설은 주베일 항만 공사를 계획보다 일찍 완공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 상상을 불허하는 현대의 창의력에 감탄하도록 만들었다. 그 후 현대는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등 중동일대 대형 공사를 잇달아 수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에 30일이 넘게 걸리는 뱃길을 무려 열아홉 차례나 건넌 강심장 정주영, 그는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 남들과 다르게, 뭔가 새롭게 하고자 했다. 따라서 정주영의 생각은 남들과 달랐고, 그로 인해 결과도 남들보다 월등했다. 이러한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한쪽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으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훗날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의 무모한 도전에 대해 은근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었다고 말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의지이며, 현대건설을 세계 최고의 건설회사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2. 불가능을 가능으로 살리는 도전정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이 말은 정주영의 자서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압축되어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격려했으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실패는 시련일 뿐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진 수많은 실패의 경험담이 성공의 탄탄한 디딤돌임을 생각하라는 뜻에 가깝다. 또한 실패는 부정적으로 보면 시련일 뿐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성공의 씨앗이 된다. 그는 언제나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은 사람이다. 또한 실패를 하면서도 그것을 실패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성공의 발판이라 인식하고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했다. 실패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열심히 도전할 뿐이었다.

청년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몇 번의 실패를 거쳐 1946년 서른둘의 나이에 적산積産 200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 주식회사로 의욕에 찬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반년 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은 후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손을 잡고 1968년 11월 첫 번째 차 '코티나'를 양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참담한 실패였다. 조악한 품질에 수해까지 겹쳐 울산공장이 침수되는 피해까지 보게 되었다.

1980년대 군부통치 시대, 정주영은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자기 손으로 일군 현대중공업을 정부에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한 아픔도 겪었다. 훗날 정주영이 대통령 후보에 출마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1980년대를 살아가는 경제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8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져갔다. 그러나 정주영의 도전정신은 이러한 어려움을 발판 삼아 더욱 넓은 세계로 도약하겠다는 강한 도전정신을 만들어냈다.

정주영 인생에 있어서 '운'은 바로 '타이밍'이었다. 그는 앞으로 좋아질 수 있는 기회, 즉 좋은 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그것을 발판으로 더욱 발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반대로 나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온힘을 다해 노력하여 그 상황을 기회로 삼고자 했다. 결국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좋은 실패란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성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서 편히 안주하기를 원하지만, 정주영은 여러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위대한 것은 비전을 실천할 때마다 만난 역경을 실패가 아닌 시련이라 생각하고 성공으로 바꿔갔다는 점이다.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정주영은 성공하기까지 주변의 비난이나 질투를 한몸에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수많은 비난이나 질투를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를 국민 기업으로 키워 한국을 번영시키겠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절대 한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이 하나의 봉우리에 깃발을 꽂으면, 또 다른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967년, 동양 최대의 댐 공사인 소양강댐 공사는 정주영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원래 소양강댐 공사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최대의 건설업체인 일본공영에서 설계부터 기술, 용역까지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공영은 100미터 이상의 높은 댐 공사를 중력댐으로 설계를 하고 시공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시공하면 일본에서 자재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일본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으로 자금이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에 있는 자갈을 이용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설계를 사력댐으로 바꿔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공법 변경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일본공영과 정부 관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당시 상황으로 보자면 일개 하청업체인 현대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공영을 상대로 시공법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행정상 번거로움을 가져오는 새로운 의견에 대해서 반대부터 하고 보는 정부 관료들을 설득하는 일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황은 더욱 나빠져 사람들은 정주영의 학력이나 경험 수준을 운운하며 공격했고 사력댐으로 시공하고자 하는 것을 비난했다. 정부에서도 사력댐을 지으면 무너지기 쉬워 물난리가 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정주영의 생각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소신과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풍부한 현장경험을 근거로 콘크리트댐은 폭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알리는 등 주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정주영의 굽히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소양강댐은 사력댐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면 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더 가치 있으며 그 길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남들이 이미 이뤄놓은 일이나 자신이 해본 일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단정 짓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때 화제가 되었던 불가능에 대한 아디다스의 광고 문구를 떠올려 보자.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가능,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불가능,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3.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진보정신



기회는 꿈을 가진 자에게 온다

정주영은 대한민국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손을 걷어붙이고 현장을 누빈 우리의 진정한 드리머이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공으로 향하는 길을 모색한 사람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만약 신이 주신 기회가 세 가지라면 과연 신은 정주영에게 어떤 기회를 준 것일까?

어쩌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쌀가게 주인의 눈에 들어 가게를 물려받은 것이 첫 번째 기회요, 쌀가게를 운영하여 번 돈으로 자동차 관련 기계를 사서 정비소를 연 것이 두 번째 기회요, 아도서비스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린 것이 세 번째 기회였을지 모른다. 정주영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고 성공의 기회로 삼았다. 그에게는 남들에게 그냥 스쳐지나갈 작은 일조차도 기회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그것을 꿈꾸고 그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성공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정주영은 비록 시골의 빈농에서 태어났지만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경험하는 것이 모두 기회였다. 성공한 사람들은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모두 부지런하다. 아니 100퍼센트 부지런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게으르다. 그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머리와 입으로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돌아갈 기회란 없다.위기를 기회로 바꿔라

정주영의 성공은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남들보다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다른 이들이 위기를 만나 주저앉거나 허탈해할 때, 그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더욱 열정적으로 이를 헤쳐 나갔다. 그에게 위기는 기회였으며 위기가 클수록 정주영의 돌파력은 더 강렬하게 발휘되었다.

정주영은 1940년 4월, 자동차 정비공장을 설립한 지 한 달여 만에 화재로 공장을 잃는 위기를 맞았다. 더욱이 공장을 짓느라 빌린 돈을 다 갚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는 작은 사고로 빚더미에 앉아 곧 패가망신할 상황이었고, 함께 일하던 근로자들도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다시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공장을 세우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녔다. 다행히 평소 정주영의 신용을 인정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실과 신용을 믿고 투자하는 마음으로 돈을 꿔주었다.

하지만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전쟁수행 체제로 돌입하면서 전국의 모든 공장을 강제로 통폐합하는 기업 정리령을 내렸고, 결국 그의 공장도 종로에 있는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흡수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공장을 빼앗기고 낙향하게 된 정주영은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홀동금광의 광석을 황해도 수안군에서 평양 선교리와 진남포 제련소 등지로 운반해주는 일을 했다. 징용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기회는 기회의 꼬리를 물었고, 해방 후 드디어 현대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의 문을 열게 된다.

또한 오늘날 세계 최고의 조선업을 이끄는 현대중공업이 되기까지는 절망도 많았다. 조선업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안 되어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선주들이 주문한 배를 인도해가지 않아 현대 측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건조하기 위해 모든 비용을 지출한 상태에서 배를 인수해 가지 않으니 현대조선소로서는 막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직원들은 절망에 빠졌고, 회사 입장에서도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들이 만든 배가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과 함께, 막대한 손해로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채만 한 배를 버릴 수도 그렇다고 마냥 재고로 떠안을 수도 없는 회사의 사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던졌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은 배를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한 끝에 해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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