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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리더십

아담 카헤인 지음 | 에이지21
아담 카헤인 지음

에이지21 / 2008년 5월 / 240쪽 / 13,500원



PART1. 어려운 문제들




올바른 해답은 꼭 하나뿐일까?

어린 시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78년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했다. 맥길 대학 학생으로 있으면서 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에 소속된 모임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스리랑카 출신 여성이 자국이 겪고 있는 에너지 부족에 대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나는 그 문제에 흥미를 느꼈고 그런 복잡한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배운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고 싶었다.

이후 나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경제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나의 관심사는 어려운 물리학적 문제를 푸는 것에서 힘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나는 사회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책 연구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 버클리에서 석사를 마친 후 나는 미국, 일본, 프랑스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에너지 문제를 푸는 해결책을 발견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986년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퍼시픽가스앤일렉트릭사에 취직했다. 나의 업무는 기업 전략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입사 2년 후 전략연수회에서 임원들을 위해 사용할 분석 자료를 모으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연수회는 실망스러웠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던 이사들은 분석 자료는 무시하고 파워게임을 벌이거나, 파벌을 짓고 의도적으로 서로의 말을 왜곡했다. 나는 그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나는 그들이 지식이 풍부하고 명석하고 세상을 위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올바른 해답이라는 것은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다

1988년 나는 로열더치쉘의 전략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쉘은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의 거대 에너지 화학회사이다. 내 업무는 사업상의 어려운 문제들로 고민하는 경영진을 돕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인 피에르 왁과 함께 일했다. 그는 1970년대 초 시나리오 경영기법을 창안했던 사람이다. 왁은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첫째 단계를 '귀 기울이기(Breathing in)'라고 불렀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트렌드를 관찰하기 위해 세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과 학술지를 읽고,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 기울이기 작업이 끝나자 우리는 '말하기' 단계로 넘어갔다. 몇 달 동안 우리가 보고 들었던 것들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고 핵심을 찾아냈다. 그리고 두 개의 시나리오를 채택했다. 쉘의 경영진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꼭 이 시나리오를 참조한다. 시나리오 중 하나는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시나리오 덕분에 쉘은 경쟁사보다 빨리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1999년 팀의 새로운 리더로 미국인 조셉 자보르스키가 들어왔다. 재판 전문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던 그는 미국 리더십 포럼을 설립하고 키우면서 1980년대를 보냈는데 이 포럼은 시민운동단체의 리더십과 상호 협동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였다.

자보르스키의 주도하에 우리는 자유화와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우리는 '신개척자'와 '방어벽'이라는 제목의 두 개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신개척자는 사람들이 자유화와 세계화가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계속 추진하는 시나리오이다. 방어벽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업, 권력, 자율성, 종교적 전통 등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 자유화와 세계화에 저항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우리는 이를 경영진에 공개하려 했지만 자보르스키가 반대했다. 그는 신개척자가 방어벽보다 세계를 위해 더 좋은 전망이라고 말하면서, 쉘은 두 개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신개척자 시나리오가 실현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쉘이 세계 변화에 참여했을 때 사람들이 쉘에 대해 적대감을 품지 않을까 걱정했다. 동시에 나는 '우리는 사업가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정부가 정한 법과 규율에 따라야 한다'는 회사 방침이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쉘은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제, 에너지 자원, 환경과 관련된 법률들이 제정되도록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회사를 위해 로비하는 것과 세계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참여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세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쉘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보르스키의 정열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행동은 나의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잃어버렸던 욕망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기적의 조건

1991년 중반 자보르스키가 피터 르 루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르 루는 남아공 웨스턴케이프 흑인 대학 교수였다. 1년 전 남아공 백인 정부는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를 포함하여 흑인 반대세력들이 세운 정당을 합법적으로 인정했다. 백인 정부와 흑인 세력은 인종분리주의 정책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기 위해 평화적으로 협상하고 있었다. 르 루는 흑인 반대세력을 위한 새로운 시나리오 기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보르스키는 르 루의 시나리오 기획을 지원하기 위해 나를 남아공으로 파견했다. 나의 임무는 방법론적인 조언을 하고 워크숍이 잘 진행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워크숍 장소는 케이프타운 외곽에 있는 몽플레 컨퍼런스센터였다. 르 루는 남아공의 영향력 있는 22명의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모았다. 그는 좌파 성향 반정부 집단에 속한 지도자, 백인 사업가, 학자들을 초대했다. 참석자들은 남아공의 축소판이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남아공의 현재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그것을 고치는 데 헌신하기 위해서였다. 르 루는 3명의 흑인 지도자의 승인 아래 이 시나리오 기획을 시작했다. 그 지도자들이 바로 넬슨 만델라의 뒤를 이어 남아공 대통령이 되는 타보 음베키,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범아프리카의회 부대표인 디캉 모세네케였다. 남아공의 권력을 잡게 될 흑인 지도자들은 이미 우리의 시나리오 전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참가자들에게 10년 후 남아공의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게 했다. 1999년 9월 첫 브레인스토밍에서 30개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우리는 30개의 이야기를 합치고 간추려 9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12월 두 번째 워크숍에서 우리는 9개의 시나리오 중 남아공의 상황에 적합한 시나리오 4개를 선택했다. 1992년 8월 네 번째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고위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나리오를 발표하고 시나리오의 타당성을 시험했다. 4개의 시나리오는 1992년 남아공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4개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타조'는 백인 정부가 타조처럼 자신의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고 다수의 흑인들이 요구하는 협상안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레임덕'은 약체 정부가 들어서서 모든 세력의 눈치를 보지만 그 어떤 세력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연된다. 셋째, '이카루스'는 흑인 정부가 대중적인 지지를 잡고 권력을 잡는다. 그들은 이상적인 포부를 품고 거대하고 경비가 많이 드는 국가사업을 추진하다가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넷째, '플라밍고의 비행'은 남아공의 성공적인 전환을 보여준다. 남아공의 모든 대표 세력들이 연합해서 서로를 따돌리지 않고 천천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 이 시나리오를 갖고 참가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정치, 경제, 시민단체에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상대로 100번 이상의 워크숍을 가졌다.

몽플레 기획은 아프리카민족회의와 다른 좌파 정당의 경제관념과 태도를 변화시키고, 남아공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덕분에 남아공의 정권을 잡은 아프리카민족회의는 1996년부터 '성장과 고용과 재건설'이라는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뒤돌아보면 남아공은 1994년부터 느리지만 꾸준히 협력하면서 발전해왔다. '플라밍고의 비행' 시나리오를 실현시킨 것이다. 나는 몽플레 기획이 가져온 모든 결과에 매혹되었다. 몽플레 기획에서 명석한 전문가, 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국가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풀기 위해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외부에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문제의 본질 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1994년 나는 쉘에 사표를 내고 남아공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도로시 뵈삭과 결혼했다. 나는 안정된 직장과 자유로운 독신자의 삶을 포기했다. 대신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과 혁명이 진행되는 남아공에서 아내와 3명의 의붓자식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1994년 남아공에는 흑인 정부가 들어서고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동안 극적인 변화가 큰 혼동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고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플레 기획은 그런 대화 과정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보다 큰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의 일부였다.

PART2. 말하기



한발도 양보하지 않고 맞서기

나는 남아공으로 이주한 후 제네론 컨설팅 회사를 만들었다. 조셉 자보르스키와 빌 오브라이언이 나의 첫 파트너였다. 자보르스키는 쉘에서 근무할 때 나의 상사였다. 오브라이언은 하노버 보험의 전 사장이었다. 나중에 MIT 슬론 스쿨의 교수인 오토 샤머가 연구 파트너로 참여했다. 그 당시 몽플레 기획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남아공과 각처에 있는 회사, 정부, 시민단체들이 그들이 겪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그들을 돕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평화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힌트들을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해답은 단순하고 실용적이었다. 말하기와 듣기를 통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마음을 닫는다면 어떤 워크숍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하고 어려운 일이다. 2002년 10월 나는 바스크 지방을 방문했다. 당시 바스크 지방에서는 바스크 민족주의자와 스페인 정부가 극단적으로 대립한 가운데 서로 폭력만을 행사하고 있었다. 나는 바스크 민족주의자와 스페인 정부의 정치가를 만났다. 모두 겁을 먹고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현 상황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이 최고의 피해자이며 상대편은 극단적인 가해자라고 설명했다. 그때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양쪽 모두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환영했지만 상대와 이야기하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바스크 분리주의 정당의 정치 활동을 불법화했고, 그럼으로써 테러리스트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폐쇄된 상태였다.

상대편과 말하지도 않고, 상대편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미 싸움 자체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상대편이 말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 버린다. 이런 교착 상태에 빠진 문제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한쪽이 힘을 행사해 일방적으로 자기의 해결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스크 지방에서 분쟁 당사자들이 했던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관계자들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아공에서는 흑백 양쪽 모두 힘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해결책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마지못해 대화를 시작했다.

지시하기

교착상태에 빠진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그 문제와 관련된 사람들이 서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주장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말하기는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2001년 파라과이에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워크숍에는 정치가, 사회운동가, 사업가, 장군, 판사, 기자, 지식인, 농부, 학생 등 45명이 참가했다. 참가자 대부분은 의심이 많고 냉소적인 비관론자처럼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주저했으며, 내가 그들은 대신해 결정해주기를 바랐다. 대화는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합의사항을 지키지도 않았고,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참여자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워크숍 참가자인 역사학자 밀다 리바롤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파라과이는 오랫동안 독재자의 지배를 받았어요. 당신은 독재 권력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야 해요. 모든 것은 정부의 승인과 동의를 얻어야 하고, 정부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죠. 당신이 보았던 행동패턴은 독재자에게 억압당했던 후유증입니다." 독재 치하에서 독재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결과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젖는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를 관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지켜내는 것을 주저한다. 독재에서 벗어난 후에도 이런 태도는 천천히 힘겹게 변화한다. 나는 파라과이 사람들에게서 이런 행동 패턴을 보았다.

이런 행동패턴은 어디서나 나타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상사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고용자들은 그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권위적인 조직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렇다. 권력자가 뛰어난 전문성을 가진 조언자나 고문과 의논한 뒤 해결책을 내놓고 그것을 아랫사람에게 지시한다. 단순한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에는 이런 권위적 해결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복잡성이 높은 문제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관찰하면서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말하기란 상사가 아랫사람에게 지시나 일방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닫혀 있는 방식이다.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보다 열려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예의바르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파라과이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을 주저했다. 정직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가 권위를 가진 윗사람에게 보복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인들은 달랐다. 캐나다인들은 조금 다른 이유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데 주저했다. 캐나다인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당황시킬까봐 두려워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주저했다.

1996년 나는 캐나다인 워크숍 팀과 함께 일했다. 이 팀은 퀘벡 분리주의자들과 캐나다 연방주의자들 사이의 구조적인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정치가와 공무원들은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매우 조심스런 태도로 워크숍에 임했는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냉정하고 이론적이고, 예의바른 형식으로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참가자들이 아무리 토론을 해도 이상할 정도로 합의점에 닿지 못했고, 결국 워크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예의바름은 대화가 아니라 침묵을 이끈다. 예의바르게 말할 때 우리는 사교적 관습에 따르게 된다. 사교적 관습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속한 사회 시스템이 잘못되고 위선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워크숍에 참석한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와 연방정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풀리지 않은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대다수는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무해하고 이론적이고 예의바른 대화만 나누었다. 결론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워크숍에서 공식적인 객관성을 성취했지만, 시선을 끌 만한 어떠한 결론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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