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초삼걸
장따거, 쉬르훼이 지음 | 지식노마드
한초삼걸
장따커, 쉬르훼이 지음
지식노마드 / 2011년 2월 / 446쪽 / 18,000원
한초삼걸, 유방이 천하를 얻은 까닭한(漢)나라의 성립은 어느 특정 인물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방과 수많은 문무신하가 공동으로 창조한 역사인데, 특히 한나라의 개국 공신 가운데서도 장량, 소하, 한신의 공로가 가장 컸으므로 이들을 '한초삼걸'이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들의 공적을 다루고 있다. 먼저 삼걸의 출신부터 살펴보자.
장량은 한(韓)나라 귀족 출신으로 가장 신분이 높았는데, 한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소하는 포의(벼슬 없는 선비)였으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아 나중에 패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한신은 유랑민이었다. 이처럼 형편이 서로 다른 세 가문에서 성격이 서로 다른 세 인걸을 배출하였는데, 귀족 출신이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장량은 교제가 넓었고 혈기도 왕성하였으며, 협객을 흠모하였고 세상이 놀랄 일도 서슴없이 벌였다. 또 고난을 겪으며 세상사를 꿰뚫었고 도가의 '무위'를 수련하였으며, 병법을 배워 유방을 보필하여 제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제왕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섬겼고, 공명을 이룬 뒤 물러날 줄 알았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소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일처리와 대인관계에서 매우 신중하였다. 또 행정의 귀재로 탁월한 수성의 능력을 발휘하며 초한 전쟁 당시에는 후방의 근거지를 지키고, 군수품의 공급을 원활히 하여 전선을 지원했다. 아울러 한나라 건국 이후에는 제도의 창설에 힘을 기울여 초대 재상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수훈갑이 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상을 떠돌던 한신은 의리와 우정을 소중히 여겼고 공명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정치적 두뇌가 없었기에 최고의 훈공을 세우고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이런 차원에서 한신은 장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제 한초삼걸의 흥기를 살펴보자.
장량, 진시황을 저격하다: 한(韓)나라가 망하자 장량은 비분을 가슴에 품고 진나라에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참고로 장량의 조부와 아버지는 한나라에서 다섯 왕의 재상을 지냈을 정도로 권세가였다. 하지만 한나라가 망하면서 가문이 파탄나는 아픔을 당했다. 하지만 장량은 쓰러지지 않았다. 장량은 300명이 넘는 노복을 해산시켰고 가산을 모두 처분하였다. 그리고는 초나라의 도성인 회양으로 가서 예를 배웠고 협객을 사귀면서 진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218년, 진시황의 제2차 동방 순례는 장량이 테러를 결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진시황의 행차가 박랑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120근짜리 철퇴가 날아와 황제의 깃발을 단 수레에 명중하였다. 하지만 다른 수레에서 이를 목격했던 진시황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에 격노하여 전국에 걸쳐 열흘간 대규모 수색을 벌였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수색망에서 빠져나온 장량은 희 씨 성을 버리고 장량으로 이름을 고친 뒤, 초나라의 하비에서 숨어 지냈다. 시황제에 대한 저격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장량이 그 일을 꾸며 실행으로까지 옮겼고 또한 시황제의 수색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아주 용맹하고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장량이 숨었던 하비는 유명한 대도시는 아니지만 사방으로 연결된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데도 진시황이 장량을 붙잡지 못했던 것은, 장량이 일찍이 초나라에서 사귀었던 호걸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또한 반항의식이 농후했던 초나라 사람들이 진나라 관리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지리적으로 하비와 가까웠던 풍ㆍ패 지역은 유방, 소하, 번쾌, 조참의 고향이었다. 즉 장량이 이들과 함께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소하, 시대의 변화를 읽다: 소하는 성실하고 진지하였으며, 매사에 민첩하고 조리가 있었다. 진나라의 어사가 사수로 감찰하러 나갔다가 소하의 행정능력을 높이 평가해 패현에서 사수군으로 부서를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1년 뒤, 관리들에 대한 평가에서 소하의 업적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진나라 어사가 소하를 경성의 관리로 천거하려 했으나, 소하는 사절하고 패현의 주리연(서기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복귀하였다. 황제의 칙임대신에게 아부해도 모자랄 판에 소하가 마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소하는 학정을 일삼는 진나라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고향에 남아 조용히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하를 논하면서 유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은 나이가 비슷했던 데다가 어려서부터 좋은 친구였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함께 패현의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함께 창업의 길을 걸어서 마침내 한(漢)나라를 세워 유방은 황제가 되었고, 소하는 승상이 되었다. 성격이나 지향 그리고 개인적인 수양 면에서 소하와 유방은 달랐다. 소하는 점잖고 고상하였고 유방은 거칠고 호방하였다. 그러나 난세에 성공을 갈망했던 소하는 유방의 힘이 필요했고, '큰일'을 꿈꿨던 유방도 소하의 도움이 필요해, 소하와 유방은 같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한 배를 탔다.
한신, 검을 들고 종군하다: 한신은 장대한 체구에 장검을 차면 기품이 서리고 위엄이 넘쳤다.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했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재간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얻어먹고 다녔기에 그를 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부랑자'라고 비난받았다. 사실 한신은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정장과 같은 아전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다못해 현소속의 아문에서 잡일을 보아도 밥은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우했던 경력 때문에 한신은 불의를 증오하고, 친구의 은혜는 반드시 갚는 품성을 갖게 되었다. 한편 기원전 208년 항량이 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설 땅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청년들이 뒤따랐는데, 한신도 천하를 누빌 절호의 기회로 보고, 종군하여 항량의 호위병이 되었다. 이때 한신의 나이 스물이었다.
난세가 인재를 단련하다난세의 도래: 사마천은 격동의 진한시대에 민심의 향배야말로 "천하를 호령하는 자가 세 번이나 뒤바뀌었던" 결정적인 요소라고 총괄하였는데, 먼저 "처음에 난을 일으킨 것은 진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 최초로 진나라 폭정에 맞섰던 진섭의 공적을 긍정하였다. 다음 "잔인하고 사납게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항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 진나라를 뒤엎은 항우의 공적을 긍정하는 동시에 진나라 멸망의 전철을 밟았던 항우를 비판하였다. 다음 "난리를 평정하고 포학한 자를 제거하여 천하를 평정함으로써 마침내 황제의 지위에 오른 것은 한나라였다"고 하여 유방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여기서 '난리를 평정했다'는 것은 천하를 다투던 수많은 호걸들을 평정했다는 말이고, '포학한 자를 제거했다'는 것은 항우를 제거했다는 말이다.
『고조본기』와 『항우본기』에서 그려진 항우의 포학함과 유방의 어짊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로 유방의 군대가 함양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할 때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삼갔기 때문에 진나라 백성들은 기뻐했고 진나라 군사들은 자진해서 무기를 버렸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항우는 서쪽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짐을 덜기 위해 "이미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여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 모두 생매장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항우는 민심을 잃고 고립되었다. 아무튼 항우가 실패하고 유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민심의 향배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한초삼걸도 유방에 귀의하고 민심을 따랐기 때문에 위대한 공적을 세울 수 있었다.
포의장상의 시대: 진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서 초왕 심, 조왕 헐, 위왕 구, 위왕 표, 한왕 성, 제왕 전담, 전영 등 기존의 여섯 나라 후예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잇따라 패망하였고, 결국은 평민이던 유방이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방을 따랐던 망명 무뢰배들도 훈공을 세우고 장상의 반열에 올랐다. 즉 선조의 유업을 물려받았던 귀족 후예들보다는 그 어떤 사회적 배경도 없었던 평민이 오히려 천하의 주인이 되었던 이 시기가 바로 시대와 사회의 격변기라는 사실을 사마천에 이어 최초로 인식했던 청나라의 역사학자 조익은 이를 개괄하여 '한나라 초기 포의장상(布衣將相, 귀족 출신이 아닌 베옷을 입은 선비 혹은 평민 출신의 장수와 재상)의 형국'이라고 하였다.
난세는 인재 단련의 용광로: 난세에 나타난 영웅과 성세에 육성된 인재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형성된 다른 유형의 엘리트다. 예로 태평성대는 문치를 우선시하므로 문인학사와 과학기술자가 많이 배출되고, 난세에는 대체로 문무장상이 배출되어 '병법과 지략'으로 큰 공을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아무튼 고금으로 걸출한 역사 인물은 대체로 결렬한 투쟁의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걸출한 인재는 격렬한 투쟁의 사회적 환경에서 나타나는가?
격렬한 투쟁의 사회에서 개인은 반드시 노력하고 시대의 조류에 순응해야만 비로소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데, 개인의 투쟁은 항상 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태평성대는 이와 달라서 사회는 조용하고 질서정연하며 사람들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으므로, 개인은 평온한 일상에서 활동하고 제한된 범위와 집단에서 실천한다. 따라서 성세의 인재는 재능은 탁월할지 몰라도 담력과 식견이 결여되어 큰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세에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가장 첨예하고 격렬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개개인의 담력과 식견, 재능이 날로 발전해 진취적인 자는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무능한 자는 도태된다.
유능한 신하는 현명한 군주를 택한다진나라가 멸망하고 혼잡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군주들은 유능한 신하를 골랐고, 신하들도 현명한 군주를 택해서 섬겼다." 예로 뛰어난 모략과 지혜를 지녔던 범증과 백전백승의 명장 종리매는 항우에 의탁했다가, 전자는 울화로 죽었고 후자는 자살했다. 장량, 소하, 한신은 유방을 추대하여 한나라를 건국하였고, '한초삼걸'로 칭송되며 천고에 명성을 날릴 수 있었다. 이들의 선택은 뛰어난 식견과 현명함이 밑바탕 되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장량은 공명을 이룬 뒤 때맞춰 물러났기에 시기와 질투가 횡행하던 왕조에서 끝까지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자손들도 오래도록 봉록을 누릴 수 있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농부의 아들, 유방: 기원전 247년, 유방은 초나라 패현에 속하는 풍읍의 중양리에서 유씨 집안 셋째로 태어나, 계(季)라고 불렸다. 참고로 유방이라는 이름은 그가 황제로 등극하고 정식으로 사용된 이름이다. 유방은 어릴 때부터 개구쟁이로 소문났다. 그는 글도 배우지 않았고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허구한 날 친구나 사귀었고, 유협을 숭상하여 도검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편 패현에는 번쾌라는 개장수가 있었는데, 무용이 뛰어났고 성격이 강직하며 신용을 잘 지켰다. 또한 주발이라는 누에치기가 있었는데, 상가에서 피리를 불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유방을 형님으로 모시며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유방은 성품이 어질고 통이 커서 베풀기를 좋아했는데, 돈이 생기면 언제나 친구들과 나누어 써, 유민들 사이에서 '관대한 장자'로 불렀을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유방은 성인이 되어 시험을 통해 관리에 등용되어 사수정의 정장이 되었다. 참고로 정은 진나라 때 지방행정의 기층조직으로 정장 한 사람을 두고, 그 아래 정보와 구도를 한 명씩 두었다. 정장의 직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적을 체포하여 관할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청년들을 훈련시켜 궁, 노, 극, 도, 검 등 다섯 가지 병기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오고가는 관아의 하급관리를 접대하고 변경을 넘는 관원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유방은 10년간 정장으로 있었지만 승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정장으로 지냈던 경험에 크게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직책 때문에 유방은 널리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흑백의 세계를 넘나들며 한 지역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패현의 주리연을 지내던 소하, 옥리연을 지내던 조참, 옥리이던 임오, 현리이던 하후영 등이 있었다.
기원전 209년 7월 진섭과 오광이 대택향에서 최초로 봉기를 일으키고 진나라를 뒤엎을 것을 호소하자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9월에 유방은 소하와 조참의 추대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대오를 이끌고 패현을 탈취하여 스스로 패공이라 칭하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때 유방은 적제의 아들이라는 명분으로 사방을 호령했고 깃발을 모두 붉은 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이 때 남쪽의 항량과 항우도 반기를 들었는데, 항량은 초나라의 명장 항연의 막내아들이고 항우는 항연의 장손이었다.
항우는 키가 8척이고 정을 번쩍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좋았다. 하지만 성질이 사납고 인내심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항우는 어렸을 때 글을 배웠지만 중도에 그만두었고, 검술을 배웠지만 그마저도 다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항량이 꾸짖자 항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글은 이름과 성을 적을 수 있으면 그만이고, 검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배울 만한 것이 못되니, 만인을 대적하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항량이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치자 항우는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충 그 뜻을 알게 되자 또다시 끝까지 배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량, 현명한 군주를 만나다: 장량이 기원전 218년 철퇴로 진시황 저격을 시도했을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암살이 실패하면서 장량은 개인적 의지와 신념에 큰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장량은 나이가 들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의 인생 반전은 하비에서 병서를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장량은 홀로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짧은 삼베옷을 걸친 노인이 비실거리며 장량 앞으로 다가와 일부러 신발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게 젊은이, 내려가서 내 신발을 주워오게." 노인의 무례한 어투에 잠깐 멍했던 장량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노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이 다시 "나에게 신겨라!"고 명령하였다. 장량은 기왕에 신발까지 주워왔으므로 꿇어 앉아 노인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장량은 떠나가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노인이 갑자기 발길을 돌려 장량에게로 다가와 "쓸 만한 젊은이군.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다시 만나세"라고 말했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에 장량이 그곳으로 와 보니 노인이 벌써 나와 있었고, 화를 내며 "늙은이와 약속을 하고서 뒤늦게 오다니 어찌된 노릇인가"라며 꾸짖었다. 그리고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나오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닷새가 지나 새벽닭이 울 때 장량은 다시 그곳으로 갔다. 노인은 또 먼저 그곳에 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나운 표정으로 "어째서 또 늦었는가?" 라고 꾸짖고는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나오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또 닷새가 지났다. 이번에 장량은 자정이 지나기도 전에 그곳으로 갔다. 조금 뒤 노인도 모습을 드러내고는 기뻐하며 "암, 마땅히 그래야지"라고 말한 뒤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장량에게 건네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량이 만났던 노인을 역사에서는 황석공이라고 하는데, 장량이 황석공으로부터 얻은 병서는 「태공병법」이었다. 참고로 태공은 주나라 초기의 개국공신 여망을 말한다. 아무튼 장량은 거기서 병법을 배우고 유방의 군사가 되어 초한전쟁에서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원전 209년 진섭과 오광이 대택향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고,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봉기군은 여러 성곽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각 계층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반진투쟁의 행렬에 뛰어들어, 9월에 항량과 항우가 오중에서 반기를 들었고, 유방은 패현에서 현령을 죽이고 스스로 패공이라 칭했으며, 장량은 하비에서 백 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 후 기원전 208년 정월 동해에 머물던 진가가 진섭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초왕의 후예 경구를 초왕으로 추대하여 유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재차 반진의 기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