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전쟁
뤄위밍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권력전쟁
뤄위밍 지음
에버리치홀딩스 / 2011년 1월 / 271쪽 / 14,000원
기회가 포착되면 모든 것을 걸어라기원전 260년 진나라 왕손 이인은 조나라 수도 한단에 있었다. 6년 전 이인의 조부 소양왕이 조나라와 화친을 맺고 이인을 인질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인의 부친 안국군이 진나라 태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이인은 장자도 아니었고 모친이 안국군의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이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타지에 머무르며 자유마저 속박된 채 살아가는 이인은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즈음 조나라 거상 여불위의 출현은 이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여불위는 처음 이인을 만난 자리에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제가 공자님을 출세시켜 드리겠습니다." 여불위는 각국의 정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이 보잘것없는 이인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여불위는 전 재산의 반을 이인에게 주고 빈객(전국시대 귀족의 집에 머무르며 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파는 유세객들)을 모으라고 일렀다. 여불위는 나머지 재산으로 진귀한 보석과 패물을 사들여 진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태자 안국군이 가장 총애하는 화양부인에게 진귀한 물건을 바치면서 이인의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칭찬했다. 이인이 화양부인을 늘 존경하며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화양부인은 내 하늘이시다"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자식이 없는 화양부인으로서는 감동스런 일이었다. 얼마 후 여불위에게 매수된 화양부인의 언니가 동생을 설득했다. "지금 부인께서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해 현능하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골라 적자로 삼아야 합니다."
얼마 후 화양부인은 태자에게 온갖 아첨을 떨며 이인을 화제로 옮겼다. 그가 인질로 조나라로 잡혀간 몸이지만 인맥이 넓고 명성이 높으며 모두가 칭송하는 효자라는 얘기였다. 말을 이어가던 화양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신첩이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습니다. 부디 이인을 적자로 삼아 의탁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인의 슬퍼하는 모습에 안국군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비참한 처지였던 이인이 진나라의 왕위 계승자로 등극한 것이다. 이후 여불위는 이인이 자신의 첩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보고 그녀를 이인에게 바쳤다. 이인은 여불위의 첩을 부인으로 봉했는데 오래지 않아 부인은 임신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배 속의 씨는 여불위의 집에서 뿌려진 것이었다. 그 아이가 바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다.
한번은 진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한단을 포위하자 궁지에 몰린 조나라는 인질로 있던 이인을 죽여 앙갚음을 하려 했다. 이인은 객관에 감금되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여불위는 객관을 지키는 관리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어 이인을 탈출시키고 같이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돌아갔다. 함양에 도착하자 이인은 화양부인을 찾았고 부인은 기뻐하며 말했다. "널 나의 수양아들로 삼았느니 이제 '초(楚)'라 부르겠다." 기원전 251년 태자 안국군이 왕위를 승계했고 효문왕이라 칭하고, 자초(이인)를 태자로 봉했다. 효문왕은 권좌에 오른 지 1년 만에 눈을 감았고 그 뒤를 자초(이인)가 뒤를 이었다. 자초는 장양왕이 되었다.
장양왕은 여불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리에 오르자마자 상국에 임명하고 군국대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식읍으로 낙양 10만 호를 내렸다. 놀라운 일은 여불위 소생에게 자리를 양보하듯 장양왕은 즉위한지 3년 만인 35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사람은 장양왕의 태자로 실은 여불위의 골육인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권좌에 올랐을 때 진시황은 13세에 지나지 않았고 태후와 여불위의 모종의 관계 때문에 국가 대사는 모두 여불위가 처리했다. 여불위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진시황조차 그에게 중부(둘째 아버지)라는 존칭을 쓸 정도였다. 여불위는 평범한 상인이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거듭난 역사적으로 극히 드문 사례였다.
쓸모없다면 과감히 내쳐라한 고조 유방은 원래 패현(장쑤성)의 일개 건달이었다. 그는 진나라 말의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하층민 출신의 군주가 되었다. 이 대사업을 이룬 데에는 범인을 능가하는 재능과 지략도 한 몫 했지만, 그의 특출한 능력은 용인술이었다. 그는 인재가 장점을 발휘하도록 할 뿐 아니라 단점을 이용해 그 사람을 통제했다. 인재가 쓸모가 없어지거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때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제거하였다. 그의 뛰어난 용인술의 걸작 중 하나가 한신이다.
유방은 항우와 맞서 싸울 때 한신에게 대장의 지위를 주어 전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항우의 패망 이후 한신의 공적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군사적인 재능도 따를 자가 없었다. 한신 수하의 30만 병력은 천하무적이었다. 항우가 패망한 해 겨울에 한신은 군을 이끌고 정도(산둥성 서남부)에 주둔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긴장을 풀어도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어느 날 한신의 군대가 주둔하는 진영 한 가운데로 대군이 쳐들어 왔다. 적군은 순식간에 한신의 핵심 진영을 포위하고 다른 병영을 봉쇄했다. 한신이 자세히 보니 적군은 바로 한왕 유방의 군대였다.
얼마 후 유방이 부하들을 이끌고 진영으로 들어왔다. 한신은 황급히 병사들에게 공손히 맞이할 것을 명하며 문을 열었다. 연회 석상에서 유방은 웃음꽃을 피우며 항우를 무찌르고 혁혁한 공을 세운 한신을 추켜올렸다. 그러나 일순간 화제가 전환되었다. "천하를 평정했으니 휴병에 들어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마땅하오. 병사를 병부에 남기고 제국으로 돌아가 부귀를 누리도록 하시오." 이런 상황에서 한신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30만 대군이 유방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유방은 여러 왕의 추대 속에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낙양에 도읍했다. 당시 국가제도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답습하고 동시에 여덟 명의 성이 다른 제후왕에게 분봉을 한 상태였다. 군사에는 누구보다도 밝지만 정치에는 어두운 한신은 고향(초나라)으로 돌아가 제왕이 된 것에 만족했다.
한나라 개국 이후 몇몇 총명한 총신들은 유방의 성정을 알고 매사 조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한신은 초나라에 도달한 직후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고 대규모 위병을 대동하여 각 현을 시찰했다. 이는 유방의 의심을 사기 쉬운 행동이었다. 한신이 살아 있는 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유방은 한신을 제거할 계책을 세운다. 한 6년(기원전 201년) 겨울, 유방은 각지의 제후왕에게 조서를 내려 운몽택(후남성 접경 지역의 큰 호수)으로 유람을 가려 하니, 허난성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신은 조서를 받고 갈등에 빠졌다. 그때 한 빈객이 계책을 짜내었다. "폐하께서 가장 증오하는 자가 종리매입니다. 대왕께서 종리매의 목을 베어 바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한신의 친구였던 종리매는 원래 항우의 부하 장수였다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종리매는 한신을 찾아가 검을 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사무쳤지만 한신은 종리매의 머리를 바쳐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신은 종리매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을 찾아갔다. "역적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유방의 손짓에 양쪽의 무사들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한신은 꽁꽁 묶여 포박당했다. "그대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고발이 들어왔는데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한신을 체포한 유방은 만족스러운 듯 제후들에게 각 봉지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한신을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신의 벼슬을 강등하고, 거주지를 장안으로 옮기게 했다. 장안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던 한신은 몇 년 후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망나니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만다. 유방이 자신의 사후에 태자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한신을 결국 제거한 것이다.
야망의 발톱을 내면 깊숙이 숨겨라사마의는 삼국 시대 조조 밑에서 실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조조는 지모가 풍부한 사마의에게 항상 마음을 놓지 못했다. 조조는 일찍이 아들 조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마의는 남 밑에서 일하는데 만족할 위인이 아니니 반드시 언젠가 너에게 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마의와 사이가 가까웠던 조비는 시시때때로 그를 비호하고 나서서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었고, 후에 위나라를 세운 후에는 그를 가장 신임하는 대신으로 두었다.
조조, 조비, 조학을 거쳐 어린 조방이 즉위한 후 사마의는 조상(조씨 집안 종친)과 공동으로 국정을 맡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견제하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측근을 주요 관직에 배치하고 황제에게 주문을 올려 사마의를 허울뿐인 관직에 임명하게 하고 권력과 병권을 장악했다. 아들 사마사가 이끄는 일부 병력을 제외한 모든 근위 병력에 대한 지휘권이 조상에게 넘어갔지만 사마의는 자신을 억제하며 늘 겸손을 잃지 않았다. 정권을 장악한 조상은 조정의 대사를 사마의와 의논 없이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희에 가까운 나이의 사마의는 중풍에 걸려 집에서 요양하며 정사에서 손을 떼었다. 조상은 심복 이승을 시켜 사마의의 집에 들러 병세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사마의는 이승 앞에서 하녀가 건네준 외투를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미음을 먹다가 흘리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승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승은 조상에게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마공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상은 이제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249년 정월 황제 조방이 성을 나와 명제의 능묘에서 제를 지냈다. 조상 형제도 병력을 이끌고 행차에 따라나섰다. 이틈을 타서 말을 탄 사마의의 군대가 황궁으로 돌진하였다. 황궁에 입궁한 사마의는 황태후 곽씨를 알현했다. 사마의는 조상의 불충함이 지나쳐 국가에 위협이 되고 있으니 조서를 내려 조씨 형제를 파면하라고 고했다. 황태후는 사마의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서를 작성했다. 사마의는 조서를 손에 넣은 후 곧바로 황제의 신표인 부절을 보내 조상에게 속해 있던 금위군의 지휘권과 병권을 빼앗았다. 이로써 조상이 다년간 애써 쌓은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사마의가 일으킨 정변은 성공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장기간의 준비 끝에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사마의는 조방이 즉위하고 몇 년간은 조상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위엄과 덕망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정변을 일으키고 나서는 조정의 신하들과 장수들을 위협해 조상 편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행동거지를 조심해 조상의 자만심을 키우고 경계를 늦추도록 만들었던 사마의는 병을 가장함으로써 역전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후 조상 형제와 측근들은 모반죄로 일제히 사형에 처해졌으며 가족들도 몰살되었다. 인내와 겸양을 지키다가 일단 기회가 오면 절대 망설이지 않고 뿌리부터 싹둑 잘라내 우환을 남기지 않는 게 바로 사마의의 본 모습이다.
4년 후 사마의가 숨을 거두고 뒤이어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집정했다. 이들 형제는 아버지처럼 겸손하고 공손했지만 독하고 악랄해 조가의 세 황제 조방, 조모, 조환을 전부 폐위시키고 살해했다.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진 무제) 대에 이르러 새 왕조가 태어나고 새 시대가 열렸다.
수단과 방법은 담대하고 냉혹하게 써라진 무제 사마염은 선대가 다져놓은 기초에 동오와 촉한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서진은 정권이 결코 부실한 국가가 아니었는데도 40년 만에 급속도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진 무제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혜제의 황후인 가남풍이다. 원래 가남풍은 가충의 딸이다. 가충은 위나라 정권을 탈취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공신이다. 진 무제 사마염이 적자로 선택된 데에도 가충의 공이 컸다. 때문에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 가충은 큰 권력을 손에 쥐었다. 가남풍은 용모가 추했지만 아비의 공로 덕분에 정실에 오를 수 있었다. 가남풍의 남편 혜제 사마충은 중국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백치 황제이다. 남편은 백치였지만 가남풍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의 시선을 피해 미소년을 끌어들여 욕망을 채우면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들이는 것은 철저히 막았다.
290년 무제가 붕어하자 사마충은 혜제가 되고 가남풍은 황후가 되었다. 무제의 황후이자 혜제의 이모인 양지는 황태후로 추대되었다. 혜제가 즉위하자 황태후 양지와 황후 가남풍 및 그의 외척 세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처음에는 양씨 집안이 우위를 차지했다. 양지의 부친 양준은 대도독의 자리에 올라 백관을 거느렸다. 두 부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비의 소생인 사마휼을 태자로 옹립하고 양제를 태자의 스승으로 임명하여 먼 미래를 준비했다. 가남풍이 딸만 낳았고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남풍은 아버지 가충에게 물려받은 악랄하고 잔인한 성정과 도덕규범을 깡그리 무시하는 기질로 권력을 탈취했다. 혜제는 부인의 악랄한 면모에 질려 백치화되는 바람에 가남풍이 대권을 움켜쥐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 전락했다.
가남풍은 양준이 명의상으로는 전군을 통솔하는 대도독 자리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상상황에서는 백만대군보다 황궁 시위대 수백 명이 더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남풍은 심복인 동맹과 황궁 시위대의 우두머리인 맹관과 이조와 상의해 양준을 주살하고 황태후를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다. 이를 위해 가남풍은 종친 제왕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당시 진나라는 종친들을 각 지방의 제왕으로 임명하고 병권을 주었다. 중앙정권에 위기가 오면 황제를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291년 3월 이조와 맹관이 혜제에게 양준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했다. 혜제는 양준이 왜 모반을 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남풍이 일 처리를 대신 해 주었다. 그날 밤 혜제 명의로 조서가 내려진 것이다. 양준을 체포하고 관직을 삭탈하라는 내용이었다. 황태후 양지는 이 소식을 듣고 황제를 불러 꾸짖으려 했으나 시위대가 출궁을 가로막았다. 다급해진 양지는 천 조각에 '태부를 구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노라'라고 적고 그것으로 자신의 인감을 둘둘 싼 다음 화살에 묶어 궁 밖으로 멀리 쏘아 올리게 했다. 하지만 황태후의 물건은 가남풍에게 전달되었다. 소식을 들은 양준이 황궁을 공격해야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결정을 미루는 동안 사마유가 이끄는 궁중의 시위대가 양준의 저택을 포위하고 사방에 불을 놓았다. 양준은 숨을 곳을 찾아 마구간에 숨어들었다가 사마유의 부하에게 단칼에 숨이 끊겼다. 뒤이어 양씨 집안의 관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고 삼족까지 멸해졌다. 양준을 제거한 가남풍은 혜제를 시켜 황태후 양지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낙양성 밖의 금용성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황태후의 모반을 공식적으로 벌한 사례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어미의 죄를 벌한 것 또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양지가 감금되고 나서 가남풍은 음식을 일절 넣지 못하게 했고, 황태후 양지는 비참하게 굶어 죽어갔다.
한편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에게 눈엣가시였다. 태자는 양지가 옹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남풍은 다음 수를 두었다. 자신이 전에 아이를 낳았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무제가 세상을 뜨고 얼마 후에 낳았지만 상중(3년 상)이라 알리지 못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아이는 사실은 가남풍의 여동생 가오가 낳은 아이였다. 또한 가남풍은 태자 사마휼을 모시는 태감들을 부추겨 태자가 향락에 빠지도록 부추겼다. 태자가 유흥에 빠지는 바람에 동궁의 돈이 모자라자 태감들은 태자 명의로 궁중의 물건들을 팔아치웠다. 이렇게 해서 태자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더럽혀졌다. 299년 태자 나이 22세 때 가남풍은 계략을 써서 태자를 역모죄로 몰아 서인으로 폐출시켰다.
태자가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갑자기 궁에 가남풍의 아들이 등장하자 조왕 사마륜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줄곧 가남풍을 도와왔기 때문에 태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후환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황후를 부추겨 태자를 살해한 후 태자의 원수를 갚는다는 핑계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얼마 후 가남풍은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어떤 이가 자신을 폐위하고 태자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불안해진 가남풍은 태감을 시켜 태자 사마휼을 몰래 죽이도록 한다. 태자가 죽고 나자 사마륜은 병력을 이끌고 진군한 뒤 제왕 사마경을 시켜 가남풍을 폐위했다. 가남풍은 금용성으로 압송되었고 사마륜은 이내 조서와 독주를 보냈다. 가씨 일가는 전부 씨를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