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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리더십 스토리

윤종성 지음 | 시아
박정희 리더십 스토리

윤종성 지음

시아/ 2010년 12월/ 269쪽/ 13,500원



Part 1. 역경의 인생 - 위기를 기회를 만들어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박정희의 이 말은 가난의 굴레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온 삶의 의지였고 버팀목이었다. 이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잡고 18년 6개월을 통치하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정신이요 혼이며 그의 지도력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는 인생의 역경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알았다.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가난한 몰락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미에 있는 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새벽에 일어나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기에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보가 다 젖었고, 겨울에는 땅바닥이 얼어 빙판이 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한 달 수업료가 60전이었는데 이것을 납부하는 것은 가난한 농촌 살림에 큰 부담이었다. 정희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생기면 학비를 모아두었고, 때로는 쌀을 팔거나 계란을 팔아 학비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오히려 박정희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특히 어려운 여건에서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은 박정희가 성장하여 숱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의 원천 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사범시절 박정희는 말이 없고 사색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은 민족적 분노가 불타올라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이 시기 박정희는 학업은 바닥을 기고 행동평가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훈련과 체육에는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1937년 3월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젊고 패기만만했고 반골정신이 농후했던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들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으로 가르치는 박정희를 좋아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교사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그는 교사가 되어 그 꿈을 구체화시켰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육사 시험에 합격하여 만주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1기생인 선배기수에는 혁명동지인 이주일, 김동하 등이 있었다.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군관학교에서 박정희는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였다. 국가건설과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군관학교 인맥은 좌, 우로 갈렸다. 당시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대로 이 시대를 호흡한 사람들을 과감한 행동파로 만들었다. 만군인맥의 공통점은 결속력, 친화력, 행동력, 정치 지향적이었다. 반면 일본 육사 출신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정치에 중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일본 육사에서도 2년을 보낸 박정희는 만군과 일군(日軍)인맥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생각의 씨앗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최초의 싹을 틔웠다. 군대를 단순히 전쟁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정치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한 여세를 몰아 동남아로 쾌속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1944년 7월 소위로 임관한다. 광복이 되기까지 만주군 보병 8단에서 근무하던 그는 해방이 되자 중국 청진함에서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하여 잠시 고향에 머물던 박정희는 1946년 9월 조선경비 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만군, 일군에 이은 세 번째의 군복이었다.

국방 경비 사관학교의 초기 입대자들의 성분에는 특색이 있었다. 광복군, 중국군 출신도 있었지만 주류는 만군, 일군 출신이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 집단을 피해 내려온 이북 출신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군대의 헤게모니를 반공의식이 강한 북한 출신이 잡게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엘리트 그룹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독립이라는 목표로 뭉쳐 있었으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5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4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3개월 등 장교 교육만 10년 가까이 받았다. 흐트러짐 없는 그의 단정한 자세는 이런 단련에서 우러나온 몸가짐이었다. 그는 이런 교육을 통해 한국, 일본, 중국 문화를 골고루 섭취하였다. 박정희란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동양 3국의 문화가 함께 빚어낸 공동작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Part 2. 꿈꾸는 리더 - 성품, 의지, 그리고 능력을 갖추어라



리더십 실행원리 1. 성품 - 청렴한 성품으로 마음을 사로잡다

성품은 탁월한 리더십의 요체이다. 리더십은 인격이다 할 정도로 지도자에 있어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다. 박정희의 인격은 크게 엄격, 결단, 청렴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그의 성품의 특징은 청렴함이었다. 이러한 청렴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1953년 박정희가 대령일 때 대구에서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방이 둘인 셋집에서 육영수는 아기였던 근혜를 기웠는데 당시 월급은 쌀 한 가마니 값에도 못 미치는 2만 환 정도였다. 나중에 박정희는 성북구 보문동의 언덕바지의 방 세 칸 집으로 이사를 갔다. 부관의 사촌누나 집이었다. 전세금을 낼 돈이 없어 월세를 냈다. 부관이 어느 날 박정희 집에 들렀더니 육영수가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내다 팔 옷을 고르는 것 같았다. 부관이 가면 육영수가 국수를 내 놓았는데 멸치를 넣지 못한 국물에 넣은 국수였다.

박정희는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전쟁을 막 벗어난 조국의 현실과 비교할 때 미국의 풍요함과 거대함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박정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영내 숙소에서 주로 생활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외출을 나갔다가 점심값을 아끼려 굶고 들어오기도 했다. 유학을 떠난 후 전속부관에게 어느 날 육영수가 인편으로 "쌀이 떨어졌다"는 연락을 해와 부관이 26사단 김재춘 참모장에게 쌀을 받아 육 여사에게 갖다 주었을 정도로 박정희는 청렴했다. 하지만 이런 청렴함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리더십 실행원리 2. 의지 -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지도자가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으되,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없다면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에 있어 삶의 의지는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그 자체였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은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의 윤곽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군 내부의 인적청산 문제가 대두되었고 국군의 10%가 이 사건에 휘말려 제대를 했고 처형된 장교만도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반군 토벌사령부에 참여했던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국군장교였다. 그러나 과거 남로당에 가입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소령이던 박정희는 이 사건 직후 군 내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군 수사팀에 체포된 박정희는 수사 책임자인 백선엽 정보국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수사에 시달려 몹시 초췌하였으나 담담한 모습이었다. 자포자기도 하지 않았고 생에 대한 집착도 크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말투로 딱 한 마디 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게 전부였다.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식의 변명이 아니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으니 선처해달라는 인간적 호소였다.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백선엽의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상황에서 "네 도와드리지요"라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답이었다.

박정희는 소령이었지만 자산이 많았다. 일단 군 내 평판이 좋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릇이 크다'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나이와 연륜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선엽이 결심을 하자 구명운동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군 검찰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 군 통수권자와 군 수뇌부까지 동조한 구명 운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사상과 이념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박정희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교훈을 배웠고 삶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여 이를 가슴 깊이 새겼다. 또한 무슨 일을 하건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경험을 체득했다.

리더십 실행원리 3. 능력 - 강한 지도력으로 차별화되다

능력은 계획하고 말하고 행하는 힘이다. 지도자가 아무리 성품이 훌륭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능력이 없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가 보여준 지도력의 원천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상황을 구조화하는 조직력,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실천력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차별화된 지도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박정희는 학업 성적으로 본다면 탁월한 학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만주의 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 육사과정도 3등으로 졸업하는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박정희에게 군 생활은 또 하나의 훌륭한 학습기회였다. 당시 군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정부의 안보정책 중시의 결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능률적인 조직체였다. 당시 혁명동지인 박태준은 박정희의 지도력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육사에서 생도교육을 받을 때 그 분은 중대장으로서 포병술을 강의했습니다. 무언가 꽉 차고 무거운 분이란 느낌이 왔습니다." 이처럼 박태준을 비롯한 우수한 엘리트 장교들이 박정희를 존경하고 따를 만큼 그만의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그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박정희는 당시 군 내에서 청렴성과 지도력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박정희는 예술적 감각도 탁월했다. 특히 미술과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그는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의 가사를 직접 썼고 작곡도 했다. 시적 감각도 풍부하여 그의 일기에 모인 시만 모아도 작은 시집이 하나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독서였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 이순신이나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관심과 독서 경향은 그의 인격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정희의 우수한 학업성적과 만주, 일본, 미국에서의 체험, 그리고 근대화된 한국군에서의 경험, 나아가 예술적인 감각과 내면화된 독서와 사색을 통하여 체득된 지식, 판단력, 감수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신념은 융합되어 통찰력, 조직력, 실천력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그만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주었다.

Part 3 시대를 읽는 눈 - 상황을 판단하고 진단하라



변화의 시대에 리더가 현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상황판단이란 당면한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단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하면 세상을 판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상황판단은 구성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행동으로 옮기는 출발점이 된다. 리더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상황판단을 잘못하면 나라 전체가 쇠락의 길로 추락한다. 그러면 박정희는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단하였을까?

1961년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뒤를 이은 장면 정부는 출발은 의욕적이었으나 민주당 내부의 신파와 구파 대립으로 표류하였다. 경제상황은 더 심각했다. 당시 한국은 100만이 넘는 농촌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상에게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이 와중에도 진보세력의 성장, 국가 재건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 군부 내의 정군 운동 등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몸부림은 계속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박정희는 민간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도 아닌 군인이지만 정치적 문제의 근본이 경제라는 점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제발전, 민주주의, 조국통일이라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과제 중에서 무엇보다 경제발전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1961년 4월 7일 당시 대구 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은 서울 명동 강상욱 중령의 집에서 젊은 장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다. 여기서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혁명지휘부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김종필에게 맡겼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날짜를 5월 16일로 변경하였다. 5월 14일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와 김종필이 가져온 혁명공약과 포고령 등의 문안을 검토하고, 부하들과 함께 주요 시설 점거 계획과 정부요인 체포 계획을 논의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들은 제 1한강교를 건너 서울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제 1 한강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혁명군의 도강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박정희는 총알이 날아오는 데도 고개를 들고 혁명군의 제 일선에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갔다.

박정희는 당시의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드러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실의와 좌절, 굶주림과 허탈, 원망을 가득 찬 저 군상들을 어찌한다 말인가! 우리도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신부터 뜯어고치고 사회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확 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개혁! 정치 개혁!" 강을 건넌 혁명군은 중앙청, 시청, 의회 등 정부 주요 시설을 접수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연금되거나 체포되었다. 혁명군은 남산 KBS를 점령하고 혁명공약을 방송했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내용의 혁명공약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세상은 5.16 혁명군의 편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의 목표는 잘 사는 국가의 건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굶지 않고 하루에 밥 세끼 먹을 수 있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Part 4. 가난을 몰아낸 리더십 - 비전, 가치, 전략, 과제를 제시하라



리더십 실행원리 4. 비전 -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자

비전이란 조직이 미래에 가고자 하는 모습이다. 달리 표현하면 목적지라 할 수 있다. 이는 지도자의 몫이다. 리더가 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선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정희가 '나라님도 가난 구제는 못 한다'는 우리 민족의 오랜 체념을 씻어 내기 위해 국민에게 제시한 비전은 조국 근대화였다. 이 비전은 대한민국의 미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 속에서 역사적이고 체험적인 통찰력으로 당대의 민족적, 민중적 집합의지를 꿰뚫어 보았고 가난의 근절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았다. 5.16혁명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1백 달러가 안 되는 전형적인 후진 농업 국가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집권 직후 조국 근대화를 국가 최고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국가 미래와 연결시키는 정치적 비전으로 삼았다. 그의 조국 근대화에 대한 집념은 정치 이념을 넘어선 하나의 종교요 희망이었다. 그는 지도층에게는 민족중흥이라는 비전으로 가난을 일상으로 삼았던 서민에게는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으로 격려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배고픔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이러한 미전은 미래의 모습을 그리기 충분했고 매력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모델을 어디서 찾았을까? 그것은 일본이었다. 그는 일본 육사라는 엘리트 코스 교육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단기간에 강력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 것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꾸준히 실천하면서 '하면 된다.' '잘 살아보자.'고 호소하고 국민의 단결을 고무시켰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에 조국이 반드시 근대화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대화의 신앙에 의해 우리의 조국은 통일될 것이고 기필코 복지국가의 건설은 이룩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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