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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

홍준표 지음 | 형설라이프
변방

홍준표 지음

형설라이프 / 2009년 12월 / 248쪽 / 10,000원



1 고통과 혼돈의 시절


"야들아 짐 싸라"라는 아버지 말씀에 나는 "또 이사 갑니까? 이번에는 어데로 갑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창녕읍으로 간다고 했다. 일곱 살 때 집안이 망해 창녕 남지 고향을 떠나 대구 신천동에서 일 년을 보내고 신암동으로 이사 온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홉 살이던 그해 우리는 또다시 손수레에 짐을 싣고 걸어서 창녕으로 이사를 떠났다. 창녕에서 부모님은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손수레를 끌고 양은그릇 장사를 했다. 그러나 손해만 늘어 더 이상 장사로는 살길이 없어, 다시 합천 산골로 이사를 했다. 그 뒤 나는 도내 학력고사 결과가 마을에 퍼지면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대접을 받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주변에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6학년이 되던 해, 작은누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돈 벌러 대구로 떠났고, 어머니는 나의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을 아주머니를 따라 달비 장사에 나섰다. 달비는 처녀나 부녀자들의 머리카락(당시 이것으로 수출용 가발을 만들었음)을 말한다. 내 여동생은 학교 갔다 오면 홀지기(기모노의 허리 장식품)로 돈을 벌고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이렇게 사는 것이 분하고, 어머니의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고도 도울 길이 없다는 것이 분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도울 수만 있다면 나서 보겠는데, 나는 키도 작은 꼬마였고 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라도 열심히 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 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8킬로미터 떨어진 옥야중학교에서 오라고 했으나, 나는 그 제의를 뿌리치고 보리쌀 두 말을 들고 대구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친구 한 명 없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중학교 시절에도 점심식사 시간이면 늘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고 난 뒤 나는 특대생이 되었다. 그래서 공납금을 면제받으면서 친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했다. 의과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는 의과대학을 가려면 돈이 많이 드니 육사를 가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육사를 가겠다고 했다. 그해 10월, 나는 육사 특차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12월 초순, 예비고사를 치르고 중순경 집에 오니 아버지가 지서에 잡혀 있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남이 훔친 비료를 매수하여 장물을 취득했다고 말해 주었다. 바로 지서로 면회를 가니 아버지는 그 비료를 웃촌 장씨와 같은 날 농협지소에서 배급받았는데, 농협조합장이 자신의 부정을 숨기기 위하여 장부를 조작,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다며 억울해하셨다.

그날 밤, 나는 웃촌 장씨를 찾아가 사실대로 증언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증언하면 조합장이 내년부터 비료를 배급해주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좀 알아서 처리하라'고 간곡히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조합장이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고 훈방으로 풀려 나왔다. 나는 이 사건을 겪고 난 뒤 '군인보다 검사를 해야겠다'라고 결심하고 진로를 법대로 바꾸었고, 고대 법대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972년 2월 25일 새벽 6시 서울역에 도착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기 위해 나는 대구로 갔고, 이젠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와 한 많은 서울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서울 생활은 모든 면에 있어서 실수투성이였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가르치던 학생의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교사를 마치고 밤늦게 하숙집으로 돌아오며 불 켜진 중앙도서관을 바라보면서 '내가 공부하러 서울 왔나, 먹고살러 서울 왔나' 하며 한탄하기도 했다. 일 년간 힘든 세월을 보내던 나는 1973년 3월, 등록을 포기하고 시골로 다시 내려갔다. 이렇게 살기에만 급급한 생활을 하며 다녀본들 대학 생활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더 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독학을 하기로 하고, 대구 근교에 있는 도덕암으로 거처를 옮겨 하루 열다섯 시간씩 막무가내로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석 달 후에 깨달았고, 그해 여름, 산사에서 철수하여 시골로 돌아갔다. 그러자 보다 못한 아버지는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니 어서 대구로 올라가라고 채근했다. 9급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은누나는 '이제부터 내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테니 복학준비를 하라'고 재촉했고, 또 '내 동생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서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래서 1974년 3월 초, 재입학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 입학할 때 그 마음으로 공부를 하기로 다짐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해 6월 중순경, 고향집이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급히 내려가 가족회의를 한 결과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 곧 울산 복산동 산골짜기에 단칸 월세방을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8월 중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막장 같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으나 그 좋던 건강도 술과 야간 경비 일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10월이 되자 교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신 반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해 중간고사는 결국 엉망이 되었다. 나는 공부에만 몰두하려고 했으나 열혈 청년이었던 친구의 요청으로 총단의 지하 유인물 작성을 돕게 되었다.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유인물 작성을 요청해왔을 때 나는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중앙정보부 6국 학원종교국 요원에게 붙잡혀 8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각서를 쓴 다음 풀려났다. 1975년 봄이 되자 학교는 더욱더 술렁이게 되었다.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던 날, 나는 고대 정문 앞에서 닭장차에 실려 성북서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날 밤샘 조사에서 하숙집 아줌마의 재치로 성북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해 가을, 데모는 더욱 격화되어 학교가 한층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고시를 핑계 삼아 학교에 나가지 않고 하숙집에서 밤낮으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이듬해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에는 낙방을 하면서 그 후 6년 동안 사법시험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고시공부만 열중하던 중 1976년 4월 우연히 학교 앞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창구에서 달덩이 같은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은 결국 내 아내가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해타산을 가지고 대할 때 그 사람은 가난하고 희망 없던 나를 이해해 주고 따라 주었다. 그 뒤 1980년 4월 사법시험에 낙방한 후 방위 소집에 응했다. 당시 내 체중은 48킬로그램이었고 시력과 피부병력이 겹쳐 4급 판정을 받고 방위 소집에 응해 14개월간 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그 이듬해 6월 소집 해제되어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연합철강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1982년 1월이 되자 또 고시병이 도져 마지막으로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정했고, 7월 사법시험이 끝나자 나는 도저히 합격이 어려울 것 같아 고려화학에 입사원서를 냈다. 그러나 면접관은 내가 사법시험을 다시 볼 것이라고 판단해 입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한라자원에 다시 응시하여 파푸아뉴기니에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합격했다. 한라자원 출근일은 9월 3일이었는데 사법시험 발표는 9월 2일이었다. 오후 3시쯤 되어서 학교에 전화를 걸어 합격 여부를 알아보았더니, 6년 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소리! 합격이었다.

2 정의를 위한 열정으로

연수원을 수료하고 검사를 지망하여 청주지방검찰청으로 부임하게 됐다.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으로 세상을 평정해 보겠다고 호기롭게 출발한 검사의 길은 막상 시작해 보니 내부 제약이 너무나도 많았다. 부장, 차장, 검사장의 결재 과정에서 내 소신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최소한 수사 이론에서는 밀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당시 검찰사전이라고 불리는 정 차장님의 메모를 구해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그 시절, 나는 법무부 장관의 사돈도 구속해 버리는 만용(?)도 저질렀고, 현직 도지사의 비리를 내사하는 용기도 내보였다. 또 보안대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보안대 간부를 내사해 인사조치도 취했었고, 안기부 간부의 비리도 조사하는 바람에 정보기관에서는 나를 통제불능 검사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때 형성된 내 이미지로 그 후 검사생활 내내 편할 때도 있었지만 불이익을 받을 때도 많았다. 편한 점은 상관으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인사 때는 늘 소외되었다.

1988년 8월 말, 나는 영등포에 있는 남부지청 특수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지청장으로부터 진정서 형태로 접수된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을 배당받게 되었다. 서류를 읽어보니 전 대통령의 형이 관련되었다는 막연한 추측만 있을 뿐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피해자와 관련 공무원을 불러 조사에 들어가 보니 수사를 하면 할수록 사건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고 관련자가 늘어나면서 수사망이 고위직으로 확대되었다. 그 당시 수사는 매일 대검에 일일 보고되었고 사건이 확대일로에 이르게 되자, 대검은 처음에는 수사의 속도 조절을 주문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구속하려는 서울시 국장을 불구속하라는 해괴한 지시까지 내렸다. 그러나 나는 언론의 힘을 빌려 수사를 계속했고, 강행군 끝에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바지에 가서는 사건과 수사기록 전부를 대검에 빼앗긴 채, 나는 특수부 생활 넉 달 만에 형사부로 쫓겨났다.

형사부로 쫓겨 온 뒤부터 나는 송치 사건 처리와 해원(解寃) 사건 처리에만 골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잘나가는 검사로부터 정덕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를 내사해 보기로 했다. 영등포 그의 업장에 가서 실제로 파친코를 해 보기로 하고, 10만 원 수표의 넘버를 적어 놓은 다음 게임을 해 보았다. 법정시상률은 87%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0%도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3년 동안 광주에 근무할 때도 그의 업장으로 알려진 곳만 찾아다니며 게임을 하면서 10만 원권 수표 30여 장을 잃어주었는데, 후일 이 수표를 역추적하여 그의 비밀구좌, 가ㆍ차명구좌를 찾아내는 단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미 남부지청에서 파친코 내사를 시작할 때 대검의 모 간부로부터 내사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뒤 1991년 3월 정기 인사에서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광주로 쫓겨 가게 되었다.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 수사의 여파였다. 한편 특수부, 공안부는 안 된다는 상부의 방침에 따라 광주에서 나는 형사부로 배속되었으나, 바로 강력부로 재배치되었다. 그것은 내 수사 실력을 인정해 준 차장 검사님의 배려였다. 그 당시 광주는 토착 조직 폭력배들의 세상이었다.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대는 조직 폭력 두목급들을 비호하고 있었고, 두목급들은 모두 건설업자와 다른 사업가들로 위장하고 있었다. 내가 강력부에 배치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건설업계 조직 폭력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두 달 동안 수사를 진행하여 조직 폭력배 32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30여 명은 건설업계에서 추방시켰다. 그리고 그 뒤 그 지역 현역 최고 거물인 Y모씨를 검찰 간부, 법무부, 대검 지휘부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구속하고 법정에 세워 유죄판결을 받게 하였다. 광주지검에서 조직 폭력과의 일전을 마친 후 나는 다음 임지로 대구를 원했다. 그러나 검사장께서 '고생한 검사가 좌천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 검사가 다음에 일을 하겠느냐'면서 서울지검 강력부로 보내 주었다. 그렇게 하여 지난 3년 동안 내사해 온 파친코 비리를 수사할 기회를 얻은 나는 다시 정덕진 회장 업장에 드나들면서 자료를 모았다. 그 당시 내가 모시고 있던 서울 지검장을 비롯한 검찰 고위간부들이 정씨 형제의 배후라는 정보가 많이 들어와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그런데 1992년 12월 정권이 바뀌고, 그 이듬해 3월, 서울 지검장으로 강한 소신을 갖고 있는 송 검사장이 부임해 왔고, 강력부장으로는 마약수사로 유명한 류 부장이 부임해 왔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곧 내사가 아닌 수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4월 7일, 대검에서 전국 강력부장검사 회의가 있던 날, 나는 일방적으로 파친코업계 수사를 발표해 버렸다. 대검으로부터 강한 질책이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날부터 6월 말까지 부장을 포함한 우리 강력부 검사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휴일도 없이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음해에도 시달리고 언론으로부터도 시달렸지만, 우리는 검찰 내부 고위간부도 성역 없이 수사하는 개가를 올렸다. 경찰청장, 치안감, 병무청장, 6공 황태자, 고등 검사장 3명 등 40여 명이 연루된 초대형 사건을 대검중수부도 아니고 지검특수부도 아닌 강력부 검사 몇 명이 뭉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사 이후 나는 별종으로 취급받으면서 검찰 내부로부터 철저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상부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던 검찰 내부수사를 강행하여 검찰조직에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시작된 따돌림은 내가 검찰조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1994년 10월 26일, 나는 안기부 파견을 명령받아 안기부 국제 조직 범죄 수사지도관이라는 명목으로 11개월간 근무했다. 이듬해 9월 검찰 인사 때 나는 권영해 부장님과 검찰 총장님에게 검찰로 복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총장님은 서울지검으로 복귀는 안 되고 수사부서도 안 되므로 고검 직무대리로 가 있으라고 했다. 수사권은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사 발표에 따라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발령이 났고, 나는 독일어도 모르면서 통일 독일법을 연구하는 특수법령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네가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다. 그래서 결국 법무부 인사신고 첫 날 나는 사표를 냈다.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나는 늘 이렇게 변방에 있었다. 검사가 되면서 중심부로 왔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검사생활 11년에 남은 것은 모래시계 드라마 한 편뿐이었다.

드라마 〈모래시계〉는 나에게는 멍에와 같다. 비록 이 드라마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나는 나머지 세월도 이 드라마의 틀 속에서 주인공 캐릭터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멍에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편해도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면 나는 그 캐릭터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검사를 그만두고 나는 아내와 단둘이 제주도 여행을 갔다. 그러나 허허로운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한 달가량 변호사를 개업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1995년 11월 초에 후배 변호사 사무실의 반쪽을 얻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파를 위한 열정으로

변호사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의뢰인이 아닌 협박전화였다. 아내를 납치한다. 애들을 납치한다. 너를 죽인다…. 이런 협박전화를 받고 나는 가족과 나를 지키기 위하여 제도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검찰로는 돌아갈 길이 없고, 할 수 없이 정치권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정치판에 들어가기 위해 여야 지도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를 만나 내가 사는 강남의 공천을 원했으나, 도통 답변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재 측에서는 사람을 수차례 보내 일산 자택으로 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다.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 당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던 중 김영삼 대통령 측에서 문민정부의 사정검사가 야당에 갈 수 있느냐면서 그 당으로 오라고 하기에 덜컥 약속을 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민자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1996년 1월 26일, 입당하고 보름 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게 된다. 나는 지역구를 내가 사는 개포동이 속하는 강남을로 정해 줬으면 했는데, 당에서는 여당이 지난 12년간 이겨 본 일이 없는 송파갑으로 가라고 했다. 선거를 37일 앞둔 시점에 송파갑으로 간 나는 지역구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선거를 어떻게 치르는지도 모른 채 밤에는 유세차에 〈모래시계〉드라마만 틀어 놓았다. 그냥 인사만 하고, 악수하라고 하면 악수하고, 서투른 말솜씨로 유세하고, 이렇게 보낸 15일 후 나는 압승을 하였다. 한편 당선사례를 다니느라 여념이 없던 그해 4월 말, 정확하게 당선된 후 14일 만에 나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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