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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승부수

신동준 지음 | 올림
대통령의 승부수

신동준 지음

올림 / 2009년 9월 / 296쪽 / 12,000원



이승만(1~3대 대통령, 1948. 7~1960. 4) - 현실을 직시하여 실리를 도모한다



철저히 계산된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제1공화국의 가장 큰 위기는 6ㆍ25 전쟁이었다. 당초 미국은 1950년 봄에 '애치슨 독트린'을 발표해 한반도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 바 있는데, 이는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으로 하여금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하게 만들었다. 전쟁 소식은 한국 정부보다 미국 정부가 먼저 알았고, 예사 상황이 아니라는 보고를 받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는 한국 정부에 확인하려 했으나 일요일이라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먼저 긴급 보고를 했고, 트루먼은 아직 한미 동맹이 체결되지 않은 때였음에도 즉시 참전 명령을 내렸다. 국회의 동의를 얻기는커녕 유엔 안보리에 안건 상정도 하지 않은 채 단독 결정을 한 것이다.

초반 전세는 단연 북한군이 압도했다. 기울어 가던 전세를 일시에 뒤집은 것은 인천 상륙 작전이었다. 졸지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북한군은 어쩔 줄 몰라 했고, 그 와중에 수많은 포로가 잡혔다. 유엔군 측은 처음에 이들을 부산과 경북 등지에 분리 수용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당시 유엔군이 잡은 포로는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등 모두 17만 명이 넘었는데,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부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거제도가 조건에 맞아 그곳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 포로를 모두 수용했다. 당시 북한군 포로 중 상당수가 남한 출신으로 북한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에 동원된 사람들이었는데, 유엔군 측이 일괄 송환 대신 포로 개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주장하자 이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포로수용소 내에서 '반공 포로'와 '공산 포로'가 막사를 따로 쓰며 격하게 대립한 나머지 폭행과 납치, 살해 사건이 빈발했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부는 포로를 영천과 대구, 부산, 논산, 부평 등지로 분산 수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의 반공 포로들이 공산 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보고를 접한 이승만은 유엔군 측에 반공 포로의 석방을 강력 요구했지만, 유엔군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는 당시 북한 측이 휴전 협정 체결의 전제 조건으로 북한군 포로 전원의 일괄 송환을 강력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북한 측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군 포로 역시 송환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할 수 없이 미국은 마침내 이승만의 요청을 무시하고 북한군 포로의 전원 북송을 추진했다. 이승만이 판단할 때 이는 반공 포로를 사지로 떠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수용소의 실질적인 경비를 맡고 있는 한국군이 짐짓 경계를 푸는 사이 반공 포로들이 일시에 도주하는 방안이 은밀히 추진되었고, 디데이에 국군 경비대가 경계를 풀자 반공 포로들은 일시에 도주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미국 측의 입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듬해인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은 판문점 휴전 회담에서 포로 송환의 기본 원칙에 합의했는데,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해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다. 북한 출신 반공 애국 동포를 북송할 수 없고,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의 휴전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한미 방위 조약' 체결이 노림수였다. 그는 이런 자신의 기본 입장을 "한미 방위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휴전 협정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이에 대한 미국 측의 구체적인 반응이 없자, 이승만은 6월 18일 각지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반공 포로 3만 7000여 명을 국군 헌병을 시켜 비밀리에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휴전 협정을 최대한 늦추고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었다. 미군 포로의 송환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이승만의 동의 없는 휴전 협정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그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동시에 이승만이 겨냥한 '한미 방위 조약' 체결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국 조야의 반발을 무릅쓰고 반공 포로 석방이란 강수를 쓰면서까지 미국의 동의를 받아 낸 '한미 방위 조약' 체결은 그 의미가 크다. 이 조약으로 안전 보장은 물론 한국군 증강과 경제 원조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단초는 바로 반공 포로 석방 조치였다. 이승만이 뛰어난 승부사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이다.

박정희(5~9대 대통령, 1963. 12~1979. 10) - 치밀하게 계획하고 과감하게 결행한다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


박정희는 군사 정변에 성공하자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을 했다. 먼저 그는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직결돼 있는 경공업 제품의 자급화부터 추진했다. 경공업 육성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그는 곧 중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 조정 작업에 돌입했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이후 수출 한국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제3공화국이 들어섬으로써 조선조 개국 이래 나라를 빈국에 머물게 한 소작인 제도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은 여전히 토지 자본이 자본의 대종을 이루는 후진국이었다.

자존심 대신 밥을 택한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

한일 회담은 제1공화국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국민들의 반일 감정으로 인해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였는데, 박정희는 제3공화국이 공식 출범한 1964년 초반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에 속도를 냈다. 경제 개발 자금이 시급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한일 회담을 타결해 개발 자금을 끌어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었다. 당시 식민 지배의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 측 입장과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일본 측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는데, 박정희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고, 그의 명을 받은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무상 3억 달러, 재정 차관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 등 도합 8억 달러의 돈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학생들과 야당은 '굴욕 외교'라며 크게 반발했지만, 박정희는 계엄령 발동으로 대응했다. 경제 개발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경제 개발을 위해 취해진 또 하나의 조치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베트남 파병'을 들 수 있다. 당시 파병 국군 장병이 해외 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000만 달러였고, 이 가운데 2억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는데, 이 돈이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긴요하게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당시 한국 기업들도 군수 물자 납품과 용역 사업 등으로 인해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누렸는데, 그 액수는 대략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1억 달러에 달했다.

전두환(11~12대 대통령, 1980. 9~1988. 2) - 위기가 닥치기 전에 선수를 친다

안정론과 성장론의 대립을 잠재운 '예산 동결'


전두환은 잘 알고 있었다.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까닭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는 게 관건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집권 초기에 반도체와 컴퓨터, 전자 교환기 부문을 3대 전략 산업으로 추진하고, 5년 안에 전자 부문의 생산 및 수출을 2.5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관료를 포함한 대다수 사람이 그의 호언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는 확고한 신념 아래 1981년 전기통신사업법을 고쳐 모든 통신 사업자에게 수입의 3%를 의무적으로 연구 개발비에 쓰도록 강제하여 연간 700~800억 원이 통신 사업 개발비로 투자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이후 전자 산업이 우리나라의 최대 주력 산업으로 발돋움하는 배경이 되었다.

전두환은 스스로 경제에는 문외한이라고 생각했고,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경제를 전혀 모르는 것은 적잖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곧 '당대 최고의 경제 테크노크라트'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김재익을 불러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새벽 경제학 이론을 사사받았는데, 김재익은 그에게 현 상황에서는 물가 안정이 가장 시급하고 수출을 지속적으로 독려하면서 장차 정보 산업 등의 새로운 성장 산업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과거에 박정희는 김재익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 경제가 호황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은 '3저 호황' 등의 외부 요인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지만, 이런 전폭적인 지원의 힘이 컸다고 하겠다.

한편 당시 전 세계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 따른 OPEC의 석유 감산 조치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른바 '제2차 오일 쇼크'였다. 유가가 50% 이상 급등한 결과 1980년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4%로 떨어져 전년에 비해 10% 이상 후퇴했다. 물가 상승률도 40%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가 박정희 이래 지속돼 온 고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물가 안정을 바탕으로 한 안정 정책으로 기조를 바꾼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데, 이는 시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 부처 내에서는 물가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성장 위주의 기조를 전면적으로 바로잡아 내실 위주의 안정 기조로 나아가야 한다는 안정론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성장 동력을 늦출 수 없다는 성장론의 첨예한 대립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세계 4위 외채 대국인 한국이 선결해야 할 초미의 과제는 역시 물가 안정이었다. 전두환은 단호하게 논쟁을 불식하고 인플레를 10% 이하로 잡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또 우선 외채를 줄이기 위해 과거의 물량 수출 방식에서 경상 수지 적자 억제책으로 대외 거래 기조를 바꾸었다. 그가 당시 선거를 앞둔 여당 의원들의 예산 증액 요구를 물리치고 예산을 전년 수준에 동결시키는 등의 강력한 방법을 동원해 마침내 물가를 잡는 데 성공한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물가가 안정되자 기업들도 나름대로 체질 개선을 꾀하고, 서민들도 안정된 물가를 바탕으로 생필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3저 호황을 맞아 고성장과 물가 안정, 국제 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당시 해외에서는 저물가 속의 성장을 거듭하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부러움과 경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 비결은 중화학 공업의 집중 육성에 있었다. 3저 호황 때 우리의 주력 수출품이 중화학 공업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또한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의 초석을 놓았다면, 전두환은 전자 정보 통신 사업의 기초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김재익과 오명 등의 건의를 전폭 수용해 전자와 통신 등의 미래 산업에 적극 투자한 결과였다. 천하의 인재를 발탁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용인술의 결정판이 아닐 수 없다.

노태우(13대 대통령, 1988. 2~1993. 3) - 때가 올 때까지는 대세에 순응한다



김일성도 놀란 한소 수교와 북방 외교


노태우의 통치 행위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6ㆍ29를 포함한 일련의 승부수가 던져질 당시 그가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결정한 게 없다는 점이다. 6ㆍ29 선언은 전두환을 비롯해 참모인 김종휘 등의 건의를 적극 받아들인 결과이고, 5공 청문회와 3당 통합 역시 박철언 등 주변 참모들의 건의를 수용한 결과였다. 임기 막판에 결행한 민자당 탈당 역시 박태준 등 민정계 구주류와 교신한 결과였다. 또 그의 최대 업적으로 꼽을 만한 이른바 '북방 외교'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북방 외교는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올라탄 88서울올림픽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데 따른 것이었는데, 올림픽 유치는 전두환의 업적이었다. 그는 전임자가 조성해 놓은 시세의 흐름에 올라타는 데 놀라운 기민성을 보인 셈이다.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하는 기민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제6공화국이 출범할 때만 해도 소련과 동구 공산권은 건재한 편이었다. 이들 국가 모두 적성 국가로 분류돼 인적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수출과 투자 등의 교류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림픽 대회마저 동서 간의 이념 대립으로 두 번에 걸쳐 계속 반쪽짜리로 치러지고 있었다. 전 세계는 연이어 반쪽짜리로 치러진 올림픽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정상화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과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들이 하나같이 참가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소련의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의 공이 컸다. 그러나 데탕트의 천하대세에 올라탄 노태우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소련의 참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2월 1일 우리나라는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공식 수교를 맺었다. 이어 6월 5일에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열었고, 마침내 10월 1일 소련과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한소 수교에 놀라 중국의 덩샤오핑을 만나 한국과의 수교 여부를 타진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도 1년 후 한국과 정식으로 수교했기 때문이다. 한편 임기 말년인 1992년 노태우는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 등을 만나 한중 외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현재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제1 교역국이 될 수 있었던 단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그리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북방 외교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 IMF 환란 당시의 경험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사양 산업으로 분류된 신발과 완구, 봉제, 피혁 등의 업종은 외환위기 폭풍에 휩싸여 공장 폐쇄를 결행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위기를 넘긴 것은 물론 일부는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한국 기업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있는 것 역시 한러 수교의 선과(善果)로 볼 수 있다. 노태우는 민주화의 단초를 연 데 이어 성공적인 북방 외교로 경제와 외교, 국방의 활로를 연 셈이다.

김영삼(14대 대통령, 1993. 2~1998. 2) -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치운다

'일괄 해임, 일괄 임명'으로 하나회를 척결하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 곧바로 하나회를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1993년 3월 초에 일어났다. 국방부 내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 앞 유리에 전단지가 붙었다. 내용은 "정치군인 몰아내자. 하나회가 웬 말인가. 군이 진정 새롭게 태어나려면 순수한 야전군 지휘관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하나회를 몰아내자"라고 적혀 있었다. 아연실색한 권영해 국방 장관이 지시해 전단지를 살포한 자를 잡아 조사한 결과 배후에 현역 대령이 있었다. 수뇌부가 대응책을 모색하는 와중에 김영삼이 갑자기 권영해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군도 정리해야 하고, 이참에 육군 참모총장부터 새로 인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 알고 육군 참모총장에게 예편 준비를 하라고 하세요." 그 후 계룡대에서 참모 회의를 주재하던 육군 참모총장 김진영은 난데없는 예편 결정에 '잠깐만'이라고 소리칠 사이도 없이 옷을 벗고 말았다. 후임에는 육사 17기의 수석 졸업생인 김동진이 임명되었다. 얼마 후 다시 하나회 소속 특전 사령관과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이 차례로 예편 조치되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하나회 척결은 김영삼의 강고한 뚝심과 전격적인 명령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김영삼은 정기 인사철을 무시하고 1군 사령관과 수방사 사령관 등 핵심 요직에 포진해 있는 하나회 출신 장성들을 한꺼번에 해임하면서 동시에 참모총장을 비롯해 후임들을 일시에 임명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하나회는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해임과 동시에 후임을 임명한 게 그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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