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처럼
박현모 지음 | 미다스북스
세종처럼
박현모 지음
미다스북스 / 2008년 1월 / 495쪽 / 25,000원
1.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태종의 위대한 선택 - 세종 시대를 위한 길닦기태조 이방원의 최대 업적인 성공적인 왕위 계승 작업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태종 재위 말년인 1417년까지만 해도 아무도 충녕대군이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비록 태종과 양녕대군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태종이 죽은 뒤 양녕대군에게 어쩔 수 없이 왕위가 계승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해 들어 성녕대군(태종의 넷째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자 태종이 정치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세자 양녕이 반항하는 사건으로 세자 양녕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되면서, 충녕대군으로의 왕위계승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418년 수년간 계속된 세자(양녕)와 국왕(태종)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보며 고민하던 고위 신료들이 마침내 양녕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종사 만년의 대계를 생각해 세자를 폐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체될 세자 후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당시 충녕대군은 공부 잘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으로 왕과 신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지만 열 명이나 되는 왕자들 가운데 왜 하필 충녕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필요했다. 신하들이 제시하는 기준은 '어진 사람'이었다. 문제는 누가 어진가를 가리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태종은 택현(擇賢)을 하겠다고 말했다. 배우기 좋아하고, 일머리를 알며, 외교능력도 있는 충녕을 선택해야 수성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자 교체 후 태종의 교육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태종은 양녕 때와 달리 충녕에 대해서는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면서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현실정치를 익힐 기회를 주기 위해 의정부에 명하여 세자가 국왕 대신 국정을 보고 받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신료들에게 잘못된 정부 정책을 말하게 하는 구언(求言)의 지시를 내렸고, 들어온 진언을 육조에 내려 의논해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정치교육은 세종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구언교지를 내리곤 했다.
태종의 왕위 계승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간 밀려 있던 토목 공사들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한 다음의 말이다. "이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내가 다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위한 다음에는 한 줌 흙이나 한 조각 나무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하여 민심을 얻게 하겠다." 바로 이 같은 태종의 위대한 선택과 길 닦기 과정에서 위대한 세종 시대로 가는 초석이 마련되었다.
왕의 조건 - 왜 충녕인가태종이 맏아들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충녕은 배우기를 부지런히 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이씨 가문에서 중요한 조건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무인이었기 때문에 이씨 가문은 성균관 출신 유학자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싸움만 잘하는 가문이 아니라 공부도 잘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충녕이 학문을 좋아하여 밤새도록 책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둘째, 정치의 대체(다스림의 본질)를 알았기 때문이다. 태종은 "큰일에 처했을 때 충녕은 매번 범상치 않았고 뛰어난 의견을 제출했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충녕대군이 이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현안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태종은 백성들에게 양녕이 대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진 세자를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의다. 또한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고 폐하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법규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세우면서 몇 가지 부탁을 한다. 첫째, "나라의 근본을 바로 잡으려 할진데 오직 지극히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마음에 지극한 공정함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사사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된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국력은 쇠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왕으로서 항상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말한다. 셋째, 총명한 자질을 키우고 배움을 즐겨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한다. 넷째, 나랏일을 맡겼으면 확실하게 믿고 맡겨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의 존경을 받는 왕이 되어 달라고 당부한다.
정치 비전 -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세운다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근정전에 나아가 자신의 정치 비전인 즉위교서(취임사)를 밝힌다. "일체의 제도는 태조와 부왕 태종께서 이루어놓으신 법도를 따라갈 것이다."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선포하여, 왕권이 바뀔 때마다 생기는 정치 변화에 대한 우려를 사전 차단한 것이다. 아울러 사면령을 반포하고 "모든 것의 위치를 바로잡고 그 시작을 조심해서 하겠다"고 말하였다.
세종이 약속한 첫 번째 정치비전은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원래 <맹자>에 나오는데, 사회적 약자인 백성들에게 어짊과 덕을 잘 베푸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법령과 제도를 만든 다음 이리로 따라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베풀고 모범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이고, 바로 거기서 제도와 정치의 방향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런 정치 비전을 가진 세종이 즉위해서 처음 한 말이 "의논하자!"였다. 세종은 토론의 군주였고, 의논하면서 지혜를 수렴해 결정을 내리곤 했다. 당시 신하들은 세종을 "토론을 즐기는" 군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세종은 토론만 한 것이 아니고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서 정책으로 만드는 데도 뛰어났다. 그랬기 때문에 언어, 군사, 과학, 의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토론 정치의 의미이다.
반면, 정조의 즉위 첫 마디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이었다. "의논하자!"를 첫 마디로 시작했던 세종과, 죄인으로 죽은 생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정조의 처지는 두 사람의 상이한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세종과 정조의 첫 마디를 보면 선왕인 태종이 기반을 모두 닦아놓은 후에 즉위한 세종의 정치 조건과,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당한 아버지를 둔 정조의 어려운 환경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2부 세종식 경영: 인재경영과 지식경영
인재충원 - 인재의 선발, 검증, 재교육 과정세종 치세를 가능케 한 핵심 인물로 허조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 시스템의 정립이다. 허조는 10여 년간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추천된 인재들을 검증하는 데 전력했다. 그의 인재검증 시스템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관직에 사람을 임용할 때 그는 먼저 이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정밀하게 간택하게 했다. 후보자의 경력과 자질, 부패 혐의는 물론이고, 가족관계까지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에 평론을 거듭했다. 후보자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더 나은 적임자는 없는지에 대해서 내부 전문가들로 하여금 격렬하게 토론하게 했다. 마지막은 이조 밖의 여론을 들어보았다. 고위 인사의 경우에는 인사 주관 부서의 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조정 안팎의 여론이 좋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조에게 있어 인재 검증의 3단계(간택-평론-중의)보다 중요한 인사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인사 담당자의 공적인 자세이다. 다음은 세종과 허조의 대화이다. "경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를 임용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진실로 그 말과 같사옵니다. 그 사람이 현재(賢才)라면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이 피혐(避嫌)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조가 중시한 또 다른 원칙은 인재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거나 국가 정책을 비판하다가 곤경에 처한 관리들을 보면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곤 했다. 힘들여 기르고 까다롭게 선발한 인재가 "간사한 자들의 모함에 빠져" 희생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이자 국가적 손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인재쓰기 사례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황희이다. 황희는 충녕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하였다. 세종에게는 정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종은 유배에서 풀려난 황희를 중용했다. 세종은 황희를 중용한 이유로 "경력과 학문, 나랏일을 풀어가는 모책, 검증된 인재, 균형 있는 인재등용과 형량결정" 등을 들었다. 이처럼 황희는 경륜이 뛰어나고 아이디어가 풍부하며, 인재 선발 및 정리 능력이 뛰어났던 재상이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사관들의 황희에 대한 평가이다. 황희는 어머니가 노비인 서얼 출신이다. 서얼출신이 관직에 나간 것도 놀라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황희가 대사헌이 되어 금을 받았다는 비리 혐의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에게 선제공격을 제안했던 박포의 아내와 간통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청백리 황희의 명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런 황희를 세종은 무려 18년이나 정승을 맡겨서 국정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주목할 점은 세종 12년 이후 황희의 스캔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간악한 소인에서 청렴한 정승으로 극적인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극진한 보호와 교화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역사의 좋은 인재쓰기의 최고 사례이며, 나아가 한국 정치를 위한 희망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강점경영 - 공적으로 허물을 덮게 하라세종 시대에는 비록 흠이 있지만 공적이 있는 인물들을 쓰는 사례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함길도 감사 조말생이다. 조말생은 병조판서를 역임한 뛰어난 인물이다. 파저강 토벌이나 대마도 정벌 모두 병조판서로서 조말생의 도움을 받아 추진된 정책들이다. 그런 조말생이 세종 8년 노비 증여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24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그의 벼슬을 빼앗고 유배를 보낸다. "정실과 뇌물이 횡행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조말생은 곧 복귀한다. 그를 죽이라는 언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말이다. 세종은 그를 복귀시킨 후 함길도 감사의 자리를 주어서 여진족의 재침략에 대비케 하고, 변방수비와 사민정책을 추진하게 한다. 사실 조말생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세종을 만나 기회를 얻었고 장점을 발휘한 것이다. 조말생의 경우를 보면 능력은 있는데 욕심이 많아서, 뇌물을 받은 인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하지만 본인이 반성하고 고쳤을 경우에는 인재를 버리는 것이 결코 능사는 아닌 것 같다.
"훌륭한 정승 한 명 얻으면 나랏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1433년 세종은 최윤덕을 정승에 임명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다. 최윤덕은 곧고 착실하여 세종의 신임을 얻었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선뜻 그를 선발하지 못했다. 우선 문신 출신이 아니라는 게 걸렸다. 무인 출신이어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데 세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신들이 판치는 조정에서 무시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그에게 정승을 제수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벼슬을 주는 것은 세종의 인사원칙, 즉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포상을 하고, 오직 유능한 자에게만 관직을 맡겨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승은 일은 물론이고 말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국가가 지금 하는 일이 백성과 임금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적절히 설명하는 능력이 필수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세종은 조정 신하들이 지나치게 문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인 출신 최윤덕을 정승으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황희, 맹사성 같이 허물이 있는 인재들도 정승으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장기간 정승의 직책을 수행하게 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정책의 지속성을 보호했다. 그것이 바로 세종 치세를 가능케 한 인사 비결이다.
혁신경영 - 수령 임기 늘려 유능한 관료 만들라세종은 재임 5년에 종래 30개월의 수령 임기를 60개월로 늘리는 구임제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렇게 임기를 늘리는 것은 짧은 수령 임기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세종은 수령임기와 관련하여, 잦은 수령교체로 인해 영송(迎送)의 민폐와 행정 효율성 저하를 큰 문제로 보았다. 그래서 수령의 임기를 늘려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장애물들이 있었다.
첫째는 신료들의 반대였다. 이들은 태조 때의 법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또한 지방 관리들의 불만, 즉 중앙 관리들과 달리 외직으로만 돈다는 불평을 들어서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집현전에 명해 중국의 사례를 연구하게 한다. 그래서 <서경> 등에서 9년 임기제가 있었음을 찾아 반박한다. "너희들은 역사책을 읽었을 것인데 구임의 불가함이 어느 전적에 실려 있더냐?"라는 말은 과거사례에 대한 이견을 넘어서기 위해 일종의 지식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는 구임제 법안에 반대하면서 어전 회의 중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고약해를 처벌하는 문제였다. 고약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 때문에 그를 벌준다면 공론정치가 위축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세종은 고약해를 처벌하게 한다. 언로도 중요하지만, 사사로운 마음으로 국가 제도를 바꾸려는 태도는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다시 그를 등용함으로써 자유로운 회의 분위기를 유지하게 한다. 그 결과 세종이 도입을 추진한 수령구임제는 성공하였다. "관직을 오래 맡긴다는 한 가지 일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소란하였지만, 굳게 잡고서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성공의 효과가 있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독서경영 - 제왕학 교과서 <대학연의>의 정치학세종시대에는 경연이라는 회의가 있었다. 경연은 언관과 재상들이 왕 앞에 앉아서 고전을 놓고 공부하면서 당면과제를 풀어가는 독특한 회의방식이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그 전까지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경연을 본격화하고 국정 토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특히 세종은 경연에 당시 신진 엘리트 그룹인 집현전 학사들도 참여하게 하여, 말과 일을 엮으며 국사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혁신적인 회의 방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독서경영. 사안(일)을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책 내용(말)을 풀어놓으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을 펴놓고 소리내어 읽게 한 다음, 중요한 대목을 집중토론한다는 것이다. 잠시 현실을 떠나 고전의 세계로 심취해 들어가면서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어느 순간 창의적인 해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둘째, 합금식 회의. 이질적인 구성원을 회의에 참석케 해서 격론을 벌이다가 뜻을 모아가는 방식이다. 동질적인 사람이 모여 의논하는 것은 일종의 순금과 같아서 모양은 좋지만 단단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셋째, 좋은 의견에 힘 실어주기. 회의에서는 내용을 정리하고 짧은 의견을 덧붙이는 사람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황희가 그 역할을 자주 했는데, 토론이 충분히 진행된 다음 균형감각 있는 회의 참석자가 회의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