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
정철우 지음 | 비전코리아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
정철우 지음
비전코리아 / 2008년 4월 / 249쪽 / 12,000원
Game 1.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
'어떻게'가 아니라 '왜'부터 물어라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로 통한다. 스프링캠프 때면 선수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한다. 하지만 그가 아끼지 않는 시간이 있다. 매일 저녁 1시간씩 치러지는 팀 미팅이 그것이다. 한 해설위원은 "프로선수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은근히 비꼬기도 하지만, 이는 미팅의 효과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김 감독은 그 시간을 통해 선수들에게 '어떻게'가 아닌 '왜'를 가르친다. 첫 시간은 항상 선수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수들은 "너에게 야구란 무엇이냐?" "어떤 각오로 훈련에 임하고 있으며 목표는 무엇인가?" 등의 항목에 답해야만 한다. 김 감독은 이것을 약속이라고 표현한다. 감독과 선수 간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다.
2000년 말 LG 트윈스 2군 감독에 취임했을 때 일이다. 당시 선수들 속엔 현재 LG의 주전 유격수 권용관도 있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고 1군과 2군 사이의 경기가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모두가 짐을 싸고 있을 때 김 감독이 권용관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1시간이 넘도록 직접 수비훈련을 시켰다. 권용관은 하늘이 빙빙 돌 정도로 땀을 쏟아야 했다. 권용관은 이날 경기서 실수가 없었다. 그러나 긴장한 탓에 평상시와 같은 넓은 수비범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LG 주전 유격수는 유지현이었다. 김 감독은 적어도 수비에서만은 권용관이 유지현을 넘어섰다고 믿고 있었다. 그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권용관에게 언 땅을 온몸으로 녹이도록 한 것이다. 김 감독은 그렇게 땀을 흘리고도 정작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에서 움츠러든 제자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권용관은 유지현을 2루로 밀어내고 당당하게 LG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매김했다. 권용관은 아직도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진짜 야구 선수가 된 시간'이라고 당시를 떠올리곤 한다.
2007년 스프링캠프에서도 미팅은 계속됐다. 가득염, 조웅천 등 고참 선수들마저 야구를 떠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라며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모든 선수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뒷자리에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는 선수들도 있다. 김 감독은 굳이 그들을 불러내 꾸짖지 않는다. 김 감독은 "리더는 방향 설정을 해주는 거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받아들이지 않는 선수를 억지로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김 감독의 마음을 받아들인 선수는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를 선택한다.
두려움의 미학김 감독은 새로운 팀을 맡거나 시즌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큰일났다"고 말한다. 두려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스스로에게 거는 긍정의 주문이라 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위기를 맞았을 때 팀을 구렁텅이로 빠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가장 부정적인 전망에 초점을 맞추고 시즌을 준비한다. 부상 선수들은 전력에서 일단 제외해 둔다. 선수들의 페이스에도 매우 짜게 점수를 매겨 놓는다. 모든 마이너스의 합이 진짜 팀 전력이라는 베이스에서 출발한다.
2006년 11월 가을훈련이 시작될 즈음, 김 감독의 SK에 대한 전력구상을 다시 들여다보자. 우선 채병룡과 신승현은 일찌감치 전력 외로 간주했다. 둘은 부상으로 2006년 시즌 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일단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하지 않고 다른 선수만으로 판을 짰다. 타선도 그렇다. 박재홍, 김재현 등의 페이스가 전성기와 다르다는 기준을 갖고 들어갔다. 김 감독의 계산대로라면 기존 원투 펀치와 중심타선이 모두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큰일났다"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채병룡과 신승현을 대신할 선수를 키우거나 영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외국인 선수를 투수 두 명으로 가져 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재홍, 김재현 등의 빈자리는 젊은 선수들의 육성에 승부수를 두었다. 시즌이 모든 끝난 현재 시점에서 따져보면 김 감독의 슬픈 예감 중 틀린 것은 채병룡 하나 뿐이었다. 채병룡은 5월부터 정상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아줬다. 만약 김 감독이 채병룡을 애당초 전력에 포함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부족했던 퍼즐 하나를 끼워 넣는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없다고 생각한 선수가 가세하게 되니 그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 즐겨라김 감독은 재일교포 2세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마쳤다. 초등학교 시절엔 주위 학생들에게 괴롭힘도 당했다. 그러나 6학년 때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던 학생과 1대1로 맞붙어 이긴 뒤로는 맘 편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후론 오히려 학교의 주류 세력이 되었다. 중학교 땐 학교 연극의 주연으로 나섰고 고등학교 때 학교축제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은 고단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했고 생선가게, 공사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웠다. 우유배달을 하면 공짜 우유를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어떻게 하면 우유를 빨리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하나씩 나아질 때마다 성취감을 즐겼다.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공터에서 공놀이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공을 던지고 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재미가 있으니 힘든 줄도 몰랐다. 한 번은 좌익수 앞으로 안타성 타구를 날리고도 1루에서 아웃된 적이 있었다. 발이 워낙 느렸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학교 육상부 주장을 찾아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발이 빨라질 수 있냐?" 육상부 주장은 "내리막길을 뛰어 보라"고 권했고 그 길로 쉼 없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달렸다. 이후 좌전안타를 치고 1루에서 아웃되는 일은 사라졌다. 김 감독은 "야구가 즐겁다 보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즐거우면 귀와 마음이 열리고 더 잘해 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열정은 즐기는 자에게서 나오는 에너지. 리더 김성근의 비결은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말괄량이는 무조건 길들여라감독 생활 40년에 김 감독의 속을 무던히 썩였던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런 선수들도 쉽게 내치지 않았다. 시즌 중 KIA 김진우가 잠적했을 때 김 감독은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 감독은 김진우의 이탈 소식을 들은 뒤 "내가 한번 만나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걸까? 그의 답은 의외였다. "말을 해주긴 뭔 말을 해. 그냥 들어주는 거지. 일주일 내내 술을 같이 먹어 줄 생각이야. 말하고 싶으면 말하게 하고 하기 싫으면 술만 먹고." 그동안 말썽쟁이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노하우에서 나온 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태평양 시절 정명원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하루는 고된 훈련을 참지 못하고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다. 결국 며칠 만에 잡혀왔고 김 감독 집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김 감독은 말없이 집을 나섰다. 그 뒤를 정명원이 머쓱한 걸음걸이로 따랐다. 한참을 걷다가 김 감독이 불쑥 동네 문방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기장과 볼펜 몇 자루를 사더니 정명원에게 건넸다. 그리고 또 걸었다. 이번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맥주 몇 병을 주문하더니 또 말이 없다. 잔에 술을 부어 주고 '마셔'가 전부였다. 정명원은 어색하게 계속 술만 들이켜야 했다. 술이 다 떨어질 때쯤 김 감독이 드디어 얘기를 꺼냈다. "너 오늘부터 이 일기장에 매일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써. 너한테 야구가 뭔지, 왜 야구를 하는지도 쓰고 훈련이 어땠는지도 써 봐."
그걸로 끝이었다. 크게 혼날 것을 각오했던 정명원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내 김 감독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후 정명원은 매일같이 일기장을 써 내려갔고 김 감독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 이후 정명원은 단 한 번도 사고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리즈 첫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대투수로 성장했다.
장점을 먼저 생각하라2007년 시즌 SK 2루수 정경배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시즌 타율 2할3푼5리에 불과한 공격력 때문이다. 정경배의 중용에 대해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김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타율은 수비의 효과와 높은 득점권 타율이 보완해 준다고 여겼고, 또 한 가지 크게 고려한 것은 정경배의 경험과 팀 내 비중이었다.
정경배는 고운 심성에 타고난 성실성까지 갖고 있다. 후배들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 감독은 경험이 부족한 SK 내야 수비진을 이끄는데 그만한 선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즌 최종전인 한화와의 경기에서 정경배는 2타점을 추가하여 타점부진이라는 부정적 옵션도 극적으로 무마했다. 후배들은 어떻게든 정경배 앞에 출루하기 위해 애를 썼고 결국 타점을 올리게 되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냉정한 프로세계에서 다른 선수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김 감독은 이처럼 정경배가 팀을 앞장서서 이끄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묶어 줄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많은 지도자들이 선수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단점에 집착하다 보면 장점까지 묻혀 버릴 수 있다. 김 감독은 "아주 도드라진 장점이 있다면 그걸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단점 고친다고, 또 그 단점이 미워서 쓰지 않는다면 장점까지 묻힌다. 리더가 생각을 바꾸면 낭비되는 자원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법김 감독이 2002년 LG에서 물러난 뒤 2007년 SK 감독을 맡을 때까지 4년간 공백이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의 존재감은 계속됐다. 그 사이 굵직한 제자들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박찬호, 이승엽 등 한국을 대표하는 별들이 줄을 이어 그의 야구를 전수받았다. 김 감독의 무엇이 이들 스타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까? 첫 단추는 존중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이제껏 해낸 성과와 노하우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교육을 시작했던 것이다.
박찬호가 김 감독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2003년 말이었다. 그때 김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 내 정보망을 동원하여 좋은 투수코치와 훈련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자신이 나서 이것저것 만져보려 하지 않았다. 야인이던 김 감독에게 박찬호 과외는 자신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지만 김 감독은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 "내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야. 대한민국 최고인데 함부로 하면 안 되지. 가르치기보다 같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해." 김 감독은 첫 대면부터 지금까지 그때의 마음 그대로 박찬호를 대하고 있다.
두 번째는 열정과 진실이다. 김 감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며 그들의 성공을 기원했다. 어느 겨울 김 감독은 박찬호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야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박찬호의 투구판 밟는 버릇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까지 벗고 투구 폼을 보여 주었다. 특급 호텔 커피숍에서 환갑을 넘긴 남자가 양말만 신은 채 투구 폼을 지어 보인다.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 감독에게 주위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보다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김 감독은 최고들의 스승으로 인정받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그저 내가 맞고 틀리고 보다 그 선수들하고 나하고 마음이 맞은 거 아닌가 싶어."
사자의 새끼를 깨우는 법김 감독이 LG 감독이던 2002년 오키나와 캠프에서 한 선수를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 "걔가 배팅을 치면 그물망 주위로 양준혁, 김재현도 모여든다. 확실히 치는 재주가 남달라." 주인공은 박용택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박용택이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처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감독이 노발대발하며 크게 나무랐다는 것이다. 훈련태도가 태만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박용택은 이후 며칠 동안 훈련장 주위를 맴돌아야 했지만 이를 악문 뒤 다시 방망이를 잡고 땀을 흘렸다. 그 해 박용택은 신인답지 않은 맹활약을 펼치며 LG의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했다. 김 감독은 박용택을 꾸짖은 날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만 지켜보니 자극이 필요한 스타일이더라. 그냥 잘한다고 놔두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겠더라고."
SK 투수 김광현은 반대였다. 김 감독은 김광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았다. 투구 폼에 문제가 보였지만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시즌이 시작되고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07년 8월 19일 김광현은 광주 KIA와 경기 초반에 무너진 김원형을 대신해 1회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이미 경기가 기운 상태였지만 김 감독은 김광현에게 "이미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던져 보라"고 주문했다. 결국 김광현은 7회까지 139개의 공을 던진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한국 시리즈의 영웅으로 거듭 난 김광현은 인터뷰에서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던지면서 알게 되었다. 힘을 빼고 공을 던지는 것이 어떤 건지 느끼게 된 경기였다"며 "끝까지 믿어 주신 감독님 덕분이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박용택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속내는 같았다. 스스로 어려움을 겪어 보며 뭔가를 느껴 보라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모든 선수들에게 일부러 어려움을 안겨 주지 않는다. 밑에서부터 한 단계씩 올라오는 선수들에겐 좀처럼 훈련시간을 빼가면서까지 혼을 내는 법이 없다. 어르든 달래든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더 치거나 던지게 한다. 그러나 싹수가 확실하게 보이는 선수들에게는 다르다. 박용택과 김광현은 김 감독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은 최고의 재목들이었다. 그들의 내성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접근을 했던 것이다.
그른 것들과 타협하지 마라김성근 감독은 구단과 마찰이 잦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괜히 그래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제 숱한 의견충돌이 있었고 이 같은 갈등은 실적을 올리고도 팀을 떠나야 하는 비운으로 이어졌다. 김 감독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야구인으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크고 작은 갈등의 요체는 야구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의 대립이었다. 김 감독의 구상을 이해 못하거나 혹은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빚어진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2002년 LG에서 물러났을 때 표면적으로 구단이 요구했던 것은 코치 선임 문제였다. 꼴찌 후보에서 일약 한국 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돌아온 것은 'LG 야구가 아니었다'는 질책 뿐이었다. LG구단은 김 감독에게 "1군 코치는 감독이 알아서 정하되, 2군은 구단이 정하겠다. 일본인 코치도 줄이고 새로 영입하겠다는 3명의 코치 중 1명만 받겠다"고 통보했다. 김 감독은 단호하게 맞섰고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해임 통보를 받았다.
세월이 흐른 뒤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이 참았다면 어땠을까요. 3명(코치)을 살리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