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의 치
멍셴스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정관의 치
멍셴스 지음
에버리치홀딩스 / 2008년 4월 / 430쪽 / 18,000원
위대한 영웅의 시대 - 진양기병에서 중원 통일까지
아버지를 도와 병사를 일으키다
'진양기병(晋陽起兵)'이란 이세민의 아버지인 이연을 중심으로 이씨 가문이 수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벌였던 쿠데타를 가리킨다. 이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천하를 얻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적당한 시기를 찾지 못했을 뿐, 이연이 정식으로 거병해 수나라에 반기를 든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때는 대업 13년(617년) 정월쯤이었을 것이다. 북방의 돌궐이 갑작스레 침략했고 군병과 돌궐은 태원의 북쪽 지방인 마읍(馬邑)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이연은 부유수 고군아(高君雅)를 보내 마읍 군수 왕인공(王仁恭)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수나라의 법에 따르면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반드시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도 황제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던 이연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나쁜 쪽으로 몰아갔다. 당시 양제의 살인은 그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연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반란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양제가 더 이상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태원의 병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연의 거병 준비는 핵심 인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게다가 대략적인 시기를 정해 천하의 호걸들과도 이미 연락을 취해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과연 중지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으니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연은 신하의 예를 행하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돌궐과 손을 잡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마침내 대업 13년 6월 정식으로 결의대회를 열어 양제의 갖가지 죄상을 들추어내며 자신이 나서 수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백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연은 황제가 되기 위한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진양기병은 이연이 수나라로부터 최고 정권을 빼앗은 역사적 터닝 포인트다. 이때부터 이연 집단은 천하를 평정하고 이당(李唐) 정권 수립의 길을 걸었다. 진양기병, 그것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성공적인 모반이었다. 시기 선택에서부터 거병의 방식과 구호, 안팎의 긴밀한 연락, 그리고 철저한 보안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 진양기병이 이연이 주도한 것인지 아니면 이세민이 주도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데, 사실은 이렇다. 이연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정치 집단이 수나라의 멸망을 예감하고 최고 권력을 얻기로 한 것이다. 이 집단의 핵심 인물은 물론 이연이었으며 차남인 이세민은 수하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세민을 신뢰했고 덕분에 그는 이 계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계획에서 이연의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연을 도와 계획을 세우고, 호걸들과 연락을 취하며 돌궐과 손잡는 데 이세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대업 13년, 쉰두 살의 이연과 쉰 살의 유문정, 그리고 마흔여덟 살의 배적과 비교하면 이세민은 한창 젊은 스무 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업적은 '소년 영웅'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위대했던 것이다.
이연의 황제 등극과 갈등의 시작
거병 후 장안에 자리를 잡은 이연은 대왕 양유를 황제로 옹립하고 대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는 양제를 태상황으로 모심으로써 황위를 찬탈하지도, 수 왕조를 전복시키지도 않았다. 이연은 조조와 마찬가지로 기존 왕조의 신하를 자처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황제의 세력을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정책으로 천하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다. 이연이 생각하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 조조가 그랬듯이 칭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정치투쟁에 있어 어떻게 권력을 빼앗고 어떻게 자신의 힘을 키울지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다. 만약 너무 일찍 칭제를 한다면 이는 공개적으로 기존의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뼛속까지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도덕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일부로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을 갖다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정당한 명분이 없으니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명분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도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수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라 할지라도 입으로는 자신의 불충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공개적으로 보위를 넘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칭제하는 대신 계속해서 수나라를 받드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연은 칭제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드디어 왔다. 618년 음력 3월, 강도의 양제가 갑자기 신하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양제는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아예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장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이에 대해 대부분이 관중(關中) 출신이었던 황제의 금위군(禁衛軍)들은 반발을 하고 점차 탈영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수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이렇게 무장한 병사들 수만 명이 모여 결국은 황제를 해할 음모가 싹튼 것이다. 이 강도사변과 양제의 죽음으로 수나라의 멸망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제가 죽자마자 칭제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같은 해 소선(簫銑)이 황제를 자처하며 국호를 양(梁)이라 했다. 이듬해 왕세충(王世充) 역시 칭제하며 국호를 정(鄭)으로 삼았다. 이연도 칭제에 나섰다. 그는 장남인 이건성을 태자로 삼고 이세민과 이원길을 각각 진왕(秦王)과 제왕(齊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연호를 무덕(武德)으로 바꾸었고 618년은 당조 무덕 원년이 되었다. 이연의 칭제는 당나라가 정식으로 건국되었음을 의미했다. 만약 이연이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훗날의 태종도 없었을 것이고 정관의 치 역시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세민, 천하 통일에 뛰어들다
이연의 황제 즉위 후 이세민과 가까웠던 유문정의 모반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까지의 증거로 보면 유문정은 확실히 모반을 도모하지 않았고, 이연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연은 무덕 2년 8월에 유문정의 모반죄를 인정하고 그를 사형시켰다. 사실 이 사건의 결말과 이연의 최종 결정은 애초부터 유문정의 모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연이 보기에 심문 과정에서 보여준 유문정의 태도는 분명 황권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주제에서 황제는 대외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유일무이, 지고무상한 존재여야 했다. 이연은 진작 천자로 등극했지만 군주제를 철저하게 다져나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특히 전시에 내부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천하 통일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이연은 이세민을 우두머리로 두고 유문정이 대표하는 집단이 조정과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성토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래서 유문정을 죽여 가장 투쟁에 능한 아들 이세민에게 겁주려 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이연과 이세민 부자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연은 이세민을 유문정과 같이 불충한 신하라 생각했고, 이세민은 언젠가는 자신도 유문정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세민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유문정이 죽고 난 후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세민은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공을 세우고, 공을 세우며, 또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공을 세우며 당나라의 영역을 넓히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과 실력을 키워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또 황제와 조정에 필요한 인물이 되면 버림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얼마 뒤 첫 기회가 찾아왔다. 무덕 2년에 하동 지역에서 유무주와 송금강이 손을 잡고 당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배적 등이 나서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이세민이 나서 송금강의 대군을 물리치면서 당나라가 맞은 큰 위기를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산서 지역의 실권을 수복했으며 수도 역시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당나라는 위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배적과 이원길이 지키지 못한 태원이 이세민 덕분에 다시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다음 해에는 낙양의 왕세충을 목표로 하여 하남을 공격했다. 결국 무덕 4년(621년) 5월, 이세민은 낙양성에 입성했다. 그는 동쪽에서 세력이 가장 큰 두 적이었던 두건덕과 왕세충을 동시에 물리치고 중원지역을 통일했다. 그것은 이세민이 당나라를 위해 세운 공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이로써 당나라는 통일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의 시대 - 현무문의 변에서 황제 즉위까지
태자 자리를 둘러싼 싸움
이세민이 혁혁한 공을 세워 명성이 높아지고 세력이 커질수록 그에 대한 조정의 경계도 강화됐다. 그저 경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세민이 낙양을 평정하자 이연은 비빈을 그곳으로 보내 그를 감시하도록 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이세민은 이때부터 몇 달 동안이나 그에 대한 상조차 받지 못했다. 이세민은 여기에 대처해 행동을 시작했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고 최종 목표를 권력 찬탈로 잡은 것이다.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세민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최고 권력을 거머쥐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권을 최종 목표로 삼고 차분히 자신의 인재 풀을 구축하고 비밀리에 군사력을 비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던 중 무덕 7년 6월에 경주도독 양문간(楊文幹)의 모반 사건이 발생했다. 황제 이연이 인지궁으로 피서를 떠난 사이 장안을 지키고 있던 태자 이건성이 양문간에게 갑옷을 보내며 모반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양문간 사건은 시작부터 태자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허점이 있었다. 태자가 돼 모반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태자의 모반이 사실이라면 그 목표는 단 하나 황위 찬탈인데, 합법적 계승자인 태자는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무덕 7년, 태자 이건성의 위치는 공고했으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믿음 역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또한 황제가 장안을 비운 사이에 멀리 경주의 도독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들 황제를 자신의 통제권에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 모반을 꾀했다면 황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건성이 그렇게 미련한 방법을 썼을 리 없다. 훗날 황제의 명을 받고 곧바로 인지궁으로 달려간 사실만 봐도 그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정확한 사건 조사를 위해 이연이 양문간을 소환하자 양문간은 진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후 상황으로 봤을 때 그의 반란은 절대 이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연은 태자가 모함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양문간 사건을 조종한 사람은 음모와 술수에 능한 진왕부의 두엄이었다. 즉 이 모두가 진왕부 측의 음모였던 것이다. 이연은 동궁의 왕규와 위정, 진왕부의 두엄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황제는 두 형제에게 사이좋게 지낼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동궁과 진왕부의 수하들을 처벌함으로써 이들에게 경고했다. 황제이자 그들의 아버지인 이연 역시 아들들의 끊임없는 다툼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이란 유한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양문간 사건은 현무문의 변의 전주곡이었다. 이세민은 정치투쟁으로 태자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목표에 아주 가깝게 다다른 듯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만약 이번 일이 성공했다면 당 왕조는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피의 현무문
돌궐의 철기군이 오성(烏城)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건성은 이 오성 전쟁을 이용해 진왕부의 핵심 세력을 참전시켜 한창 전쟁이 벌어지는 틈을 타 그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동시에 환송식에 참가하는 기회를 이용해 이세민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 정보가 이세민 진영에 입수되고 만다. 이 정보는 현무문의 변의 핵심적인 발단이 된다.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먼저 극단적인 방법을 쓴 쪽은 이건성 진영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혹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라면? 예를 들어 진왕부의 핵심 세력의 해체가 목표였을 뿐 죽일 계획은 아니었다면 먼저 극단적인 방법을 쓴 쪽은 이세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현무문의 변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비극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역시도 이세민 진영에서 짜놓은 치밀한 계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덕 9년 6월 4일 새벽, 모든 것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이연의 소환 통보를 받은 이건성관 이원길은 동궁의 북문에서 만난 동쪽에서부터 현무문 쪽으로 걸어갔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태극궁 안의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한 이건성이 뭔가 낌새를 눈치 채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세민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이건성을 부른 것이다. 이세민이 쏜 화살에 이건성이 맞아 죽었다. 이세민이 쏜 화살은 무겁게 내려앉은 현무문의 새벽 공기를 단숨에 갈라놓았다. 이윽고 이세민의 병사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대동한 병사들은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소대 정도의 규모는 되었다. 때문에 양측 간에 혼전이 계속되었다. 혼전 중에 이원길은 위지경덕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현무문의 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이세민은 위지경덕을 보내 황제 이연을 보호하도록 했다. 이연은 모든 병권을 이세민에게 준다고 명령함과 동시에 동궁의 근위병들에게 모든 저항을 멈추도록 했다. 동궁과 제왕부를 점령한 이세민은 이건성과 이원길의 아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며칠 후, 이세민은 태자가 되었다. 두 달 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진왕부의 관속들은 새 조정의 중신이 되었다. 한편 이연은 태위 후에 태상황이 되었다.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끝난 후 당나라의 정권은 새 주인을 맞이한 것이다.
현무문의 변은 분명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이세민 역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일이 자신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공명정대한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했다. 더 큰 업적을 세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했던 것이다. 즉 현무문의 변은 그를 더욱 노력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인물들 중 이세민과 같이 정관의 치라는 눈부신 업적을 이룬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들이 이세민의 정변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훗날 이세민은 성실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황권을 운용했으며 이를 통해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 이세민만큼 황권을 합리적으로, 온전하게 백성을 위해 사용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지덕을 모두 겸비한 명군 중의 명군이었다.
위대한 군주의 시대 - 노선 결정에서 치국까지
화합 정책으로 민심을 얻다
치국,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렇다면 이세민은 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했을